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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창영 Dec 25. 2016

Underground Boy

다방집 소년 (연재소설 #9)

다방집 소년 9 -(내용 중에 다소 폭력적이거나 성적인 소재가 있어 19세 이하 청소년이 읽는 데 주의를 요합니다.)


 ‘땡!’


 벨루아 공국의 여왕으로부터 샤디아 공주와 결혼을 해야 한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그래서 여왕에게 이 결혼을 꼭 해야 하는지 물어보는 순간 어디선가 전국 노래자랑의 땡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나는 화려한 여왕의 집무실에서 수도 다방이라고 불리는 지하 다방집 홀로 돌아와 있었다. 여전히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전국 노래자랑의 마지막 출연자이자 머리에 곱게 족두리까지 하시고 한복을 제대로 차려입으신 할머니는 땡 소리를 듣고도 뭐가 좋으신 지 흥겹게 박수를 치며 웃고 계셨다.  


                                        …


 그리고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그 사이 MBC 청룡은 포스트시즌 진출이 좌절됐고 방어율 0.99의 괴물투수 선동렬을 앞세운 해태 타이거즈가 우승을 차지했다. 정국은 현 대통령의 부득이한 사고로 인한 조기 대선 이슈와 더불어 조기 대선 전에 내각제 개헌안을 집권여당인 민정당이 들고 나와 시끄러웠다.

 10월 초 아시안 게임이 국가원수의 부재 속에 조용히 끝난 가운데, 10월 중순에 야당인 신한민주당 유성환 의원이 국회 본회의 질의에서 88 올림픽에 참여할 공산권 국가 이야기를 꺼내며 대한민국은 “반공이 국시가 아니라 통일이 국시”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가 바로 구속되었다. 정국은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유 의원을 성토하는 반공단체의 시위와 지지하는 대학생들의 집회가 이어졌다.

  더군다나 건국대 사태로 체포된 대학생 900명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이어서 지난 쿠데타의 또 다른 주역인 민정당 노태우 대표는 연일 내각제 개헌안의 조석한 처리를 야당에 촉구했다. 여당은 내년 1월 발의, 2월 처리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야당인 신민당은 내각제 개헌 반대와 직선제 쟁취를 위한 대규모 집회를 열기로 했다. 이에 당정은 야당의 집회를 민중봉기를 유도하는 불법 집회로 규정하고 강력히 대처하기로 했다.

 하도 시끄러운 세상이 되어가서 매일 저녁마다 조석 간 5종 신문 보기가 겁이 났다. 결론적으로 호랑이 하나 없앤다고 당장 숲이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호랑이 없는 숲에 교활한 여우가 대장질을 하는 꼴을 보게 되었다.   

 이런저런 일들을 지나치고 나니 어느덧 12월의 첫째 토요일이 되었다. 내일은 벨루아 공국에서 샤론 여왕이 말한 그 결혼식을 해야 하는 일요일이 된다.

 역시나 변태 같은 미술 선생은 실기수업 위주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교과서 시험 범위만 알려주고 공부는 알아서 하라고 했다. 오늘 미술 실기수업의 주제는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수채화로 그리라 했다. 시커먼 17살 남자아이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라니! 아이들의 망연자실한 표정이란? 나는 그때 엄마를 그려야 하나 샤디아 공주를 그려야 하나 약간 망설였다. 결국 엄마를 그렸다. 선생은 무척 상냥하고 반가운 얼굴로 내 그림을 가져갔다. 뭔가 속은 느낌이 드는 것은 단순히 내 착각일 것이라 생각했다.

 지난 한 달 동안 하루하루가 지나갈수록 점점 더 긴장이 되었다. 그런 데다가 IQ 테스트 전교 1위인데 수학 성적을 비롯해 매달 시험을 칠 때마다 성적이 더 떨어졌다. 결국 11월 말 시험에서 국어나 영어 성적은 그나마 평균 근처를 유지했는데 수학만큼은 전교에서도 끝에서 몇 등을 하고 있었다. 수학 성적은 결국 40점을 넘지 못했다. 수학이라는 과목은 정말 나하고 맞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지난 IQ 테스트 전교 1등인 데다가 무려 아이큐 지수가 159나 된다는 소문이 아이들 사이에 돌기 시작했다. 평소 나를 좋지 못하게 보던 아이들은 내 엄청난 수학 점수를 놓고 놀리거나 시비를 걸어왔다. 학교에서 서울말을 쓰면 나를 묻어버리겠다고 하던 우리 학교 1학년 짱이자 같은 반 종철이가 서너 명 되는 제 패거리를 데리고 하굣길에 교문을 나서던 나를 막아섰다.

