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nctuary Mar 16. 2021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와  돌봄의 영성

소년 가장 길버트의 선택이 특별한 이유


군가를 돌본다는 것: 상호 보살핌과 성장의 가능성을 향하여



인간은 본질적으로 보살핌(caring)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정도와 방법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개인적 혹은 사회적 차원에서 보살핌을 받고 살아간다. 심리학자 테일러(S. Talyor)는 보살핌 행위를 인간의 '본능(tending instinct)'이라고까지 정의한다. 그런데 보살핌 혹은 돌봄(이 글에서는 caring의 번역인 돌봄과 보살핌 두 가지를 동일 의미로 교차해서 사용한다)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개념의 범위는 생각보다 광범위하다. 사전적 의미로 보살핌이란, "문제나 근심을 느끼는 것, 또는 관심이나 염려를 느끼는 것, 그리고 병든 사람을 간호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보살핌은 가족제도 안에서 주로 여성이 담당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돌봄 행위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보살핌의 범주와 가치에 대해 다양한 층위에서 정의를 내린다.


메이어로프(Mayeroff)는 보살핌을 '다른 사람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부모의 자식에 대한 보살핌, 교사의 학생에 대한 보살핌, 의사의 환자에 대한 보살핌 등이 이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보살핌의 개념을 윤리와 젠더의 관점에서 좀더 정밀하게 정립한 나딩스(Noddings)는 보살핌을 자연적 보살핌(natural caring)과 윤리적 보살핌(ethical caring)으로 나눈다. 쉽게 말해서 자연적 보살핌이란 타인을 배려하려는 자연스러운 감정에 의해 나오는 행위로써 특별한 윤리적인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윤리적 보살핌이란 과거 보살핌을 받거나 돌봄을 실천한 경험이 모여 '윤리적 자아(ethical self)'로 발달될 때 실현가능한 보살핌이다.  


현대 사회에서 공적인 차원의 보살핌에 대한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지면서 그동안 돌봄에 대한 수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대다수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합의하는 부분은  보살핌이 결코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주는 (caregiving)' 행위가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은 보살핌을 통해 상호의존적 유대감을 형성시키며, 돌봄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관계를 통해 서로가 성장하게 된다. 이러한 '상호보살핌'이 가능한 사회가 될 때 즉 사회적 관계망이 건강하고 촘촘하게 엮어질 때, 그 사회는 지속가능한 공동체(sustainable community)로 긍정적인 힘이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 대다수 돌봄 연구자들의 공통된 전망이다.  이런 사회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다. 이런 배경때문에 보살핌은 가족 구성원(혹은 공동체 성원)사이의 관계와 의사소통 문제와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보살핌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한쪽이 일방적이어서는 안 되며 서로가 서로를 관계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할 때 비로소 온전한 의미의 보살핌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나딩스, 2002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1993)에 나타난 돌봄 영성 (Spirituality) [1]


앞의 글 <할리우드 영화에 드러난 영적 주제와 구원의 문제>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돌봄의 영성'은 현대 사회에서 유행하는 영성, 즉, 타자를 배제하고 개인화된 영성(셀프 힐링, 웰빙 열풍, 치유 관련 상품 소비 등)과는 확연하게 구별된다.  돌봄의 영성은 사회관계망 안에서 성장하는 영성이다. 돌봄 영성을 통해 인간은 타자의 현실로부터의 도피와 회피가 아닌 공동체 구성원 안에서의 관계회복을 지향하며 타자를 위한 사랑을 통해 자신의 참된 자아를 발견한다.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What’s Easting Gilbert Grape?) 우리에게 잘 알려진 두 배우, 조니 뎁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출연하여 우리나라 관객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길버트(조니 뎁)는 지적장애인 동생(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우울증에 걸린 비만인 엄마를 보살피는 소년 가장 역할을 하며 살아간다. 이 글은 '돌봄 영성'의 측면에서 주인공 길버트가  어떻게 자신의 처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현실을 받아들이며 자유를 찾아가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미국 중서부 아이오와주에 위치한 작은 시골 마을 엔도라. 식료품점 점원 길버트의 삶은 고달프다.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집안에 틀어박혀 고래처럼 살이 쩌버려 마을 전체의 놀림감이 된 어머니, 철들자 바로 가출해서 연락이 끊긴 큰 형, 실직 상태의 누나와 철없는 여동생, 그리고 곧 열여덟 살이 되는 지적장애인 동생 어니. 가족 모두의 삶을 책임지고 있는 길버트의 어깨는 무겁다. 유부녀 베티의 유혹은 이런 현실을 잠깐 잊게 하지만 그의 삶에는 도무지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느 날, 캠핑카가 고장 나 이 고장에 머물게 된 베키. 길버트와 베키는 즉시 서로에게 끌리지만 가족에게 묶인 듯 살아가는 길버트는 베키에게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 영원히 바뀔 것 같지 않던 이 마을에도 햄버거 체인점 ‘버거반’과 대형마트가 들어서고, 베키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상황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 길버트 역시 이 곳을 떠나고 싶지만 쉽지 않다




