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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ctuary May 02. 2022

언제든 도망칠 수 있는 안식처

즐거움과 영혼이 자라는 헤세의 정원처럼



눈이 뻑뻑하고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면
 나무가 있는 정원으로 간다
글쓰기에서 도망칠 수있는 나의 안식처


노동을 가장한 휴식
상상의 실타래가 한없이 풀리는 명상

영혼이 자란다
즐거움이 자란다


- 헤르만 헤세 <정원 가꾸기의 즐거움> 첫 부분 -



헤르만 해세/source: pinterest

                                                                      

뒤늦게 정원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헤르만 헤세가 정원에 관해 글을 쓰고 그림도 그렸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헤세의 책 <정원 가꾸는 즐거움>을 읽으면서 정원이 인간에게 통찰과 사색, 그리고 삶과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줄 수 있다는 것도 새로 알았다. 그러나 아직 머리로만 이해할 뿐,  이제 막 거친 땅을 1년 남짓 일구기 시작한 나에게 흙만지는 일은 여전히 조금 어색한 작업이다.


돌이켜보면 이 집에 이사온 후 방치된 이 작은 땅을 가꾸어야한다고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그냥 이대로 두면 여기 심어진 은행나무, 대추나무, 목련나무가 다 잘려져나갈 지 모른다는 위기 의식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내가 스스로 필요해서 정원을 찾아다녔다기보다 정원이 나에게 어느날 슬그머니 다가온 것같다.  '좀 어떻게 해줘..당신이 필요해'라고 말하면서.


내 브런치이름은 'sanctuary'이다.  '쌩츄어리'라고 발음한다. 피난처, 보호구역, 피신처, 안식처. 성역, 성지라는 뜻이다. 성스러운 곳을 뜻하는 라틴어 'sanctuarium'에서 만들어진 단어이며 거룩함, 성인, 성스러운 곳을 뜻하는 'saint' 와 같은 어원이다.


이름만 보면 내가 꽤 종교적인 분위기를 품고 있다고 생각되기 쉽지만 사실 '생츄어리'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십여년 전 영국 런던의 한 작은 상점이었다. 그곳에서 보았던 향기로운 양초 제품의 브랜드가 생츄어리였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지금처럼 양초나 바디용품들을 따로 판매하는 곳이 전혀 없던 시기였다. 나는 그곳에서 코를 자극하는 진하고 이국적인 아로마향을 담은 아름다운 캔들과 신기한 목욕용품들에 매료되었고 그 중에서 제법 비싼 가격표가 붙어있는 커다랗고 둥근 양초 하나와 바디로션을 큰맘먹고 골랐던 기억이 있다. 당시 가난한 유학생 신분으로는 사치품을 샀기 때문에 아직도 그 가게가 잊혀지지 않는다. 게다가 ‘sanctuary’? 생전 처음 본 단어여서 사전으로 뜻을 찾아보았던 것 같다.


부르기 쉽고 예쁜 이름들 중에서 브런치이름으로 나는 하필 왜 이 단어를 골랐을까 생각해보았다.  발음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느낌이 좋았을까 아니면 피난처나 보호구역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와닿아서였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희미한 기억의 회로가 조금씩 선명해진다. 공부와 생활에 대한 걱정과 불안, 혼란스러움 -> 편안하고 아름다운 장소에서 만난 ‘santuary’ 의미와 에너지 -> 향기와 촛불의 공감각 경험 -> 휴식과 안식처로 오랫동안 각인…대략 이런 흐름인 것 같다.


영국 유학을 떠올리면 즐거웠던 기억보다는 가슴아프고 답답하고 아쉬운 기억이 더 많이 남아있다. 당시 나에게 피난처는 내가 공부했던 런던에서 1시간반 정도 기차로 갈 수 있는 글로스터(Gloucester)에 사는 J의 집이었다. 아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집의 정원에서 J와 함께 했던 시간이었다. 자존감이 떨어지고 극도로 불안하고 답답했던 나에게 그 집의 정원 공간은 내 숨통을 틔워주고 휴식과 충전을 제공해주었다.


런던에서 석사를 끝내고 다음 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올라간 북쪽지역 학교에는 캠퍼스 내에 아름다운 숲과 큰 호수가 있었다. 머리가 아프고 논문이 풀리지 않을 때, 외로움과 불안함에 견디기 어려울 때 그 호숫가를 자주 걸었다. 아마 그 때 나의 피난처는 그 호숫가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여전히 도시의 소음과 북적거림, 사람들과의 활기찬 만남이 그리웠다. 고요하고 적적한 그곳의 삶이 그저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아제 시간이 훌러 한국에서 그 때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나에게 이 작은 공간이 주어졌다. 이 곳을 일구고 가꾼다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위대한 작가와 감히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헤세에게 정원일이 ‘글쓰기에서 도망칠 수 있는 안식처' 이자 '노동을 가장한 휴식'이라면, 나에게도 정원일이 어떤 피난처나 안식처가 될 수 있을까? 이 곳에서 즐거움과 영혼이 자라는 경험을 할 수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다만,  어떤 연유든 나는 지금 이렇게 흙에 이끌려있고 그 속에서 생명이 움트고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이 경이롭다. 어쨌든 중요한 건 내가 책임져야할 한 뼘 땅이, 그 흙이 지금 나의 서툰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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