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anne Jan 01. 2023

태양은 없다: 떠오를 태양, 빛을 발할 별들

엄마 C의 시선


1999년 초에 개봉되었던, 그리고 “비트“와 “무사” 등을 연출한 김성수 감독이 만든 “태양은 없다”는, 그의 영화들 가운데 가장 '급'이 높다고 할 만큼 신선한 감각과 예술성, 탄탄한 스토리를 담고 있는 작품으로,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25세 두 청년이 요지부동의 거대한 현실 앞에서 무너지고 깨어지면서도 그 단단한 현실의 벽에 여전히 온몸을 던져 부딪히는 모습을 그린 - 장르상으로는 버디 무비(buddy movie)에 속한다고 할 - 영화입니다. 요즘 식의 표현으로 “답이 없다”는 말이 어울릴 “홍기”역을 능청스럽게 연기한 배우 이정재는 그해 “청룡영화상”의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1999년 개봉작답게 당시 유행하던 “세기말 감성”, “밀레니엄 시대” 등의 표현과 잘 어울리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 한 명의 주인공이자 권투 선수인 "도철”이 링 위에서 쓰러지는 첫 장면과 그에 뒤이어 나타나는 “태양은 없다”라는 오프닝 타이틀이 영화 전체의 내용과 주제를 압축하고 있는 듯한 이 영화는, 열일곱 살 때 가출해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면서 '돈이 되는'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 홍기와, 한때는 챔피언 후보로까지 지목 받던 유망주였지만 후배 선수에게 KO패를 당한 뒤 권투를 그만 두기로 결심하고 돈벌이를 찾아 나선 도철이라는 두 청년의 '삶'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일확천금으로 큰 빌딩 하나를 사서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 꿈인 홍기와는 달리, “흥신소” 일로 - “심부름센터”는 너무 순화된 표현이기에 - 어쩔 수 없이 그와 엮이게 된 도철은 “펀치 드렁크(Punch Drunk Syndrome)”라는 증상(얼굴 부위를 계속 가격 당한 권투 선수들에게 주로 나타나는 증세로 머리에 가해진 충격과 뇌세포 손상에 의해 혼수상태, 정신 불안 등을 보이는 현상)에 시달리면서도 마음속으로 여전히 권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돈에 대해선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인물입니다. “인생은 한 방”이라면서 자신이 30억짜리 빌딩을 갖게 되는 것이 “길어야 6년”이라고 큰소리치는 홍기를 향해 “짧아야 60년”일 거라고 대답하는 도철의 모습에서 두 사람의 전혀 다른 사고 성향을 엿보게 됩니다.





남의 뒷조사하는 일이 싫다고 그만두겠다는 도철에게 불법으로라도 돈을 벌어야 남들에게 대우 받는다며 설득하던 홍기가 막상 “흥신소”에 맡겨진 '업무'마저 편법으로 처리하다 해고되면서 두 사람 모두 하던 일을 그만두게 되는데, 연예인 지망생인 여성들을 꼬드겨 데뷔시켜 주겠다며 돈을 뜯는 “아이템”도 함께 다루고 있던 홍기의 '고객' 중 하나인 “미미”를 집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도철이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기지만 - 물론 그의 신중한 성격 때문에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면서 - 배우나 모델 같은 화려한 직업을 꿈꾸는 미미 역시 실제 삶은 뜻대로 풀리지 않아 행사장 도우미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처지입니다. 그런 미미가 '제대로 된' 매니저와 운 좋게 연이 닿아 모처럼 초대 받은 파티 장소에 함께 갔던 홍기와 도철이 술김에 분위기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은 뒤, 그 매니저로부터 뒷머리를 얻어 맞은(맥주병으로) 도철을 대신해 합의를 주선했던 홍기는 합의금의 액수까지 속이며 착복을 시도합니다. 처음엔 100만원만 받았다고 거짓말을 했다가 상황을 눈치 챈 도철에게 들켜 결국 400만원임을 실토한 후에도, 끝까지 의리를 지킨 도철이 금액을 반반씩 나누자며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자기 몫을 은행에 입금해 달라고 부탁하자, 그의 통장까지 가로챈 채 함께 살던 집에서 짐을 챙겨 달아나 버립니다.


