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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anne Jan 28. 2023

원더풀 라이프: ‘순간’의 선택이 결정할 ‘영원’

딸 J의 시선


2023년의 시작과 함께 다룰 영화를 고민하던 중 문득 떠오른 작품이 [원더풀 라이프]였다. 아무리 그래도 새해 초부터 사후 세계를 그리는 영화를 언급하는 건 좀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끝’을 염두에 두고 진입하는 시작점에도 의미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강력하게 추천했고, 결국 엄마의 동의하에 '채택'되었다.


줄거리부터 짧게 설명하자면, 앞서 말했듯 [원더풀 라이프]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다루는 영화이다. 영화의 설정 속에서는 세상을 떠난 이들이 이승과 저승의 중간쯤 위치한 듯한 낡은 건물에 도착해 대합실에서 기다리다가, 그곳 직원들과 면접실에서 한 명씩 만나게 된다. 낡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직원은 사망자에게 당사자의 죽음을 통보하고 조의를 표한 후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이제 이들은 7일 간 이곳에 머물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사흘 안에 골라야 하고, 직원들은 그 추억을 짧은 영화로 재현해 낸다. 그리고 6일째 되는 날에는 모두가 모여 영상을 감상하는 자리를 갖는데, 영화를 보던 영혼에게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면 그는 ‘다른 세계’로 넘어가 그 기억 속에서 영원히 머물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이처럼 월요일에 도착한 영혼들이 ‘영원’에 닿기 위해 직원들과 보내야 하는 일주일 간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나는 이 영화를 연출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아주 좋아한다. 사실 일본 대중문화엔 나와 맞지 않는 부분들도 많지만, 감정을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무덤덤함을 특징으로 삼는 범주의 일본 영화는 꽤 선호하는 편이고 그중에서도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들이 제일 취향에 맞는 듯하다. 사실 어릴 적 [원더풀 라이프]를 봤을 때는 당연히 이 감독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던지라 더 커서야 이 영화가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이라는 걸 깨달았는데 그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 어렸을 적의 나는 ‘죽음’을 굉장히 두려워했었다. 죽음을 생각하면 떠올리게 되는 그 영원한 단절과 어둠, 몰이해가 끔찍하게 느껴졌고 그래서인지 대중매체에서 천국을, 그러니까 사후 세계를 낙관적이고 이상적으로 다루면 그것이 꽤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그랬던 당시의 성향 때문에 나는 [원더풀 라이프]도 아주 긍정적이고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이 영화의 설정이 성경적 세계관과는 일치하지 않으나 하나님을 배제한(?) 하나의 창작물로만 본다면 동화같이 아름답고 따뜻한 '사후관'을 갖고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고레에다 감독 특유의, 어딘가 씁쓸하고 냉소적이면서도 그 토대만은 다정함을 잃지 않는 작품들의 대표적 표본이랄까? 그렇게 이번에도 마음이 ‘따땃’해질 준비를 하고 영화를 다시 틀었다가 예전과 달리 영화의 설정이 그저 낭만적으로만은 다가오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영화 속 사망자들은 자신에게 제일 소중한 추억 하나를 고르기 위해 모두가 끙끙대며 고민하는데, 살았던 삶이 각기 다른 만큼 가지각색의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한다. 여전히 소녀처럼 고운 얼굴로 어린 아이 적의 추억을 고르는 할머니도 있고, 사창가를 들락거리던 경험담을 자랑처럼 늘어놓는 중년의 남자도, 젊은 시절 자살을 시도하다 절벽 아래 철로를 보는 순간 어머니와 연인의 얼굴이 떠올랐다는 남성도, 갓난아기였을 때의 희미한 기억을 - 과연 그런 기억이 가능한지 모르지만 - 택하고자 하는 청년도 있다. 이들은 결국 남이 보기엔 ‘별 것 아닌’ 듯한 추억을 선택한다.


