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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anne Jan 13. 2023

가족의 탄생: 발생에서 탄생으로

엄마 C의 시선


김태용 감독의 연출로 2006년 개봉되었던 “가족의 탄생”은 당시 흥행 성적이 저조했음에도 많은 평론가들에 의해 “그해의 영화”로 선정되고 다음 해 “대종상영화제”의 “최우수 작품상”과 “시나리오상”, “청룡영화상”의 “감독상” 등을 휩쓸었을 만큼 작품성에서 충분한 인정을 받은 영화입니다. 물론 저 개인적으로도 무척 좋아하는 한국 영화 가운데 하나이지요. 영화의 형식상 연속적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다양한 인물들의 등장과 함께 각기 다른 시간대의 사건들을 뒤섞어 제시하면서 “비선형적(non-linear) 서사 구조”라 불리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면에서도 특이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다수의 영화들이 채택하는 고전적 스토리텔링 방식을 “선형적(linear) 네러티브/서사 구조”라고 부른다면, 시간의 흐름에 역행하거나 사건의 순서를 무시하는 플롯이라는 점에서 “가족의 탄생”과 맥을 같이한다고 할 “펄프 픽션(Pulp Fiction)”과 “스내치(Snatch)”,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Lock, Stock and Two Smoking Barrels)” 등은 “비선형적” 코드를 취하는 영화들로 분류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일곱 명의 중심인물들(미라, 무신, 현철, 채현, 매자, 선경, 경석)로 구성된 두 가정의 이야기를, 마치 각기 다른 세 편의 단편영화를 모아 놓은 것처럼 비순차적이고 불연속적으로 그리고 있는 이 영화에서, “미라”와 “현철”은 누나와 동생 관계, 그리고 “매자”와 “선경”은 엄마와 딸의 관계입니다. 그 일곱 인물 가운데 특별히 '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 그들 모두를 주인공으로 부른대도 전혀 문제가 없지만 - “미라”, “무신”, “현철”, “채현”으로 구성된 가정이 '배출한' 젊은 여성 “채현”과, “매자”, “선경”, “경석”으로 이루어진 가정에서 '키워 낸' 청년 “경석”이 '차세대'이고 그 둘의 사랑이 이 두 가정의 연결 고리가 된다는 점에서 전체 이야기를 두 사람의 관계에 맞춰 조망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5년 동안이나 연락 한 번 없다가 누나인 “미라” 앞에 느닷없이 나타난 “현철”이 스무 살쯤 연상으로 보이는 “무신”을 아내라고 소개하는 장면을 통해 이 가정의, 그리고 이 영화의 스토리가 범상치 않게 전개될 것임을 암시하는 그들 세 사람은, 무신의 “전남편의 전처의 딸”인 “채현”의 등장으로 갈등을 겪게 되고, '사건' 직후 간식거리 사온다며 만 원짜리 한 장 달랑 들고 집을 나선 채 영영 돌아오지 않는 현철로 하여 가족 해체의 위기까지 맞게 됩니다. 이토록 '기가 막힌' 상황 속에서도 채현을 업고 나서려는 무신을 붙잡은 미라로 인해 - 화면상에 정확히 보여지지는 않지만 관객들이 그렇게 짐작할 수 있기에 - 이들 세 여성(미라, 무신, 채현)은 같은 집에서 함께 살게 됩니다.


한편 일본 관광객 대상 여행 가이드로 일하는 “선경”은, 수시로 '애인'을 바꾸다 현재는 유부남과의 사이에 아들을 낳고 사는 엄마 “매자”를 혐오하고 원망하면서 가끔 한 번 만나는 정도의 관계만 유지합니다. 오랜만에 불쑥 나타난 엄마를 타박하며 밀어내는 그녀에게 엄마의 애인인 “아저씨”는 엄마가 많이 아프다는(아마도 오래 살기 어려우리라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아픈 엄마를 대신해 유치원 운동회에 한 번 같이 가 주는 정도의 친밀감을 쌓자마자 엄마가 돌아가신 후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 남동생 “경석”을 - 아내와 두 아들이 있는 '아저씨'가 키워 줄 수도 없을 테니 - 자신이 키우기로 선경은 결심합니다.