돈만 생기면 요행수를 바라며 경마장이나 온라인 도박장에 가서 있는 돈을 모두 쏟아 붓는 홍기가 자신의 돈을 탕진하고 나서도 착하고 순진한 도철은 다시 못 이기는 척 홍기를 친구로 받아 줍니다. 오갈 데 없어진 두 사람이 권투를 다시 시작한 도철의 체육관을 잠자리 삼아 함께 생활하며 밤 늦은 시간 음악을 틀어 놓고 춤을 추는 장면이나 주고받는 위트 있는 대사들은, 이후 많은 이들 사이에 회자하는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되기도 했지요.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으면서도 '스타일'을 목숨처럼 중요시하는 홍기가 체육관 바닥에 깔고 자는 담요 밑으로 양복 바지를 넣어 놓고 눕는 - 밤사이 바지의 '줄'이 서게 하려고 - 모습이나, 이제는 더 이상 챔피언 감이 아니라며 자신을 만류하는 관장뿐 아니라 어차피 챔피언이 돼도 큰돈은 못 만질 것 아니냐고 비아냥대는 홍기에게 자신이 링에 오르려는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니라고, 어려서부터 시작한 그리고 자신이 선택했던 복싱이 틀린 길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강변하는 도철의 표정은 짠한 마음과 함께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장면입니다.





영화의 초반부터 자신을 쫓는 사채업자 “병국”으로 인해 마음 편한 날이 없던 홍기는, 이제는 빌린 돈의 원금보다 이자가 열 배는 더 되는 것 같다면서도, 과거에 있었다는 “3600배 배당의 신화”를 잊지 못하고 - 그것이 자신에게 꼭 일어날 일인 양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서 - 재가한 어머니에게서 뜯어낸 돈, 할부 자동차를 저당 잡고 받은 돈 등을 가리지 않고 돈만 생기면 다시 경마장으로 향하는 바람에 있는 돈까지 모두 날리곤 하는데, 자신에게 사흘이라는 마지막 기회를 준다는 병국의 최후통첩을 받자 이성을 잃은 채 보석 가게의 유리를 깨고 물건을 훔치려고까지 합니다. 결국 그것마저 실패한 후 도철과 함께 미친 듯 노래하며 바다로 달려가선 밤새 술을 마시고 자살 시도도 하지요. 물론 그의 평소 성격으로 볼 때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를 말리려고 정신없이 쫓아 온 도철이 아니었더라도 실제로 결행할 의도가 있었는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입니다.


결국 서울로 다시 돌아와 돈을 얻으려 또 찾아갔던 어머니에게서 다음날이 그의 생일이니 미역국이라도 끓여 먹으라며 건네 받은 '푼돈'으로 케잌과 술을 사서 미미와 도철이 있는 집으로 찾아갔던 홍기는, 두 사람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미미가 계약금으로 받아 가방에 넣어 둔 돈을 발견하고 갈등되는 표정으로 그 돈을 바라보고 있다가 일찍 돌아온 도철에게 현장을 발각 당합니다. 오해일 수도, 그의 진정한 '인간성'이 노출된 것일 수도 있는 모습을 목격한 도철이 홍기를 끌고 나와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며 절교를 선언한 후, 안타깝게 자신을 바라보는 홍기가 눈에 밟힌 도철은 그를 험담하는 미미와도 다툼을 벌입니다. 여담이긴 하지만 도철이 홍기를 내쫓는 장면에서 “너 만나고부터 제대로 풀린 일이 아무 것도 없어. 아무리 생각해도 너란 놈은 재수 없는 놈 같아.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고 했던 모진 말이 강력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인지, 이후 음료수 광고에 등장하여 '전 국민'의 귀에 익게 된 "너 만나고부터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가! 가란 말이야!”라는 카피가 생겨났다고도 합니다.





