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씨네맘 천준아 Jul 13. 2022

통인시장 원조할머니 기름떡볶이



경복궁역에 내려 통인시장으로 걷는다. 나는 이 길목에 남다른 애정이 있다. 세심한 관찰자가 아니더라도 이 길을 걷다보면 자연히 간판들에 눈이 갈 수밖에 없다. 세계적인 커피숍은 물론이고 빵가게, 화장품가게, 편의점까지 한글간판이다. 늘 접해왔던 외래어간판들이 한글을 입은 모양새는 유난히 정겹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세종대왕의 생가터인 통인동을 비롯해 ‘세종마을’로 명명된 인근 11개 동주민들이 자율적으로 참여한 결과라고 한다.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시 여겼던 외래어 간판들이라 이 낯선 풍경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한글 간판들이 즐비한 길을 지나 통인시장에 들어서면 익숙함을 배반하는 또 다른 풍경을 만날 수 있다.





50년 단골이야. 내 나이 예순이 넘었어.
국민학교 때부터 먹었으니까 끊을 수 없는 맛이지. 유년의 기억이니까.


오랜 세월 끊지 못하는 유년의 맛이란 곰삭을 대로 삭은 젓갈도 아니고, 사골을 고아 우려낸 구수한 설렁탕도 아니다. 바로 통인시장에 자리 잡은 원조할머니 기름떡볶이 맛이다. 십대들이 바글거리는 여느 떡볶이집과는 달리 단골손님들의 평균 나이가 반백년인 곳, 예순 넘은 할머니가 삼십대 딸과 어린 손주 손을 잡고 찾아오는 희한한 떡볶이집이다. 누구나 어린 시절 줄기차게 드나들던 떡볶이집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반백년 동안 단골이 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생각해보라. 떡볶이집이 60년간 건재하기도 어렵지만 대체 어느 누가 떡볶이라는 메뉴를 60년 동안 잇는단 말인가.





지금은 1인분에 3천 원인데, 그때는 개수로 세서 팔았어.
 10원에 떡볶이 2개. 빈대떡 한 장에 500원이었어.



시간은 흘렀고 많은 것이 변했다. 지금은 4차선인 자하문로가 2차선이던 시절, 진명여고가 목동이 아닌 종로구 창성동에 자리했던 시절, 통인시장도 지금의 세련된 모습을 갖추기 훨씬 전이었다. 그리고 원조할머니 기름떡볶이의 안주인도 현재의 김임옥 할머니(77)가 아닌 맹 씨 할머니라는 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60년 전인 1956년으로 거슬러 가본다. 6.25 전쟁으로 북에서 서울로 피난한 맹 씨 할머니가 자하문로 길가에서 간장 양념을 한 떡을 기름에 볶아 팔기 시작했다. 물에 갖은 양념을 한 뒤 졸이는 일반 떡볶이와는 달리 양념에 잰 쌀떡을 기름에 볶는 방식은 ‘떡볶이’라는 이름과 가장 어울리는 조리법이었다. 아마도 맹 씨 할머니가 북에서 보낸 어린 시절, 명절을 쇠고 난 뒤에 떡을 비롯해 남은 음식들을 기름에 볶던 어머니의 모습에서 착안한 것이 아닐까 하고 김임옥 할머니는 짐작한다.





“물이 들어가지 않으니까 떡이 불지 않고 쫄깃한 식감이 계속 살아있는 거야.
그리고 기본 간장 소스가 자극적이지 않으니까 많은 양을 먹어도 질리지 않고.”


맹 씨 할머니로부터 기름떡볶이를 전수받은 김임옥 할머니도 원래는 단골손님 중 한 사람이었다. 기름떡볶이와의 운명적인 만남은 남편과의 사별이 결정적인 계기였는데, 건설업을 했던 남편은 건설경기가 호황이던 70년대에 집을 세 채나 장만했을 정도로 잘 나갔다. 그런 남편이 느닷없는 간암 선고를 받게 되자 집을 차례로 팔아 병원비를 마련했지만, 그 당시 의료기술로는 남편을 살리기 어려웠다. 결국, 김 할머니는 다섯 살, 세 살인 두 아들을 홀로 키우기 위해 남은 돈을 긁어모아 순대국밥 집을 열었다. 콩나물 하나를 무쳐도 비법이 뭐냐 물을 만큼 음식 솜씨 하나는 자신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던 중에 맹 씨 할머니 떡볶이집을 알게 되고 그 오묘한 매력에 빠진 김 할머니가 떡볶이 만드는 방법과 전 부치는 요령을 물으면서 친해졌다. 실향민인 데다 자식이 없었던 맹 씨 할머니에겐 자주 찾아와 살갑게 구는 김 할머니가 딸같이 어여쁘고 정겨웠던 모양이다. 김 할머니가 정식으로 기름떡볶이를 전수받은 것은 30년 전인 1986년이다.





“저 역시 기름떡볶이를 먹으며 자랐어요. 정말 맛있었어요.
어머니가 가져오시면 형이랑 신나서 먹던 기억이 생생해요.”