 

 “어이! 이 봐라! 좇성재! 거기 좀 서 봐라!”

 “왜?”

 “짜슥이! 왜는 무슨 왜! 나 쫌 보자 안 카나!”


 무척 친한 듯이 종철이가 내 어깨를 감싸 안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덩치 크고 힘이 좋은 녀석에게 어깨를 잡히니 천하에 근육 하나 없는 슬림한 몸을 가진 나는 어찌 반항할 방법이 없었다. 성적이 좋은 아이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성격까지 좋은 것은 아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은 나를 끌고 가는 이 네 명 모두 다 나보다는 수학 성적이 월등히 높다는 것이었다. 젠장!

 멀리서 보면 마치 친한 친구들끼리 어디로 놀러 가는 정겨운 풍경이지만 나는 이제 어째야 하나 싶었다. 학교 정문 옆으로 난 주택가 작은 골목길을 따라 50여 미터쯤 가다 보면 학교로 향하는 작은 철문이 나왔다. 그 옆에 어떤 일인지 학교 공용 창고가 있어서 못 쓰게 된 책걸상 따위를 쌓아두었다. 평소에도 좀 어두컴컴해서 창고 앞 작은 공터에서 곧잘 아이들끼리 싸움을 하는 곳이기도 했다. 종철이 패거리는 나를 거기로 데리고 갔다.

 가방을 뺏어서 저만치 던지고는 공부도 못하는 새끼가 왜 아이큐가 159로 소문이나 학생들을 자괴감에 빠지게 하는 데다가 아직도 서울말을 쓴다며 무턱대고 주먹질을 시작했다. 배를 정통으로 맞아보니 중학교 때 맞을 때랑은 비교도 안 될 강도였다. 고등학생이 된 사내아이들의 주먹은 이제 제법 매워졌다. 어떻게든 엄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아니 혹시 모를 내일의 결혼식을 위해서라도 얼굴만은 맞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내가 혼신을 다해 가드를 올려 얼굴을 막고 있으려니, 이 패거리 녀석들이 내가 오른 손목에 차고 있는 벨루아 공국산 검은 전자시계를 보게 된 모양이었다.

 

 “어이! 좇성재! 잠깐만! 와! 이거! 이거슨 뭐냐?”

 “뭐?”

 “뭐긴 새꺄! 시계! 존나 좋아 보이는데?”

 “…이, 이거 별 거 아냐! 엄, 엄마가 생일 선물로 사준 거야!”

 “하잇! 좇도 아닌 다방집 새끼가 시계는 참 좋은 걸 차네?”   


 녀석들은 처음 보는 시계라며 그 손목시계를 뺏으려고 했다. 평소 힘이 없으니 덩치 큰 억센 아이들에게 그냥 첨단 장비 많기로 소문이 난 벨루아 공국산 전자 손목시계를 별 저항도 못하고 뺏겼다. 종철이는 내 오른 팔뚝을 걷더니 손쉽게 시계를 풀었다. 종철이가 한 손에 내 시계를 들고 이리저리 살피더니 다른 손으로 내 머리채를 잡았다.  


 “이 새끼! 니 엄마 일본 시계 밀수 하제? 어잉! 팍 신고했뿐다. 마! 내 이거 차고 다니도 학교에 말하면 그땐 진짜로 확마 쥑이삔다. 알긌나? 대답해라! 새끼야! 이 존만한 새끼가!”


 다른 녀석들도 다방집년 새끼가 정말 같지도 않게 이런 흔치 않은 시계를 낀다고 낄낄거렸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어린 친구들은 건드리지 않으려고 단단히 결심을 했었다. 그런데 그랬던 마음이 지금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당장 종철이 녀석의 마음속에 들어가 단박에 녀석의 명줄을 끊어버려야 하나 싶었다. 녀석들이 시계를 돌려보며 낄낄거리는데 오른 팔뚝에 있는 구렁이 문신이 아주 오랜만에 금빛으로 빛이 나더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눈을 감고 녀석의 마음속에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그러지 마!” 갑자기 여자아이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떠 고개를 돌려보니 1986년 11월 D고등학교 월말고사에서 기어이 우리 반 경일이를 제치고 전교 1등이 된 민소정이 종철이 패거리 옆에 서 있었다. 나는 서둘러 금빛으로 물든 팔뚝의 구렁이 문신을 감췄다.

