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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ctuary Mar 22. 2021

나는 풍경 전체를 보고 있는가?

영화 <플립(Flipped)>에 나타난 성찰과 성장

성장은 성찰과 함께 이루어진다


영화 <플립>은 사랑스럽고 따뜻한 영화입니다. 브런치에 <플립>으로 검색하면 영화에 대한 정말 많은 글이 나옵니다. 대체로 주인공인 13 줄리와 브라이스의 알콩달콩한 사랑과 가족에 대한 내용이 많습니다.  이 글에서는 제가 최근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인 ‘성찰과 성장’ 관점에서 이 영화를 깊게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주인공 줄리와 브라이스


이 영화는 <스탠 바이 미><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시애틀의 잠못이루는 밤><프린세스 브라이드><미저리><버킷리스트>외에 우리에게 익숙한 수많은 웰메이드 작품을 만든 로브 라이너(Rob Reiner)가 연출했습니다. 어느날 틴에이저 아들이 소설책 한권을 집으로 가져왔는데 읽고 너무 좋아서 영화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저는 사춘기에 접어든 딸과 함께 볼 영화들을 찾아보다가 우연히 이 영화를 알게 되었는데 어느새 저의 인생영화 목록 중 하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십대들의 풋풋한 사랑이야기인가 하고 보았는데 몇 번을 거듭해서 보고 나니 이 작품 안에 켜켜이 숨겨진 빛나는 주제들이 눈에 보였습니다.


가운데 계신 분이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감독 로브 라이너


할리우드에서 인정받은 관록있는 감독의 작품인만큼 조연 배우들의 면면도 흥미롭습니다. 한 때 스크린을 주름잡았던 쟁쟁한 배우들의 나이든 현재의 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줄리의 아빠인 리차드를 연기하는 에이단 퀸(Aidan Quinn)은 한때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가을의 전설>(1994)에서 브래드 피트와 함께 출연했었지요. 한참 영화광이던 시절 (long long time ago) <마돈나의 수잔을 찾아서>라는 영화에서 처음 이 배우를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후 <베니와 준>에서 조니 뎁과 공연했고  <미션>에서 로버트 드 니로가 살인을 해야했던 동생으로 등장했었지요. 모성애를 자극하는 눈빛을 가진, 상처와 유약함을 지닌 캐릭터로 자주 나왔던 배우인데 어느새 세월이 흘러 이 영화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소화해냅니다.


로맨틱한 반항아 역할을 하던 에이단 퀸의 과거와 현재 모습


브라이스의 엄마역인 레베카 드 모네이(Rebecca De Mornay는 저에게 다소 충격적인 캐스팅이었습니다. 날카로운 금발 미녀로 할리우드에서 주로 팜므 파탈 역을 맡아왔기에 (<요람을 흔드는 손>에서 복수의 화신으로 나왔던 강렬한 기억이..) 중산층 가정의 평범한 주부 역할에 익숙해지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습니다.

 