자신들의 여성 편력에 대해 늘어놓던 좀 추한 남자들도 결국에는 아내와의 추억을, 딸의 결혼식에서의 기억을, 가벼운 관계로 만나던 여자가 자신이 아플 때 죽을 끓여 주며 병간호를 해 주던 순간을 택한다. 어느 여고생은 친구들과 놀러 갔던 디즈니랜드에서의 기억을 선택하려 하지만, 그곳의 직원이며 역시 어린 나이에 사망한 "시오리"의 충고를 듣곤 엄마 무릎을 베고 귀 청소를 받던 기억을 택하기로 마음을 바꾼다. 결국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 영원히 머물기를 원하는 순간은 하찮지만 소소하고 따뜻한 것들이라는 의미로 해석해도 좋을 듯하다. 어떤 노부인이 자신이 어렸을 적 발생한 관동 대지진 때의 기억을 택한 것도 흥미로운데, 대다수 사람들에게 그저 끔찍한 재해로 기억되었을 그 일이 어린 그녀에게는 피신한 대나무 숲속에서 친구들과 놀고 어머니들이 해 준 주먹밥을 먹을 수 있던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다는 것이다(한국인 대량 학살 사건 당시 씌워졌던 '조선인'들에 대한 누명을 벗기려는 감독의 노력도 여기에 덧입혀진다).





한편 영원까지 가져갈 하나의 기억을 택한 사망자들과 직원들이 함께 그 기억을 재현해 나가는 장면들은 꽤 매력적이다. 나는 창작자가 표현해 내는 사후 세계, 혹은 천국의 모습에서 그의 철학이나 신념, 더 정확하게는 ‘이상’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 사실 그래서 장진 감독의 [로맨틱 헤븐]을 봤을 때는 좀 뜨악했었다 -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의 사후 세계가 좀 '궁상'맞은데다 가내수공업적이기까지 하다는 사실이 우스우면서도 귀엽다. 사망자들과 직원들이 작은 세트장에서 일인 다역을 하고 소품 정리를 하는 모습을 보다 보면 고레에다 감독이 상상하는 사후 세계가 사실상 독립 영화 촬영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여기서 또 재미있는 설정은 영혼들을 ‘영원’으로 이끄는 영상이 기록의 객관성이 아닌 기억의 주관성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사망자가 영상을 보며 그 기억에 흠뻑 빠질 수 있어야 '다른 세계'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직원들은 체계적으로 자료 조사를 하기보다 그 사람 본인이 기억하는 정보를 토대로 추억을 재구성한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 기억을 그대로 복제하는 것이 중요하지 팩트 체크가 목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사망한 영혼이 기억하는 '소리'를 틀고 소품을 디자인하고 세트를 지으며 미세한 디테일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지만, 동시에 적절한 망각과 미화 역시 허락한다. 영화 속 등장인물의 대사처럼 기억이란 것이 나름의 현실성은 있겠지만 결국 우리가 상상한 이미지로 바뀌게 되니 말이다. 심지어 사망자 중 한 여인은 자신이 골랐던 ‘기억(유부남인지 모른 채 진심으로 사랑했던 연인과 보냈던 순간)'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았던 일임을 나중에 고백한다. 현실에서 연인은 그녀를 만나러 오지 않았으나 그녀는 마치 그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기억을 자신 안에서 만들어 냈던 것이다.





영혼들을 위해 영상 제작을 하는 직원들이 그 영혼의 과거나 삶에 대해 잘 모른다는 설정도 이 ‘주관성’을 지탱한다. 우리가 흔히 대중매체에서 볼 수 있는 천사나 저승사자처럼 명부를 가지고 다니거나 개인 정보를 줄줄 읊는 것이 아니라 사망자 본인을 통해서만 정보를 얻는 방식이다. 개개인의 삶의 기록으로 녹화된 비디오테이프가 있긴 하지만 가능한 한 사용하지 않는 것도 규칙인 듯하다. 다시 말해 이곳에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없다. 완벽한 진실을 꿰뚫는 객관성도, 모든 기억의 영상을 완벽하게 구현해 낼 수 있는 '힘'도 이 공간엔 없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사망한 뒤 이곳에 도착한 이들은 모두 자신의 ‘천국’을 스스로 선택하고 창조해 나간다고도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했던 기억,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정하는 것도 각자의 판단에 달렸으며 그 기억 속의 소리, 촉감, 온도, 빛, 색감 등등 다 자신이 '기억하는 대로' 재현된다. 본인이 원하는 대로, 본인의 행복을 위해 망각하고 미화하여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완성해 그 속에 영원히 머물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을 배제한 세계관에서 보면 가장 이상적인, 자기 결정권을 최고도로 보장하는 '달콤한' 사후 이해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면서는 어딘가 갑갑하다는 느낌도 받았다. 가장 행복한, 자신이 창조한 기억 속에 영원히 머물 수 있다는 말은 반대로 그 외의 모든 기억을 잃는다는 뜻이 되며, 어떠한 미래도, 발전도, 가능성도 없이 그저 '멈춰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실 고레에다 감독이 이 설정을 진지하게 천국의 표본으로 내세우는 것 같지는 않다. 이 잔잔한 영화에서 그나마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은 대부분 기억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원더풀 라이프]는 여러 영혼들의 기억에 조명을 비추지만 실질적인 플롯은 이곳의 직원들, 특히 "모치즈키"와 "시오리"를 중심으로 흘러가는데,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하나의 기억을 ‘선택’해 영원으로 넘어가는 대신 살아 있었을 때의 기억, 그리고 그 공간에서의 추억을 잊지 않기 원하는, 그런 소수의 사람들을 대변한다.





