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anne Dec 27. 2022

이태원의 그들도 남기고 싶었을 한마디: “If...”

아래의 포스팅은 네이버 블로그 “영상이몽(映像異夢): 기독교적 영화 읽기" 11월 10일자에 올렸던 글입니다.



딸 J의 시선


모든 것이 그저 평소대로 흘러서는 안 되는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국가 애도 기간은 종료되었으나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상흔을 남긴 참사를 추모하는 일에 '기간'이 따로 있을 수 없겠기에, 이번 주의 블로그에서는 평소 다루던 영화들과는 조금 다른 작품을 이야기하려 한다.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If Anything Happens I Love You)”은 12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다. 2020년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소개되었으며 202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받기도 했다. 대사가 등장하지 않는 이 애니메이션 영화는 삶의 의욕 따위는 모두 잃은 듯 무기력하게 일상을 보내는 한 부부를 조명한다. 대화라고는 전혀 없이,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지도 못하는 듯 살아가는 둘의 옆에는 그들의 그림자같이 생긴 검은 존재가 함께하는데, 이 존재들은 서로 미친듯 싸우며 폭발하기도 하고 무표정하게 시간을 보내는 자신을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두 사람이 각자의 ‘영혼’을 빼어 놓고 살고 있다는, 혹은 생기와 감정이 넘쳤던 ‘과거’의 자신을 완벽히 외면한 채 살고 있다는 암시로 보인다.


그렇게 멍하니 일상생활을 이어가던 중, 습관처럼 빨래를 하던 아내가 빨랫감 속에서 작은 티셔츠를 발견하며 관객은 이 부부를 내리누르는 무기력의 원인에 대해 차츰 깨닫게 된다. 문을 닫은 채 출입을 '금하던' 어느 방으로 간 부부는 작은 침대 위에 함께 앉아 그들의 어린 딸을 추억한다. 그들의 영혼, 혹은 과거를 상징하는 검은 존재들은 딸을 상징하는 존재와 함께 시공간을 날아다니며 세 가족의 행복했던 시간들을 되짚는다. 그러나 사랑만이 가득했던 그 시간들은 어린 딸의 마지막 등교에 대한 기억으로 참혹하게 막을 내린다. 학교로 씩씩하게 걸어가는 딸을 부모의 ‘영혼’은 어떻게든 막아서기 위해 애를 쓰지만, 아이는 결국 국기가 걸린 학교 안으로 들어선다. 잔인한 장면이 직접적으로 표현되진 않으나 닫힌 문 너머로 들리는 총소리, 딸에게서 온 마지막 문자의 내용으로 그 후의 상황은 충분히 유추된다.





“If Anything Happens I Love You.” 영화의 원제목이기도 한 이 문장을 의역하자면 아마도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엄마 아빠를 사랑한다는 걸 기억해]에 가까울 것이다. 미국에서 벌어진 교내 총기 난사 사건의 많은 피해 학생들이 자신의 부모와 가족에게 보낸 마지막 연락과 실제로도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세상에는 있어서는 안 될, 일어나서는 안 될 비극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난다. 1999년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 2012년 샌디 훅 초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을 포함해 지나치게 자주 일어나는 미국의 총격 사건들. 그럼에도 여전히 막강한 재력과 로비 활동으로 총기 규제 법안을 막으려 드는 "전미 총기 협회 NRA(National Rifle Association)"와 여러 음모론자들. 1989년,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여실히 드러냈던 인재, 2014년 벌어진 참사와 희생된 학생들. 그 후에도 수없이 되풀이되는 크고 작은 사건들. 이익만을 생각하는 탐욕에, 공권력의 무능력과 무관심에, 편리를 추구하는 이기심에, "전에도 이랬었다"는 관행의 안일함에 많은 삶을 놓쳤다. 우리는 분명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하다.





이태원 참사 이전에 나는 피로감과 무력감에 아주 가까이 서 있었다. 멀리서, 또 가까이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비극들에 대해 같은 마음으로 슬퍼하는 것이, 다시 말해 세상을 사랑하고 보듬는다는 것이 너무나도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어서였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닮음으로 감수해야 하는 여러 상처와 아픔들이 두려워서 마음에 단단한 껍질을 한 겹 두르고 있었던 것도 같다. 그러나 평범하게 일상을 이어가는 것이 죄스러울 정도의 비극을 또 한 번 마주하고 보니 ‘슬퍼하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슬퍼하지 않는다는 건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과 정확히 같은 뜻일 테니 말이다.


