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꼭 100년이 되었다는 ‘종로양복점’에 가는 길. 1916년 종로에서 시작한 양복점이 지금은 을지로 3가에 있다. 을지로 골뱅이 골목에서 백 년 된 노포(老鋪 :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점포)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백 년 가게에 대해 상상한 이미지가 있어 시간의 더께가 쌓인 오래된 체취나 백 년의 기백 같은 것이 가게 외관에서 묻어나지 않을까 하는 밑도 끝도 없는 기대를 했다. 하지만 3대째 내려오는 백 년 가게는 골뱅이 골목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오피스텔 빌딩의 618호였다. 백 년 가게의 위상을 고려해봤을 때 조금은 초라한 첫인상이었다. 마치 맞춤양복이 처한 현주소인 것만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가게 한쪽 면에 온통 양복 원단들이 빼곡하게 쌓여있는 옷장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올가을과 겨울에 입기 좋은 멋스러운 색상과 패턴의 양복도 눈에 띈다. 이 작은 공간의 한쪽 귀퉁이 작업대에서 ‘종로양복점’의 3대 사장, 이경주 씨가 멋쩍게 웃으며 반겼다.
“어쩌다 보니 을지로까지 옮겨왔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 볼 면목이 없지.
처음 시작은 종로였거든.
한때는 종로 피맛골 앞에
2층 건물도 지을 만큼 잘 나갔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창업주 이두용 씨는 보신각 옆에 양복점을 열었다. 조선시대 초부터 도성을 여닫는 시간은 종루에 매달린 종을 쳐 알렸으므로, 자연히 그 일대에 ‘종로’라는 지명이 붙었다. 1대 이두용 씨는 당시 정치 1번지였던 종로에 터를 잡고 종로양복점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그리고 종 모양을 디자인해 양복점의 상표로 등록했다. 처음 밋밋했던 종 모양은 2대, 3대를 거치면서 옆에 돌기 하나씩이 더 붙었다. 돌기는 단순히 디자인적 의미를 넘어 종로양복점의 자부심과도 같은 것이다. 종로양복점의 세 번째 돌기인 3대 이경주 씨가 그 옛날 번성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할아버지는 수완이 참 좋으셨지.
한국인이 연 양복점이라고 해서
일본양복점들의 견제가 상당했는데
할아버지가 학생복을 제작해 틈새를 노린 거야.
애국심에 불타는 조선인 학교 선생님들이랑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홍보해서 자리를 금세 잡았지.”
일본인 양복점에서 심부름부터 시작했던 1대 이두용 씨는 자비를 들여 일본유학길에 오를 만큼 양복 기술에 대한 애착이 상당했다. 산업박람회에는 2m가 넘는 사람 인형을 직접 제작하고 맞춤 양복을 입혀 홍보할 만큼 열정도 대단했다. 그 덕에 1920년대 종로양복점은 개성과 함흥까지 분점을 내게 되었고 직원만 200명이 넘는 규모로 발전했다. 종로 피맛골 앞에 2층 건물을 지은 것도 그즈음이다. 1층엔 매장과 숙직실이 있었고 2층은 공장이었다. 단골 가운데엔 이시영 초대 부통령도 있었고 그 유명한 김두한도 있었다.
“김두한은 참 의인이었대. 길가다 추위에 떠는 사람을 보면 양복을 벗어서 줬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가난한 학생들을 보면 전당포에서 돈이랑 바꾸라고 또 양복을 벗어주고.”
백 년 가게다 보니 어디에서도 듣지 못할 보석 같은 이야기가 쏟아진다. 게다가 보물 같은 물건들도 가게 곳곳에서 볼 수 있다. 50년은 족히 넘었다는 재단용 가위와 줄자, 그리고 패턴 자를 비롯해 연대를 추정하기 어려울 만큼 낡은 다리미와 어깨 다림판, 그리고 그 옛날 히로히토(裕仁)가 일본 천황으로 즉위하면서 사용한 연호인 ‘소화(昭和, 1926년)’가 적힌 영수증까지 발견할 수 있다.
