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덕동에서 서울역으로 넘어가는 만리동 고개에 오른다. 고개가 유난히 길고 높아 만 리를 걷는 것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은 옛것을 갈아엎는 재건축이 한창인데 이쪽은 여전히 낡은 가게들이 오밀조밀하다. 삼거리슈퍼 주인에게 ‘성우이용원’ 가는 길을 물으니 대뜸 ‘내가 40년 단골’이라며 말을 건넨다. ‘그때그집’ 가게 간판을 이정표 삼아 내년이면 90살이 되는 국내 최고령 이발소를 찾아가는 길. 저 멀리 서울타워가 보이는 이 높은 곳에도 사람이 살고 어김없이 장이 선다. 오래된 풍경들이 주는 넉넉함을 지나 골목 어귀로 들어서면 마치 박제된 듯 전설처럼 서 있는 집 한 채를 마주하게 된다.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건물은 언뜻 보면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낡았다. 그런데 집 앞 가득 공들여 가꾼 알록달록한 화초들과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이발소 사인보드가 ‘영업 중’ 푯말을 대신한다. 행여 부서질까 조심스레 문을 여는 순간, 마치 과거로 통하는 빗장을 연 듯한 풍경이 펼쳐졌다. TV 자료화면에서나 봤음직 한 옛날 물건들로 빼곡한 이발소 내부에서 초로의 이발사가 나를 반긴다.
“만 리를 걷는 것 마냥 길어서도 아니고,
만 리 밖까지 보여서도 아니고,
세종 때 유명한 학자 ‘최만리’가
나고 자란 곳이라 만리동 고개인 거야.”
만리나 되는 고개를 올라왔다며 너스레를 떨자 만리동의 또 다른 유래를 들려주는 성우이용원 대표 이남열 씨(68). 백 년이 다 되어가는 이발소 주인이 하는 말이라 왠지 더 그럴싸하게 들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외할아버지 서재덕 씨와 아버지 이성순 씨 뒤를 이어 3대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남열 씨는 이발업에 몸담은 지 올해로 54년째. 그런데 이발소 안에는 올해 예순여덟인 그의 나이와 54년의 이발경력을 무색하게 하는 시간의 증거물들이 가득하다.
조발(캇트)라고 쓰여진 생경한 요금표, 이제는 회사 자체가 사라지고 없다는 바론상사의 이발의자와 55년 된 세면대, 그리고 제작연도를 가늠하기 어려운 연탄난로와 선풍기까지 과거 어느 시점으로 시간을 되돌린 것만 같다. 연신 감탄을 쏟아내는 내게 이남열 씨가 꽁꽁 모셔둔 보물가방 하나를 열어 보인다. 면도칼과 가위가 헝겊에 칭칭 동여매어 진 채 한가득 나온다.
그거 모르지?
눈에는 안 보이지만 세월이 흐르면 쇠도 흘러내려.
사람도 늙으면 피부가 처지듯이.
그래서 3일에 한 번씩 기름칠하고 닦은 다음
낡은 천으로 꽁꽁 싸매서 산화되는 걸 막는 거야.
성우이용원에서 가장 오래된 물건은 쌍둥이 칼로 유명한 독일 브랜드의 140년 된 면도칼이다. 또 다른 면도칼에는 ‘1934’라는 제작연도가 뚜렷하게 각인돼 있다. 하지만 이 중에서 이남열 씨가 애지중지하는 보물은 일당 150원 하던 시절, 일주일 동안 일한 돈을 모아서 700원에 산 가위다. 손가락을 넣는 부위가 들뜨지 않게 설계돼 있어서 머리 자를 때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게다가 요즘 가위는 관리를 잘해도 4~5년을 채 못 쓰지만, 이 가위 날은 보관만 잘하면 앞으로 4~50년도 거뜬하단다.
1927년, 이곳에 이발소를 개업한 것은 외할아버지 서재덕 씨다. 원래 앙꼬(단팥)공장을 하던 그는 일본인에게 이발 기술을 배워 당시 조선인으로는 두 번째로 이발 면허증을 땄다. 그리고 아버지 이성순 씨 역시 일본인에게 이발 기술을 배운 국내 212호 이발사였다. 당시 국립극장에서 이발했던 이성순 씨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절게 되면서 일자리를 잃고 새로 취직한 곳이 바로 성우이용원이었다. 그러니까 외조부와 부친은 먼저 사장과 종업원으로 만나 장인과 사위가 된 셈이다. 참 영화 같은 인연이다.
1935년부터 성우이용원을 맡은 아버지 이성순 씨는 아들 다섯과 딸 둘을 뒀고 이남열 씨는 그중 다섯째다. 이용원에 붙어있는 단칸방에서 아홉 식구가 살을 부대끼며 살다 보니 아버지 눈에 자식들의 기질이 보였을 터. 일곱 형제 가운데 유독 꼼꼼하고 빈틈없는 이남열 씨가 눈에 들어온 모양이다. 14살이 되던 중학교 1학년 때,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쓰는 비질을 시작으로 가위와 면도칼을 갈고 수건을 빨기 시작한 게 시작이었다. 방과 후면 부리나케 뛰어와서 아버지를 돕고 일당 50원을 용돈으로 받았다. 조금 더 지나서는 손님 머리를 감기고 드라이하는 것도 겸했다. 그렇게 꼬박 3년을 쉬지 않고 일했다. 그리고 아버지 뒤를 이어 가업을 잇기로 결정하면서 고등학교 책가방 대신 가위를 들었다.
아버지가 내 손님이 되어주셨어.
머리를 망쳐도 좋고 면도칼로 얼굴을 베어도 좋으니까 해보라고.