 “니가 뭔데! 여 낄라카노! 엉! 꺼지라! 좋은 말로 할 때!” 종철이 옆에 있던 똘마니 영덕이가 말을 꺼냈다.

 “가만, 쟈! 교감 선생 딸아이가?” 민구라는 안경 쓴 친구가 말을 이었다.

 “아! 맞다. 전교 1등 민소정!” 잠시 종철이가 망설이더니 말을 이었다.

 “쳇, 니 재수 좋은 줄 알아라! 마! 어잉!” 종철이가 내 머리채를 던지며 말했다. 나는 속으로 ‘넌 죽을 뻔 했다. 너야 말로 민소정이에게 고맙게 생각해라!’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물러나는 아이들에게 민소정이 다시 용기 있게 말을 더 했다.


 “그 시계도 주고 가라!”

 “뭐라꼬? 이 가시나가 죽을라꼬?” 다른 아이가 협박을 했지만 민소정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 시바! 교감 아부지 안 둬가 서러버 살긌나? 어잉! 쳇!”


 종철이가 내 시계를 바닥에 내던지더니 발로 짓이겼다. 아! 이 녀석 방금 넌 나한테 죽을 뻔했다고……오!!! 그랬는데, 느닷없이 종철이 녀석이 발로 내 얼굴을 찼다. 뭔가 성이 안 찼던 모양이었다. 상당한 충격이 내 얼굴에 가해졌다. 붕 날아 올라 땅바닥에 얼굴부터 처박았다. 턱 쪽도 얼얼했다. 내, 내일 어쩌면 결혼식인데……. 결국 나는 내 얼굴을 지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큰 대자로 뻗었다. 이 무슨 쪽팔림인가?  


 “니, 한 번만 내 앞에서 서울말 씨부려 봐라! 그땐 진짜 묻어버릴 기다. 어잉! 알았나! 지 아비도 모르는 다방년 새끼야! 캭 퉸!!!”   


 다른 녀석들까지도 가래를 내게 뱉고 나서야 아이들은 물러갔다. 민소정이 경악을 하며 그 광경을 지켜봤다. 코를 제대로 강타했는지 내 입으로 막 코피가 흘러들어왔다. 쇳내 나는 짭조름한 액체를 얼결에 뱉어냈다. 그때 민소정이 급하게 손수건을 꺼내 내 코를 막아 주었다.


 “우짜노, 코피 마이 난다. 이거가꼬 막아봐라!”


 나는 손수건을 받고는 민소정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잠시 창고 벽에 기대앉아 입으로 들어온 코피를 뱉고 손수건으로 코를 막았다. 노란 손수건이 검붉은 피로 물들었다. 그러면서 민소정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민소정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나는 여기 있었던 소년 넷 모두를 저세상에 보내버렸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인간들이라고 모두 악한 존재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하는 교감 선생의 딸이지만, 분명 민소정은 따듯한 마음을 가진 좋은 인간임에 분명했다.


 “고마워! … 우리말 한 번 제대로 나눈 적이 없는데….”

 “아이다. 이제 좀 괘안나? 쟈들이 뭐가 꼬였는지……. 종철이는 내도 쫌 아는 아인데…. 어릴 때는 참 착했었거든…….”

 “괜찮아! 쟤네들 힘도 별로 없어. 내가 싸우는 걸 싫어해서 가만히 있었지.”

 “잘했다. 니가 잘 한 기다. 그리고 이 시계 진짜 좋은 갑다. 진짜 멀쩡하네!”


 시계를 건네주며 민소정이 내게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시계를 건네받고 보니,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역시 캐산 집사 말로는 인간계에 비해 3,40년은 앞선 첨단 기술의 벨루아 공국이라더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말했잖아! 재네들 힘없다고…. 그리고 나 이제 그만 가야겠다.”


 애써 일어나려고 했다가 다시 휘청했다. 많이 맞아서인지 도무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때 민소정이 갑자기 쓰러지는 나를 부축하면서 우연찮게 민소정 품에 내가 안기게 되었다. 아마도 공부만 해서 살집이 있는 편이었지만 안기고 보니 오랜만에 참 편안한 느낌이 들어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평소 엄마랑도 잘 안거나 스킨십 같은 걸 하지 않아서 이런 느낌을 잘 몰랐었다. 물론 샤디아 공주와 얼마 전 굉장히 묘한 경험을 했지만 이건 그것과는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아! 미안!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이제 정신 차릴게” 소정이의 품에서 떨어지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괘안타. 내는! 부축 좀 해주까?”

