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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네맘 천준아 Jul 16. 2022

천호동 동명대장간 - 3대째 불을 다스리는 담금질



푹푹 찌는 한여름 낮, 천호동 로데오 거리를 걷는다. 강동구에서 가장 핫한 여기도 이 시간만큼은 한산하고 조용하다. 조금만 걸어도 땀에 젖고 숨이 막히는 요즘은 외출하는 게 오히려 미련하게 느껴질 정도다. 태양의 맹공격에도 로데오 거리 주변엔 신축 공사가 한창이다. 브랜드 아파트가 태양에 정면으로 맞서 쉼 없이 올라가고 있다. 소위 뜨는 동네인 이곳은 새로운 변화에 유연해 보이지만 유독 어울리지 않는 간판이 하나 눈에 띈다. ‘동명대장간.’ 대장간에 들어서자 30도가 넘는 바깥 온도는 그나마 양반이었음을 온몸으로 느낀다. 쇠를 달구는 화덕 때문에 대장간 안은 50도에 육박한다. 그마저 오후가 되면 내부에 쌓아놓은 철들까지 뜨거워져 여기야말로 이 일대에서 가장 핫한 곳이 된다.





오전 6시, 어김없이 강영기 씨(65)가 화덕에 불을 지피는 것으로 대장간의 하루가 시작된다. 대장장이로 살아온 지 52년이 흘렀지만, 그 오랜 세월에도 한여름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선풍기의 바람조차 대장간 내부 열기에 잡아먹히고 만다. 쇠를 달굴 때 불꽃의 최고 온도는 무려 2천도. 그러니 턱밑으로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지만 피할 데라곤 없다. 어차피 밖으로 나가봤자 맹렬한 폭염뿐. 하루에 옷을 한두 벌씩 갈아입더라도 오히려 여름이 낫다고 한다. 추운 겨울에는 실내와 바깥의 온도 차가 너무 커서 감기를 달고 지내는 일이 허다한 데다 겨울은 매출 또한 춥기 때문이다.


“온통 공동묘지였어.
집도 한 채 없었고,
정말 이 근처에는 아무것도 없었지.”


이 동네의 50년 전 풍경을 강영기 씨가 떠올린다. 본격적으로 아버지, 故 강태봉 씨를 도와 대장간에 나오기 시작했던 1964년, 그 당시엔 포장된 길이 없어 온통 질퍽한 땅이었기 때문에 늘 장화를 신고 다녔단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뒤로는 공동묘지, 인적도 없는 외진 곳이라 아버지는 이곳에 대장간을 열었다. 이른 아침부터 쇠의 모양을 잡는 매질이 쩌렁쩌렁한 울림으로 반복됐기 때문에 여간 시끄러운 게 아니었다. 그랬던 곳이 먹자골목을 중심으로 주변에서 상권이 가장 활발한 곳으로 변했으니 뽕나무밭이 바다로 변한 것만큼이나 낯설다.





강원도 철원이 고향이었던 아버지는 1937년 철원에서 대장장이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6.25 직전, 서울로 오게 되면서 지금의 자리에 대장간을 연 것이다. 그 후엔 강영기 씨가 자리를 지켰고, 또 십 년 전부터는 강영기 씨의 아들 강단호 씨(37)까지 합류해 3대에 걸쳐 무려 79년간 대장장이 명맥을 잇고 있다. 그사이 맞춤제작을 하던 대장간들은 하나둘 문을 닫았고 강동, 송파, 강남 일대에서는 유일하게 ‘동명대장간’만 남았다.





“공사장에서 쓰는 ‘정’ 주문이 많지.
어떤 날은 하루에 3~400개씩 들어오니까.”


대장간 매출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건설현장에서 돌을 부술 때 사용하는 ‘정’이다. 아버지 밑에서 대장장이 일을 배울 때만 해도 호미, 낫, 칼과 같은 농기구와 생활도구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 농기구를 찾는 이들은 주말농장이나 집 앞 텃밭에서 소일거리로 밭을 일구는 사람들뿐이다. 게다가 칼은 다시는 대장간에서 주문해 사용하지 않는 도구가 되었다. 녹이 슬고 수시로 칼날을 갈아야 하는 수고로움을 감당하기엔 워낙 좋은 제품의 칼들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70년대 건설 붐이 일어나면서 ‘정’을 비롯해 건설현장에서 쓰이는 다양한 도구들의 주문이 늘어났고 이제는 곡괭이 모양을 한 등산용 지팡이 등 새로운 주문 제품들도 추가로 생겨났다.