예전에 영화 [괴물]에 대한 글에서 비극의 ‘개인화’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유사한 맥락에서, 이번 비극에 대한 슬픔도 ‘개개인’의 것, 유족들만의 것으로 전락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들 홀로 감내하고 홀로 이겨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비극이 ‘공동체’의 비극이 되어 그 슬픔도 ‘함께’ 나누고 ‘함께’ 책임지기를 바란다. 여태껏 너무 많은 피해자들이 그래야 했듯, 그들만의 힘으로 자신을 추스르고 회복시켜야 하는 동시에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세우는 부담까지 떠맡는 일이 더는 없어야겠다. 그들의 공동체가 그들을 감싸고 함께 비통해 하기를, 함께 울분하기를 바란다. 영화에서 부부는 결국 떠나간 아이를 떠올리고, 그들 사이의 충만했던 사랑을 기억하며 희망을 암시한다. 절망에 잠겨 서로 다른 방향으로 멀어지려던 부부의 ‘영혼’을 억지로 끌어당겨 붙여 놓는 것은 딸의 ‘영혼’으로 보이는 존재다. 그렇게 부부는 ‘함께’ 슬퍼함으로써, 그들 가족의 ‘사랑’을 기억함으로써 ‘치유’의 길로 들어선다.





사랑이 우리를 상처 입히듯 결국은 그렇게 사랑이 우리를 치유하리라 믿는다. 주님의 사랑을 가진 우리가, 자식을 잃은 부모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그분의 마음을 진심으로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그들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슬픔과 절망이 덜어지고 대신 그 자리가 진실과 정의로 채워질 수 있기를 바란다. 슬픔과 절망, 원인 규명과 문제 해결을 향한 노력을 공동체가 나누고 함께 짊어짐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만 떠올리고 추억할 수 있기를, 그래서 더 빨리 치유로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기를. 잊지 말자는, 추모하자는 구호가 따로 필요 없이 우리가 계속해서 이 아픔을 가까이 품고 살아갈 수 있기를. 우리가 ‘함께’ 나눈 사랑과 애통함이 마침내 변화를 불러오기를.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되고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또 주어야 했을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그들을 떠올리고 추억함으로 사랑, 사랑만이 남기를.





엄마 C의 시선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으로 의역된 제목의 단편 영화, “If Anything Happens I Love You”는 미국의 교내 총기 난사 사건(school shooting)으로 딸을 잃은 부모의 아픔을 그린 2D 애니메이션으로, 2020년 11월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후 비평가들로부터 호평과 찬사를 받으며 큰 반향을 일으켰고 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작품입니다. 그 해 한국 배우 윤여정의 “여우조연상” 수상 소식에 가려 크게 주목 받지는 못했지만, 미국 현지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애니메이터 노영란이 제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이름을 올린 작품이라는 점에서 한국 관객들도 관심 있게 찾아 볼 만한 영화라고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따른 순서대로라면 한국 영화를 소개해야 할 차례겠지만 2주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비극이 한국에서 일어난 데다가 - 역시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모르나 봅니다 - 한국인의 연출 참여 때문인지 등장인물들이 아시안으로 그려져 있고 대사가 전혀 없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굳이 외국 작품으로 분류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합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남편과 아내가 긴 식탁의 앙쪽 가장자리에 떨어져 앉아 묵묵히 식사를 하는 우울한 모습이 등장합니다. 마지못한 듯 일상을 이어나가면서도 서로 아무런 대화가 없는 그들 부부의 흑백 톤으로 표현되는 영상 안에서, 아내가 꺼내 든 세탁기 안의 작은 옷과 남편이 바라보는 벽에 남은 자국만 파란색으로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아내가 그 옷을 안아 들고 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방에 들어가 작은 침대 위에 앉자 어린 딸을 동반한 세 식구가 행복하게 드라이브를 즐기는 광경이 펼쳐지면서 화면에는 조금씩 색이 입혀지고, 시간은 다시 뒤로 돌아가 딸이 처음 세상에 태어나던 순간, 맛있는 음식을 욕심내는 아기 때의 모습, 아빠와 함께 축구를 하다 벽 한쪽에 흠집을 내고는 부서진 자국을 파란 페인트로 칠하는 장면, 10살 생일을 맞는 모습 등이 전개됩니다. 여느 때와 같이 좋아하는 축구공을 가지고 등교하던 날 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나고, 딸이 죽기 전 남긴 “If aything happens I love you”라는 문자가 화면에 가득 찹니다. 그림자와 같은 형상으로 나타난 세상을 떠난 딸은, 자신의 죽음 이후 한마디의 대화도 없이 속으로는 서로를 탓하며 고통 받고 있는 - 피해자들이 도리어 자책감과 죄의식을 느끼는 일반적 경우처럼 - 아빠와 엄마를 가까이로 모아 상대방의 상처를 보듬어 주도록 만듭니다.