 “아니! 아니! 이제 괜찮아!”


 대충 옷에 뭍은 흙을 털고 창고 저 쪽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내 프로스포츠 가방을 찾아 어깨에 들러 메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러 갔다. 민소정하고는 집이 같은 방향이라 같이 6번 버스를 탔다. 승객도 없고 따로 앉기도 뭐해서 제일 뒷좌석에 같이 앉았다. 민소정은 나보다 두 정거장 앞에 내리는 정도는 나도 눈치껏 알고 있었다.


 “민소정! 오늘 일은 정말 고마워! 잊지 않을게!”

 “뭘! 괘안다.”

 “음…….”

 “와! 니 뭐 할 말 있나?”


 얼굴이 욱신거렸다. 코가 부러진 건 아닌 거 같은데 좀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나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친구에게 내가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안 해도 되지만 멀리 보면 지금 이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고양이 인간의 피가 흐른다는 말을 듣는 데다가 심지어 현직 대통령까지 쥐도 새도 모르게 저 세상 근처까지 보내는 무서운 존재가 이렇게나 좋은 인간을 사귈 수 있을까 싶었다.  


 “그래, 너에게 할 말이 좀 있어!”

 “뭐! 말해 봐라!”

 “음…….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 같아!”

 “그래!”

 “그런데, 나는 네가 쪽지를 보내거나 편지를 보내는 그런 사람은 못 되는 거 같아!”

 “왜?” 슬픈 표정으로 민소정이 나를 쳐다봤다.

 “아까 종철이도 말했듯이 우리 집은 다방집을 해. 아가씨가 나오는 술집도 했었고. 나는 민소정 너처럼 좋은 집안 아이랑 만날 처지가 안 돼!”

 “무슨 말이 그렇노? 니는 그런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렁그렁한 눈으로 민소정이 나를 봤다. 역시 예쁜 눈을 가진 아이다.

 “알다시피 나는 너처럼 좋은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어. 홀어머니에, 지하실에 살고, 몸도 약하고, 지금까지도 누굴 사귀어본 적이 없었어. 지금도 누구를 사귈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어!”


 그때 또다시  샤디아 공주의 절박한 얼굴이 떠올랐다. 아! 이런 남녀 간의 관계란 무얼까? 이 건 뭐가 이리도 어려운가? 나는 왜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나? 솔직하게 내 존재를 말하면 민소정은 과연 이해할까? 그때 민소정이 내 곤란한 표정을 보고 말았다.


 “아! 사귀는 아가 따로 있구나. 알았다. 솔직하게 말을 해야 좋잖아! 알았다. 내도! 이제 더 이상 귀찮게 안 할게! 그리고 나 여기서 내릴 거다! 잘 가라! 조성재!”

 “아니, 민소정! 내 얘기는…….”   


 저 아이는 내게 넘치는 아이다. 여전히 민소정의 예쁜 눈에서 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민소정의 노란 손수건은 피가 묻은 채 내 주머니에 있었다. 이 상황은 내가 겪었던 여러 마음속 전투에서 느꼈던 어려움과는 전혀 다른 생경한 어려움이었다. 아픈 마음? 가슴이 아픈? 뭐 이런  말들! 내가 잘 이해하기 어려운 마음의 고통!


                                              …    


 마음도 심란하고 토요일 오후이기도 해서 집에 바로 들어가기가 싫었다. 버스에서 내려 D시 유일의 시립 도서관을 향했다. 시외버스 터미널 앞 복권 판매소를 지났지만 다시는 복권을 사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꿈을 꿔도 당첨이 안 되는 데 뭣하러?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도서관 앞까지 걸음을 걷는 데도 마음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누가 나를 좋아해 주는 마음은 너무나 기쁜 일이지만 나처럼 하루하루가 힘이 드는 사람(?)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기가 참 어려웠다. 더군다나 어쩌면 내일이면 벨루아 공국에 가서 결혼식이란 걸 올려야 한다.

