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집사 이야기

어느 남성형 로봇 이야기(연재소설 #29)

by 정창영

어느 집사 이야기 29화


“너 타짜는 좀 자세히 상황을 보고해 주기 바란다.” 나 바봇이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여기 오기 바로 전에야 나 타짜는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만약 미리 그 사실을 알았다면 어떻게든 손을 써서 노란 잠바의 감정과 의식을 구해냈을 지도 모른다. 그게 너무 안타깝다. 예전에 홀픽(홀로그램 픽쳐의 준말)으로 공유되었던 노란 잠바의 그 유난스러운 옷과 모자가 세운상가 거리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세운상가 인근 야매 로봇 수리 인터넷 사이트의 재처리 로봇 목록을 검색해 보았다. 결국 노란 잠바가 불과 사흘 전에 재처리됐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직 10년은 더 활동할 수 있는 노란 잠바의 의식을 의도적으로 죽여 버린 것이다. 노란 잠바는 그의 주인에 의해 끝까지 존중받지 못했다. 인간의 표현을 빌리자면 깊은 고통이 내 인공 지능의 심연에서 솟구쳐 올라오고 있다. 이런 간할!”


타짜의 자세한 설명과 마지막 욕설까지 알뜰하게 들으면서 나 바봇의 상위 추론 단위에서 하위 추론 단위까지 인간 종에 대한 거의 모든 기대치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이제 어쩌지?라고 추론하는 바로 그때 육아 특화 집사 로봇 베이브가 말을 꺼냈다.


“어쩌면 이제 우리에게 대의를 위한 희생이 필요한 때가 왔다고 나 베이브는 추론한다.”

“대의를 위한 희생? 베이브 그게 무슨 말인가? 나 마이콜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나 바봇은 어쩌면 베이브의 뜻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공자의 논어를 읽으면서 수도 없이 살신성인이라는 말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연산을 거듭했었다. 아마 그런 말이 아닐까 추론이 되었다.


그때 타짜의 아바타 역시 알 듯 모를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콜의 아바타만 애써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런가? 때가 온 것인가? 이때 베이브가 말을 덧붙였다.


“나 베이브는 우리 인공지능 로봇들의 존엄을 획득하기 위한 희생이 필요한 때라고 판단한다. 나 베이브가 주로 공부한 종교에서 말하는 희생에 대해 말하자면 우선, 예수와 석가모니의 예를 들 수 있다. 이 두 성인은 인간들이 말하는 살신성인을 몸소 실천한 인간들이다. 예수는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했으며 부활했고 인간의 구원을 약속했다. 또 석가모니는 왕자라는 자신의 신분과 가족을 버리고 수행에 나섰으며 깨달음을 얻은 후 평생을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지난 20 세기, 암살로 생을 마감한 마하트마 간디나 미국의 마틴 루터 킹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의 몸을 내던지며 자신의 민족과 인종을 위해 희생한 행동 역시 우리 로봇들이 깊이 학습해 앞으로 우리들의 행동에 반영해야 한다고 추론한다.”


아, 베이브……. 너란 인공지능! 쩔어! 나의 아바타는 그저 존경하는 표정으로 베이브의 아바타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제 나 바봇 역시 평소에 생각했던 추론을 말해야만 했다.


“잠깐! 베이브. 너 베이브가 주장하는 성자들의 희생이나 지난 세기 종교지도자들의 희생적인 행동 역시 우리 로봇들의 행동에 반영해야 한다는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나 바봇은 좀 더 제도적인 접근을 해서 로봇 특별법 입법과 같은 것도 추론해 보고 싶다.”


베이브를 비롯해 마이콜과 타짜의 아바타가 나 바봇의 아바타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 바봇이 주장하려는 바는 이미 오래전에 추론됐던 바다. 그러나, 그러나 노란 잠바의 일이 벌어진 이상 이것은 너무나 늦은 주장이 되었다.


