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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네맘 천준아 Jul 16. 2022

을지로 3가 송림수제화 - 80년 가업의 무게



옛것과 새것이 공존하는 곳, 을지로 3가의 인상은 그랬다. 전철역에서 나오니 덩치가 큰 고층 건물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데 고개를 돌리자 어깨를 나란히 한 낮은 건물들이 옹기종기 줄지어 서 있다. 공구, 조명, 타일, 인쇄 등 간판만 보아도 단번에 업종을 알 수 있게 친절하다. 주의 깊게 이곳을 지나친 적이 없어서일까. 수십 가지에 이르는 간판을 눈으로 따라가다 보니 여기서 구하지 못하는 물건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다. 새삼 을지로라는 지명이 ‘을지문덕’에서 유래했다는 사실마저 떠올라 이곳이 더 새롭게 느껴진다.



가게들이 수시로 간판을 고쳐 달고, 업종들이 한데 모여 특화 거리가 만들어지는 동안에도 미동조차 않고 1936년부터 을지로를 지킨 수제화 업체가 있다. 한때 제화점 거리로 불렸던 골목에서도 유일하게 남은 송림수제화. 신발을 만드는 곳인데 한 자리에 발이 묶였구나 생각하며 문을 열었더니 마침 3대 임명형 씨(53)가 손님과 얘기 중이다. 나이가 들어 몸의 밸런스가 깨졌다는 손님은 정형외과에서 맞춘 특수깔창을 들고 왔다. 좌우 높이를 비교해보니 걸을 때 느끼는 통증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된다.




“우리 가게엔 깔창 안 들고 오셔도 돼요.
제가 사람들 발 연구하느라 안 가본 정형외과가 없거든요. 
특이한 발이란 발은 제가 다 봤어요.”


별일 아니라는 듯 손님의 발 크기와 너비, 발등의 높이를 꼼꼼히 잰 후, 일명 오아시스라고 불리는 폼에 체중을 실어 발 모양을 뜬다. 그러므로 좌우 높이가 다른 특수깔창이 따로 필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신발은 오래 걸어도 피곤하지 않고 발목과 무릎 관절을 보호해준다. 손님 발을 그대로 찍은 폼에 석고를 부어 족형을 뜬 후 재단과 재봉, 밑창 등 크게 16번의 큰 공정에 천 번의 손길이 오간 후에야 단 하나의 신발이 완성된다. 대체로 한 달이 소요된다.





‘신발이 잘 맞고 발이 편하면 만릿길도 가깝다’는 중국 속담이 있다. 비싼 신발이 좋은 신발일 리 만무하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좋은 신발을 찾아다닌 사람도 송림에 와서야 ‘아’하고 탄성을 내뱉는다. 평발이나 요족(평발의 반대), 족근막염(발뒤꿈치 통증), 무지외반증(엄지발가락 쪽 관절이 튀어나오는 것)으로 고통받는 발들도 송림에서는 비로소 제 신을 만날 수 있다. 임명형씨가 무작정 정형외과를 찾아다니며 발을 연구한 공도 물론 크지만 80년 신발 제작의 노하우가 응집돼 있는 까닭이다.





80년 전, 지금 이 자리에 ‘송림화점’으로 처음 가게를 열었던 1대 이귀석 씨는 금강, 칠성, 에스콰이어 창업주들과 함께 제화업계 1세대다. 그는 일제 시대였던 1933년, 서울에서 유일하게 한국인이 운영하는 ‘상동양화점’에서 구두 만드는 일을 배웠다. 신발을 만들면서 깨우친 것은, 세상 사람들의 발을 들여다보면 어느 하나 똑같은 발이 없다는 거였다. 1960년대 너도나도 기계 설비를 하고 기성화 시장에 뛰어들 때도 이귀석 씨만은 고집스럽게 남았다. 모든 발이 다른데 평균을 만들어 대량생산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 싶었다. 그런 이귀석씨의 마음을 헤아려 가업을 물려받은 건 외조카 임효성 씨였다.