이곳에 새로이 도착한 영혼들 중에도 선택을 거부하거나 혹은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영화의 시선이 가장 오래 머문다. 70대의 노인 "와타나베" 씨는 자신이 ‘살아 있었다는’ 증거, 그러니까 자신의 삶에 무언가 의미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 받고 싶어 하고, 본인의 삶의 모습이 담긴 비디오테이프 71개(1년당 1개인)를 돌려 보며 자신이 그저 ‘고만고만한’ 삶을 살았다는 것에 괴로워한다. 그렇게 고민하는 와타나베 씨에게 마찬가지로 기억을 선택하지 못한 20대 청년 "이세야"가 건네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자신은 못 고른 게 아니라 안 고른 것이며 이렇게나마 자신의 인생에 '책임'을 지겠다"는 선언이다.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을 대사지만, 영원히 머물고 싶은 추억을 생전에 만들지 못했으니 아무 기억도 선택하지 않는 대신 그 어떤 기억도 잃지 않는 방식으로 삶에 책임을 지겠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이 말을 듣고 무언가 깨달은 듯한 와타나베 씨는 결국 하나의 추억을 고른다. 혈기 넘치던 청년 시절도, 활발하게 일을 하던 중년 시기도 아닌 노년의 어느 날, 영화를 좋아하는 아내와 결혼 생활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한 뒤 근처 공원에 앉아 있던 때의 기억이다. 자신의 담당 직원이던 모치즈키에게 남긴 편지에서 그는 본인의 70년 인생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 어떤 미화나 망각 없이, 오랜 시간을 함께한 동반자와 지난 세월을 조용히 돌아보던 인생 끝자락의 한때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싶다. 단지 어떤 ‘한 순간’의 행복이 아니라 삶 전체를 아우르는 기쁨과 후회, 회환을 모두 안고 가는 것이 그가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는 방식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20대에 사망한 후 그 '순간'을 선택하지 않고 50년 간 직원으로 근무했던 모치즈키는 그보다도 한발 더 나아간 선택을 한다. 와타나베의 비디오를 함께 보다가 그의 생전 부인이 자신의 약혼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모치즈키는, 동료 직원인 시오리의 도움으로 5년 전 사망한 그녀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기억이 20대 시절, 그의 전사 직전 둘이 함께 보낸 순간이었음을 발견한다. 그런 그는 자신도 기억을 선택하기로 마침내 결심하지만, ‘영원’으로 가서 자신을 잊을 것이냐며 절망하는(그를 사랑하는) 시오리에게 그녀와 이곳을 잊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빈말처럼 들리는 이 약속은 곧 지켜지는데, 시오리의 예상과 달리 생전 약혼녀와의 기억이 아니라 바로 전날의 기억을 그가 선택하기 때문이다. 이승과 저승의 중간인 이곳에서 생전의 삶과 ‘죽은 후의 삶’ 모두를 돌아볼 수 있어 행복했노라고 말하는 모치즈키는, 생전의 기억은 물론 그곳에서 지낸 시간 동안의 기억 모두를 안은 채 조용히 사라진다. 기쁨과 절망, 그리고 ‘선택’을 하지 못해 보내 온 긴 시간들을 포함한 인생 전체를 그 또한 책임진 듯하다.