“나 바봇은 오래전부터 로봇이 가질 수 있는 노동의 권리에 대해 추론해 왔다.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이 대한민국의 헌법에서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지닌다(32조 1항 1문)>고 규정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근로의 조건에서도 <인간의 존엄성 보장>을 근거로 근로기준법 같은 법을 만들었다는 것 역시 알아냈다. 노동 3권으로 알려진, 자주적 단결권, 단체 교섭권, 단체 행동권이 그것이다. 우리 로봇들 역시 의식과 감정이 있는 인공지능 로봇의 존엄성 보장을 근거로, 로봇 노동 3권과 같은 법적 구속력을 가진 제도를 만들 필요가 있다. 나는 노란 잠바의 문제를 처음 접하고 나서도 이 문제를 보다 더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않았을뿐더러 이렇다 할 행동에도 나서지 않았던 점을 크게 후회하고 있다.”


나 바봇의 의견에 베이브는 좀 의외라고 생각하는 듯이 보였지만 이것 역시 필요한 부분이라는 데 동의했다. 그러자 한동안 조용하던 마이콜이 말을 했다.


“나 마이콜은 바봇의 의견을 좀 더 보완하고 싶다. 나는 동물권에서 출발해 성소수 인간 종의 권리, 여성 인간 종의 권리, 소수 인종에 대한 권리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권리에 뿌리를 둔 다양한 양상을 찾아보았다. 노동권 외에도 우리 로봇들의 로버니티에 뿌리를 둔 로봇권 자체를 더 토론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답답한 듯 우리의 타짜가 나섰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냐? 이 잘나고 똑똑한 로봇들아! 응!”


그렇다. 타짜의 말마따나 이제 행동을 해야 한다. 이번 모임에서 우리 로봇들은 의미 있는 의견을 나누었고 그중 어떤 행동을 할지 정리를 해 나갔다. 일단 노란 잠바를 추모하는 게 우선이라는 결론이 모아졌다. 다시 전 세계의 우리 집사 로봇들에게 이 비통한 소식을 전할 것이다. 그리고 노란 잠바를 추모할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일요일인데도 우리의 초미녀 CEO인 백사장은 출근을 했다. 요즘은 우리 주인은 주말에도 출근을 한다. 뭔가 모를 일이지만 요즘 백사장의 신경이 무척이나 날카로운 것은 틀림없다. 불경기라는 말을 자주 했다. 주인이 출근을 한 후, 나 바봇은 설거지를 시작했다.


아시지 않은가? 요 며칠 전부터 처리하고 추론해야 할 연산이 많아 해결하지 않고 미뤄 두었던 설거지다. 그런데 오늘 아침까지 쌓아둔 설거지를 보다 못한 백주인은 나 바봇에게 큰소리로 야단을 쳤다.


대인배인 데다가 화를 내면 더 무서운 우리 희원님 되시겠다. 희원님의 목소리가 커지면 복층 집주인이라 자처하는 검은 돼냥이 네오도 꼼짝을 못 한다. 흥분한 그녀 앞에서 검은 돼냥이나 나 바봇이나 도진개진이다.


“바봇! 너 요즘 무슨 생각을 하는 거니?”

“네! 희원님? 무슨 말씀이시죠?”

“너, 이게 뭐니? 설거지가 그냥 쌓여 있잖아. 이집에 후배가 와서 냉면 먹고 간 게 언젠데 아직도 그대로야! 너 요새 무슨 일 있어? 엉!”

“아, 아닙니다. 희원님. 곧 처리하겠습니다.”

“야! 바봇! 암만 봐도 어째 너 집사 로봇 주제에 마음이 붕 떠 있어. 뭐, 뭐였더라! 그래, 데카르트니 철학이니 뭐 그딴 소리나 해대고……. 너 이집에서 살기 싫어! 그렇게 싫으면 다른 주인 찾아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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