농기구에서 공기구로의 변화보다 아버지 세대와 강영기 씨 세대를 가르는 더 큰 변화의 주역은 바로 ‘기계’였다. 아버지 때에는 모든 공정을 손으로 해야만 했다. 화덕에 불을 지피고 행여나 불이 사그라들까 줄기차게 펌프질을 하는 것부터, 화덕에 쇠를 넣어 풀무질(달구는 것)한 뒤엔 빨갛게 달구어진 쇠를 모룻돌에 올려놓고 모양을 잡는 매질(두들기는 것)을 거치고, 마지막에 쇠를 식히는 담금질(물에 넣는 것)까지 계속 손이 갔다.


http://blog.naver.com/i_sfac/220799695238

(매질하는 영상)


그중 특히 쇠를 힘껏 두드려 펴고 늘리고 뾰족하게 다듬는 매질만큼은 너무나 고된 작업이다. 망치로 내리칠 때의 반동 때문에 어깨나 손목의 관절이 남아나질 않는다. 대장장이 경력 30년이 되던 해, 베테랑 강영기 씨도 매질하다가 자신의 손가락을 망치로 잘못 내리치고야 말았다. 위험천만한 일이다. 게다가 풀무질할 때 수시로 튄 불꽃에 왼쪽 팔에는 온통 화상 자국이다. 그런데, 풀무질을 위해 바람을 불어넣는 기계와 매질을 대신해주는 기계가 고안되면서 힘은 덜 들고 시간은 단축되었다. 물론 ‘기계’ 때문에 대장간에서 그 일을 맡았던 인부들은 직업을 잃게 되었다.





강영기 씨가 대장간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한 건 1964년, 열네 살의 일이다. 학교 대신 대장간에서 아버지를 스승으로 섬기며 어깨너머로 대장장이 일을 배웠다. 아버지는 매우 엄한 분이셨다. 옛 어르신들이 대체로 그렇듯 칭찬보다는 채찍질에 능하셨다. 점심을 먹고 난 오후에 꾸벅꾸벅 졸면 뭉툭한 쇠망치로 툭 툭 치며 잔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예전에 대장장이는 정말 천한 직업이었어.
하도 일하기 싫어서 세 번 도망갔지.
목수도 했다가 리어카 만드는 일도 했다가
마지막엔 건설현장에서도 일했었어.”


군대에서 분대장에게 목공을 배운 후 광진교 쪽에 목공소를 열었지만, 벌이가 시원찮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뚝섬 인근에 리어카 바퀴만 따로 만드는 가게를 열었지만, 가게 주인이 그 자리에 집을 짓는다고 해 쫓겨났다. 하지만 대장간으로 돌아오는 건 죽기보다 싫어서 공사 현장에 제 발로 찾아갔다. 그때 잠실 주 경기장 철근 올리는 일부터 포항제철 사택 아파트 공사와 판문점에서 강원도를 잇는 벙커 작업에도 참여했다. 그런데 하필 벙커의 끝이 아버지가 처음 대장장이를 시작했던 철원일 줄이야. 결국, 철원에서 강영기 씨는 방황에 종지부를 찍고 천호동으로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탕아는 대장간 일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날 때 호기심으로 장검 만들기에도 도전했다. 쇠를 접어서 때리고 붙이고 늘리기를 수십 차례. 마치 물고기 비늘처럼 이어 붙인 장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에 뒀는지 까마득하다. 문득 드라마 주몽에서 대장장이 ‘모팔모’가 만들고 싶어 하던 ‘강철검’이 그런 모양이었을까 상상해 보았다.


강한 쇠를 만들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뜨거운 불에 오래 달구는 풀무질도, 모양을 잡기 위해 수십 번 두들기는 매질도 아니다. 바로 뜨거움을 다스리는 담금질에 있다. 찬물에 쇠를 넣어 식히는 것을 담금질이라 하는데 그 시간이 몇 초만 짧아도 혹은 몇 초만 길어도 쇠가 늘어지거나 혹은 부러진다.


