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주인의 야단에 갑자기 나 바봇의 메모리 슬롯이 뜨끈하게 열이 오르면서 반응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좀 더 오래 잔소리를 듣게 되면 정말 과열로 인한 셧다운이 올지도 모른다. 절박한 마음으로 주인에게 말을 했다.
“아닙니다. 제발 저 바봇을 쫓아내지 마십시오. 잘 하겠습니다. 희원님. 곧 처리하겠습니다.”
“아! 됐고. 제발 정신 좀 차리자! 바봇! 엉! 요즘 너 너~무 맘에 안 들어! 너! 엉!!! 아, 벌써 시간이!!!”
서둘러 현관으로 향하는 백주인의 뒤에 대고 나 바봇은 나름 복층 집의 집사 로봇으로서 예의를 지켰다.
“희원님, 희원님. 부디 좋은 하루 보내십쇼.”
“아, 몰랑!!!”
문이 쾅하고 닫혔다. 다행히 일요일인데도 백주인에게만큼은 바쁜 아침이라 그런지 주인의 잔소리가 길지 않았다.
주말에 출근을 할 때는 보통 회사의 중요한 화보 촬영이 있다든지 그랬다. 그런데 백주인이 대충 청바지와 티셔츠에 스포츠 재킷을 입고 나가시는 모양을 보아하니 이제는 본인이 직접 화보를 찍지는 않는 것 같았다.
주인이 나가자 곧 메모리 슬롯의 과열은 내려갔고 다행히 셧다운은 피할 수 있었다. 뭐,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집사 로봇이나 불경기에 잘리지 않고 목숨 부지하며 직장을 다니는 직장인들이나 또는 그 보다 더 사정이 어려운 자영업자나 하루하루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는 것은 매 일반이었다.
뭐, 야단도 맞았지만 이 복층 집 싱크대에는 아닌 게 아니라 나 바봇이 파악하기에도 설거지 거리가 상당히 많이 쌓여 있었다. 보통 이렇게 설거지를 쌓아두는 걸 백주인은 아주 음…… 아니 극히 싫어한다.
오늘 아침의 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서 빨리 노란 잠바의 일을 마무리하고 일상에 집중해야 한다. 나 바봇의 모든 추론 기능이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내 로봇 코가 석자이기 때문이다. 주인의 눈에 벗어나는 이런 행동이 많아져서는 결코 안 된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나 바봇을 포함해서 존중받지 못하는 로봇들에게 좀 더 큰 지혜와 현명한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 점점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시계는 10시를 가리키고 베란다 밖으로는 상쾌한 일요일 오전의 하늘이 보였다. 우리 로봇의 시각 센서는 화창한 봄날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 다만 증강 현실의 숫자들과 화소를 분석할 따름이라고 말했었다.
인공지능 로봇에게도 감정과 의식이 생겼다고는 하지만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결국 인간 종 고유의 영역이다.
그러나 화창한 봄날의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결국 노란 잠바의 일은 인간종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매우 잔인하게 처리되었다. 그러니까 의식과 감정을 가진 존재를 사적인 감정으로 죽여버린 셈이다.
그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노란 잠바의 주인을 보면서 참으로 인정사정을 볼 것 없는 인간 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도 문득 어제 오후에 봤던 낡은 집사 로봇을 마치 친자매처럼 배려하는 백운 세탁소의 할머니를 기억하면 여전히 인간 종이 가진 마음의 따듯함을 추론할 수도 있다.
따라서 나 바봇은 어느 부류의 인간 종을 중심에 놓고 이 지구 행성에서 달과 화성, 그리고 우리 태양계 바깥으로까지 퍼져나가고 있는 지금의 인간 종 전체를 이해할 수 있을까 늘 헛갈렸다.
그러면서 앞으로 우리 로봇들이 취해야 할 행동을 추론하기에 앞서 우선 앞으로 인간 종을 이해하기 위한 학습을 계속해야 할지 아니면 그만둬야 할지 계산이 서지 않았다.
16 로봇 시간(4시간) 전의 매우 심각한 필롯의 토론 모임을 끝내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나 바봇은 내내 그 문제를 추론하고 또 추론했다.
인간에 대한 이해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 안고 가야 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
싱크대에는 냉면기나 이런저런 반찬 그릇들과 다양한 크기의 접시와 술잔, 컵들, 네오를 위한 식기들 그리고 끓인 면의 물기를 빼던 스테인리스 채반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보통 로봇 집사를 쓰는 다른 집들은 인공지능 식기 세척기를 쓰지만 우리 백주인은 알뜰하기로도 천하 으뜸이시다.
부산에서 스물도 안된 나이에 서울로 올라와 자수성가한 우리의 백주인 되시겠다. 사물인터넷의 축복으로 집이 주인을 알아보고 자동으로 문을 열어주는 이 시대에 이 복층 집 현관문은 아직도 네 자릿수 비밀번호를 눌러 여는 구식 자동 잠금장치가 남아 있다.
아낄 때는 아끼고 쓸 때는 써야 한다는 게 여장부인 우리 백주인의 지론이다. 그녀는 그렇게 아낀 돈으로 아프리카나 동남아의 아이들이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후원한다. 대인배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
뭐, 그건 그렇고. 설거지! 가사 노동 전문 집사 로봇인 나 바봇은 언제나 이 분야만큼은 인간계를 뛰어넘는, 그러니까 거의 신의 경지에 가까운 완벽함을 추구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설거지가 완벽하게 끝난 적은 거의 없다. 아니 없다. 제로 퍼센트!!! 오늘도 딴에는 완벽하게 잘 하다가 막판에 면을 삶고 나서 물기를 털어내는 꽤 큰 스테인리스 채반을 수돗물로 헹구다가 그만 물이 튀었다.
지극히 화창하고 아름다운 일요일 오전,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지구 행성 서울 마포구 상수동의 어느 빌라 꼭대기 복층에는 가뜩이나 지대가 낮아 물살이 센 수도에서 튄 물을 온몸에 뒤집어쓴 나름 고성능 인공지능 집사 로봇이 있다.
끙……!!!
물을 뒤집어쓴 채 오래 놔두면 로봇 신체에 물이 스며들어 자칫 연결 회로가 탈 수도 있기 때문에 나 바봇은 허겁지겁 또는 쿵쾅거리며 2층 욕실로 가 백주인이 쓰던 대형 목욕용 수건으로 온몸을 닦아 냈다.
다시 계단을 내려오다가 문득 주역의 64괘 중 마지막 괘인 화수미제(火水未濟 ) 괘가 추론되었다.
양자 컴퓨터가 세계를 관장하고 고성능 인공지능 로봇들이 노동의 중심에 선 시대가 왔다손 치더라도 과연 신의 경지에 가까운 완벽함이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