홍기와도 그리고 미미와도 소원해진 도철이 다시 링에 올라 KO 직전까지 가면서 끈질긴 투혼을 불사르는 동안, 가진 돈을 모두 긁어 모아 병국을 찾아 갔던 홍기는 장기를 팔아서라도 빌린 원금과 이자를 갚으라는 병국의 말을 듣자 잠시 방심해 있는 그의 머리를 사무실에 있던 화분으로 내리치고 도망 나옵니다. 스스로도 자신의 행동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쥐어뜯으며 정신없이 길을 헤매던 홍기이지만, 그럼에도 의부를 간호하고 있는 어머니를 병원으로 찾아 가서는 병국에게 가지고 갔던 돈 전부를 이부(異父) 동생에게 건네 주며 이틀 뒤인 어머니의 생신을 챙겨 드리라고 당부합니다. 시합이 끝난 후 절망한 모습으로 락커룸에 앉아 있던 도철은 자신을 찾아 온 홍기에게 “정말 이길 수 있었다”고 울먹이면서 처음으로 연약한 자신을 드러내지요. 실상 특별한 결론이라는 것이 있기 어려운 이 영화의 결말은, 달리 갈 곳이 없는 도철과 홍기가 결국 다시 미미 집으로 찾아가 외출해서 돌아오지 않는 그녀의 문밖에서 밤새 기다리다가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툭탁이는 모습으로 마무리 됩니다.


흥신소 사장이 '주먹 센' 도철의 능력이 필요해서 빚 독촉 일을 다시 그들에게 맡겼을 때, 사업이 도산해 허름한 과일 가게를 하는 채무자의 상점을 찾아가 때려 부수며 협박을 하다가 그의 노모가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결국 모질게 일을 '마무리'하지 못한 후, 늘 가던 빌딩의 옥상에 올라 앉아 나누는 그들의 대화도 이 영화의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입니다. “작년의 경마 최대 배당이 3600배였으니 100만원만 걸었어도 30억짜리 빌딩을 사고 남았다”는 홍기의 말에 “진짜 돈이 최고냐?”라고 묻던 도철은, 돈이 생기면 하고 싶은 일들을 신나게 열거하다가 스스로도 “이게 아니다” 싶었는지 갑자기 말을 멈추곤 “그럼 넌 뭐가 최곤데?”라고 반문하는 홍기에게 “엄마... 우리 엄마”라는 뜬금없는 대답을 내놓지요. 어쩌면 그때 그 일 때문에, 인생의 벼랑 끝까지 몰린 상황에서 어머니를 찾아간 홍기가 자신의 목숨줄 같은 돈을 모두 내어 드리고 왔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따지고 보면 성향이나 가치관에서 거의 공통점이 없는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워 하면서도 친구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듯' 감당할 수 없는 현실과 분투하고 있다는 동질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가진 거라곤 빚뿐인 홍기가 옷만은 늘 번드르르한 정장을 갖춰 입는 모습과 현실의 타이틀 획득은 요원하기만 한 도철이 “Champion”이라고 써 있는 셔츠를 즐겨 입는 모습, 그리고 실제 삶은 밑바닥이면서도 항상 높은 빌딩의 옥상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그 둘의 모습이 그러한 사실을 방증하는 듯도 합니다. 다 망해서 남은 것도 없는 과일 가게 사장에게 '수금'을 목적으로 행패를 부려야 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다 결국 시작하게 된 그들의 행동과 교차되어 보여지는 장면에서, “열일곱 살 때 집 뛰쳐 나온 후 안 해 본 일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나에겐 기회가 안 오더라”는 홍기의 말과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 없다는 거 이제 알았다”고 하는 도철의 일갈이 단지 철없는 젊은이들의 푸념으로만 여겨지지 않는 것은, “태양은 없다”라는 제목이 상징하듯 떠오르는 태양을 기다리며 반짝이고 있어야 할 수많은 별들이 빛도 없는 공간을 떠돌고 있는 모습을 연상하게 되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주변의 젊은이들, 각박한 현실이 힘겨워 술이나 담배 등에서 일시적 위안을 찾고 복권과 같은 요행수에 희망을 거는 이 시대의 청년들을 위해 기도할 때 절로 나오는 간구인 “썩어 없어지고 불면 날아가 버릴 것들에 명운을 걸지 않고 진정한 희망이자 구원(태양)이신 주님을 알게 될 것”을 소망하는 마음 때문인지 화면 속 그들의 삶을 남의 일처럼 생각할 수도, 객관적이고 제 3자적인 입장에서 비난하거나 손가락질할 수도 없습니다. 보석상을 털겠다는 계획마저 실패한 후 바닷가에서 밤새 앉아 있다 새벽에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좋다, 나 바다에서 해 뜨는 거 처음 봐”라던 도철의 말이나 “하기야 도시엔 저런 태양은 없지”라고 그 말을 받는 홍기의 대답은, 영화의 제목과 달리 그들이 몰랐던 어딘가에는 여전히 “태양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려는 의도로 읽힙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지막 대사로 유명한,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다시 떠오를 거야”라는 - 원작에서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어쨌거나 내일은 또 새로운 날이 될 테니까)”라고 했던 대사를 보다 '신선하게' 의역한 - 말처럼, 그들의 삶에도 매일 아침 새로운 빛으로, 그리고 변치 않는 따뜻함으로 임하시는 진정한 '태양'이 늘 함께할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해 봅니다.




