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이 영화 찍으면 생기는 일

모두가 나의 오케이만 기다리는 순간, 한 번만 더 갈게요를 외치는 순간

by 씨네마조이스트



감독

네~ 컷.


연출팀

엔드 슬레이트!

테이크 17!


배우와 스탭 모두가 감독 모니터쪽을 바라보고 있다.

감독은 모니터에 시선이 꽂혀 있다.


배우

오케이?


사람들의 이목이 나에게 쏠린다. 하지만 모르는 척 배우에게 걸어간다.
어떤 말을 해야 내가 생각한 그 연기(사실 나도 모른다)를 배우가 해줄까.
아닌가 앵글의 문젠가. 아닌가 사운드가 시끄러워서 그런가 나중에 녹음을 따로 따서 붙일까.
아닌가 요새 ai 잘 된다던데 ai로 배경을 바꾸면 달라질까.
음 나는 배우 앞에 도착을 해버렸다.


감독

그… 혹시 연기하는데 신체가 긴장이 들어가 있는 상태이실까요?


배우

음.. 아니?

난 편한 것 같은데?


감독

아 그래요?

신체가 좀 더 자유로웠으면 좋겠는데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앵글이 단순하고 길다 보니까

배우가 움직임을 줘야 컷에 다양성이 생길 것 같아요.


배우

엄… 해볼게. 카메라를 신경 안 써볼게.

아 근데 점점 추워서 입이 잘 안 움직여.


감독

하하하하핳 빨리 끝낼게요 죄송해요 진짜 마지막.

(그리고는 3시간째, 약 15킬로 정도 되는 짐벌을 들고 있는 촬영감독에게 다가간다)

그… 배우한테 따라서 느낌 가는 대로 살짝씩. 아주 살짝씩

뭐라 그래야 되지? 카메라가 유영하듯이?


촬영감독

어…

한 번 해볼게


감독

(돈도 안 받고 조명을 도와주러 온 조명감독에게 다가간다)

끝나고 뭐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얘기해!


조명감독

지금 추우니까 뜨끈한 전골? (네이버 지도를 켜 메뉴를 검색한다)


감독

좋지!

(모두에게) 저희 우선 슛 준비할게요!


걸어서 모니터 쪽으로 걸어간다.
내가 방금 뭐라고 한 거지?
몰라 한 테이크 더 갈 수 있잖아.

아직은 배우랑 스태프들 상태가 괜찮은 것 같으니까 슬쩍 한 테이크만 더 가보자고 할까.
아니야 이번에 우연처럼 좋은 컷이 탄생할 수도 있잖아?

제발 도와주세요 기적처럼.
나 말고 누군가가.

기적을 좀 만들어주세요.




나는 영화를 이렇게 찍는다. 촬영 준비할 때 많은 걸 준비하고 현장에 가지만 결국 모니터 앞에 있으면 기도한다. 분명히 많은 회의를 해왔고 결정도 잘했는데 리허설을 하는 순간 깨달을 때가 있다. 뭔가 잘못됐다. 이건 아니다. 근데 방법을 모르겠다. 그래서 끝없는 수정을 하다 포기하고 언제부턴가 기도를 한다. 그냥 모르겠고 누군가 힘내서 제발 좋은 걸 보여줬으면 좋겠다. 열 번 번의 디렉팅을 통해 디테일한 연기 수정을 했지만 그냥 내 말 무시하고 슛 들어가면 갑자기 접신을 해서 뭔가 다른 걸 어마어마한 걸 보여줬으면 좋겠고 근데 방향성이 너무 벗어나면 안 되고. 아니면 촬영감독이 갑자기 신들려서 환상적인 무빙과 함께 새로운 앵글을 보여줬으면 좋겠고 배우가 중요한 대사 하기 전에 갑자기 세상이 조용해져서 색다른 리듬감이 만들어졌으면 좋겠고 그렇다. 그냥 세상이 날 도와줬으면 싶다.


영화를 찍을 때는 변수가 너무 많다. 그 많은 걸 통제하려면 세트장에 들어가면 된다. 날씨도 만들 수 있고 해도 만들 수 있고 달도 만들 수 있고 조용하게 녹음할 수 있고… 다 좋은데… 모든 걸 통제할 수 있는 세트장에 갈 돈이 없다. 근데 사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돈이 있다고 해도 이 모든 걸 통제할 수 있는 세트장에 들어가고 싶으면서 들어가기 싫다. 세트장에 가면 내 능력이 다 들킬 것 같다. 스탭과 배우들이 입을 모아 말하겠지. 우리가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줬잖아 근데 영화가 이것밖에 안 나왔어? 넵. 제 실력이 그 정도랍니다.


영화는 정말 너무 어려운 것 같다. 모든 걸 다 준비해도 현장 상황이 바뀌면 현장에 맞춰 다시 진행해야 한다. 아주 튼튼하고 견고하게 지은 집을 순식간에 부수고 나무를 잘라서 오늘 하루 겨우 잘 수 있는 아늑한 공간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걸 준비하고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자세로 현장에 나간다. 그때 나는 모를 수 있다. 그게 더 좋을 수고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일생일대의 판단을 참 많이 한다. 근데 마법 같은 순간이 꼭 올 때가 있다.


잠시만 지금은 슛 갈 거니까 딴생각하지 말자.



감독

네 가볼게요!

레디 액션!



(모니터를 보며) 오 아까보다 나은데.
오 무빙도 부드럽고 배우 타이밍도 좋은 거 같고 감정선과 신체적인 반응도 좋은 거 같고

음. 좋은데 참 좋은데. 뭔가 부족한 것 같은데. 뭐가 부족한 거지. 이젠 진짜 모르겠다.
다시 보니까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수정할 곳도 안 보인다.

후시 녹음 좀 하고 음악 넣고 색보정 하고 믹싱 좀 하면 괜찮아질 것 같은데…


감독

컷!

아! 넵 오케이 할게요!


오늘은 마법이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근데 또 모른다. 편집 때 찾아올 수도.
편집 때 해결하자.

미래의 나야 잘 부탁한다.
지금 스태프들이랑 배우 죽으려고 한다.

돈도 못 주잖니?
예산 많이 들고 오던가

왜 그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