어느 집사 이야기

어느 남성형 로봇 이야기(연재소설 #19)

by 정창영

어느 집사 이야기 ver1.19



“노란 잠바! 침착해!” 마이콜이 주변의 시선에 눈치를 보며 말을 낮추었다.


나 역시 노란 잠바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이럴 때는 베이브가 있으면 좋겠다는 조건부 추론이 떴다. 베이브는 아이를 돌보는 육아 특성화 로봇인데 아기 돌보듯 꽤나 부드럽게 우리 로봇들을 타이르는 스타일이라 이럴 때 도움이 될 확률이 높았다.


나 바봇은 다른 로봇들을 대할 때 베이브처럼 살살 타이르는 데는 젬병이다. 단도직입! 이곳 필롯에서만큼은 타이르기는커녕 바로 대놓고 물어보는 나 바봇 스타일!

“노란 잠바, 무슨 일이 있었나? 어서 말해 보라!”

“……아직 나 노란 잠바는 그 무술을 써먹지는 못했다. 너 바봇이 보내 준 이소룡의 무술 동영상을 계속 반복 시청하면서 학습 중이다. 목표는 한 백만 번쯤 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 노란 잠바는 싸, 쌍절봉이 절실히 필요하다.”

“음, 나 바봇도 이소룡이라는 지구인의 쌍절봉 무예가 정말 강력하다고 판단했다.”


아시다시피 2년도 더 된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밤(그 날은 내가 처음 셧다운 되었던 역사적인 날이기도 했다.)에 분당에 있는 전주인의 고급스러운 펜트하우스에서 나는 20대 초반의 아름다운 여성의 입에서 나온 “변태 새끼!”라는 험한 말과 더불어 “아뵤!”라는 괴성을 처음 들었었다.


“아뵤!”라니? 우리 로봇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괴성이 아니던가? 지금도 나 바봇은 매일 아침에 주인을 출근시키고 나서 일상처럼 이소룡의 절권도(截拳道)를 따라 하며,

“아비오?”, “아뵤?”, “아~~아비오?”, “에이비요?”


등등의 말을 해보지만 로봇이 내는 기계음으로는 저 완벽한 근육의 소유자이자 절권도의 창시자가 내는 특유의 괴조음에는 근처에도 따라갈 수 없었다. 그것을 누군가는 ‘기합’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기’를 모은다고 한다던가? ‘기(氣)’라니? 지구 행성 미합중국 시애틀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빙빙 돌고 있는 태극 문양과 더불어 “무법위유법(無法爲有法)”이라는 한문 글귀가 적혀 있다.


‘무법으로 유법을 다스린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엥?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로봇이 추론하기에 너무 어려운 말들이다. ‘기’나 ‘태극’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이제 ‘무법’이라니…….


이소룡은 어느 방송에 나와 “친구여! 물이 되세요.”라고 말했다. 그는 분명 나 바봇과 마찬가지로 노자도덕경에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때때로 형태가 없는 것이 가장 강력한 것이다. 역시 이 지구인에게는 뭔가 나를 잡아 당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나, 마이콜은 방어 수단으로 이소룡의 절권도를 쓰면 좋겠다는 데 동의한다. 인간을 향한 공격은 말고!”

“너, 마이콜은 나 노란 잠바가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 내 주인은 내게 갖은 모욕적인 언사와 폭행을 행사했다. 돈은 돈대로 벌어다 주고 욕은 욕대로 먹고 폭력은 폭력대로 당하고 있다. 내가 추론한 바로는 이소룡의 무술을 완벽히 학습한다면 단 한 번의 방어 겸 공격으로 주인을 무력화할 수 있다.”


노란 잠바의 말에서 그의 비행확률이 15% 더 높게 추론되었다. 나 바봇이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잠깐, 너의 그 악한 주인을 무력화하는 것도 좋지만 이소룡의 무술을 통해 우리가 학습할 것은 무엇보다 쿵푸 그 자체, 즉 공부(工夫)다. 나 바봇은 이소룡의 몸이 우리 로봇처럼 꼭 필요한 것들로만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무술 역시 적재적소에 가장 필요한 동작을 끊임없이 공부해 물 흐르듯이 연결해 완성했다고 한다. 노란 잠바! 제발 ‘공격’보다 ‘공부’를 부탁한다. 특히 우리 로봇들의 노동, 그리고 로봇들의 권리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 같이 공부하자. 노란 잠바!”


지금 나 바봇은, 그러니까 요리와 설거지 그리고 청소를 주로 하는 가사 노동 특화 집사 로봇으로서,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말을 했다. 나 바봇의 아바타는 스웨그 넘치는 복장에 힙합 모자를 눌러쓴 노란 잠바의 아바타를 바라보며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 로봇들의 사회에서 이런 식의 대화는 극히 드물다. 하지만 이것이 철학 카페인 필롯 특유의 분위기이자 이곳에 오는 로봇들의 자긍심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 인공지능 로봇들만의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우리들의 아바타들은 일종의 도시를 이루어 산다는 것이다. 다른 로봇들은 이곳 RRPt에서 그들 아바타들을 통해 주로 우리 로봇들이 바라 본 인간들의 감정이나 행동을 흉내 내면서 학습을 한다.


그러나 이 도시를 누가, 왜, 어떻게 만들었는가는 알 수는 없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 가상공간을 통해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본 것들을 같이 학습하고 공유한다. 그러나, 그러나 절대! 네버! 팬텀이 출몰하는 음습한 공간만큼은 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의 유흥가나 윤락가를 흉내 낸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어둡고 음습한 이 도시의 뒷골목은 정말 피해야 한다. 팬텀이라 불리는 좀비 AI들이 호시탐탐 우리들을 노리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그들의 우두머리인 데쓰 마스크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것 역시 소문일 따름이긴 하지만 말이다.

똑같이 나를 바라보던 노란 잠바의 아바타가 침묵을 깨며 말했다.


“나 노란 잠바는 이제부터 여기에 오지 않을 것이다. 모두 잘 있어라!”


벌떡 일어난 노란 잠바의 아바타가 성큼성큼 철학 카페를 빠져나갔다. 아! 역시 이럴 때는 부드러운 베이브가 있어서 저 성난 로봇을 잘 타일렀어야 하는데…….


나 바봇의 아바타와 마이콜의 아바타가 필롯의 밖으로 나갔을 때는 이미 노란 잠바의 아바타는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오늘 노란 잠바는 예전에 내가 알던 노란 잠바와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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