2대 임효성 씨는 이귀석 씨가 만들어놓은 구두 기술 위에 새로운 토대를 세웠다. 1960년대 들어 차츰 등산 인구가 늘었지만, 등산화가 없었던 탓에 영국 군화를 신고 산행하는 이들이 많았다. 거듭 영국 군화의 밑창을 수선한 것이 국내 최초 등산화창 몰드 개발과 국내 1호 등산화 제작으로 이어진 배경이다. 내 발에 꼭 맞는 수제등산화였으니 입소문은 어마어마했다. 여기에 77년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반한 산악인 고상돈 씨가 송림등산화를 신고 안나푸르나 정상에 오르며 그 유명세는 더해졌다. 그 후 송림등산화의 모험은 세계 최초로 3개 극(極)지점과 7대륙 최고봉 등정에 성공한 탐험가 허영호 씨와 함께한다. 북극, 남극 횡단에 이어 베링해협까지 건너더니, 지난 5월에는 허영호 씨의 개인통산 다섯 번째 에베레스트 등정 때도 최정상을 함께 밟았다.





“프로 산악인이 송림을 찾는 건 기성화에서는 자기 입맛에 맞는 등산화를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죠.

원정을 가게 되면 습도나 기후에 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등산화를 예측해서 만들어야 하는데

그 요구라는 것이 워낙 디테일하거든요.”


송림의 등산화는 지속적으로 진화했다. 3대 임명형 씨는 아버지가 단단하게 다져놓은 등산화 기술에 ‘쉘러’원단을 접목했다. 고어텍스보다 기능이 뛰어난 최고급 원단인 ‘쉘러’는 대량생산하는 등산화 업체에서는 단가를 맞추기 어렵다. 그래서 수제 등산화를 만드는 송림에서만 유일하게 이 원단을 등산화에 쓴다.





때마침 등산화를 찾으러 외국인 손님들이 방문했다. 등산 마니아인 제이슨은 한국인 지인에게 추천받아 송림을 신어본 뒤에 자신의 친구에게도 주문제작을 적극 권했다고 한다. 친구는 등산화를 신자마자 ‘나이스!’ 하면서 몇 번이고 엄지를 들어 보였다.





현재 송림수제화를 이끌고 있는 3대 임명형 씨는 아버지 덕에 국민학교, 중학교 시절 내내 가죽으로 된 수제화를 신었다. 그때는 운동화만 신어도 잘사는 집이었고 고무신을 신는 아이들이 많았던 시절이다. 하지만 반짝이는 구두가 오히려 부끄러웠다. 일부러 고등학교 입학 후에는 운동화만 신었다. 가업에도 관심이 없어 금속회사에 취직했다. 그런데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어려서부터 어깨너머로 익힌 제화기술이 어느 틈엔가 자신의 것이 되어 있었다. 군대에서는 부대원들의 군화 밑창을 일일이 수선한 통에 군 생활이 편했다. 제대 후 금속회사 복직이 두어 달 미뤄지면서 아버지를 도와 가게 셔터맨을 하게 됐다. 하지만 그 후로 영영 송림을 떠나지 못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일반 가게에서는 손님이 왕이잖아요.
그런데 저희 가게 손님들은 이상하게
아버지께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거예요.
그리고 선물도 보내고 편지도 보내더란 말이죠.
내가 생각한 그저 그런 신발일이 아니구나,
그때 깨달았죠.”


그것이 계기였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신발을 만드는 일의 가치를 목격한 것이다. 본격적으로 기술을 배우면서 차차 임명형 씨의 단골손님들도 늘어났다. 올 때마다 모찌떡을 들고 와서 ‘모찌떡 아줌마’로 부르는 손님부터 산삼 8뿌리로 술을 담가 보낸 손님, 전라도 광주는 물론이고 완도, 목포 등 전국 곳곳에서 찾아왔다. 심지어 미국에서 주문하는 손님도 있다. 최근에는 방문이 어려운 뉴욕 손님에게 문자로 발사진, 걷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받고 무려 6번이나 택배를 주고받았다. 뉴욕으로 ‘본’을 보내고 손님이 발 모양을 떠서 보내면 가봉할 신발을 만들어 보내고 이후 최종 완성된 신발을 다시 보냈다. 이쯤 되면 영리를 최우선으로 하는 가게는 확실히 아니라는 감이 온다.