아버지 머리랑 얼굴 버리는 거니까 맘껏 하라고 하셨지.
어떤 때는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아버지 머리를 깎는 일도 있었다. 손님 귀를 최소 서른 번은 가위로 집어봐야 기술자가 되는 거라고, 시행착오가 없이는 절대로 배우지 못한다고 아버지는 누차 얘기하셨다. 가위를 잡고 처음엔 학생들만 전담했다. 엉망으로 자를 때도 있었고 면도하다가 얼굴에 상처를 내는 일도 있었다. 그럴 때면 오히려 아버지가 손님 앞에서 더 불같이 역정을 냈기 때문에 손님들이 크게 화를 내지 못했단다. 아버지는 때로는 엄하지만, 한없이 자애로운 스승이었다. 그렇게 이발을 배운 이남열 씨가 면허증을 딴 것은 1970년의 일이다.
하지만 그즈음부터 방황이 시작됐다. 아버지로부터 가업을 물려받기로 약속했지만, 이발은 자신의 업이 아닌 것 같았다. 제조업 공장을 운영해서 크게 성공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꾸었지만, 자본이 없어 접어야 했다. 그러자 이용원에 마음을 둘 수가 없었다. 틈만 나면 종업원들에게 이용원을 맡긴 채 이발가방 하나만 들고 길을 나섰다. 이발을 해주는 대신 숙식을 제공받는 식으로 정처 없이 떠돌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내 길은 이게 아닌데 대체 내 꿈은 무엇일까를 고민한 시간이 무려 18년이나 이어지던 어느 날, 불현듯 깨달음은 왔다.
세상 사람들 모두 저마다 주어진 삶이 있다.
내가 잘하는 일이 이발이고
지금까지 그 일을 하면서 밥을 먹었는데
왜 나는 지금껏 헤맨 것일까.
이남열 씨 얘기를 듣자니 어쩌면 우리는 ‘꿈’이라는 단어에 지나치게 큰 무게를 싣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란 건 모름지기 일상성을 벗어난 것이어야 하며 거창하고 원대해야만 할 것 같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있는 건 아닌가 말이다.
오랜 방황 후, 이남열 씨는 오롯이 성우이용원의 이발사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그 후 연구를 거듭해 자신만의 이발 방식인 하향식 기법을 완성했다. 일반적으로 아래에서 위로 깎는 이발이 아닌 위에서 아래로 머리카락을 잘라나가는 식이다.
사람들은 키에 따라 골격에 따라 두상이 다 다르거든.
거기에 몽골족, 한족, 장족, 외국인 모두 달라.
두상을 알고 머리카락이 난 방향대로
위에서 아래로 잘 잘라주면 머리가 자라도 흉하지 않아.
감자전분을 묻히면 더 잘라야 할 머리카락이 잘 보인단다. 원래 전통식 이발에서는 석면이 들어간 파우더를 사용하는데 아버지는 그 때문에 진폐증으로 돌아가셨다. 그 시절 진폐증은 이발사들의 직업병과도 같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이남열 씨는 파우더를 대체하기 위해 밀가루부터 온갖 가루를 시험해보고 결국 감자전분을 사용하게 되었다. 감자전분을 이용해서 한 올 한 올 위에서 아래로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모습은 여느 미용실에서 본 적이 없어 신기하기만 하다. 게다가 다 자른 뒷머리가 차분히 결대로 내려앉은 모양이 매우 시원해 보인다. 정성을 들여 깎는 전통 이발이라 손님을 더 받고 싶어도 하루 열 명 남짓이 적당하단다.
이용원 한쪽에는 그를 위한 시 한 편이 걸려있다. 김영환이라는 단골손님이 손수 쓰고 족자로 만들어 선물한 것이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섬세한 손재주를 가진 이남열 씨는 손님을 연필로 그렸다. 그림이라곤 배운 적 없는 솜씨라 더 놀랍다. 언젠가부터 성우이용원이 TV를 비롯해 여러 책자에 소개되면서 찾아오는 손님들도 다양해졌다. 이건희 회장을 비롯해 유명한 정재계 인물들도 한 번씩 들르고, 특히 외국에서 오는 이들도 있다. 90년 가까이 된 이발소가 주는 묘한 분위기와 전통 이발에 대한 호기심으로 왔다가 단골손님이 되는 경우도 많다.
일본방송국 MBS에서 근무하는 ‘나오하라 요시미츠’ 씨는 두 달에 한 번 한국에 올 때마다 찾는 단골손님이다. 오래된 이발소가 주는 남다른 정취에 매료됐던 그가 이제는 이남열 씨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지난해 연말에는 손수 찍은 사진을 책으로 엮어 편지와 함께 주기도 했다.
내 사전에 자진해서 은퇴하는 일은 없어.
눈이 보이지 않고 왼손이 떨리기 시작하면 그제야 놔야지.
요즘 그의 관심은 오로지 건강이다. 올해 서른이 된 아들이 가업을 물려받길 바라지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라 될 수 있는 한 오래 성우이용원에서 이발을 하고 싶다. 그는 내게 진정한 이발의 경지는 왼손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오른손으로 가위를 들고 자르지만, 진짜 중요한 건 빗을 흔들림 없이 머리카락에 대주는 왼손에 있다고. 그래서 이남열 씨는 자신의 이발을 ‘왼손의 경지’라고 부른다. 11년 후, 성우이용원 100년이 되는 해, 다시 한 번 이곳에서 왼손의 경지를 확인하고 싶다.
_글,사진| 천준아
_서울문화재단| '서울, 人에게 묻다' (2016-2017년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