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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ctuary May 01. 2021

오스카가 소환한 기억, 앤서니 홉킨스

영화 <더 파더>와 <남아있는 나날> 그리고 딜런 토마스의 시(詩)

며칠 전 영화 <더 파더>(The Father)>를 보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앤서니 홉킨스(Anthony Hopkins)에게서 배우로서의 거대하고 묵직한 힘이 느껴졌는데, 이번 오스카 시상식에 이 작품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으나 참석 못한 그의 근황을 듣고 한 인간으로서의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배우 윤여정의 수상 소감이 장안에 화제를 일으킨 바로 그 시상식에 홉킨스는 불참했고, 식이 끝나고 나서야 뒤늦게 인스타그램을 통해 고향  웨일스에서 동영상으로 수상소감을 올렸다고 한다. 자신이 상을 받게 될 줄은 정말 기대하지 않았다며... 그 뉴스와 함께 그가 시상식 오후에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딜런 토마스의 시를  낭송했다는 기사를 접하고 인스타그램 앱에 오래간만에 들어가 그의 계정을 검색해서 수상소감과 시 낭송 동영상을 보았다.




그가 개인적으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모르겠다. 이력에 보면 서구의 배우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여러 번 이혼 경험도 있고 딸과는 거의 절연 상태라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그가 이전에 어떤 삶을 살았더라도 84세에 이른 지금, 고향으로 돌아가 피아노와 고양이와 그림을 가까이하면서 햇살과 바람 속에 시를 낭송하며 노년을 보내는 삶은 잔잔한 파장을 준다. 물론 아마도 옆에 누군가 보살핌을 주는 이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은 몸과 마음이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남은 삶을 욕심 없이 편안하게 누리고 있는 그의 모습은 참 보기가 좋았다. 그건 단지 그가 자신이 출연한 영화 <더 파더>의 앤서니처럼 치매로 고통받고 있지 않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가 출연한 작품 중에서 내가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는 <남아있는 나날>(1993)이었다. 일본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을 원작으로 제임스 아이보리가 연출한 긴 러닝타임의 이 영화를 티브이로 보았던 기억이 있다. 어떤 일요일 오후였고 그때 남편은 다른 방에서 곤히 낮잠을 자고 있었던 것도 생각이 난다. 나는 아마도 EBS 일요 명화로 그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 어찌 보면 지루한 이야기인데 그토록이나 몰입해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삶을 대하는 집사 스티븐스의 태도 때문이었던 것 같다. 엠마 톰슨을 오랜 세월 마음 깊이 사랑하지만 끝까지 고백하지 않았고... 끝내는  다시 만나지만 특히 마지막 비 오는 밤에 버스정류장에서 "굿바이"하며 헤어지는 장면에서 정말 속마음은 접어둔 채로 그 의례적인, 고상한 체하는 (snobbish!) 영국인 특유의 인사말을 (항상 건강하길 바라고 스스로를 잘 보살필 걸 꼭 약속해줘야 하고.. 이렇게 와줘서 정말 고맙고 당신은 진짜 친절한 분이고 블라블라...) 서로 끝도 없이 나눌 때는 정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던 기억이 난다.  


https://www.youtube.com/watch?v=4q0kFltnULs


이 장면에서도 미스 켄튼(엠마 톰슨)은 뒤늦게 찾아온 스티븐스(홉킨스)에 대한 무너지는 마음을 일그러진 표정으로 보여주었지만, 그는 피부의 표면은 딱딱하게 굳어있지만 그 한 겹 속 숨겨진 연약한 피부가 찢어지는 듯한 절제된 감정 연기를 보여주었다(최근에야 그가 이 영화로 1994년 아카데미 주연상을 수상한 것을 알았다). 




윤여정도, 앤서니 홉킨스도 모두 명배우들이고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오스카상을 받지 않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삶을 휘청거리지 않고 빛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아름답게 나이 드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공통점 중 한 가지는 모험과 도전을 망설이지 않지만 결코 결과에 욕심을 내지 않는다는 점인 것 같다. 


시상식 오후, 그가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낭송한 시는, 역시 사우스 웨일스 출신의 시인 딜런 토머스(1914~1953)의 시 “고이 잠들지 마십시오(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이라고 한다. 치매로 인해 삶의 기억이 분열되고 상실되는 가슴 아픈 연기를 했던 그였기에,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현재의 모습은 더욱 빛이 나고 묵직한 감동을 준다 (낭송하다가 중간에 어떤 구절에 너무 마음 아프다고 가슴에 손을 얹기도 한다).


인스타그램에 올려진 동영상: 

https://www.instagram.com/p/COGIFfwngK6/?utm_source=ig_web_button_share_sheet


“고이 잠들지 마십시오. 노년에는 날이 저물수록 더욱 불태우고 몸부림쳐야 하니, 꺼져가는 빛을 향해 분노하고 분노하십시오. 똑똑한 이들은 마지막 순간에 어둠이 마땅함을 알게 되지만, 자신의 언어로는 어떤 번개도 가르지 못하기 때문에 고이 잠들지 않습니다···”.



원문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Old age should burn and rave at close of d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Though wise men at their end know dark is right,


Because their words had forked no lightning they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Good men, the last wave by, crying how bright


Their frail deeds might have danced in a green b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Wild men who caught and sang the sun in flight,


And learn, too late, they grieved it on its way,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Grave men, near death, who see with blinding sight


Blind eyes could blaze like meteors and be g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And you, my father, there on the sad height,


Curse, bless, me now with your fierce tears, I pray.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출처: 중앙일보] 오스카 시상식 불참한 앤서니 홉킨스, 아버지 무덤에서 시 낭송

https://news.joins.com/article/24045348


* photos by jungae park (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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