남편 없이 홀로 기름떡볶이로 아들 둘을 키운 김 할머니에게도 지금은 든든한 지원군이 생겼다. 둘째 아들, 오정환 씨가 5년 전부터 김 할머니 곁을 지키고 있다. 요리학과 출신인 오정환 씨(43)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 급식부에서 조리실장까지 하던 중 언제까지 회사 생활을 할 수 있을지 회의감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때마침 어머니가 기름떡볶이를 같이 해보지 않겠느냐 제안을 했을 때 어린 시절부터 먹어온 맛을 자신이 이어간다는 데에 묘한 사명감도 느꼈다. 게다가 지금은 그 맛에 대한 자부심까지 더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인 최초로 미슐랭 별을 받은 뉴욕의 ‘후니 김’ 셰프가 언젠가 통인시장에 들러 기름떡볶이를 맛본 후에 자신의 식당 ‘한잔(HANJAN)’에 기름떡볶이 메뉴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단다. 그리고 뉴욕 식당을 찾은 손님들에게 이건 가짜이고 진짜의 맛은 통인시장에 있다고 권해서 실제로 찾아오는 손님들도 있다고 한다.




하루 평균 100여 명의 손님들이 들르고 주말에는 평일의 3~4배에 달하는 사람들이 줄 서서 찾는 기름떡볶이집. 유명세를 타다보니 기름떡볶이 간판을 내걸고 맛을 흉내 내는 가게들이 통인시장 안에도 두 곳이나 생겼다. 하지만 60년의 노하우가 담긴 맛을 흉내 내기란 어렵다. 미국은 물론 인도까지 냉동 포장해가는 충성도 높은 단골손님들은 원조할머니집에만 있으니 말이다. 문득 궁금해졌다. 60년간 자리를 지켜온 이 떡볶이집의 내공은 뭘까. 버텨야지, 살아남아야지, 대를 이어야지, 부러 그렇게 해야지 작심하고 작정해도 어려운 일이다.


“어릴 때는 전혀 몰랐어요. 어머니를 도우면서 새벽 4시에 일어나
저녁 8시까지 일해야 하는 중노동이라는 걸 알았죠.
회사 다니는 것보다 더 힘들더라고요.
쉬는 날도 없지, 또 남기고 가는 손님이라도 있으면 왜 남겼을까?
떡볶이에 문제가 있나? 별별 생각이 다 들고 마음의 무게가 장난 아니에요.”


아들은 새로운 일터에서 어머니를 다시 보았다. 행여나 아이들이 깰까봐 불도 켜지 못하고 매일 새벽 조용히 집을 나섰을 어머니. 동이 트지 않은 컴컴한 하늘을 마주하고 해가 진 뒤에나 돌아온 자만이 그 세월을 말할 수 있으리라. 김 할머니는 매일 밤마다 ‘내일 나가지 말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안 나가면 단골손님들은 어쩌고 두 아들은 어쩌냐는 생각으로 기어이 나온 게 지금까지 온 거란다. 달리 말하면 그것이 바로 어머니만의 ‘신뢰’였던 게 아닐까. 나만 믿고 있는 누군가에게 할 수 있는 최선 말이다.






매일 새벽 4시 반에 넓적한 무쇠솥을 기름칠하며 시작하는 원조할머니 기름떡볶이집. 어느덧 이 무쇠솥은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그 옛날, 맹 씨 할머니는 연탄난로 위에 네모나고 납작한 양은 쟁반을 올려놓고 떡볶이를 볶았다고 한다. 그런데 김 할머니가 전수받은 후에 떡볶이 소스가 타거나 눌어붙지 않으면서 데울 방법을 고민하다가 가마솥 뚜껑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주물공장에서 가마솥 뚜껑의 손잡이를 제거해 사용했다가 3년 전에 두께와 크기를 제작 주문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맹 씨 할머니에게서 전수받은 소스에 여러 가지 재료를 더 넣어서 맛을 풍성하게 만든 것도 김 할머니다. 그리고 아들 오정환 씨는 어머니가 완성한 비법 양념을 특허내고 또 그동안 어림짐작으로 양념하던 것을 항상 동일한 맛이 나게끔 비율을 정량화하는 작업을 했다.


물론 대단한 요리도 아니고 그래 봤자 떡볶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고된 것에 비하면 버는 돈도 형편없다고 푸념만 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오묘한 맛이다’, ‘처음 먹어보는 독특한 맛이다’ 하면서 점차 늘어가는 단골을 만나는 게 신이 났단다. 어머니와 아들 모두 세상 어디에도 없는 60년 전통의 기름떡볶이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다.


“지금은 어머니와 단둘이 하니까 여력이 되지 않지만
가까운 미래에는 기름떡볶이를 전국 어디서나 드실 수 있게
포장 배달하고 싶어요.”


오정환 씨는 팔순을 목전에 둔 김 할머니의 하루하루가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조만간 자신이 혼자 도맡게 될 기름떡볶이의 앞날도 하나씩 구상 중이다. 기름떡볶이 4대도 꿈꾸냐는 물음에 오정환 씨는 손사래를 친다. 장담할 수 없고 너무나 요원한 일이라고. 하지만 단골손님 4대는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늙은 노모와 나이 든 자식 그리고 젊은 부부와 어린아이들이 이 오래된 작은 떡볶이집에 나란히 앉아있는 풍경을 상상해본다.



_글,사진 | 천준아

_서울문화재단 <서울, 人에게 묻다> (2016-2017년 연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