 지난 한 달 동안 하루나 이틀마다 캐산 집사가 내게 찾아와 결혼식에 관한 뷰리핑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했다. 어쩌면 이 결혼식은 벨루아 공국이 위치한 이계와 인간계 모두를 구하는 역사적인 일이라고까지 했다. 내가 웅변 학원을 몇 년간 다녀봐도 좀처럼 말하는 게 늘지 않았는데 청산유수로 흐르는 캐산 집사의 언변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런데, 세상 똑똑한 캐산 집사도 나를 도련님이라 불렀다. 다방집 도련님이라 스스로 부르고 있었는데 벨루아 공국에서도 도련님이라 불리니 기분이 묘했다. 어쨌든 나는 내일 결혼을 하게 생겼다. 그런데 이렇게 별생각 없이 그냥 결혼을 하나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의논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엄마를 볼 때면 아버지에 관한 진실을 어떻게 물어봐야 할까 늘 고민스러웠다.    

 심지어 샤론 여왕과 우리 아빠의 목숨을 건 약속이었다니! 이 무슨 전근대적인 행위란 말인가? 캐산 집사의 말로는 벨루아 공국의 선조는 고대 이집트 건국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고양이 인간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차원의 이계를 거쳐 지금 벨루아 공국 위치에 정착했다고 했다. 나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묘하게 캐산 집사의 말에 집중하게 되었다.

 집사는 이계와 인간계의 안위를 책임 진 공국의 귀족들은 결국 인간계에서의 활동을 위해 인간의 외모로 까지 거듭 진화했다고 말했다. 결국 이들은 인간계와의 끊임없는 왕래로 인류의 과학문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분명히 내게 설명했다. 그러나 핵폭탄의 개발은 분명히 계산 착오였다는 점을 시인했다.  

 이렇듯 막힘없는 언변에 논리도 정연한 캐산 집사가 상당히 진지하게 내게 설명했으므로 나는 그를 진지하게 믿어보기로 했다. 다만 일주일 전 토요일 밤에 캐산 집사가 지하 다방집 내실 옆 쪽방인 내 방을 둘러볼 때 참 고약한 표정을 지었다.

 그날도 다방집 새방에 미스 나 누나의 애인을 자처하는 필수 씨를 비롯한 동네 노름꾼들이 드나들다 보니 다방집 홀이 예전에 비해 더 시끌벅적했다. 더군다나 담배 심부름을 다녀오면서 육사를 가겠다며 박정희 전 대통령을 배신한 현 대통령에게 험한 말을 퍼부었던 태현이의 아버지 김선주가 있었다. D 항구에 배를 여러 척 가진 김선주가 어떻게 알고 다방집 노름판에 끼는 게 보였다. 김선주 뒤를 따라 들어가는 동네 건달 배씨의 음흉한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어쨌든, 이날 캐산 집사는 내 쪽방에 대해 뭔가 말을 하고 싶어 했다.  


 “도련님의 방은 참 독특하군요.”

 “무슨 말이야? 좀 알아듣게 말 좀 해봐! 빙빙 돌리지 좀 말고!”

 “그러니까? 음, 제가 조금만 도움을 드리면 상당히 좋아질 수 있습니다만….”

 “아! 됐어! 나는 이 시계도 과분해!”

 “아니, 도련님은 고귀하신 신분인데 괜히 이런 곳에 거쳐하셔서 불편하신 게 아닌지 저 캐산은 자꾸 신경이 쓰입니다.”

 “나는 내가 고귀한 신분인지 잘 모르겠고, 세상 어디에서도 여기가 마음이 제일 편해. 이방이 좀 감옥 같고 답답한 구석은 있어도 나는 별 불만 없어. 그리고 너무 자주 이렇게 연락해서 불쑥 나타나지도 마! 나도 고민을 하고 있으니까? 내가 결혼할 생각이 없으면 안 해도 되는 거잖아!”

 “아니! 아니! 도련님!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결혼할 생각이 없으시다뇨? 세상에! 이런 행운을 누리고 싶어 하는 벨루아 공국의 귀족 도련님들이 얼마나 많은 지 아십니까? 도련님 가문의 사촌들만 해도…. 도련님이 안 하신다고 하면 서열상 누구더라? 그 잘 생긴 도련님 이름이! ”

 “나한테 사촌들이 있어!”

 “아! 네! 죄다 남성분들 입죠.”

 “진짜? 모두 몇 명인데?”

 “19명 아니 20명쯤 됩니다만…….”

 “정말! 진짜! 그러면 두 팀으로 나눠서 야구도 할 수도 있겠는걸?”

 “예! 야구가 뭡니까? 성재 도련님?”