1대 이두용 씨로부터 종로양복점을 계승한 것은 2대 이해주 씨였다. 아들만 무려 아홉 명을 두었던 이두용 씨는 아홉 아들 가운데 넷째였던 이해주 씨를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었다. 그런데 이해주 씨는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졸업하고 막 은행에 입사한 터였다. 하지만 이두용 씨는 막무가내로 지인에게 부탁해 만주 조지아백화점 양복부에 이해주 씨를 부탁했던 것이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장남부터 차례로 세 명의 아들을 건너뛰고 왜 하필 은행에 취직까지 한 넷째 이해주 씨였던 것일까?
“옛날 분들은 장남에게 좋은 직업이 아니고선 대를 잇게 하질 않았어.
그런데 양복쟁이는 천대받던 직업이었거든.
그래서 장남에겐 양복부속품 가게를 차려주고,
차남에겐 공장 책임직을 주고,
셋째는 워낙 공부를 잘해서 일본 유학을 보내고,
그러다 보니 넷째인 아버지가 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
분명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니었을 거란 짐작을 해본다. 이두용 씨는 보성전문학교 상과 출신인 이해주 씨가 자신보다 더 양복점을 잘 꾸려갈 거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됐건 아버지 말씀에 군소리 없이 양복 기술을 익히고 돌아온 이해주 씨는 1대 이두용 씨가 작고한 1942년부터 종로양복점을 운영했다. 그 시절 사진을 보니 젊은 시절 이해주 씨의 또렷한 이목구비가 영화배우 저리 가라다. 아마도 세련된 양복을 차려입은 모던보이 사장은 손님들을 끌어들이는 모델 역할도 톡톡히 했겠다 싶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유언대로 아버지는 오로지 정성껏 양복을 짓는 것 외엔 몰랐다고 이경주 씨는 회고한다. 심지어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직원들과 옷감을 짊어지고 경산으로 피란을 가서는 군인들 군복을 줄여주고 바지를 만드는 일을 쉬지 않았다.
‘쉼 없이 끝없는 정성을 다하자’는 의미의 ‘지성무식(至誠無息)’은 1대 이두용 씨가 남긴 종로양복점의 정신이다. ‘중용’에서 비롯된 이 말에는 정성을 다하면 드러내지 않아도 빛나고, 움직이지 않아도 변하며, 의도하지 않아도 이루어진다는 삶의 철학이 담겨 있다. 실로 그러했다. 서울에서 ‘종로양복점’을 모르는 이들이 없었다. 맞춤양복의 전성시대였다. 종로 네거리부터 미도파백화점(현 롯데백화점 본점)까지 온통 양복점 가게가 줄을 섰다.
그즈음 3대 이경주 사장도 양복의 세계에 발을 딛게 된다. 큰형은 한국전력에 다니고 있었고 둘째 형은 화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준비를 하던 셋째 이경주 씨는 전공인 건축학을 살려 건설회사로 취직하는 대신 양복점으로 출근하게 되었다. 물론 가업을 잇는 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였지만 배우는 과정이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에 늘 도망치고만 싶었다. 하루에 10벌, 한 달로 치면 300~400벌을 만들던 시절이었다. 어찌나 옷감을 잘라댔는지 하루 종일 가위질을 하고 나면 손아귀가 부어오르고 결국엔 굳은살까지 잡혔다.
“하루에 10벌을 만들었다는 얘기는
하루 손님이 30명이었다는 거야.
10명은 치수 재고, 10명은 가봉하러 오고,
10명은 완성된 걸 찾아간 꼴이니까.
그게 매일 반복된다고 생각해 봐. 밥 먹을 시간이 있었겠나.
5남 1녀였는데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 결혼식에도 나만 못 갔어.