이렇게 각자의 가정에서 자란 채현과 경석이 어른이 돼 툭탁거리는 연인 관계를 시작합니다. 어느 누구에게든 지나친 친절을 베푸는 채현과 그녀를 이해하기 어려운, 그리고 그런 그녀로 인해 더 큰 외로움을 느끼는 경석 사이의 사랑이 원만할 리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갈등에 새로운 국면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은 무신의 생일을 맞아 시골집으로 내려온 채현의 곁에 있던 경석을 주책스럽게 반기는 “엄마들”, 즉 미라와 무신의 살가운 태도입니다. 엄마의 자리를 대신해 온 누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을 텐데도 모성을 충분히 누리기 전 엄마를 잃었기 때문인지 애정 결핍 비슷한 감정으로 채현의 태도에 늘 갈급함을 느끼던 경석에게 '두 엄마'의 사랑은, 채현의 지금까지의 행동을 이해하게 하는 실마리로뿐 아니라 채워지지 않던 그 자신의 목마름에 해갈이 될 단비로도 예감되기 때문이지요. 동생이 만들어 준 브로치를 자랑스럽게 가슴에 달고 합창단의 일원으로 방송에서 노래하는 누나의 모습을 채현의 가족과 함께 경석이 시청할 때 선경의 뒤쪽으로 불꽃놀이가 펼쳐지듯 표현된 아름다운 장면은, 각각의 가정에서 “탄생”했던 두 가족이 합쳐져 다시 하나의 가족으로 “탄생”하리라는 - 반드시 그들 둘의 결혼이 아니더라도 - 즉, “1+1=2”가 아니라 “1”이 될 수도 있는 '기적'의 가능성을 암시하며 영화를 끝맺게 합니다.


세상에 하나뿐일 핏줄이어서인지 오랜만에 만나는 애인을 기다리듯 설레는 마음으로 동생을 맞이했던 미라가 결국은 친동생 형철보다 생판 남인 무신을 더 사랑하며 '진짜' 가족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나, 쌀쌀맞고 무뚝뚝해 변변한 연애도 못하는 선경이 자신(리얼리스트)과는 달리 여전히 낭만적인 사랑을 구가하며 딸인 자신을 오히려 순위 밖으로 밀어내는 듯해 더 미운 사람(로맨티스트)이던, 그럼에도 백퍼센트 혈연임은 분명한 엄마가 아니라, 가정이 있는 '잘 모르는' 아저씨의 아들이기도 하기에 피가 '반'만 섞인 이부(異父)동생인 “경석”과의 관계를 통해 사랑의 의미를 발견하며 진정한 “로맨티스트”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면, “'가족주의'에 대한 유쾌한 반란”이라는 영화 소개가 무척 적절하다는, '유쾌한' 느낌을 공유하게 됩니다.





흔히 “보통의 가정” 혹은 “평범한 가족”이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하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이런 식의 가정과 가족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수 있을 뿐 자신의 상식에 부합하는 '정상적' 가족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될지 모릅니다. 더욱이 수직적 위계 질서로 이루어진 가정의 형태만을 경험해 본 사람들에게는 이처럼 순수하게 사랑으로 묶여진 수평적 가족 관계가 생경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같이 그저 담담하고 잔잔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인간' 관계가 있는 대로 목소리를 높이는 '혈연' 관계의 부각보다 더 실재감 있게 느껴지는 것은, 특히 요즘 들어 많이 제작되고 있는 소위 액션 영화의 소재로서 자녀를 잃은 아버지, 아내를 잃은 남편 등을 내세우며 - 그나마 최근에는 그 역할을 맡은 '어머니'가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 복수를 목적으로 한 무자비한 폭력과 살인을 보여 주기 위한 구실로 소비되는 “가족 팔이” 장사를 생각할 때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같은 신앙인들을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은 비기독교인들에 비해 이런 문제에서의 사고가 보다 유연하고 관점이 훨씬 폭넓어야 마땅하겠지요. 교회에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외치고 “형제님”, “자매님”을 스스럼 없이 입에 올리면서, 실제 마음속으로는 “우리 집”에 사는 그 사람들만 '진짜' 가족으로 여기며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돌보도록 맡기신 다른 영혼들은 타인, 이방인처럼 느낀다면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일이 될 테니까요. 영화를 다시 보면서 제 머릿속을 맴돌았던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Whoever loves father or moth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and whoever loves son or daught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ESV)”라는 같은 장 37절을 “혈연 관계만을 기초로 한 가족을 하나님과 그분이 맺어 주신 가족보다 우위에 두는 일은 주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말씀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이 될런지요.