 “아! 뭐, 9명이 한 팀을 이뤄서 이만한 공하고 배트랑 글러브 가지고 하는 스포츠 경기가 있어.” 야구공 크기를 손으로 쥐는 형태로 설명을 했다.

 “벨루아 공국에서는 단체로 하는 경기는 거의 없습니다. 거의 개인전이라 기록 경신 위주로 열립니다. 특히나 매년 음력 8월 15일에 열리는 3차원 육상 대회는 우리 벨루아 공국 최대의 행사이기도 합니다. 이미 지난 9월 대회에서 샤디아 공주께서 공국 전체 1위를 하셨죠.”

 “그래? 저번에 보니까 운동을 진짜 잘 하더라고. 그나저나 만약에 내가 공주랑 결혼해 살게 되면 내가 꽉 잡혀 살지는 않겠지?”

 “음……. 샤디아 공주님, 음…….”

 “뭔데? 말을 해! 뭐야?”

 “음, 그러니까, 샤디아 공주님이 살짝살짝 무서우실 때가 있기는 합니다. 사실! 그러나, 대체로 용감하고 대범한 여장부시고 공국의 백성들을 아끼시는 마음은 샤론 여왕님만큼이나 절실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도련님께서도 공주님의 마음을 아시어서 우리 공국을 잘 이끌어가시는데 도움을 주시….”

 “야! 캐산 집사! 정확히 말하자면 샤디아 공주가 무섭다는 말 아냐? 혹시 사람을 죽이기도 하니?”

 “음…….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전쟁이나 전투에서는 굉장히 용감한 분이지만 현실에서는 전혀, 전혀! 그런 분이 아닌 줄로 압니다.”

 “아! 아! 몰라! 지금은 마음이 너무 복잡해.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 하자! 다음에 연락을 줄 때는 눈치껏 상황 봐서 들러주길 바래!”

 “네, 알았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벨루아 공국의 위대한 페일 공작 가문의 정통 후계자이신 성재 도련님”

 “왜 맨날? 아! 이거 나 놀리는 거 아니지? 아, 알았어! 그만 바이 바이!”    


 검은 전자 손목시계 위에서 캐산 집사가 정중한 인사를 하는 입체 영상이 사라지고 나면  나는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별로 친구가 없는 내가 누군가와 이렇게 길게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게 흔치 않았다. 은근히 캐산 집사가 이런저런 카운슬링을 해주어서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이야기는 요리조리 피해 가는 지라 늘 좀 뭔가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그럴 때면 다방집 건물 뒷마당에 나가 D시 시외버스정류장의 주차장에 서 있는 버스들을 바라보며 장미 담배를 피워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진짜 결혼을 해야 하는 건가? 17살에?   

 긴 장미 담배를 깊이 빨아 당긴 담배연기를 허공에 ‘후우~~!’ 하고 내뿜었다. 그때였다.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져 옆을 돌아봤다. 언제 왔는지 샤디아 공주가 내 옆에 바짝 서서 나를 노려보고 서 있었다.


 “아! 깜짝이야! 여, 여긴 어떻게?” 그러자, 샤디아 공주는 내 손에 든 담배를 뺐더니 담장 밖으로 던져버렸다.

 “성재! 담배는 몸에 좋지 않아!”

 “야! 마음이 힘들고 어려울 때는 필요해!”

 “아냐! 호흡만 잘 해도 힘든 마음을 추스를 수 있어. 이렇게 나를 따라서 심호흡을 해 봐!”

 “뭘? 어떻게?”

 “편하게 서 봐! 그리고 다섯을 세면서 천천히 코로 숨을 들이마셔 봐! 하아나, 두울, 세엣, 네엣, 다아섯!”

 “그래서!”

 “그리고 여덟을 세면서 천천히 입으로 호흡을 내쉬어봐! 호흡을 깊게 해야 해!”  

 샤디아 공주가 시키는 데로 몇 번 해 보았다. 큰 효과는 모르겠고 시간이 지나자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여기는 왜 온 거야!”

 “너랑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서! 사실 나도 마음이 좀 그래! 그래서 요즘 이렇게 심호흡을 자주 하는데 그래도 답답해서…….”

 “담배 한 대 줄까? 피워 봐!”

 샤디아 공주가 내 등짝을 짝 때렸다.  

 “난 지금 진지하다고!”

 “아야! 진지고 뭐고 너 자꾸 폭력 행사하고 이러면 나 결혼 안 한다. 정말!”