레베카 드 모네이의 리즈시절(톰 크루즈의 연인이기도했다는)왼쪽은 <요람을 흔드는 손>의 악녀역
초록색 옷을 입은 우아한 엄마 역


이들 조연들 중에서 제가 가장 주목한 배우는 바로 브라이스의 할아버지 쳇 던컨(Chet Duncan )역은 맡은 존 마호니(John Mahoney)입니다. 쳇은 아내를 잃고 혼자가 되어 딸의 집에 와있습니다. 아내와의 사이가 각별했던 쳇은 상실감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요. 창가 의자에만 멍하게 앉아서 지내던 쳇이 미소를 되찾은 건 바로 잘릴 위기에 처한 동네 플라타너스를 지키기 위해 나무 위에서 내려오지 않고 버티던 줄리의 이야기가 실린 신문 기사를 읽고 난 후입니다. 쳇은 줄리의 강한 성격이 아내 르네를 닮았다고 느끼고 먼저 다가갑니다. 혼자 정원을 가꾸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줄리를 도와 나무를 다듬고 잔디를 심고 울타리를 만들면서 서로의 마음을 터놓고 우정을 나눕니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줄리와 브라이스, 두 가족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도 바로 쳇입니다. 계란 사건으로 지저분하게 방치되어 있는 줄리네 정원 문제가 불거질때 장애인 삼촌을 비싼 요양 시설에 보내기 위해서 형편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변호해주기도 합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브라이스 엄마인 펫시가 줄리 가족을 초대하게 되지요. 또 쳇은 사위인 스티븐이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도 담담하게 받아넘깁니다. 사위가 왜 그렇게 줄리네 집 일에 냉소적인인 태도를 보이는지도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위나 손자에게 꼭 해야 할 말은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단호하게 표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쳇은 줄리가 어떤 아이인지를 한눈에 알아봅니다. 자신을 끈질지게 따라다니는 줄리를 스토커이며 이상한 아이라고 투덜대는 손자 브라이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평범한 사람을 만나고, 어떤사람은 광택나는 사람을 만나고, 어떤 사람은 빛나는 사람을 만나지. 하지만 모든 사람은 일생에 단 한번 무지개 같이 변하는 사람을 만난단다. 네가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더이상 비교할 수 있는게 없단다.



한글로 번역된 대사는 이렇게 긴 문장이지만 사실 영어 표현은 매우 짧고 압축적입니다.



Some of us get dipped in flat, some in satin, some in gloss; but every once in a while, you find someone who's iridescent, and once you do, nothing will ever compare.



"iridescent"보는 각도에 따라 색깔이 변하는, 무지개처럼 눈부신 존재, 즉 여기선 줄리를 뜻하지요.
멋진 표현입니다. 쳇의 아내 르네도 자신에게 그런 사람이었다는 의미도 있지요. 안타깝게도 브라이스는 이런 줄리의 진면목을 몰라봅니다. 이 영화에는 이런 표현을 비롯해서 특히 기억해둘만한 명언(명대사)이 많기로 유명한 작품이기도 해요. 나레이션과 대사 하나하나 노트에 적어두고 싶을 정도로 주옥같습니다.

(나중에 영어-한글 명대사를 후속 글에 한번 정리해놓겠습니다)


이 배우는 아쉽게도 <플립>을 마지막으로 출연하고 세상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이 영화에서 쳇 할아버지 역시 줄리만큼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빛이 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브라이스에게 줄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담스러운 존재일 뿐이다. 왜 저렇게 나무를 지킨다고 무모한 짓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전체가 보이는 어떤 순간


줄리는 아빠가 그림그리는 것을 지켜보고 옆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느 날 그림을 그리다가 아빠는 딸에게 브라이스에 대해 묻습니다. 그 질문에 줄리는 의외로 당황하며 머뭇거립니다. 그리고는


 "아마 그 아이 눈빛 때문인지도 아니 어쩌면

  미소 때문인 것 같아요"라고 대답하죠.


 그러자 리차드가 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항상 전체 풍경을 봐야한단다. 그림은 단지 부분들이 합쳐진 게 아니란다. 소는 그냥 소이고, 초원은 그냥 풀과 꽃이고, 나무들을 가로지르는 태양은 그냥 한줌의 빛이지만 그걸 모두 한 번에 같이 모은다면 마법이 벌어진단다."


영어로는 어떻게 표현했는지 볼까요?


Juli: I guess it's something about his eyes or maybe his smile.

Richard: And what about him?

Juli: What?

Richard: You have to look at the whole landscape.

Juli: What does that mean?

Richard: A painting is more than the sum

 of it's parts. A cow by itself is just A cow.

A meadow by itself is just grass, flowers.

And the sun picking through the trees, is

just a beam of light. But you put them all together and it can be magic.