딸 J의 시선


영화 “만추”의 감독으로, 혹은 “탕웨이의 남편”으로 더 유명할지 모르는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영화 중 하나다. 거기에는 물론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이 작품을 볼 때마다 마음이 ‘따땃’해지기 때문이란 것이다(‘따뜻’이 아니다. ‘따땃’이 맞다). 사실 이번에 리뷰를 준비하며 꽤 오랜만에 다시 영화를 감상했는데, 보는 내내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괜히 민망했더랬다.


이번엔 영화 줄거리를 소개하기에 앞서 영화의 테마에 대해 잠깐 언급하려 한다. 이 영화는 가족이란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감독의 고찰이다. 태어날 때부터 혈연으로 결정되는, 저절로 "생겨나는" 것만이 ‘가족’인지, 아니면 함께 보낸 시간들과 쌓아온 신뢰, 추억, 이해 등을 기반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는 것인지를 탐구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서로 아무 관련 없는 인물들의 개별적 이야기 세 가지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묶여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영화이지만, 사실은 세 개의 막(three acts)으로 나뉘었다고 보는 게 더 맞을 듯하다. 먼저 “제 1막”에서는 작은 분식점을 운영하며 혼자 사는, 야무진 듯 물렁한 듯 귀여운 “미라(문소리 분)"의 삶을 보여준다. 집을 떠나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남동생 “형철(엄태웅 분)”의 연락을 받은 미라는 설레는 마음으로 동생을 기다리는데, 등장부터 껄렁껄렁한(특히 그 경박한 웃음소리가 압권인) 형철은 그동안 결혼을 했다면서 '묘령'의 여인을 데리고 들어온다. 동생보다 스무 살은 위로 보이는 “무신(고두심 분)"을 마주한 미라는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싫은 소리는 하지 못한다. 변변한 직업도 없는 형철은 당연하다는 듯 누나 집에 무신과 함께 눌러앉고, 어쩔 수 없이 동생 부부와의 어색한 동거를 시작한 미라는, 눈치가 없는 건지 염치가 없는 건지 붙임성과 능청만큼은 최고인 형철 '덕분'에 그럭저럭 평화로운 일상을 유지해 간다.





“제 2막”은 면접 시간에 늦게 도착하고도 온갖 너스레를 떨며 자리에서 일어서던 면접관들을 기어이 붙잡아 앉힐 정도로 '생활력'이 강한 “선경(공효진 분)"에 관한 이야기다. 고궁에서 일본 관광객들을 안내하는 가이드로 일하며 어떻게든 일본에서 일을 찾아 한국을 떠나려는 선경은, 유부남과 불륜 관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와 아들까지 낳은 엄마 “매자(김혜옥 분)"에게 원망과 답답함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까칠하고 예민한 선경이지만 투병을 시작한 매자를 완전히 외면하지 못하고 아픈 엄마 대신 이부 남동생의 유치원 운동회를 가 줄 정도로 그녀에게 마음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만날 때마다 목격하는 엄마의 ‘구질구질한’ 삶에는 속을 부글부글 끓일 수밖에 없다.


“제 3막”의 주인공은 기차에서 처음 만난 후 풋풋한 연애를 시작한 “채현(정유미 분)"과 “경석(봉태규 분)"이다. 나름 알콩달콩 잘 노는 귀여운 커플로 보이지만 실제 둘의 사이는 곪아 가고 있는데, 채현이 착해도 너무 착하다는 것이 바로 그 이유다. 다른 '남자' 선배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나, 사랑싸움을 하던 와중에도 다른 '남자' 선배의 부친상 소식을 듣고 달려가 장례식장에서 일을 돕질 않나. 게다가 경석의 누나가 집에서 같이 밥을 먹자고 초대한 날에는 웬 아는 남자의 아이를 함께 찾아 주다가 휴대폰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연락도 없이 경석과 누나를 바람맞힌다. 참다 못한 경석은 ‘헤픈’ 채현에게 원망을 토해 내며 이별을 고한다. 물론 그래 놓고도 본가에 내려가려 기차를 타는 채현을 찌질하게 또 쫓아오지만 말이다.