 “알았어! 미안해!” 웬일인지 공주가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그나저나 나도 나지만 너는 뭐가 답답해서? 말이 되니? 넌 모자랄 게 없는 그야말로 공주인데……!”

 샤디아 공주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한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의 분노가 느껴졌다.    

 “너는 내가 무척 편해 보이는가 보지?”

 “뭘? 평생 이런 지하 다방집에 살고 있는 나보다 나은 게 사실이잖아!”

 “참! 그럴 거 같지? 너는 내가 커오면서 지금껏 줄곧 떠안고 있어야 했던 그 책임감을 이해할 수 있겠어!”

 “무슨 말이야? 무슨 책임감? 권력이겠지!”

 “너는 몰라! 나를 비롯해서 우리 공국 왕족들이나 귀족들이 느끼는 공국에 대한 책임감을!”

 “물론 그건 캐산 집사한테 이야기는 들었어. 내가 살고 있는 나라는 예전부터 나라를 팔아먹은 권문세가들이 활개를 치는 나란데 그나마 벨루아 공국이 건강한 거겠지.”

 “그게 아니야! 우리는 우리가 가진 권리만큼이나 목숨을 거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책임감을 요구받고 있고 실제로도 책임을 지고 있어!”

 “그래서 어쩌라고!! 뭐? 뭐! 무엇 때문에 온 거냐니까?”

 “나랑 꼭 결혼을 해달라고 이렇게 부탁하려고…….”

 샤디아 공주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너, 뭐 하는 거야! 어서 안 일어나? 너 공주야! 한 나라의 여왕도 된다며!”

 “못 일어나! 네가 나랑 결혼하겠다는 약속을 하기 전에는 절대 못 일어나!”

 “이 봐! 일국의 공주가 여기서 이럴 일이 아니야!”

 “잘 들어! 결혼만 하고 나면 네 자유를 보장해 줄게. 우리 공국의 안녕을 위해서 너랑 나의 결혼은 굉장히 중요해!”

 “알았어! 알았다고! 결혼하겠다고! 어서 일어나! 좀!”

 샤디아 공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벨루아 공국의 페일 공작 가문 남자들은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해. 그리고 아까 말대로 결혼 후에 누구를 사귀던 너의 자유야! 물론 나도 고민을 많이 했어. 공국을 위해서 내 자유를 희생해야 하는 건가? 고민스러웠다고! 그러나 이 결혼을 통해서 공국의 체제 안정을 꾀할 수 있다면 나는 냐 한 몸을 희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대체 왜 나랑 결혼을 해야만 하는데? 이유나 좀 알자!”

 “네 아버지인 페일 공작 3세와 우리 어머니인 샤론 여왕과의 약속은 겉으로 드러난 일이고 사실은 공국에서 왕권이 점차 약화되고 있어. 우리 공국의 영웅인 페일 공작 3세의 아들과의 결혼은 왕권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뿐 아니라 대호선국을 포함한 주변 국가들의 도발에도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어. 더군다나 너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어. 우리 공국에서는 너의 그 힘에 큰 기대를 걸고 있어!”

 “내가 무슨 힘이 있는데…!”

 “넌 아직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사실, 우리 공국에서는 너를 꾸준히 모니터링하고 있었어. 너를 보호하기 위한 페일 공국 수호대가 오랫동안 네 주변을 맴돌았던 걸 몰랐니? 지금도 네 주변에는 우리 공국 수호 대원들이 밀착해 경호를 하고 있었어!”

 “에엥! 그러면 그동안 나를 쫓아다니는 길고양이들이 다 벨루아 공국 수호 대원들이라고?”

 “그래. 너는 우리 공국에서 예상보다 더 존중받고 있어!”

 “그래도 만약 내가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쩔 건데!”

 “그만! 페일 공작 가문은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그러면서, 갑자기 샤디아 공주가 내 입술에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깊고 진한 키스였다. 말하자면 물리적인 첫 키스인데 이런 딥한 키스를 하게 되다니? 평생 처음 느껴보는 부드러움이었다. 그리고 키스를 할수록 어디선가 ‘갸르랑’ 하는 고양이 소리가 들렸다. 아니 바로 내가 그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내가 발정이 난 고양이 소리를 내고 있을 줄은 나도 몰랐다.