딸 J의 시선


영화 이야기에 앞서 한 가지 고백할 것이 있는데, 그 누구도 궁금하지 않겠지만 나는 잘생긴 사람을(물론 예쁜 사람 또한) 아주 좋아한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무례하고 옳지 않은 일이지만 외적인 아름다움을 행복하게 감상하는 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 아니겠냐는 나름의 핑계가 있다. 작품의 주인공인 정우성 배우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잘생긴 게 최고야. 짜릿해. 늘 새로워...” 이렇게 굳이 TMI를 남발한 데에는 이유가 있는데, 꽃미남 배우들의 ‘잘생김’이 [태양은 없다]에서 플롯의 장치 비슷한 것으로 쓰이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한물 간 복서 “도철(정우성 분)”과 크게 한 건해서 폼나게 살 생각밖엔 없는 한량(더 정확하게는 양아치) “홍기(이정재 분)”의 이야기다. 도철은 한때 챔피언 후보로 주목 받았으나 나가는 시합마다 지기 시작한지가 오래고, 설상가상으로 복싱의 부작용인 "펀치 드렁크"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해 자주 코피를 쏟는다. 홍기는 흥신소에서 일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론 이런저런 사기를 치고 다니며, 돈이 생기기만 하면 도박으로 거하게 잃어 버린 바람에 상당한 빚에 시달리고 있다(여기서 이범수 배우가 무시무시한 사채업자인 깡패 역할로 등장하는데, 그 찰랑찰랑한 단발머리가 가히 예술적이다. 그의 '똘마니'들 중 하나로 어린 박성웅 배우도 볼 수 있다).





