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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국 Apr 03. 2024

영화 <위플래쉬> 보셨나요?

더 이상 열정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본 연재글에는 해당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구독 전 주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햇수로 어느덧 개봉한 지 10년이 된 <위플래쉬>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재개봉도 여러 번, 데미언 셔젤 감독에 대해 물으면 <위플래쉬> 또는 <라라랜드>가 바로 튀어나올 정도로 데미언 감독의 양대산맥 작품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본 만큼, 많은 사람들의 인생영화를 책임지고 있는 만큼 영화의 해석도 사람마다 제각각입니다. 가장 의견이 분분하다고 느꼈던 건, 영화가 끝난 이후 네이먼(마일즈 텔러)의 삶에 대해서였습니다.


자, 그건 가장 나중에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하고요. 저는 여러분께 가장 먼저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위플래쉬>를 보면서 여러분을 덮쳤던 감정의 정체는 무엇이었나요? 감동이었나요? 주인공과 동일시되어 강한 열정을 느꼈을 수도 있겠고, 슬픔이 와닿았을 수도 있겠네요. 그게 아니라면 공포였나요? 다른 사람들은 감동적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 영화가 너무 무서웠다' 하는 분들도 계시겠죠. 또는 스토리고 뭐고 음악에 몰입해 황홀감에 흠뻑 젖은 분도, 취향이 아니라서 그닥 강한 감정을 느끼지 못한 분도 분명 계실 겁니다.  


이걸 왜 여쭤 봤냐구요? 사실 이 영화의 본질은 음악보다 열정보다 공포에 가까울 수도 있을 것 같아 여러분의 의견이 궁금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많이 슬펐습니다. 그 와중에 음악은 너무 황홀했구요. 단 하나의 꿈을 가지고 자란 네이먼이 마치 한평생 마지막 기회라도 얻은 듯 본인을 죽기 직전까지 몰아세우는 그 모습이 대단하기보단 안타깝게 느껴졌죠. 10년 전에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도, 재개봉날 극장에서 다시 봤을 때도, 며칠 전에 봤을 때도 같은 장면에서 울었고 같은 장면에서 숨을 참았습니다. 다시 볼 때마다 감상이 달라지는 영화가 있다면 <위플래쉬>처럼 몇 년이 흘러도 크게 감상이 달라지지 않는 영화도 있다는 걸 느꼈어요.


하지만 인물들에 대한 해석은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가장 최근에 <위플래쉬>를 보고 나서야 '카라반'의 메인 드러머를 결정하기 위한 몇 시간에 걸친 피의 연주가 진짜 실력을 가리기 위해서가 아닌, 그저 네이먼을 자극하기 위함이었음을 알아차렸죠. 가능성이 보이는 인재에게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성장시키고 싶어 하는 괴짜 교수로만 보였던 플레처(J. K. 시몬스)가 해를 거듭할수록 제게는 더 소름끼치는 인물로 다가왔습니다. 네이먼을 타겟으로 정하고, 유대감을 만들고,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준 다음 패배를 맛보게 하고, 다시 그 자리를 쥐어주며 더욱 간절하게 만든 후에 더 깊은 심연으로 추락하게 만듭니다. 아주 촘촘하고 교묘하게 설계된 가스라이팅이죠. 네이먼에게 아버지의 존재가 없었다면 션과 같은 결말을 맞지 않았을까요. 이것이 이 영화의 공포 요소입니다.


네이먼에게 복수하기 위해 새로운 곡을 알려주지 않고 무대에 세운 플레처를 보면 그에게 음악이라는 게, 공연이라는 게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보다 누군가를 망가뜨리는 것이 중요한 인물이죠. 그에게 음악이라는 건 순수하고 열정 가득한 학생들을 무너뜨리기 위한 수단 아니었을까요? 성희롱 섞인 폭언을 일삼고, 폭력을 정당화하고, 권력을 남용하는 그를 자신의 미래를 위해 그저 따르고 있는 학생들을 보다 보면 기묘하고 이질적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시퀀스와 함께 앞서 했던 질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 볼 차례입니다. <위플래쉬>의 최고의 장면을 꼽으라면 저는 마지막 시퀀스를 통째로 들어 보이고 싶습니다. 업스윙잉, 카라반, 위플래쉬로 이어지는 무대, 그 안에서 펼쳐지는 플레처와 네이먼의 대립, 숨을 멈추지 않고선 듣지 못하는 네이먼의 독주, 탄성이 터지는 위플래쉬의 시작이자 영화의 끝.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의 큰 임팩트를 선사합니다. 음악적으로 본다면 너무나 완벽하지만 인물들의 감정선을 본다면 더없이 혼란스러운 시퀀스입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하는 아들을 보는 아버지의 표정, 네이먼과 플레처가 주고받는 미소. 영화가 끝난 후 펼쳐질 네이먼의 삶에 대한 힌트를 주는 걸까요?


저는 그 연주가 네이먼의 마지막 연주였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플레처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고, 내가 어떻게 이용당했는지 알았고, 드럼에 매달리던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 알았기 때문에 그 후회없는 연주를 끝내고 오히려 미련을 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무대 커튼 사이 아버지의 표정에서 어떤 절망감을 읽었다고 해야 할까요? 여러분은 아버지의 그 표정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아들의 간절함에 대한 놀람과 감격, 미안함 따위의 복합적인 감정이 담겨있다고 느껴오다 언제부턴가 <위플래쉬>를 다시 볼 때면 그 장면에서 그런 감정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네이먼의 삶이 어쩌면 다시 망가질 수도 있다는 예고를 보는 것 같았다면 너무 절망적인가요?


우리는 이 영화를 볼 때 네이먼의 나이를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겨우 열아홉의 나이죠. 그래서 더 조급하고, 모든 결과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다가오고, 그렇기 때문에 플레처의 계획에 가장 완벽하게 걸려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 앞에서 드럼을 연주하던 자신의 영상을 보고는 눈물 흘리며 마음을 다잡고 드럼의 모든 흔적을 정리하는 소년의 모습은 그 짧은 인생 동안 그의 전부였던 꿈을 잃은 공허함을 보여 줍니다. 나를 평생 꿈꾸게 했지만 또한 나를 몰락으로 이끈 것. 이제 열정이라고 칭할 수만은 없게 되었으니 계속할지, 포기할지를 정해야 할 테죠. JVC 페스티벌에서 다시 잡은 스틱이 다시 그 길을 가기 위함인지, 미련 없는 포기를 위함인지는 네이먼만이 알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가 만들어지고 10년이 지난 지금, 네이먼이 어떤 방식으로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시간이 흘렀다면 그 10년간 여전히 드럼과 함께이든, 드럼과는 전혀 상관없는 걸 하고 있든 말이죠. 여전히 가끔씩 아버지와 만나 팝콘을 나눠 먹으며 영화를 보고,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 데이트를 하고 재미는 없어도 평범한 20대를 보내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드럼을 붙잡고 한계 따위 없는 듯 끝까지 달려나가던 그 열정을 다른 곳에도 충분히 쏟아 부을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내 인생에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것'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나 또한 준비해야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가슴에 새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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