일 좀 그만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양복 기술을 익히는 건 좀처럼 쉽지 않았다. 분명 배운 대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손님에게 입히면 이상하게 한두 군데 몸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중 손님 한 명은 대놓고 완성된 양복을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 기억은 지금까지도 트라우마처럼 남았다. 허나 그런 때마다 아버지는 말을 아꼈다. 아들에게 단 한 마디 핀잔도 주지 않았다. 손님에게 호되게 혼이 난 날은 2층 공장으로 올라가 할아버지 때부터 근무했던 최고의 기능장에게 꼼꼼하게 다시 배웠다고 한다.
모든 것은 ‘지성무식’이 해결해 주었다. 쉼 없이 정성을 다해 기술을 익히는 동안 이경주 사장을 찾는 단골도 늘었다. 장가간다고 예복을 맞추고는 20년이 지나 포항공대 교수가 되어 ‘좋은 옷’ 해달라고 찾아온 손님도 기억에 남지만, 죄송한 마음에 잊을 수 없는 손님도 있다. 한창 일거리가 밀려서 잠도 설쳤던 어느 날은 자주 오는 단골의 양복을 미처 완성하지 못했다. 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며칠만 더 말미를 달라 연락할 방도가 없었다. 예정된 날짜에 방문한 손님은 대뜸 내일 자신의 결혼식에 입을 양복이라고 했다. 결혼 예복이었던 셈인데 결국 못해준 꼴이 됐다. 그렇게 섭섭한 일을 겪고도 꾸준히 들렀던 그 손님에겐 세월이 지나도 마음의 빚이 남아있다.
그 시절, 서민들에게 양복을 맞추는 일은 큰맘을 먹지 않으면 힘든 일이었다. 한 달 치 월급과 맞먹는 가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껏 계약금을 걸어두고도 완성된 양복을 찾아가지 못한 이들도 많았다. 양복점엔 손님들이 계약금 대신 놓고 간 시계들이 전당포마냥 넘쳐나기도 했다. 서민들에게 양복은 인생의 중요한 시기, 새로운 시작과 닿아있는 근사한 이벤트였다. 졸업 선물로, 입학 선물로, 취직 선물로 주로 양복을 맞췄다. 잘나가던 양복점의 아들로 컸지만 이경주 씨도 변변한 양복 한 벌 해 입은 기억이 없다. 딱 한 번 대학 입학했을 때 아버지가 손수 만들어주신 감색 반코트는 지금도 선명하다. 양복점 3대 사장이 되어 막상 금고 열쇠를 손에 쥐고 나서야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비싼 옷감에 직원도 여럿이라 양복점은 아무리 바빠도 많이 남는 장사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경주 씨가 3대 사장이 된 것은 1980년, 서른다섯의 일이었다. 종로양복점 상표에 세 번째 돌기가 아로새겨졌다. 하지만 운명처럼 맞춤양복은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바로 양복에도 기성복 시장이 열린 것이다. 물론 80년대 이전에도 기성양복은 있었다. 하지만 소규모였던 탓에 맞춤양복점에 큰 타격은 없었다. 그런데 새로운 기성양복의 물결은 제일모직에서 시작되었다. 지금껏 맞춤양복의 원단을 직접 제조하던 대기업이 직접 경쟁에 뛰어든 꼴이다. 처음 맞춤양복점들은 의기투합해 불매운동을 벌였다. 제일모직에서 생산하는 원단을 사지 말자 했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치수를 재고, 가봉하고, 완성되면 찾으러 가야 하는 맞춤양복에 비해 기성양복은 저렴한 데다 손쉽게 바로 구입할 수 있었다. 젊은이들이 대거 기성양복으로 몰렸고 수순처럼 맞춤양복점들은 하나둘 문을 닫았다.
