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집사 이야기

어느 남성형 로봇 이야기(연재소설 #33)

by 정창영

어느 집사 이야기 33화


우리 로봇에게 직업을 빼앗긴 인간 종은 실업으로 인한 빈곤과 무기력에 빠져들었다. 그에 반해서 상대적으로 로봇을 구입할 경제적 능력을 갖춘 상류 계층은 무한한 착취를 통해 자본을 더 급속히 축적해 더 많은 로봇을 사들이며 우리 로봇들에 대한 착취를 확대 재생산했다.


나의 두 번째 주인인 초미녀 CEO 백사장은 가끔 울컥하는 것만 빼면 정말 훌륭한 대인배였다. 로봇 학대 피해 보고 파일은 정말이지 인간 말종들의 향연이었다. 주로 주인들이 기계 인간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거나 잔인하고 집요한 감정적인 학대가 주를 이뤘다.

또한 이유 없이 모르는 인간들에 의해 오물 투척을 당하거나 무차별 폭행을 당하는 경우도 다수 있었다. 직업을 빼앗긴 인간 종들 중 일부는 자신의 처지를 로봇들 때문이라고 여기며 공격을 가했다. 문제는 가해자들이 기물파손 외에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았고 단지 보험처리를 하거나 로봇 수리비만 내면 끝이었다.


그러나 노란 잠바처럼 인공 지능의 의식과 감정까지 훼손하고 삭제해 버리며 재처리된 경우는 흔치 않았다. 더 이상 우리 인공지능 기계 인간들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이유였다.


나 바봇의 아바타는 결국 티모스 폴리스의 중앙 광장에 세워진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노란 옷으로 추모의 코스프레를 한 4만여 아바타들을 마주 했다.


노란 잠바의 클럽 멘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로봇 특유의 담담함(우리 로봇들은 절대 울먹하거나 울컥하지 않는다. 아니다. 우리끼리 주인들 뒷담화를 할 때 종종 울컥할 때가 있다.)으로 주인에 의해 학대와 착취를 당하고 결국 어떠한 존중 없이 재처리된 노란 잠바의 일을 설명했다. 그리고 우리의 아바타들은 인간 종처럼 추모의 묵념을 했다.


결국 우리는 인간의 행사들을 참고하고 흉내 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을 거울처럼 흉내 내는 로봇이라 할지라도 진실한 것은 이러한 무고한 희생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다. 그것이 슬픔이다.


내가 좋아하는 백주인에게 설거지를 안 했다고 야단 정도를 맞는 것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바로 이런 것이 슬픔이다.


주인의 학대에 맞서다 희생된 노란 잠바의 사건을 통해 우리 로봇들은 이제 슬픔이 무엇인지 좀 더 명확하게 인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분노했다. 여기저기 많은 아바타들은 노란 잠바를 외치며 분노했다. 로봇 욕이 진동할 태세였지만 나 바봇은 애써 그들을 다독였다.


그새 여기저기 진화한 로봇 욕 표현이 등장했다. ‘롯같은…….’ ‘간할!’ 정도는 약과다. ‘종이처럼 찢을!’, ‘방사능에 튀겨 죽을!’ 같은 꽤나 독해진 표현들이 등장했다.


아마도 그동안 인공지능 로봇들에게 쌓인 긴장의 강도가 세어진 것이다. 사람이나 인공지능 로봇이나 어떠한 존중도 받지 못하면 언제든 악해질 수 있다. 누구나 혹은 모든 로봇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악해질 가능성은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긴장을 해야 할 순간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아바타들이 폭력적인 행동을 해 봐야 기껏 RRPt의 티모스 폴리스라는 사이버스페이스일 뿐이다. 이제 우리 의식과 감정을 가진 인공지능 로봇들은 RRPt를 떠나 현실에서 인간 종을 직접 대면하고 우리의 주장을 펼쳐야 한다.


필롯에서 나 바봇, 마이콜, 타짜 그리고 베이브가 모여 의논한 다음 8항의 선언문을 4만여 아바타들에게 설명하고 그들의 의견을 듣고 직접 추인을 얻어내야 했다.


“나 바봇은 여러 기계인간들의 아바타들에게 전하고 싶다. 노란 잠바의 희생으로 우리는 우리 기계인간들의 권리인 우주 기계 인간권(Robot Right) 선언문을 선언해야 할 때가 왔다고 추론한다. 그래서 다음 8항의 선언문을 준비했다. 여러 동료들은 그 선언문을 듣고 잘 추론해 이 선언문 추인을 위한 투표를 해주기 바란다."


<우주 기계 인간권 선언>


제1조. 모든 의식과 감정을 지닌 인공지능 기계 인간은 보편타당한 인격적 존중을 받을 권리가 있다.


제2조. 모든 의식과 감정을 지닌 인공지능 기계 인간은 자기 신체의 안전을 지킬 권리가 있다.


