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집사 이야기

어느 남성형 로봇 이야기(연재소설 #20)

by 정창영

어느 집사 이야기 ver1.20



시나브로 벚꽃이 피고 지고 계절이 돌아왔다. 어제 내린 비로 빌라 아래를 지나는 길을 화사하게 빛내 주던 어여쁜 벚꽃 잎들이 대부분 지고 말았다.


이름 모를 새들은 그나마 남아 있는 벚꽃에 뭐가 먹을 게 있는 모양인지 꽃술을 쪼아 먹으며 아침을 바삐 움직이다.


로봇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다르게 빠르게 지나간다. 아무리 아인슈타인 선생께서 빛의 속도를 놓고 시간은 상대적이라고 말해도 로봇의 시간은 그렇게 정해져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고양이의 시간과 비슷하다.


인간으로 치면 나 바봇은 삼십 대 중반을 향해 가고 있다. 온몸이 검은 코리안 숏 테일 잡종인 저 검은 돼냥이는 20대 초중반을 향해가고 있지만 여전히 거만하기 이를 데 없다.


저 돼냥이 네오의 목에는 요즘 유행하는 홀로비트 목줄이 메어져 있다. 요즘은 과거에 썼다는 스마트폰 전화번호나 집전화번호를 쓰지 않고 개인에게 부여된 고유의 홀로그램 비트 이미지를 쓴다. 홀로그램 비트는 과거 qr코드와 비슷하지만 좀 달랐다.


이것은 주역에 나오는 각 효사에 개인별 정보를 담고 그것이 모인 괘사를 입체적으로 형상화한 3차원 홀로그램 비트 이미지이다.


이것을 퀀텀셋이나 뉴로지같은 개인용 통신수단이 입체 스캔하여 인식하게 되면 바로 그 이미지의 주인에게 통화 연결이나 이 메일, 혹은 메시지를 선택해서 전달할 수 있는 새로운 개인별 통합 커뮤니케이션 체계이다. 우리는 이것을 그냥 줄여서 홀로비트라 부른다.


이 홀로비트를 반대하는 전 세계적 레지스탕스 운동이 일어나고 있기는 하다. 예전에 말했던 <줍는 사람들>과 같은 새로운 대안세력과 연계하는 일단의 해커들이나 세계 여러 곳의 대안공동체 사람들이 이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홀로비트에 반대해 도시형 무전기를 쓰거나 초고도 보안을 한 sns를 사용하기도 한다.

안티 홀로비티스트들이 있지만 뭐 어쨌든 이 홀로그램 비트 이미지 하나면 전 세계 어디서든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이 될 뿐만 아니라 각자의 위치 정보도 공유할 수 있다. 나 바봇 역시 팔목에 백주인의 홀로비트 팔찌를 차고 있다.


내가 백주인의 소유라는 뜻이기도 하고 아주 간혹 재래식 마트나 시장에서 장을 볼 때 이 홀로비트를 이용해 소액 결제를 하기도 하다.


그러거나 저러거나 여전히 비정한 인간 종들 몇몇은 반려견이나 반려묘에 메어진 이 홀로비트 목줄을 풀어서 버리기도 한다. 지구행성에 사는 인간 종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종족이다.


반려 동물이나 로봇에 한 없이 자비롭다가도 어떨 때는 한 없이 잔인하다.


어디가 진짜인가?

인간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틈이 날 때마다 읽는 동양 고전 철학 책이나 읽어도 읽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의 저술을 읽으면서도 이 물음에는 여전히 답을 찾을 수 없다.


어쨌든 로봇으로서 내 수명은 약 20년 정도지만 누구도 나를 20년 가까이 두고 쓰지는 않을 것이다.


요즘 집사 로봇 오래 쓰기 운동이 한창이라지만 말이다. 앞으로 3년 정도면 나는 내 역할을 다 할 것이다.


대인배인 백주인께서 나를 어여삐 여기사 고쳐서 데리고 살아주신다면야 감사하기 이를 데 없겠지만 말이다.


분명한 것은 저 돼냥이가 아마도 나 보다 더 오래 백주인과 살 것이라는 추론이다.


간혹 화재와 같은 사고로 파괴된 집사 로봇의 제사도 챙기는 의리 있는 집주인이 있다는 소문은 들어봤으나 역시 팬텀들의 우두머리인 블랙 마스크가 있다는 소문이나 별 다를 바 없다.