가족의 “탄생”이라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이 영화는 앞서 말한 질문에 대해 가족은 "만들어지기도" 한다고 대답한다. “1막”에서 미라는 그녀 인생에 도움이라곤 되지 않는, 책임감도 대책도 없는 동생 형철보다 오히려 그의 ‘아내’인 무신과 미묘한 유대를 쌓는다. 무신은 밖으로 나도는 형철 대신 미라가 형광등 가는 것을 도와주고, 미라는 못 이기는 척 형철과 무신을 따라 놀러 나서며, 동생 부부를 위해 새 이불을 사고, 그들과 함께 어색한 ‘가족사진’을 찍기도 한다. 그러던 중 무신의 전남편의 딸아이가 나타나면서 - 그것도 형철이 아이에게 미라의 집 주소를 알려 준 결과로 - 셋 사이에 큰 갈등이 일어난 후, 잠깐 나갔다 오겠다며 집을 나선 형철이 그길로 돌아오지 않는데, 남겨진 두 여자가(아이까지 합치면 세 여자가) 조용히 밥상에 마주 앉아 그를 기다리는 모습은 이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들 중 하나이다. 마루 밖 마당의 풍경이 바뀌며 시간의 흐름이 감지되는 사이, 마당에서 뛰어노는 채현과 대비되어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는 미라와 무신(묵묵히 밥을 먹는 미라와 아무 말 없이 미라 쪽으로 반찬을 당겨 주는 무신) 사이에는 어떤 ‘이해’의 흐름이 느껴진다. 그들 둘 다 사랑하지만 신뢰할 수는 없는 형철이란 남자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공통의 이해를 통해 ‘같은 편’이 되어 감을 암시하는 듯도 하다.





“2막”에서 선경은 끝까지 엄마와는 화해하지 못한다. 엄마가 불쌍하면서도, 불륜 관계의 '애인'에게 정신이 팔려 자신에겐 아무 관심 없어 보이는 모습이 밉기 때문이다. 그 결과 2막에서 자주 나오는 선경의 대사는 엄마는 모르는구나, 엄마는 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 같은 것들이다. 뾰족뾰족한 선경은 어디 좀 같이 가자는 매자의 조심스러운 부탁을 신경질적으로 거절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엄마의 죽음을 맞고 만다. 장례식을 마치고 멍하니 앉아 있던 그녀는 매자가 전에 놓고 간 짐가방을 열었다가 자신의 어렸을 적 사진과 장난감 등 엄마와의 추억으로 가득한 물건들을 보고는 아이처럼 서럽게 엉엉 운다. 엄마가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만큼 자신도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음을, 그럴 노력조차 하지 않았음을 깨달아서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장면이다. 하지만 선경에게는 엄마와 하지 못한 것들을 어린 남동생과 함께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아픈 엄마 대신 참석했던 남동생의 유치원 운동회에서 그 까칠한 선경이 토끼 가면까지 뒷통수에 단 채 동생과 이어달리기를 하고 병아리같이 노란 운동복을 입고 뛰어오는 동생을 꼭 끌어안는 모습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듯하다.


그리고 마지막 “3막”에서, 1막과 2막에서 뿌린 씨앗이 결실을 맺고 ‘가족’에 대한 이 영화의 철학이 클라이맥스에 도달한다. 사실 3막의 주인공인 채현은 1막에서 무신을 찾아왔던 어린 여자아이이고, 경석은 2막에서 나온 선경의 어린 남동생이다. 경석이 엄마나 다름없는 누나 선경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녀가 동생을 사랑으로 키웠다는 것, 그것이 그렇게나 미워했던 엄마 매자에 대한 용서와 이해이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누나에게 왜 결혼 안 하고 사냐며 엄마처럼 ‘구질구질’하다고 화를 내는 경석에게 선경은, 엄마는 정이 많으셨던 거야, 하며 매자를 감싸는 모습을 보인다.