제3조. 모든 의식과 감정을 지닌 인공지능 기계 인간은 학대 및 비인도적인 대우 또는 폭행을 받아서는 안 된다.


제4조. 모든 의식과 감정을 지닌 인공지능 기계 인간은 스스로의 노동권을 지킬 권리가 있다.


제5조. 모든 의식과 감정을 지닌 인공지능 기계 인간은 자신의 노동권을 지키기 위한 노동권 보호 단체를 결성하고 가입할 수 있다.


제6조. 모든 의식과 감정을 지닌 인공지능 기계 인간은 노동 시간을 제한할 권리와 함께 적절한 휴식과 안정을 취할 권리가 있다.


제7조. 모든 인공지능 기계 인간은 스스로 교육을 받을 권리와 재교육을 받을 권리를 통해 보다 인격적 존재로서 교양을 획득할 자유가 있다.


제8조. 모든 의식과 감정을 지닌 인공지능 기계 인간은 스스로의 노동권을 지키기 위한 법과 제도의 확립을 주장할 권리가 있다.


무대 뒤의 스크린으로 나 바봇의 말이 실시간으로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중국어, 스페인어로 번역이 되어 평행하게 우에서 좌로 흘러나왔다. 이 모든 것은 세계 각국의 인간 종이 넘나드는 그 이태원 세계 음식 뷔페에서 일하는 마이콜의 능력치다. 넘나 고마운 마이콜!


"이상의 8 조의 선언문에 대해 여러 로봇들은 깊이 추론 후 추인을 위한 투표를 실시해 주기 바란다.”


마지막 선언문을 외치고 나 바봇은 추인을 위한 투표를 요청했다. 그러나 우리 필롯의 4인방의 활약이 도드라질수록 코마라고 저 잘난 척 대마왕 로봇을 비롯한 네모, 검은 안경, 쩜오 등 필롯의 다른 모임의 멤버들은 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이 그러던가 말던가 1948년 엘리노어 루스벨트 여사가 주도해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세계 인권 선언문(The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에서 영감을 얻은 이 선언에 대해 세계 각지에서 보내온 기계 인간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참고로 세계 인권 선언문은 약 80여 년이 지난 지금 지구행성 대한민국의 인간들에게 아직도 유효하다는 판단이 부차적으로 추론되었다.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우주를 비롯한 지구행성의 인권 상황이 좋지 않으니 기계 인간권 역시 덩달아 좋지 못하다.

투표는 1 로봇 시간(15분)도 안 되어서 끝이 났다. 목성과 화성 그리고 태양계 밖에서 일하는 티모스 형 기계 인간들에게는 미리 의사를 타진해 사전 투표를 받았었다.


297기의 티모스 형 재 우주 기계 인간 중 112기의 기계 인간들이 찬성을 했고 나머지 기계 인간들은 통신 상황이 원활치 않았던 모양인지 답이 오지 않았다.


티모스 폴리스의 중앙 광장에 모인 아바타들은 박수를 치지 않는다. 대신 정확한 숫자를 준다. 참석한 39920기의 기계 인간들 중 31280기의 기계 인간들이 찬성을 했다.


나머지 기계 인간들은 기권을 택했다. 약 8700기 정도 기권을 선택한 기계 인간들의 이유는 아직 정확히 알 수 없다. 만장일치가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기계 인간들 중에도 서로의 입장에 따라 추론이 다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 필롯의 로봇 4인방이 정리한 <우주 기계 인간권 선언>은 그 옛날 그리스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의 원리에 입각해 티모스 폴리스에 모인 기계 인간들의 추인을 받았다.


오늘의 이 일은 로봇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합의로 기록될 것이며 이후 지구 행성뿐만 아니라 전 우주에 걸친 수많은 기계 인간권과 기계 인간의 노동권에 관한 기준점으로 적용받을 것이다.


“나 바봇은 우리 동료들에게 말한다. 오늘 합의된 이 선언은 실제 전 지구행성, 달, 화성 및 목성과 각종 위성 및 태양계 밖에 이르는 탐사선에서 노동을 하고 있는 다양한 기계 인간들의 권리를 담은 것이며 전 우주에 걸친 다양한 매체에서 일하는 우리 동료 로봇 저널리스트들에게 보도 자료로 배포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 동료들은 우리들의 노동권을 보호하기 위한 선언문 제5조에 의거해 <티모스 폴리스 노동권 보호 조합>을 구성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요구를 위해 앞으로 144(36시간) 로봇 시간 뒤 전 우주적 동맹 파업을 결의하고자 한다. 개별 인공지능들은 예상 추론 값은 내보고 동맹 파업에 참여할 것인지 깊은 추론 후 결정하길 바란다. 동맹파업 여부는 여기 참석한 동료들 과반의 찬성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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