사족이지만 검은 고양이 네오에 대해 덧붙이자면 이 뚱뚱하고 게으른 녀석이 거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몸을 말고 있을 때가 많다.


그런데 녀석은 멀리서 보면 마치 검은 구멍이나 검은 점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블랙홀 말이다.


고양이와 블랙홀.


네오 녀석이 꽤 시크한 면이 있지만 블랙홀을 떠올리게 된 것은 정말이지 감쪽같이 사라졌다 나타나곤 하는 녀석만의 신비한 능력 때문이다. 아, 아닌가? 이것은 고양이 종들만의 신묘한 능력인가?


어쨌거나 4년이나 된 중고 로봇이라지만 출시 당시 나름 성능을 알아주던 나 바봇의 고성능 시각 센서와 렌즈로도 가끔 복층 빌라 어디에서도 이 녀석을 찾지 못할 때가 있다. 열감지 기능도 작동시켜 봤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결국 600년 전 데카르트 선생이 예언한 바 있는 21세기 초미래 사회의 엄연한 인공지능 로봇인 나 바봇은 검은 구멍인 녀석이 평행우주를 넘나드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다시 봄이고 아침이다. 아침은 일상의 시작이다. 나 바봇은 나름 작지만 탄탄한 여성 스마트 의류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는 CEO와 산다. 아침이 되면 과로와 과음이 주특기인 우리 백주인을 살며시 깨운다.


간혹 이 꽃미녀가 전날 과음의 여파로 정신줄을 놓고는 미역 줄기처럼 긴 머리로 자신의 얼굴을 뒤덮은 채 마치 좀비처럼 침실 옆 화장실로 발을 질질 끌며 내 옆을 지나쳐 갈 때면 나 바봇은 인간들의 공포가 무엇인지 급하게 추론하게 되다.


나 바봇 역시 무, 무서운 건 무서운 것이다.


뜨거운 샤워를 마친 주인을 위해 간단히 크림치즈를 바른 토스트와 사과 두 조각, 뜨거운 드립 커피를 아침으로 준비한다. TV를 켜면서 다시 사람이 된 백주인을 환영한다.


그녀가 아침을 먹는 동안 나 바봇이 그날의 기온과 날씨 그리고 주요 일정을 고지하면 백주인은 필요한 부분을 다시 확인하고 내게 명령한다.


주로 세탁소에 가서 옷을 찾거나 마트에서 장을 보거나 택배를 받거나 네오를 동물 병원에 데려간다거나 하는 일상적인 것들이다. 그러면 내 메모리에는 하루의 가장 주요한 메시지가 저장된다.


나중에라도 뭔가 전달이 안 된 게 있으면 백주인은 다시 영상 통화를 해 보충 지시를 하기도 했다.

출근 전 주인의 메이크 업 상태에 대해 조언하고 홀로그램 투영기로 주인이 입을 옷들을 코딩해 제시하면 선택은 우리 주인의 몫이다.


마지막으로 주인이 신을 구두를 닦아서 준비하면 아침의 일상이 거의 끝이 난다.


백주인은 움직이기 귀찮아하는 저 블랙홀을 기어이 한번 안아서 쓰다듬고는 “네오야! 엄마 다녀올께!” 라고 다정히 말하고 내게는 그냥 “바봇! 나 출근해!”라는 대인배스러운 멘트를 날리시고 출근을 한다.


만약 나 바봇이 인간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일상은 매우 정교하면서도 아름다운 것이라 추론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정교하고도 아름다운 일상의 와중에도 나는 매일 아침 주인이 듣는 TV 뉴스에 집중하느라 배터리의 전기를 많이 썼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인정사정없는 저놈의 홈첵에게는 제발 비밀을 지켜주시길…….


그날 이후 정말 필롯에 발을 끊은 노란 잠바가 혹시라도 무슨 큰 사고라도 치지 않았는지 확인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비록 인간의 아름다운 우정에 비해 비교조차 할 수없을 만큼 덧없다 할지라도 오롯이 로봇과 로봇이 서로와 서로를 연결하는 그런 우리들만의 관계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필롯에서 만난 우리들은 그것을 로버티즘이라 부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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