그림이란 건 부분이 합쳐진 것 이상이라는 말이 무엇인지 열 세살 줄리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사실 어른도 마찬가지죠. 머리로는 '그래, 부분을 봐서는 안되지. 항상 전체를 잘 조화롭게 봐야하는 거지'

라고 알고는 있지만, 그 원리를 삶에서 실제로 적용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빠와 딸의 대화 장면 동영상

https://www.imdb.com/video/vi2867267097?



열 세살, 무엇을 어떻게 바라볼까?


사물과 사람을 보는 눈이 반드시 나이와 비례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이의 통찰력이 오히려 나이든 어른들이 선입견 때문에 못보는 것을 보는 경우를 많이 보았어요. 그러나 확실히 나이가 어릴 때에 전체가 잘 안보이는 경향이 있기는 한 것 같습니다. 유치원 때나 초등 저학년 때 멋져보이던 사람(선생님이나 친척오빠 혹은 친구의 누나 등)을 고등학생이나 어른이 되서 다시 보았을 때 너무 평범하고 매력이 없어서 내가 대체 그 때 왜 좋아했는지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있지 않으신가요? 사람을 부분적으로만 보다가 전체적으로 보게 되면, 즉 보는 기준과 관점이 달라지면 그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줄리는 처음에는 아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매일 스쿨버스 정류장 옆 플라타너스 나무에 올라가서 풍경을 바라보면서그 의미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풍경을 봐야한다는 말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나는 내 주변의 광경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줄리는 주변의 친구들과 가족들을 그 기준으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깨닫게 되지요.


자신이 브라이스의 전체를 보지 못했음을.


이렇게 관점의 대전환이 일어납니다.


 순간이 바로 '성찰' 순간이겠지요.

 

누구든 이 순간을 한번 경험하면 다시 이전의

관점으로 돌아갈  없게 됩니다.



나무 위에서 매일 달라지면서도 변함없는 풍경의 전체적인 아름다움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도 살다가 이런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내가 그동안 전체가 아니라 한 부분만을 보고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의 순간이 느껴질 때이지요.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부모로서 자녀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어떤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과연 내 자녀를 전체로 보는가 아니면 부분으로 쪼개 보고 있는가? 그래서 그 부분 부분 파편화된 것들을 내가 원하는 대로 보려 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이끌어가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비단 부모와 자녀 사이의 문제 뿐 아니라 모든 인간 관계에서 상대방에게 내가 원하는 부분만을 떼어내서 바라보고 그 부분이 내 생각대로 만족스럽게 채워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닌지, 타인을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내 맘대로) 기대하면서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그 모습을 보기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나도 의식하지 못한 채로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혹은 '나의 생각'으로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는 거죠. 그 결과, 당연하게도 실망감이 찾아옵니다. 그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아니니까요.


줄리의 경우, 브라이스를 7살 때 처음 본 그 순간의 느낌을 잊지 못하고 그 "느낌=브라이스"라는 틀 안에서만 6년 동안 바라본 것인지도 모릅니다. 'dazzling eyes' 라고 표현한 그 반짝이는 눈빛을 보고 브라이스에게 첫눈에 반하게('flipped') 되고 사실은 브라이스도 속으로는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언젠가는 첫 키스를 받으리라고 확신해버립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상대방은 계속 자신을 피하고 서로를 알아가기가 힘들어지고 모든 일이 자꾸 어긋나기만 합니다.


이 영화와는 완전히 다르지만 저는 이안 맥큐언의 소설을 영화화한 <어톤먼트(Atonement)(2007) 라는 영화를 보면서 한 소녀의 잘못된 판단과 증언이 어떻게 주변 사람들의 삶을 파괴할 수 있는지 몸서리쳤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좋아하는 아일랜드 출신의 배우, <레이디버드>와 <작은 아씨들>의 시얼샤 로넌(Saoirse Una Ronan)이 <플립>의 줄리와 같은 나이인 열 세 살의 브라이오니 역할을 맡아서 연기했습니다.