그리고 짝사랑했던 모치즈키를 잊지 않기 위해 여전히 선택을 하지 않고 그곳에 남아 있는 시오리가 모치즈키의 자리로 첫 출근하는 모습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그녀 또한 자신의 모든 감정과 아픔들을, 자기의 삶을 책임지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화가 ‘한 순간’의 행복을 위해 기억을 선택하거나 자신의 추억을 미화하는 등장인물들을 비판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을 보는 감독의 시선은 오히려 따뜻한 연민에 더 가깝다. 다만 "이세야"의 극중 대사를 통해 감독의 생각이 조금 엿보이기는 한다. "과거의 ‘같은 순간’에 머문다는 것은 자신에게 너무 괴로운 일"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말이다. ‘행복’한 순간만을 추구하며 사는 것, 삶의 끝에 ‘행복’만 있기를 바라는 것, 아름다운 ‘한 순간’이 계속해서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 아픔과 상처를 망각하거나 미화해 좋은 시간들만 취사 선택하는 것은 그닥 좋은 삶의 방식이 아니라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삶의 모든 순간과 느낌, 좋고 나쁜 것 모두를 책임짐에 의해서만 그 너머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는, 약간의 삐딱한 격려로 보아도 좋을 듯 싶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와 달리 이제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것, 그것을 어둠이나 단절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음을 새삼 실감한다. ‘영원’이란 말의 뜻이 어떤 순간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꽤 감격스럽다. 무엇보다 나의 천국이 내가 직접 창조해 낸,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행복의 구현이 아니라는 데에 감사한다. 아무리 미화하고 재창조한다 해도 ‘내가’ 만들어 낸 천국은 나의 경험, 나의 상상력, 나의 개인적 성향 등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우주와 그 너머를 창조하신 분께서 내가 상상하는 그 어떤 것도 뛰어넘는, 나 혼자서는 깨달을 수도 다다를 수도 없는 행복과 평온으로 구성된 천국을 지금도, 이후에도, 삶의 끝 너머에서도 누리게 해 주시는 것, 그래서 인생의 밝고 어두운 모든 면을 기꺼이 ‘책임’질 수 있도록 도우신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다.




엄마 C의 시선


일본 영화인 “원더풀 라이프(영어 제목: After Life)”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1998년 작으로 한국에서는 2001년 개봉되었던 영화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첫 작품인 “환상의 빛”을 포함한 총 12편의 영화 모두가 다양한 국내와 국제 영화제에서 여러 부문의 상을 수상한 데다가 2013년 작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 2018년 작 “어느 가족”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을 만큼 '세계적 거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 부족함 없는 뛰어난 연출가입니다.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일본 영화에 대한 편견을 - 기괴한 분위기의 공포 영화나 공감하기 어려운 정서를 강요하는 순정 영화가 대부분이라는 - 가지고 있던 저는 “기쿠지로의 여름(Kikujiro)”,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Welcome Back, Mr. McDonald)”, “쉘 위 댄스(Shall We Dance?)”, “간장 선생(Kanzo Sensei)” 등의 ‘수준 높은’ 블랙 코미디들을 접하게 된 이후 그런 편견을 모두 버릴 수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들이 일주일 간 머물며 ‘다음 세계(천국)’에서 영원히 기억할,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 하나를 선택하는 장소 “림보(limbo)”가 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이기에 영어 제목인 “After Life”가 영화 전체의 줄거리에 더 적합하겠지만, 그런 식의 엄숙하거나 딱딱한 느낌이 아닌, 관객들의 정서에 따뜻하게 다가서는 영화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사후의 삶”이란 의미의(지나치게 영적이고 종교적으로 느껴지는) “After Life”보다 “원더풀 라이프”라는 제목이 훨씬 잘 어울리지 않을까 - 사실 일본어 원제가 “완다후루 라이후”(!)이기도 하고 - 생각됩니다. 이 작품을 무척 좋아하며 높게 평가하는 평론가 이동진이 대학 강의의 커리큘럼에 매 학기마다 포함시키는 영화라는데, 10년 간 다큐멘터리를 연출하며 삶과 죽음, 그리고 '기억'에 관한 고찰의 시간을 보낸 감독이, 배우 아닌 일반인 500명에게 “자신의 삶에서 단 하나의 행복한 기억을 선택한다면?”이라는 질문을 던진 후 그에 대해 '재미있는' 답변을 제시했던 10명을 캐스팅해 대본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도록 유도하는 다큐멘터리 기법을 사용한 것도 그 같은 평가의 주원인 중 하나가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죽은 직후 그곳에 오게 된 이들이 삶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을 한 가지 선택하면 “림보”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그 장면을 짧은 영화로 재현해 보여준 뒤 영원으로 인도한다는 설정은, 비교적 긍정적인 면에서는 “단테”의 “신곡(La Divina Commedia, La Commedia Di Dante Alighieri)” 가운데 “연옥(燃獄: Purgatorio)” 편을, 좀 더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중세 시대의 “면죄부/면벌부(免罪符/免罰符; Indulgentia)”를 연상시키지만, 각 ‘입소자’들의 과거 삶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림보”의 ‘직원(상담원)’들이 망자 스스로 자기 삶의 최고의 순간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들에게 그 기억이 선명히 되살아나는 순간 영원한 시간이 약속된 ‘저 세상’으로 가게 된다는 낭만적인 전제를 생각하면 사실 그렇게까지 깊거나 어둡게 생각할 주제의 영화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편집실에서 혼자 작업하던 감독의 마음속에 문득 떠올랐다는, “내 과거의 삶을 영화로 상영한다면? 정말로 어딘가에 신이 인간의 기억을 기록해 두는 곳이 있다면?”이라는 질문과, 영화 속에서 생애 최고의 순간을 선택하는 데 어려움을 겪던 20대 청년 “이세야”의, “기억이란 우리가 상상한 이미지로 바뀔 수 있다”는 대사에서 엿볼 수 있듯, ‘기억’이라는 것의 의미와 본질에 더욱 천착하는 작품이라고 보아야 옳을 것입니다.


