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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려야 깨닫는 평범함의 소중함

인생은 아름다워 (1997)


내가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았다고 생각한 순간은 아이러니하게 많은 것을 잃고 난 순간이었다. 영화 초반 귀도와 페루치오는 한 자동차를 타며 길을 내려온다. 그러던 중 멀쩡하게 달리던 자동차는 갑자기 페루지오의 노랫말처럼 갑자기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는다. 멀쩡하던 자동차의 브레이크 고장이 당연하게 생각했던 브레이크의 중요함을 일러주듯, 영화는 상실의 순간 속 당연함에 가려진 행복의 가치를 다시 한번 알려준다.


귀도가 살던 시절은 그에게 불행한 시절이었다. 유대인인 귀도는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권력을 가지고 있던 파시즘 속에 가장 약한 사람이었다. 귀도의 삼촌 엘리 세우는 불한당에게 강도를 당했을 때에도 그는 "침묵이 가장 큰 소리"라고 말했다. 그때는 유대인들은 독일 사람들에게 눈에 띄지 않은 채 조용히 사는 것이 최선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귀도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귀도에게는 당연하게 누려야 할 행복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악화되었고 그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잃었다. 그는 평범하게 상점에 들어가는 일도, 서점을 운영하는 일도 가족과 함께하는 일도 할 수 없었고 심지어 자신의 삶조차도 지킬 수 없었다. 영화의 마지막 귀도는 아내를 찾다가 독일군에게 발각되어 총살을 당하기 직전에 놓인다. 그 순간 그는 웃는 얼굴로 숨어있는 아들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로 구석진 곳으로 향한다. 마지막까지도 아들에게 안심을 주기 위해 그리고 모든 것을 잃는 순간이 삶은 자체로 소중했음을 알려주는 시간이었다.


최근 미디어와 SNS는 우리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당신이 이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불완전하며,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가졌기에 행복하다고 세뇌한다. SNS 속 여행지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사진들은 자신은 이런 것을 가지지 못함을 상기시키며 한 사람의 침묵을 깬다.


나 역시 그런 미디어 속에 불행을 느끼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미디어와 SNS를 보며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만 집중했고 스스로를 비관했다. 내가 불행한 건 더 가지지 못해서 그리고 성취하지 못한 탓 같았다. 그러던 중 그런 나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찾아왔다. 어느 날 나는 블로그에 올라온 한 사람의 글을 읽었다. 자신은 60세가 넘은 노인이라며 자신을 소개한 글은 자신의 일상이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매일같이 새벽에 일어나 아파트 경비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손자가 어여쁨에 감사한다고 고백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일이 고됨에 불평할 수 있고 더 가진 게 없음에 비관할 수 있었음에도 그는 자신의 상황에 감사했다.


이름을 부르면 사라지는 것이 있다. 답은 침묵이다. 적막을 깨는 외침은 내가 고요한 침묵 속에 있었음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침묵이 사라진 후에야 그 고요 속에 일상이라는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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