종로양복점도 긴축재정에 들어갔다. 할아버지가 경영하던 시절 직원 200명은 까마득한 꿈이 되었다. 80년대 10명 남은 직원이 다시 5명으로 줄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할아버지가 세운 피맛골 앞의 2층짜리 건물은 재개발로 철거되고 그 자리에 르메이에르 빌딩이 들어섰다. 하지만 이경주 씨는 양복점을 포기하지 않았다. 기성양복이 판을 바꾼 시대적 흐름에 어쩔 수 없이 결국 종로에서 을지로까지 밀려나고 말았지만 1916년부터 지켜온 역사였다. 그리고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그리고 자신에게로 전해진 ‘지성무식’의 철학 또한 저버릴 수 없었다. 그 정신 하나로 버텨온 것이 올해로 백 년을 맞은 것이다.
“이대로 물러서면
죽어서 할아버지, 아버지를 어떻게 만나?
적어도 애썼다, 고생했다는 소리는
들어야 할 것 아니야.”
끊임없이 새로운 패션 아이템들이 진열되고 사라지는 이른바 SPA 브랜드가 패션시장을 주도한 지 오래다. 대기업이 직접 기획하고 제조해서 유통까지 하는 저렴한 패스트 패션이 전 지구적인 트렌드인 셈이다. 새로운 아이템의 회전 주기도 길어야 2주밖에 안 된다. 그런데 이런 흐름 속에서 치수를 재고 가봉하고 양복을 완성하기까지 열흘이 소요되는 맞춤양복을 고집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를 위한 단 하나의 양복인 거지.
아무리 기계로 정교하게 재단해봤자
완전히 내 치수에 딱 맞춘 나만을 위한 옷은 아니거든.”
사회 전반적으로 개성, 희소성, 다양성에 가치를 두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다시 맞춤양복에 대한 관심이 깨어나고 있다고 이경주 씨는 말한다. 심지어 기술을 직접 사사받고 싶다고 찾아오는 젊은이들까지 생겼다. 의지가 있어 보이는 몇몇은 현재 공장에서 바느질부터 배우도록 하고 있다. 맞춤양복이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공장에서 그 기초부터 닦아야 훗날 재단을 하는 과정에서도 탈이 없는 법이다.
소규모 가업의 가치와 장인정신을 높게 사는 일본은 현재 천 년 넘은 가게가 6개나 있고, 2백년이 넘은 것은 1,600여개, 그리고 백 년 가게는 무려 2만 7천여 개가 운영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백 년 된 가게도 손에 꼽는 수준인 데다 심지어 직접 지은 건물도 재개발에 밀려 철거되는 지경이니 어느 누가 백 년 이후를 꿈꾸겠는가.
이경주 씨에게 종로양복점의 네 번째 돌기에 관해 물었다. 언젠가 대학에서 의상을 부전공하던 딸이 가업을 잇고 싶다고 했을 때, 그는 여자가 남자 양복을 어떻게 만드느냐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스무 군데가 넘는 치수를 재기 위해서는 일일이 남자 몸을 만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후회하고 있다. 여자가 제트기 조종을 하고 타워크레인 운전을 하는 시대라며 당시 자신의 좁은 식견을 안타까워한다.
종로양복점의 한쪽 벽면에는 고즈넉하게 서 있는 보신각 그림이 걸려있다. 마치 백 년 전 할아버지가 처음 가게를 열었던 시절에 대한 향수 같기도 하다. 이 작품을 그린 이는 다름 아닌 이경주 씨의 아들로, 7월 예술의 전당에서 개인전시회를 연 화가이다. 애초에 이경주 씨는 아들에게 기술을 가르쳐 가업을 물려주고픈 마음이었지만 최근에는 양복점의 ‘지성무식’철학을 계승하는 쪽으로 바꿔 생각하고 있다. 해서 자신만큼이나 백 년 양복점에 애착이 많은 아들이 언젠가 가게를 물려받아 경영하는 것으로 백 년 이후를 구상 중이다. 을지비즈센터 618호 창가엔 양복 재킷이 을지로를 내려다보듯 걸려있다. 그 광경이 마치 종로양복점의 새로운 미래를 도모하는 듯 보였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종로양복점의 내일을 응원한다.
_글,사진| 천준아
_서울문화재단 <서울, 人에게 묻다> (2016-2017년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