 

<길버트 그레이프>는 피터 헤지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을 하여 스웨덴 출신의 영화감독 라세 할스트롬이 연출한 작품이다. 할스트롬은 자신만의 독특한 유럽적인 감수성을 가지고 외부인의 관점에서 미국의 한 가정을 바라본다. 사실 <개같은 내인생><사이더 하우스><하치 이야기><초콜릿><베일리 어게인>에 이르는 필모그래피를 보면 가족관계에 대한 그의 일관된 관심을 알 수 있다.


그가 다루는 가족 영화의 주인공들에게는 심각한 결핍이 있다.
 
편모슬하의 가족, 누군가가 모자라거나 아픈 가족, 도시의 외곽이나 시골에 살면서
주변부에 끼어들지 못하고 어디론가 훌쩍 떠날 수도 없는 가족.

그는 이러한 신산스러운 삶의 일면과 쓸쓸한 가족들의 초상화를 그만의 유머와 공감대로 그려낸다. 마음 한구석을 저리게 하는 그의 이러한 휴머니티와 유머는 스웨덴에서뿐만 아니라 할리우드에
 와서도 여전히 다양한 관객들의 보편적인 공감대를 얻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씨네 21 영화감독 사전> 중에서


이 영화에서 길버트에게 가족이란 어떤 존재일까? 이 영화의 원제는 “무엇이 길버트 그레이프를 갉아먹는가(What's eating Gilbert Grape?)”이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길버트는 어니와 함께 연례행사처럼 이 지역을 지나가는 캠핑카의 행렬이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우린 아무 데도 안가, 아무 데도 안 가, 아무 데도!” 즐거운 듯 나무 위에서 외치는 어니. 그러나 길버트는 캠핑카를 끌고 미국 전역을 누비는 여행자들을 아득하게 바라본다. 떠나고 싶지만 훌쩍 떠날 수 없는 사람의 눈빛. 그에겐 책임져야 할, 자신을 의지하고 있는 가족들이 있기에 떠날 수 없다.     


열여덟 살 생일을 앞두고 있는 동생 어니를 업고 ”이제 네가 너무 무거워져서 못 업겠다 “고 말하자, 어니는 “형이 자꾸 줄어들어서 그래. 자꾸자꾸 줄어들어서(shrinking)“라고 대꾸한다. 24시간 보살핌이 필요한 어니와 집 밖으로 나오지 않은 엄마의 무게 때문에 길버트는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점점 줄어들고 있는 걸까?




'집'이라는 공간과 돌봄: 스위트 홈 vs. 홈리스(Homeless)




영어로 “자기가 있는 곳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는” 의미를 지닌 표현을 “자기 집에 있지 않다 (not at home)’라고 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집’이라는 공간은 종종 하나의 인격체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에서 ‘집’은 이 영화의 서사를 구성하는 주요 등장인물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하며 다층적 의미를 가진다.      


이 영화에서 길버트 가족이 거주하는 공간인 집은 이 가족 구성원 간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길버트의 아버지는 길버트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족의 표면을 유령처럼 떠돌다가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자기가 지은 집의 지하실에서 목을 매고 자살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엄마 보니는 7년 동안 집 밖에 나가지 않은 채 은둔하며 이로 인해 거대한 몸집이 되었고 마침내 이 무게 때문에 이 집을 받치는 지하실 기둥은 점점 무너져가게 된다. 이 집의 운명은 이러한 비극적인 가족사와 함께 한다.      


어니는 아버지가 목을 맨 지하실을 두려워해서 절대 가까이 가지 않는다. 길버트 역시 마찬가지이다. 길버트는 점점 무너져 가는 집을 수리하기 위해 친구와 지하실을 살피는데 차마 그 공간에 내려가 보지 못한다. 어찌 보면 아버지는 오래전에 죽었지만 길버트네 가족들은 그 집을 아버지라고 생각하며 함께 살아온 것일 수도 있다. 그중에서도 지하실은 아버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상징하는 공간이다.


이 집에서 길버트는 어니를 목욕시키고 엄마의 식사를 준비하며 바쁜 일상을 보내지만 한 번도 편안하게 혼자 방을 점유하고 있는 장면은 없다. 어깨를 짓누르는 이 집과 길버트와의 관계가 전환되는 지점은 길버트와 베키가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멀리서 집을 바라보는 시점이다.      