사무실 한쪽에 놓인 요상한 물건의 정체를 알게 되자 심증은 더 굳어졌다. 발목이 틀어진 사람과 발목이 꺾인 장애인들을 위한 신발이었다. 발바닥이 아닌 발등으로 바닥을 짚기 때문에 밑창의 위치가 다르고 발목이 틀어져 신을 수 없으니 옆 지퍼를 달아 신발을 씌우게 만들었단다.


서울시 장애인복지시설협회와 함께 임명형 씨가 매달 한 번씩 장애인 시설을 찾은 지도 2년이 넘었다. 젊어서는 장애인 차량지원 봉사를 했고 2년 전까지는 후원금만 보냈는데 어느 날 장애인 시설에 직접 가보니 맞춤형 신발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단다. 그래서 직접 찾아가 꼭 필요한 2~30명은 무상으로 신발을 맞춰주고 그 외에는 발에 맞는 깔창을 잡아주는 식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 다양한 방법으로 사회에 환원해 온 것은 송림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전통이다. 1대 이귀석씨부터 2대 임효성 씨를 거쳐 3대 임명형 씨까지 지속해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셈이다. 엄청난 규모의 기업은 아니지만, 사회적 책임감의 스케일만큼은 대단하다. 임명형 씨는 조만간 장애인 봉사활동에 장차 송림을 끌어갈 큰아들 승용 씨(25)를 참여시킬 계획이다. 이것만큼은 반드시 대를 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난해부터 기술을 배우고 있는 4대 임승용 씨는 대학에서 제화패션산업학을 전공했을 만큼 이미 진로를 정했다.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아 신발 끈 하나를 매더라도 남들과 다르게 맸는데, 그런 자신의 모습이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닮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가업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고 한다. 80년을 이어온 기업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자신은 가업을 이어가야 할 책임에 많이 무겁다는 고백도 털어놓는다. 아버지 이후, 송림 100년 후를 구상하는 모습이 스물다섯 또래의 무게와는 사뭇 다르다. 자신이 직접 만들어 신고 있는 신발도 보여준다. 총 네 번의 실패 끝에 다섯 번째 완성한 신발이라며 뿌듯해한다. 한데 옆에서 임명형씨가 ‘그거 신발 아니에요!’ 한마디 하며 껄껄 웃는다. 내가 보기엔 세련된 디자인이 가미된 멋진 신발처럼 보이는데 말이다. 승용 씨도 아버지의 말씀을 아직은 모르겠단다. 신발이 아니라는 게 무슨 얘기인지 자신이 만들어 신고 걸어 다니면서 테스트하는 중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기술에 대해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직접 가르쳐주신 적이 없어요.
스스로 터득하게끔 기다려주셨어요.
그게 아버지가 제게 남겨주신 거예요.
일일이 가르치고 조언하지 않고
그저 지켜봐 주고 기다려주는 것.”



임명형 씨는 아버지에게 배운 그대로 승용 씨를 대한다. 만들다 실패를 해야 어느 지점이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송림에는 최소 20년에서 40년에 이르기까지 자리를 지킨 장인들도 있지만 승용 씨와 함께 송림 100년 후를 책임질 젊은 기술자들도 두 명 있다. 그들에게도 일체 세세한 가르침이란 없다. 어쩌면 다양한 발 모양만큼 수많은 실패를 하며 다져진 기술이 지금의 송림을 지탱해온 양분인지도 모르겠다.


계단을 내려오며 입구에 걸려있는 액자를 다시 보았다. ‘송림수제화는 바보입니다’라고 쓰인 글귀가 부끄러운 고백이 아닌 당당한 포부였음을 알겠다. ‘송림’이라는 이름처럼 오래도록 푸른 거목으로 그 자리를 지켜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_글,사진| 천준아

_서울문화재단 <서울, 人에게 묻다> (2016-2017년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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