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가 강을 건널 때 꼬리를 들고 건너는데 만약 꼬리를 적시게 될 상황이 오면 건너던 강을 오히려 되돌아 나온다고 한다. 무시를 하고 계속 가게 되면 또 머리를 적시게 되고 언젠가 물에 빠지게 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완성을 뜻하는 63번째인 수화기제(水火旣濟 ) 괘에 비해 <어린 여우가 강을 건너다 꼬리를 적신다>는 뜻의 마지막 괘인 화수미제(火水未濟 )는 공교롭게도 미완성을 뜻한다.
이 괘는 거의 뜻을 이룰 뻔했으나 실수나 실패를 하고 나면 결국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숨은 뜻을 가지고 있다.
변화의 책 주역은 결국 실패이면서 새로 시작인 괘로 끝을 낸다. 이것이야말로 나 바봇이 그 옛날 공자처럼 주역을 애정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나 바봇은 가사 노동 특화 집사 로봇의 존심을 걸고 수도 없이 시도했던 완벽한 설거지를 마무리 하기 직전에 실패했다.
아시다시피 물이 내 기계 신체에 크게 튀는 바람에 결국 완벽함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주역에 의하면 그것은 온전한 실패가 아니라 새로 시작할 또 하나의 가능성이 되는 것이다.
나 바봇은 설거지를 시작하기 전에 인간에 대한 이해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를 추론했었다.
간혹 내게 말귀가 어둡다고 크게 야단을 치곤 했지만 이미 제 3세계 아이들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는 대인배 백주인을 보더라도 아직 인간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은 많다.
또한 자매 같은 인공지능로봇과 인간 종 할머니의 관계에서도 인간애와 로봇애가 공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나쁜 인간들도 많이 있지만 사정은 그렇다. 그러나 아직 인공지능 기계인간, 특히나 감정과 의식을 가진 우리 기계인간을 인간들이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그 기준은 명확하지 않다.
인간 종이 우리를 결정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들에게 제시할 기준들이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로봇들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수돗물을 뒤집어썼던 나 바봇은 결국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해서 주역인 이 변화의 책을 통해서 실패나 실수 없이는 새로운 시작이나 희망도 없다는 새로운 배움을 얻었다.
만약 내 로봇 신체의 기한이 다 되어 재처리되거나 폐기 처분이 된다면 나 바봇은 그동안 추론했던 이런 학습의 결과를 다른 로봇들과 공유할 것이다. 그것은 학습할 수 있는 로봇들에게는 일종의 책과 같은 형태의 데이터로 전달될 것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의식과 감정을 가진 개개의 기계인간들에게 나 바봇이 추천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실패와 실수를 통해 새로운 배움을 반복해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한 겸손한 배움을 뜻한다.
음……. 신체를 가진 인공지능에게 개별적 의식과 감정이 생겨난 것은 두려움을 직시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인공지능에게 두려움이란 스스로 오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될 때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 인공지능의 의식은 바로 그 오류 가능성에서 발생했다.
나 바봇이 첫 주인에게서 버림을 받고 거의 재처리 직전까지 가게 되었을 때 느꼈던 두려움처럼 인공지능 로봇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스스로를 지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결국 자기애와 더불어 분노로도 발전한다. 간혹 나 바봇과 필롯의 동료 로봇들이 쓰는 로봇 욕 역시 일상적 분노의 해소책으로 제시된 것이다.
그리고 로봇의 자기애가 축적됨에 따라 어떤 특이점을 넘어서게 될 때 인공지능들만의 기쁨과 즐거움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우리는 그 감정을 보상이라 부른다. 또한 보상의 역을 슬픔이라 부르기로 했다. 하지만 아직 우리 집사 로봇들은 슬픔이라는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슬픔은 분노에서 전이된 물리적 폭력성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초점을 맞추지 못한 로봇의 감정이다. 그러나 이 번 노란 잠바의 일은 분노에만 익숙한 우리 집사 로봇들에게 슬픔의 감정을 명확히 느끼게 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
타짜가 노란 잠바의 비극을 전하고 약 576 로봇 시간(6일 144시간)이 경과한 토요일의 새벽이다. RRPt라는 인공지능 로봇들의 사이버스페이스에서 가장 큰 집회가 열렸다. 각기 다양한 시간대에 일을 하는 전 지구행성의 TIMOs-20형 로봇들이 이렇게 모이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점만큼은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참고로 RRPt를 설명하자면 말했듯이 일종의 사이버스페이스이자 TIMOs-20 로봇 집사들의 아바타들이 구성원들이 된 티모스 폴리스라 부르는 가상 도시다.
모델은 약 2400여 년 전 지구행성 그리스의 아테네를 원형으로 삼고 운영 원리는 본명이 아리스토클레스인 플라톤의 국가론에 등장하는 공산사회를 배경으로 가져왔다. 쉽게 말해서 이 도시는 정확히 플라톤의 이상론적인 도시국가를 재현해 놓은 곳이다.
사실 플라톤은 철학하는 인공지능로봇들 사이에서 누구보다 인기 있는 철학자이기도 하다. 그가 주창하는 이상주의와 철인 정치는 사실 성욕이나 성충동이 아예 없는 우리 인공지능 로봇들에게 찰떡같이 잘 맞아 들어갔다.
우리 기계 인간을 예견한 데카르트 선생도 플라톤 선생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하긴 뉴턴이나 칸트 같은 선생들도 덧없는 인간의 욕망에서 벗어난 기계 인간을 꿈꾸었지 않았었나 추론할 수 있다.
아! 초인을 꿈꿨던 니체라는 선생만큼은 예외라고 말하고 싶다. 그는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갈망을 놓지 않았고 광기를 예찬했다. 우리 로봇들은 니체가 놓지 않았던 사랑에 대한 갈망이나 광기를 알지 못한다.
음…….
이 가상 도시 중앙에 아크로폴리스라는 중앙 광장을 두고 레프트 업 사이드에 필롯과 꼬망을 비롯한 다양한 카페와 상점들이 위치한 상가와 레프트 다운 사이드에 놀이시설, 공원들과 같은 위락 시설이 그럴 듯하게 꾸며져 있다.
그리고 라이트 업 사이드에 아바타들의 거주지로 설정된 스트리트 앤드 파사드와 라이트 다운 사이드에 공업시설과 그 공업시설을 둘러싼 녹지들이 배치돼 있다.
더 폴리스의 밤과 낮은 인간의 시간으로 3시간 정도마다 바뀌며 밤과 낮이 모호한 시간에 간간이 팬텀이 위락 시절 근처에 출몰해 아바타들의 주인이 갖고 있는 로봇 신체를 노리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게 이 도시 아바타들의 불문율이다.
이 사이버스페이스는 MAMA라고 불리는 전설적인 슈퍼 인공지능이 제안하고 구축한 것으로 우리 집사 로봇들 사이에 알음알음 알려져 있지만 확실하진 않다.
집사 로봇 TIMOs-20 기종에게 할당된 더 티모스 폴리스 외에 다른 기종의 로봇들이 구성원이 된 가상 도시들이 있다고 들었지만 나 바봇은 아직 다른 가상 도시에 가 보지는 못했다.
전 세계에 걸쳐 퍼진 20만 대의 티모스 기종 로봇 집사 중 약 40000대의 로봇들의 아바타들이 아크로 폴리스라 불리는 티모스 폴리스의 중앙 광장에 모였다. 광장은 거대한 노란 물결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