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기사 이야기에 헬맷을 안 챙겨 왔다.
촬영 전, 스탭들이 잘 오고 있는지 전화를 해보는 감독.
감독
OO아 스쿠터는 2차 로케 쪽으로
넘어가 있는 거지?
촬영감독
응. 이따 송파 넘어가면
내 스쿠터 가져오려고.
감독
응 좋아.
잠시 뭔가 잘못된 듯한 느낌과 함께 싸한 분위기가 맴돈다.
감독
헬맷은?
촬영감독
헬멧?
아 헬멧... 이 거기 있다.
감독
... 어 그래?
... 잠시만?
촬영시작 30분 전, 배달 기사 이야기인데 헬맷을 안 챙겨 왔다. 지금 촬영장소는 일산.
와. 오늘 시작부터 너무 즐겁네.
진짜 어떡하지. 송파를 갔다 오면... 가는데 1시간 20분, 다시 돌아오는데 1시간 20분...
2시간 40분 - 30분 = 1시간 50분 딜레이.
10분 서비스받고 2시간 딜레이.
2시간... 동안 사람들 모아놓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정말 재밌겠다.
작은 현장이고, 소품 더블 체크 해줄 사람도 없고, 이해해 주시겠지. 그치.
는 개뿔
어디서든 찾는다.
그렇게 나는 우선 로케이션 건물 밖으로 나왔다.
지금부터 헬맷이 있을 것 같은 사람을 찾으시오.
중국집
로케이션 바로 앞에 중국집이 있다.
근데 중국집... 요새 배달 어플 쓰시지 않을까.
하지만 출동.
로케이션 바로 앞 중국집을 갔는데, 이곳은... 딱 봐도 상주 배달기사님이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들어간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감독.
어찌 된 일일까. 문이 열리지 않는다.
똑똑똑.
누군가가 문으로 온다.
직원
저희 11시 오픈이라
감독
진짜 죄송한데 혹시 헬멧 같은 게 있을까요?
직원
헬맷이요?
감독
네. 제가 단편영화 찍는 학생인데
촬영하면 항상 대학생이 된다. 나는 31살인데.
심지어 나는 고졸인데
어김없이 또 대학생 졸업영화를 찍는다.
학생들에게는 비교적 너그러운 마음을 악이용 한다.
죄송합니다.
감독
네. 제가 단편영화를 찍는 학생인데
지금 소품으로 헬맷이 필요한데
혹시 헬맷을 오늘 하루 5만 원에 빌릴 수 있을까 해서요.
직원
어. 저희 헬맷이 없는데...
감독
배달은 따로 안 하시는...
직원
아... 예. 하는데
배달하시는 분이 따로 없는.
감독
아하 그렇군요!
넵. 감사합니다!
와. 어떡하지. 와 진짜 어떡하지.
우선은 중국집에서 나와서 달린다.
모른다. 달린다.
헬맷은 누가 가지고 있을까.
달리다 자전거 보관소를 발견한다.
눈에 들어온 건 자전거 헬멧.
저걸 쓰면. 이상한가. 아니지. 자전거 헬멧 쓰고 배달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
근데 어떻게 연락을 드리지.
쪽지를 남길까. 내 번호 남기면 연락을 주시겠지.
아니 그전에 내가 가져가면 화가 나시겠지?
우리 촬영은 그대로 쫑나겠지.
훔칠까.
잠시 스쳐가는 생각이다. 실제로 하진 않았다.
하지만 정상인으로 돌아온 지금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잠재적 범죄자였다.
아 아닌 것 같다. 다시 주변을 둘러보는데 눈이 띈 다이소.
다이소로 달려들어간다.
문제는 아직 오픈 전, 9시 48분. (이었을 거다.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직 열지도 않은 다이소의 문을 두드리는 정신 나간 단편영화감독.
쿵쿵쿵.
아까 중국집 직원분과 비슷하게 영문을 모른 채 다가오는 다이소 직원분.
또 같은 말을 듣는다.
직원
저희가 아직 오픈 전이라.
또 이 감독은 학생이 된다.
감독
진짜 죄송한데,
제가 단편영화를 찍는 학생이거든요?
혹시 여기 헬맷도 파나요?
직원
헬멧...? 헬맷은 없는데.
감독
비슷한 다른 것도 없을까요?
직원
어... 모자 같은...
감독
한 번 봐도 될까요?
진짜 좀 급해서...
직원
네. 들어오세요.
다이소를 둘러보는 감독.
하지만 역시 헬맷은 없었다.
포기하지 않고 비슷한 무언가를 찾아보는데...
모자.
모자! 저 모자를 어떻게 뭐. 헬맷으로 못 만드나.
저 캡모자 앞에 캡 잘라내고 모자에 은색 락카 칠하면 헬멧 같아지지 않을까.
라는 망상을 한다. 그게 되겠냐고.
직원
없죠?
감독
네. 없네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쓸쓸히 다이소를 빠져나오는 감독.
아 그냥 쿨한 척. 현장 가서 헬멧 없이 가자고 할까.
헬멧 없이 달리는 라이더....
유튜브에 올리면 문제 되지 않을까.
아니 그것보다 헬맷으로 투닥거리는 장면이 있는데... 아 그거 어떡하냐.
일단 돌아가 봐야겠다.
그냥 어쩔 수 없는 척. 헬멧 없는 라이더로 가지 뭐.
약간 불법적인 라이더 캐릭터도 매력적이잖아.
지금부터 캐릭터를 바꿔보자.
그때 부우우웅. 앞으로 지나가는 라이더.
미친....!!! 라이더!!
배달기사 영화를 찍는데 배달기사를 찾으면 되잖아.
그렇게 로케이션 앞에서 건물을 계속 빙빙 돌며 뛰어다니고 라이더를 찾아 헤맸다.
평소에는 그렇게 많이 보던 배달기사님이 왜 지금은 없을까.
다 어디로 숨은 걸까.
그때 저 멀리서 들리는 오토바이.
달린다.
아 오토바이는 왜 이렇게 빠른 거람.
나보다 훨씬 빠르네.
오. 내쪽으로 오신다. 근데 내 말을 들으시진 못한 것 같은데.
길을 막고 라이더를 막아 세우는 미친 감독.
라이더
뭐 하시는? 네?
감독
진짜 죄송한데.
(Again 학생모드) 제가 단편영화를 찍는 학생인데
지금 헬맷이 소품으로 사용되는데
혹시 오늘 하루 렌탈 5만 원으로 헬맷을 빌릴 수 있을까요...?
라이더
아. 제가 헬맷을 벗으면 배달을 갈 수가 없어서...
감독
그럼 혹시 어떻게 하면 빌릴 수 있을까요?
라이더
한 시간 후 정도면 괜찮을 거 같은데.
감독
와. 그러면 제가 번호 하나 받을 수 있을까요?
요기 바로 앞에 건물에서 촬영을 하는데 제가 이따 연락을 드릴게요.
라이더
네.
010-XXXX-XXXX
와!! 와!!!
와!!!! 와!!!!!
와!!!!!!!!! 촬영할 수 있다. X발.
다행이다. X나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다.
너무 행복하다.
난 촬영할 수 있어.
기사님은 헬맷을 3개나 보여주셨고
그중에 골라서 촬영을 했다.
간절히 원하면 이뤄진다...?
유튜브 채널 <여백조각>에서 곧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