 



이때 길버트는 집이 작아 보이는 것에 몹시 놀란다. 그토록 자신을 억눌렀던 거대한 집이 멀리서 바라볼 때 그저 허름하고 작은 공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는다.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는 중요한 순간이다. 매일 보던 그 현실이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않고 내가 현실을 객관적으로 응시할 수 있게 되는 경험을 하면 현실에서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사족이지만 이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에 하나이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샷인데 이는 빼어난 촬영술의 덕이 크다. 이 영화의 촬영은 스웨덴 출신 스벤 닉비스트가 맡았는데, 그는 스웨덴의 전설적인 영화감독 잉마르 베리만과 평생 함께 작업한 뛰어난 촬영감독이다. 길버트 가족의 이야기와 자연과 집, 그리고 등장인물들과의 역동적인 관계가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이어질 수 있는 것은 이 범상치 않은 카메라의 시선 때문이기도 하다.     




길버트의 선택: "고통당하는 사람들 곁에 있어주되 상황이 호전될 가능성이 전혀 없을지라도 계속 같이 있어주는 것"



길버트는 형 래리처럼 혼자만의 길을 찾아서 가족들을 언제든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형과는 다른 선택을 한다. 이 영화를 처음 볼 때는 누구에게나 미소만 짓고 호불호가 분명하지 않은 길버트가 좀 무기력해 보이기도 하고 어쩌면 혼자 감당할 세상이 두려워서 가족 속에서 비겁하게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번 영화를 반복해서 보면서 길버트가 가족과 남아 있는 것, 특히 자신의 보살핌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동생과 엄마의 곁을 떠나지 않는 것 역시 길버트의 선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길버트의 이 선택이 처음에는 가족으로서의 의무나 선량한 양심에 따른 것이었다면, 베키와 만난 이후 자신의 상황을 변화된 관점으로 바라보면서 이 선택은 더욱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결단'으로 승화되었다는 점이다.       


길버트는 베키와의 만남 이후 집을 다르게 보기 시작하고 유부녀 베티와의 관계를 정리하며 그토록 두려워하던 지하실로 내려간다. 무엇보다 처음으로 자신의 '진짜' 감정을 받아들인다. 비록 그것이 폭력적으로 표현되었을지라도 어니를 때린 길버트의 행위 그리고 이어진 눈물과 절규는 감추지 않은 진실한 내면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길버트가 엄마를 세상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게 하지 않기 위해 가족의 집을 그대로 불태우기로 결심한 장소가 아버지의 지하실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의 죽음을 비로소 받아들이는 순간이자, 어머니에 대한 의무감이 연민과 애도로 바뀌는 순간이다. 다르게 말하면,  집과 어머니를 함께 불태워버린다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로 인해 받았던 심리적 압박감을 모두 없애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의 마지막, 집을 불태우고 배낭 하나만 짊어진 길버트와 어니의 '떠남'은 수많은 영화에서 익숙하게 보았던 젊은이들의 '떠남’과는 다른 차원의 감동을 준다.  길버트는 고통받는 가족을 뒤로하고 세상 밖으로 뛰쳐나오는 영화 속 반항아들과는 결을 달리한다. 또는 언제든 돌아갈 집이 있다는 전제 아래 일시적 자유를 누리는 젊은이와도 다르다. 그는 어두운 과거의 터널에서 도망가지 않았으며, 상황이 호전될 가능성이 전혀 없을지라도 끝까지 가족의 곁을 떠나지 않고 같이 있어주었고,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동생의 손을 꼭 잡고 함께 길을 떠났다.



돌봄(care)의 어원은 "kara"라는 단어로 '슬퍼하다, 애통하다, 고난에 동참하다, 고통을 나누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돌봄이란, 병들고 혼란스럽고 외롭고 고립되고 잊힌 사람들과 함께 부르짖는 것이다. 즉 그들의 고통이 내 마음 속에도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돌봄이란 깨어지고 무력한 사람들의 세상 속에 들어가 그곳에서 연약한 사람들끼리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또한 고통당하는 사람들 곁에 있어주되 상황이 호전될 가능성이 전혀 없을지라도 계속 같이 있어주는 것이다.                                                                         

                                                                                      헨리 나우엔 <돌봄의 영성> 24쪽






[참고 자료]


셸리 테일러, <보살핌>, 사이언스북스, 2008

헨리 나우엔, <돌봄의 영성> 두란노, 2018.

<씨네 21 영화감독사전>



주제어  

영성, 보살핌, 소통, 가족, 성장, <길버트 그레이프>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와 영성(Spirituality)(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