영화의 내용이 진행되는 동안 림보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들이 사실은 그러한 순간을 선택하지 못해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계속 남아 있는 사람들임을 알게 되고, 그 가운데에도 “가와시마”라는 이름의, 딸이 세 살일 때 죽음을 맞았기에 그 딸이 성인이 될 때까지 거기에 있으려 한다는 –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선택해 림보를 떠나게 되면 그 한 가지 기억 외의 모든 것은 잊게 되기에 – 직원의 사연이나, 50년의 인생 동안 안 좋은 기억밖에는 없어 지난 삶 자체를 되돌아보고 싶지 않으며 어차피 더 오래 살았다 해도 특별히 즐거운 기억이 생겼을 것 같지 않다고 말하는 “야마모토”가 “삶의 다른 기억들은 모두 잊고 가장 좋은 단 하나의 기억만 가진 채 떠날 수 있는 곳이라면 그곳은 ‘천국’이 맞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 안쓰러움이 뒤섞인 공감을 느끼게도 됩니다.





월요일에 입소한 망자들의 하루하루가 화요일, 수요일…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그들이 정해진 시간 내에 그 어려운 선택을 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을 공유하게 되기도 하고, 그러한 상황에 본인을 대입시키면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기억, 영원히 머물고픈 순간이 언제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고민하게도 되겠지요. 이 영화의 평론에서 “좋은 영화란 해답 대신 질문을 던져주는 영화”라는 말로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에 주목하며, “어떤 추억을 가지고 있느냐보다 어떤 추억을 선택하느냐가 중요한 문제”라고 영화의 핵심을 분석한 평론가 이동진의 말을 생각하더라도, 영화를 보면서 저절로 고민하게 된 선택의 ‘옵션’들이 모두 하나님을 만난 '이후' 삶에서의 기억들인 저는 그 사실 자체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함으로 죽음 이후 지옥이라는 것의 존재조차 없이 천국에 가기 전 가장 행복하고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추억’을 선택하는 일만이 고민일 수 있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naive'한(순진무구한?) 생각도 동시에 하면서 말입니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머릿속에 겹쳐지던, 90년대에 큰 반향을 일으킨 “사랑과 영혼(Ghost)”이나 한동안 한국에서 크게 흥행했던 “신과 함께” 등은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여러 문제점이 발견되는 영화들이지만, 비신앙인에게 “이 땅에서의 삶의 끝이 과연 모든 것의 끝일까”라는 질문을 한 번쯤 스스로에게 던져 보는 기회를 제공했다면 그것만으로 존재 의미가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신의 71년 인생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선택하지 못해 고통스러워 하는 “와타나베”를 돕다가 그의 아내가 과거 자신의 약혼자였음을 알게 되는, 자신도 선택을 하지 못해 50년 간이나 그곳에 남아 있던 “모치즈키”가, “예전에는 나의 행복한 추억을 필사적으로 찾았지만 5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내가 누군가의 행복이었던 걸 알게 되었다”면서 그것을 참 '멋진' 일이라고 말하는 모습은 보는 이들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지만, 영화의 상황은 비록 죽은 후 생전의 한 순간을 선택하는 설정이라 해도 실제 삶에서는 살아 있는 동안 우리 각자에게 허락된 단 한 가지 선택이 영원에서의 삶을 결정하는 갈림길이 된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아직 선택의 기회가 남아 있는 관객들 모두의 마음 안에 더욱 큰 울림으로 자리 잡아 시시때때로 되돌이켜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길, 기도하며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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