오프닝 크레딧과 엔딩 크레딧 등을 모두 합쳐도 상영 시간이 12분밖에 되지 않는 이 짧은 영화는 우리가 참사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꼭 전해야 할 위로, “이 엄청난 비극은 당신들의 잘못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무언의 함성으로 관객들에게 들려 줍니다. 이태원 참사 소식을 맨 처음 들었을 때 “왜 '하필' 그곳에 가서...”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던 저부터 속죄의 마음으로 회개합니다. 참사의 장소가 “할로윈 축제”였음에 방점을 두어 사태를 '분석'하는 기독교인들도 적지 않은 듯하지만 사건의 전말이 드러날수록 할로윈 축제 아닌 어떤 행사였다 해도 - 그 이전이나 이후의 어떤 군중 밀집 상황이었어도 - 일어날 수 있던, 즉 '시간'의 문제이자 '예견되는' 참사였음이 속속 밝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그런 논리를 계속해서 펼친다면, 우리의 하나님이 단풍 구경이나 불꽃놀이에 몰리는 군중까진 그럭저럭 '봐 주면서' 할로윈 축제에 모인 군중은 괘씸하여 몰살되도록 하는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그런 편협한 분이 결코 아님은, 더구나 우리가 판단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안다고 공언하면서도 주님의 성품을 왜곡하는 가짜, 사이비 신앙인임은 성경을 통해 분명히 제시되는 바입니다. “나는 내 편지에 여러분에게 음행하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썼습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사람들이나 탐욕하는 사람들, 약탈하는 사람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과 전혀 어울리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하려면 여러분은 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라고 고린도전서 5장 9-10절에서 말하는 사도 바울은, 이어지는 12-13절에서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판단해야 할 사람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것입니다 (what have I to do with judging outsiders? Is it not those inside the church whom you are to judge? God judges those outside)”라고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형제'라 자칭하는(claims to be a brother or sister) 누군가가 악한 행위를 범할 경우 “그런 사람과는 함께 먹지도 말라”고 한 명령(고전 5:11)의 강경함은 읽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까지 느껴지게 만들 정도이지요.





오늘날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 중 제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이 두 가지 있다면, 미국 내의 총기 난사 사태로 수많은 청소년들이 목숨을 잃고 있음에도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총기 소지의 강력 규제 혹은 금지가 법적, 제도적으로 진척되지 않는 일과, 한국 사회에서 “보수(conservative)”의 허울을 쓰고 나서는 사이비 목사들을 기독교계에서 정식으로 문책하거나 퇴출시키지 않는 어이없는 현실입니다. 적어도 미국의 경우는 “전미 총기 협회(NRA)”라는 이익 단체가 엄청난 금액으로 로비를 계속할 만큼의 금전적 유불리(有不利)가 그 이유리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라도 있지만, 이런 참사 때마다 망발을 일삼으면서 '기독교'에 대한 일반의 인식에까지 큰 폐해를 입히는 자들을 한국의 기독교 지도자와 단체들이 방관하는 일에 대해서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그로 인하여 “보수(保守)”라는 - 본래는 무척 긍정적인 뜻을 내포하는 - 용어가 “무지”, “편견”, “가혹” 등과 동의어나 되듯 의미의 변질을 거듭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번 참사가 드러내는 행정력의 부재를 부인하려 “'그런 곳'에 자녀를 보내지 말았어야 할 부모의 책임도 크다”고 쉽게 말하는 이들이, “시간을 되돌려 아이가 그곳에 가지 못하도록 막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회한으로 가슴을 찢으며 몸부림치는 부모들의 애끓는 심정을 조금이나마 공감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너무도 짧은 순간 생이 마감되는 참변을 겪느라 부모님을 포함한 사랑하는 이들에게 “If Anything Happens I Love You”라는 한마디 말조차 남길 수 없었던 그들의 영혼 앞에서 긍휼과 겸비의 자세를 보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는 너 나 할 것 없이 눈앞의 일을 알지 못하는, “덧없이 사라지는 그림자(fleeting shadow)”, “잠깐 보인 후 걷히는 안개(vapor, mist)”, “피었다 곧 시드는 꽃(rapid withering flower)”에 불과(욥 14:2; 시 103:15; 약 4:14)하기에, 어느 누구도 타인의 준비되지 않은 죽음을 두고 자신은 그런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인 양 함부로 호언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들을 “사고”의 “사망자”라고 규정한 정부는 '중립적' 표현이 필요해서 그렇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세월호 참사 추모 리본을 떼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하는 사람들에게 프란치스코 교황(Pope Francis)이 건넸다는 말이 그러하듯, “인간의 고통 앞에 서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림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와이키키 브라더스: 변하지 않는 것, 변해야 하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