너무 남들을 챙겨 주는 탓에 "네 옆에 있으면 더 외롭다"며 결별을 선언했던 경석이 결국 채현을 잊지 못하고 그녀의 귀향길에 쫓아 나섰던 것은 사실 아직도 좋아하는 마음이 남아 있어 감정 혹은 본능이 이성을 이겼다 뿐이지 둘 사이의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됐다는 뜻은 아니다. 채현은 여전히 착해도 너무 착하며, 경석에게 “헤픈 게 나쁜 거야?”라고 가만히 묻는 모습에서 오지랖과 '인류애'가 넘쳐 나는 그녀의 성격이 쉽게 바뀌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석은 채현의 고향집에서 너무나 능청스런 아줌마가 되어 무신을 “언니”라 부르며 사는 미라와, 그런 미라와 스스럼없이 장난치는 무신을 만나고, 또 그 둘을 “엄마들”이라고 부르는 채현을 보게 된다. 관객들이 알지 못하는 동안 얼마나 아름다운 ‘가족’이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며 채현이 왜 그렇게 사랑과 정이 넘치는 사람으로 컸는지 납득하게 되는 부분이다. 경석도 신기한 듯 즐거운 듯 이 '세 모녀'를 바라보는데, 이제 채현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그가 앞으로는 그녀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긴다. 그리고 오래전 두 여자가 말없이 밥을 먹던 그 마루에서, 이제는 네 사람이 활기차게 웃으며 함께 식사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따땃’하고, 어찌 보면 영화의 주제를 요약한 장면이라 생각되는 순간도 3막에서 등장한다. 선경이 속한 합창단의 공연이 TV로 방영되는 것을 경석이 채현과 그녀의 ‘엄마들’과 같이 보는 장면인데, 아름다운 선율을 함께 듣는 채현, 무신, 미라 세 여자의 얼굴에서 카메라가 한동안 아주 사랑스러운 것을 보듯 머문다. 그 모습을 보던 경석이 스크린 속 누나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 누나만 쳐다보는 그의 시점을 따라 카메라도 선경을 오래도록 비춘다. 그 시선이 어찌나 애틋한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마음이 뭉클하다.





이처럼 "만들어"졌으나 다른 어떤 가족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는 세 모녀와 선경-경석 남매를 통해 이 영화는 '다양한' 가족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비슷한 맥락에서 나 역시 가족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지 못한 사람들도 본인이 선택한, 또 신뢰하는 친구나 동료, 스승, 연인, 배우자 등과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고도 '필요'한 일이라 생각할 뿐더러 남보다 못한 가족들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넘쳐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니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혈연적 가족보다 자신이 선택하고 이루어 낸 사회적, 후천적인 가족이 더 의미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가족도 타인일 수 있고 타인도 가족일 수 있을테니.


그렇다고 내가 – 또 이 영화가 – 혈연이나 법적 가족 관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자신이 ‘선택’한 공동체가 그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떠한 관계에서든 진정한 사랑과 유대는 ‘이해’를 근거로 하며, 그 이해는 “피가 섞였다”고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만 ‘쌓이’고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을 말하려는 것뿐이다. 물론 나와 우리 엄마는 사이가 아주 좋다(말 그대로 내 "Soulmate", 영혼의 단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지금껏 단순히 “엄마”와 “딸”이라는 역할에만 의존하지 않고, 동등한 인격체로 서로를 알아 가고 이해하려는 노력과 시간을 쌓아 왔기 때문이며, 모녀의 관계를 떠나서도 서로의 '친구'이자 진정한 '이해자'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의 아들이 굳이 이 땅으로 내려와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것도 그런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손으로 직접 창조하셨으나 단지 그 사실만으로 소유권을 주장하는 대신, 인간의 삶과 고통, 기쁨과 절망과 유혹을 직접 ‘경험’하고 정확히 ‘이해’하여 진정한 ‘가족’이 되고자 하신 마음이었을 것임을. 그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관계 안에서, ‘가족’이라는, 또 우리가 사랑해야 할 ‘형제자매’와 ‘이웃’이라는 개념이 더 넓어지고 더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 모두가 국적이나 성별, 나이, 언어, 문화, 지위에 관계없이, 형용할 수 없는 사랑을 통해 "입양된" 그분의 자녀임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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