분풀이하듯 복싱을 그만둔 도철은 체육관 관장의 도움으로 흥신소에서 일하면서 그곳에서 홍기를 만나게 되는데, 홍기의 단칸방에서 함께 지내는 둘은 처음엔 티격태격하며 사사건건 부딪힌다. 홍기는 돈도 되지 않는 권투에 집착하는 도철이 한심해 보이는 반면 도철은 늘 30억짜리 빌딩을 들먹이면서도 자잘하게 사기나 치고 다니는 홍기가 한심해 보이기 때문이다. 반목하던 둘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는 서로를 지켜보며 우정, 혹은 이해, 혹은 전우애 비슷한 것을 키워 나가기 시작한다. 물론 "제 버릇 개 못 주는" 홍기의 '사기성'과 충동적으로 폭발하는 도철의 성질 때문에 둘 사이가 평탄하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특정한 영화를 다루는 글에서 다른 영화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적절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 영화를 더 깊이 이해하려면 김성수 감독의 전작인 [비트]가 포함한 맥락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태양은 없다]보다 2년쯤 전에 개봉했던 [비트]는 정우성 배우가 주인공으로 출연한다는 점과 그 시절 한국 청춘들이 직면한 혼란을 그렸다는 점에서 비슷한 부분들이 있다. 어찌 보면 [태양은 없다]를 [비트]의 후속작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비트]가 거의 컬트적인 추종과 문화적 영향력을 자아낸 것과는 별개로(정우성 배우가 오토바이 위에서 두 손을 놓는 장면은 한국 영화의 유명한 장면들 중에도 대표급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그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특유의 감성이 너무 오글거리는 면도 있고 정우성 배우가 연기한 주인공 “이민”도 살짝 '중2병' 환자 같으며 -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이민”이라는 이름조차 너무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 극중 10대 주인공들의 치기와 반항이 몹시... 비생산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개인적인 소견을 말하자면, 정우성 없이는 [비트]를 논할 수 없을 만큼 그가 영화의 정체성 그 자체이긴 하지만, 나는 정우성 배우가 [비트]에는 그다지 맞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배우 본인도 인터뷰에서 자주 언급했듯 [비트]를 본 어린 학생들이 그를 선망해 담배를 배우고 오토바이를 타다 다쳤다는 등의 말을 듣다 보면, 냉혹한 사회에서 고뇌하고 방황하는 청춘의 어지러움과 절망을 표현하려던 감독의 의도가 사실상 실패한 것이 아닐까 싶어서이다. 순정 만화를 찢고 나온 듯한 정우성 배우의 외모가 "이민"이라는 인물을 너무 멋있게 만들어 버린 것이 [비트]란 영화의 전체적인 메시지에는 오히려 악재였을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비트] 다음으로 선보인 [태양은 없다]에서 김성수 감독은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정우성 배우에 더해 이정재 배우까지 합류시킨다. 역시 둘 다 '심각하게' 잘생겼다. 심지어 중간중간 나오는 장면들, 특히 해변에서 두 남자가 공을 차며 뛰어노는 장면은 그 자체만으로 화보 같을 정도이다. “Let’s Twist Again”이나 “Wooly Bully”, “Love Potion Number Nine” 등의 삽입곡들이 흐르는 장면에선 뮤직비디오 같기도 하고.


하지만 [비트]와 달리 [태양은 없다]에선 이 배우들의 ‘잘생김’이 어울릴 뿐 아니라 플롯의 장치로도 볼 수 있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도철과 홍기의 삶이 너무나 암울하기 때문이다. [비트]에서는 반항적인 고등학생 특유의 낭만, 오토바이와 패싸움에서 오는 어떤 '느낌적인 느낌'이라도 있었지만 [태양은 없다]에서 두 주인공은 그 잘생긴 얼굴로 배우 지망생들의 등이나 치고 흥신소 잡일이나 하며 비좁은 단칸방과 차가운 체육관에서 ‘가련하게’ 잠을 청한다. 언젠가 30억짜리 빌딩을 갖겠다는 홍기의 포부는 허황됨을 넘어 한심할 지경이고 꽤나 의리 있는 친구가 되어 준 도철을 배신할 만큼 ‘한탕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제 무덤을 스스로 더 깊게 파는 듯한 실망스러운 모습만을 보인다. 게다가 도철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홍기를 통해 알게 된 배우 지망생 “미미”와 연애를 시작하지만 그 잘생긴 얼굴에도 불구하고 미미가 안쓰러울 만큼 도철은 가진 게 없다. 복싱의 후유증으로 몸도 성치 않고 충동적이기까지 한 데다가 고집마저 세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오른 링 위에서 결국 패배한 도철의 짓이겨진 얼굴은 더 이상 선망의 대상이 아니다.