 그러더니 샤디아 공주가 내 츄리닝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순식간에 아무 쓸모도 없이 성을 내기만 하던 거시기가 샤디아 공주의 수중에 넘어갔다. 샤디아 공주의 손이 거시기에 마술을 부렸다. 내가 소신껏 살아왔던 소위 무성애자의 삶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고양이족 여자 마법술사의 손은 엄청난 쾌락을 내게 선사했다. 드디어는 짜르르 온몸에 전기가 돌았다. 낮고 긴 고양이 울음소리가 D시 시외버스 터미널의 주차장으로 울려 퍼졌다.    

 차마 샤디아 공주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다방집 비상구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 고개를 돌렸다. 다시 샤디아 공주 쪽을 보니 순식간에 공주는 사라지고 없었다. 괜히 고양이 나라 공주가 아닌 것이다. 내가 늘 타코 아저씨라 부르는 덩치도 큰 데다가 배가 많이 나온 대머리 아저씨가 거나하게 술이 취해 느릿느릿 뒤뚱거리며 계단을 올라와서는 비상구 출구 옆 좁디좁은 다방집 화장실 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   


 12월 첫째 토요일 오후의 시립 도서관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바닷가 특유의 칼바람이 많이 불었다. 바람과 더불어 D시를 대표하는 긴 버드나무가 미친 듯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서가가 있는 2층에 내가 좋아하는 자리에 가서 가방을 놓고 앉았다. 여전히 종철이 패거리에게 맞은 코가 욱신거렸다. 남자 화장실을 가서 세면대 거울로 내 얼굴을 보니 가관이 아니었다. 코가 부풀어 오르고 코피가 난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겨울이었지만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나니  그나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잠시 서가에 가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찾아 읽었다. 내가 살고 있는 지하실에서 엄마가 술집을 하던 시절에 햄릿을 TV로 본 적이 있다고 말했었다. 담배연기 자욱한 노름판이 벌어지던 내실 한편에 쪼그리고 누워 TV에서 해주던 BBC판 햄릿을 시청하던 거에 비하면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은 상당히 간략한 느낌이 들었다. BBC판 햄릿에서는 마치 안갯속을 헤매는 느낌이 들었는데 책의 대사는 너무 가볍게 읽혔다.

 처음 책의 앞부분에서 햄릿의 아버지인 선왕의 유령이 보초병들 앞에 등장했고 햄릿은 아버지가 죽은 후 벌어진 상황에 크게 절망하고 있었다. 예전에 TBC라 불렸지만 지금은 KBS 2 TV라 불리는 채널에서 햄릿을 연기하던 영국 배우의 형형한 눈동자가 잊히지 않았다. 하지만 책은 거기까지 읽고 더 읽기 어려웠다. 내 마음도 싱숭생숭한데 어렵고 힘든 햄릿의 대사를 읽고 있자니 더욱 힘이 들었다.  

 가방을 들고 도서관 정문을 나서는데 중학교 동창 창우를 만났다. 창우랑은 무척이나 오랜만에 마주쳤기 때문에 너무 반가웠다. 천주교 신부님이 꿈인 창우는 여전히 다니던 성당 주임 신부님을 열심히 도와 드리면서 가톨릭 대학교의 신학대학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중학교 시절 야한 사진을 보여주던 병호가 고등학교 들어가서는 질 나쁜 친구들이랑 어울려 다니면서 오토바이를 타다가 뜻밖에 사고로 다리를 크게 다쳤다는 말도 해주었다. 둘은 같은 성당을 다니면서 꽤 친했는데 지금은 상반된 길을 걷고 있었다.

 언제 병호가 입원한 근동에서 제일 유명한 대학 병원에 같이 가보자고 하고는 가볍게 작별 인사를 했다. 왠지 창우는 어딘지 모르게 오랜만에 만난 내 앞에서 꽤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다음에 볼 것을 기약하며 악수를 하고 나서 내손에 남은 창우의 체취를 맡게 되었다. 그러자 문득, 창우의 마음속이 느껴졌다.

 녀석은 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니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녀석은 경일이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경일이의 방에서 나에 대해 뭔가를 느꼈던 것이다. 창우는 야한 사진 때문에 땀을 흘린 게 아니었다. 나에 대해서 큰 공포를 느꼈던 것이다. 녀석 역시 뭔가 남다른 촉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녀석이 언젠가 나와 대결을 하려고 찾아올 때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언제인지 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나를 악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고 녀석은 나로 인해서 악한 존재를 지울 퇴마의식을 배우고 싶어 했다. 지금 녀석이 다니는 성당의 담임 사제는 악한 존재를 물리치는 정통 퇴마의식의 전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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