대장간 일은 건설 붐과 함께 승승장구했다. 때마침 새로 지은 좋은 집도 한 채 구입했다. 하지만 IMF 때 동네 주민의 보증을 선 게 틀어지면서 1억이 넘는 빚을 지게 됐다. 그 일로 강영기 씨는 열불이 나는 마음을 억누르다 화병이 났고 결국 위암 수술까지 하게 되었다. 강한 쇠를 단련하는 데 능한 강영기 씨도 자기 마음의 불을 다스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도망가고 싶었던 마음을 다잡아준 것은 전국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달리 방법도 없어 쉼 없이 주문받은 것을 풀무질하고 매질하고 다시 담금질하다 보니 어느덧 빚을 청산했다.





6살 때부터 고3 때까지 태권도를 했던 강단호 씨의 꿈은 대장장이는 아니었다. 운동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원하던 꿈이 좌절되고 건축학과를 졸업한 뒤 취업한 건설회사는 적응이 힘들었다. 몸으로 부딪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하루 종일 사무실 의자에 앉아있는 것은 고문과도 같았다. 몸은 좀 고되더라도 대장간 일을 이어가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은 그런 성향도 한몫했다.


십년 전, 아들 강단호 씨가 대장장이로 살고 싶다고 했을 때 강영기 씨는 불같이 화를 냈다. 못 배운 자신에게 대장장이는 운명과도 같았으나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건설회사에 입사한 80년생 아들의 꿈이 대장장이여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단호라는 이름처럼 너무도 단호하게 3대 대장장이가 되어 동명대장간을 이어가겠다는 아들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뜬금없이 ‘강단호.’ 순정만화 남자주인공 이름이어도 무방할 만큼 개성 있는 이름의 유래가 궁금해 물어보았더니 강영기 씨의 대답이 너무나 의외다.


“단옷날 낳았거든.
음력 5월 5일에 낳은 거야.
그래서 단오라고 하려다가
돌림자가 ‘호’라서 단호가 되었지.”


재미있는 이름 짓기는 단호 씨에서 끝나지 않는다. 단호 씨의 네 살배기 아들 이름은 ‘강대한.’ 그렇다. 가장 추운 겨울날에 낳아서 그 이름을 붙였단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공간에서 함께한 것도 어느덧 10년째. 그러다 보니 앉아서 쉴 공간 하나 없는 좁은 대장간 안에서도 호흡이 척척 맞는다. 하지만 여전히 날을 바짝 세워야 하는 연장들은 모두 아버지가 전담하고 있다. 단호 씨에게 맡기면 시간이 몇 배나 드는 까닭이다. 아버지 강영기 씨 눈에 단호 씨의 실력은 딱 손주 대한이 수준이다. 이제 막 걷기 시작했지만 능숙한 발놀림은 아닌 것이다.


아직 실력이 미치지는 못해도 강영기 씨가 높이 사는 아들의 장점은 자신과 다른 관점에 있다. 최근 중국산 값싼 제품들이 늘어나면서 대장간 주문량이 2~30% 줄어들었다고 아쉬워하는 아버지에게 단호 씨는 저렴한 중국산을 들여놓으면 손님들이 가격에 따라 선택하기 쉽고 대장간에서 만드는 튼튼한 제품과 구별이 되기 때문에 오히려 비교하는 효과도 있어 좋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흐뭇하게 바라보는 아버지에게 단호 씨가 지금껏 털어놓지 못한 비밀 하나. 어린 시절, 단호 씨에게 아버지가 대장장이라는 것은 너무나 창피한 일이었단다. 그런 자신을 아버지가 알고 계셨을지 모르겠다고 조심스레 말하는 단호 씨. 강영기 씨에게 아들을 대신해 물었더니 강영기 씨는 다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모른 척했단다. 나는 다시 단호 씨에게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만약 대한이가 나중에 아버지를 창피해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 단호 씨는 대장장이가 얼마나 값진 직업인지 아들에게 잘 설명해 주겠다고 말한다.


강단호 씨의 목표는 일단 동명대장간을 100년까지 무탈하게 잇는 것이다. 앞으로 21년이 남았다. 그 사이에 대장간 체험 프로그램도 진행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단다. 그가 아버지만큼이나 훌륭한 마스터가 되는 날까지 더욱 견고하게 자신을 담금질할 수 있길 바란다. 뜨거운 열정을 쉼 없이 타오르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스리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_글,사진| 천준아

_서울문화재단 <서울, 人에게 묻다> (2016-2017년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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