감독은 오히려 이 잘생긴 배우들로 이런 ‘밑바닥 인생’들을 대변하게 함으로써 그가 주목하고자 하는 사회의 일면들을 더 효과적으로 강조한 듯하다. 인물들의 외양과 그들의 실질적 삶 사이의 격차가 클수록 관객이 느끼는 위화감도 그만큼 더할 테니 말이다. 나름 비극적 낭만을 가졌던 [비트]와 달리 [태양은 없다]에서의 주인공들은 정말로 태양이라곤 없는 듯한, 응달에서 살아가는 인생들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삶을 살고, 하는 모든 선택과 행동들이 그들을 더 깊은 수렁에 빠트리는 모습이다. 그 절망의 대부분이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었지만 일부는 스스로가 초래한 것만 같은 혼란스러움은, 아마도 영화가 개봉되었던 당시의 청춘들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사실 [태양은 없다]는 [비트]의 후속작이라기보단 ‘계승자(successor)’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한국 사회 청춘들의 민낯이 감독의 의도에 더 부합해 보인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런데 배우들의 ‘잘생긴’ 외모가 맡은 기능은 이것 말고도 하나가 더 있다. 현실의 구질구질한 배경과 극명히 대비되는 주인공들의 외양은 그들이 처한 상황의 절망스러움을 부각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물들을 ‘미워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조금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제아무리 형편없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혹은 가망 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 듯한 사람일지라도, 그 안의 어딘가에 사랑스러움(좀 더 정확히는 ‘사랑받아 마땅함’)과 희망이 내재되어 있음을 두 배우의 외모를 통해 상징적으로 나타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 홍기와 도철은 몹시, 매우 한심하지만 그와 동시에 안쓰럽다. 미워할 수가 없다. 그냥 잘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마지막 감정이야말로 감독이 젊은이들을, 삶이 힘겨운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닐까?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City of the Rising Sun”으로 번역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아니, 태양은 없다질 않았나? 그런데 갑자기 “떠오르는 태양의 도시”라고? 해서 생각해 보니 사실 한국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불리기도 했더랬다. 영화는 태양은 없다,는 비관적인 제목으로 시작하지만 영화 안에서 태양은 선명히 존재하며 아주 아름답기까지 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들은 예전에 밤새 누워 일출을 보며 작은 희망을 찾았던 해변에서처럼, 미미의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며 떠오르는 태양을 본다. 홍기와 도철이 화해한 뒤 함께 바라보는 태양에서, 다시 돌아온 아침과 따스한 빛 안에서, 영화는 "태양은 없는" 듯 살던 이 둘에게도 희망이, 어떤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음을 암시한다. 방향 없이 반항하던 "이민"의 서사가 새드엔딩으로 마무리된 [비트]와 달리, '찌질하게'라도 살아남아 내일을 맞는 주인공들의 모습 또한 [태양은 없다]가 [비트]보다 한 단계 성숙해진 작품임을 시사하고 있다.


태양은 없다,는 말은 상처 받는 게 두려운 젊음이 섣부르게 내뱉은 속단, 혹은 반어법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태양은 있을 뿐 아니라 매일 틀림없이 떠오르고, 우리가 사는 곳은 그 어디이든 "떠오르는 태양의 도시"일 테니 말이다. 그 태양을 창조하시고 매일매일 뜨고 지게 하시는 그분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더더욱... 믿음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만큼, 점점 더 냉정하고 가혹해지는 듯한 나의 조국 한국도 결국에는 햇빛 가득한 "아침의 나라"가 될 것임을 믿어 본다. 주님의 '꼼꼼한' 사랑의 대상으로 그분이 창조하신 태양을 당연히 누려야 할 세상의 구석구석마다 따스한 햇볕이 온전히 가 닿았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이태원의 그들도 남기고 싶었을 한마디: “If...”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