<어톤먼트>의 브라이오니 역을 한 시얼샤 로넌(어릴 때)


성인이 되어 주인공 '조'를 맡아서 연기한 로넌


이 사랑스러운 13살 소녀는 그냥 어떤 상황을 전체가 아닌 '부분'만을 보았고 나아가 자신이 믿는 것을 실제로 보았다고 착각하지요. 결국 자신의 판단을 확신하여 무고한 언니의 연인을 성범죄자라고 증언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언니와 언니의 연인 그리고 가족 전체가 비극적인 사건에 휘말립니다. 세월이 흘러 (전체를 보게 되었을 때)  자신의 실수를 뒤늦게 깨닫고 뼈아프게 후회하게 되는데 과거를 결코 되돌릴 수는 없지요.  


어찌보면...줄리의 아빠처럼 열 세살 자녀에게 부분을 전체로 오해하지 않도록  옆에 누군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톤먼트>의 경우 이 소녀의 판단은 주변 어른들의 무언의 시선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거든요. 자신도 모르게 어른들의 편견을 재확인하는 역할을 해버린 거죠.  



영화 <플립>에서 플라타너스 나무 사건은 조금 더 나아갑니다. 자신에게 전체의 아름다움을 선사했던 나무가 단지 새 집의 조경을 하기 위해 무참하게 잘려나가는 사건을 겪은 후에 줄리는 좌절감과 실망감으로 한동안 그 나무가 있던 자리를 피해서 다닐 정도로 힘들어하죠. 그런데 아빠가 어느날 그림 한 장을 들고 줄리의 방으로 들어옵니다.


리차드는 줄리에게 그림을 주면서 그 나무 위에서 느꼈던 것들을 기억하기를 바란다고 말해줍니다.


비록 현실의 나무는 잘려나갔지만 줄리의 마음 속엔 나무가 여전히 살아있고 줄리는 그 위애서 보고 느낀 것을 마음 속에 생생하게 간직할 수 있습니다. 아빠가 그 나무를 다시 마음 속에 살려주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줄리의 나레이션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내가 울지 않고 보게 된 순간, 나무 이상의 것을 보게 되고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알게됐다.




플라타너스 나무처럼 성장하는 줄리와 브라이스



브라이스가 줄리네 앞집으로 이사온 날,  브라이스에게 첫눈에 반헤버린 줄리


줄리는 쳇을 통해 자신의 장점을 볼 수 있게 되고 아빠 리차드에게서 픙경의 부분에 집착하지 않고 전체를 조화롭게 바라보는 방법을 배웁니다. 이는 아마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도 도움이 되는 시선이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이상적이고 엄격한 잣대를 대서 스스로를 힘들고 지치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자신의 부족한 점을 인정하고 그것을 토대로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성장은 이렇게 성찰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이 성찰과 성장의 과정을 지켜보고 도와주는 역할이 아마도 부모 혹은 가족과 친구의 몫이겠지요.


영화는 처음에는 줄리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던 브라이스가 변하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할아버지 쳇의 도움이 컸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줄리가 브라이스를 바라보던 관점이 달라지자 브라이스 역시 그 변화를 알아차리면서 정신이 번쩍 들게 됩니다. 무언가 증요한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자신의 아버지 스티븐의 비겁함을 목격하고나서 그리고 자신도 줄리 삼촌 다니엘과 똑같은 처지일 수도 있었다는 자각이 브라이스의 닫혔던 관점을 열어주었고 줄리를 험담하는 친구의 말도 뿌리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브라이스는 줄리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줄리네 집 마당에 플라타너스 묘목을 심습니다.

(이 부분이 살짝 클리셰(cliché)같기도 하지만, 어긋난 관계가 나무로 인해 다시 이어지는 설정은 이 영화에서 결론으로 맺기에 꼭 맞는 설정으로 보입니다).


나무를 심는 브라이스의 눈빛이 다시 줄리의 마음을 설레게할 수 있었다면, 아마 줄리 역시 브라이스도 자신을 부분이 아닌 ‘전체’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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