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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anne Feb 05. 2023

괴물: 다가오는 구원, 깨닫지 못하는 우리

엄마 C의 시선


2006년 개봉되었던 영화 “괴물”은 긴 설명이 필요 없는 감독 봉준호가 연출과 각본을 맡고, 역시 다른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는 배우 송강호와 박해일 등이 출연했던, 특별한 설명을 요하지 않을 만큼 잘 알려져 있는 영화입니다. 개봉 당시 누적 관객수가 1300만을 넘었다는 통계가 있지만 그후에도 여러 경로를 통해 영화를 본 사람이 극장에서 직접 관람한 사람보다 더 많을 것으로 - 아마도 한국 ‘국민’ 거의가 보았을 것으로 - 짐작되는, “국민 영화”로도 불릴 만한 작품이지요. 영화가 다루는 주제가 워낙 다양하고 내용 또한 무척 독특한 만큼 어떤 한 가지 장르의 영화로 규정 짓기에 무리가 있어서인지 “호러”, “코미디”, “공상과학”, “사회 풍자” 등의 모든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곤 함에도, 긴장과 흥분, 박진감 등을 고루 느끼며 영화를 보고 난 후 차분한 마음으로 전체 내용을 다시 생각해 보던 저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가 “가족의 탄생”이라는, 얼마 전 다루었던 영화였음을 생각할 때, 저 개인적으론 “가족애에 관한 영화”로 분류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영화 중반과 마지막 장면에 등장한 후 여러 TV 프로그램에서 사용되며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해졌을 배경음악은 물론이지만, 주인공인 배우 송강호를 비롯해 - 역시 “가족의 탄생”처럼 모든 등장인물을 '주인공'으로 부른대도 전혀 문제가 없으나 -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그와 호흡을 맞추었던(또한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주인공 “성우”의 고교 시절 역할로 데뷔했던) 박해일과, 봉준호 감독의 첫 장편영화 “플란다스의 개”에 캐스팅 되면서 감독과 인연을 맺은 배두나 등 연기력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배우들의, 전혀 '연기'로 느껴지지 않는 '연기'를 감상할 수 있는 것도 이 영화가 가진 매력들 중 하나입니다. 역시 저의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여러 주제를 조화롭게 녹여 낸 이 영화가 봉준호 감독의 수많은 걸작 가운데에도 최고의 작품으로 불려 손색이 없다고 여겨질 뿐더러, 주로 조용하고 내성적인 역할을 맡아 왔던 박해일 역시 매사 삐딱하고 불만에 가득 찬 “남일“을 연기한 이 영화에서 가장 자연스럽고도 사랑스러운 연기를 펼쳤다고 생각됩니다.





이 영화의 영문 제목을 “The Host(숙주)”로 붙인 이유에 대해, 괴물이 죽을 때 떨어져 나간 물고기가 사실은 괴물에 기생하는 “숙주” 물고기이기 때문이라고 영화사 측에서 확인해 주었다 하여 - 그리고 이 숙주 물고기가 한국의 생태계를 교란하는 “배스(bass)”라는 어종의 미국 물고기와 닮았다 하여 - '반미'를 주제로 삼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던 작품답게, 영화는 주한 미군 부대 내의 한 의사가 “포름알데히드”라는 독성 물질을 한강에 방류하도록 명령하고 그것이 괴 생물체의 생성을 유발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2000년 당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주한 미군 독극물 한강 무단 방류 사건”과 그 사건의 주범인 육군 군무원 “앨버트 L. 맥팔랜드”를 모델로 했다는 이 영화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는 차치하더라도,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일어난 독극물 방류(모든 생명체에게 유해한)가 탄생시킨 괴물을 죽이겠다고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유독가스(역시 모든 생명체의 살상이 가능한)를 살포해 대는 모습은, 국가 간 이해 관계의 차원을 넘어서는 생명 경시, 환경오염에의 경각심 부재, 단편적이고 근시안적인 문제 대처 방식 등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요구합니다.


바이러스에 전염되었다는 '누명' 때문에 격리된 “강두(송강호 분)” 가족의 탈출을 도운 대가로 터무니 없는 돈을 강탈하는 흥신소 직원의 출연이 부패한 사회상에 대한 코믹한 풍자라면, 매점 '서리'로 어린 동생과 근근이 살아가며 “먹고 살기 힘들다”고 신세 한탄을 하는 “세진”의 처지나, 대학 재학 중 운동권에 몸담은 이력으로 취직도 안 되더라는 “남일(박해일 분)”의 푸념, 정확한 검사와 분석 결과 등이 도출되기도 전에 사람들을 강제로 수용하고 마치 죄인이나 되듯 억압하며 윽박지르는 공권력의 '발휘'를 묘사한 장면은 좀 더 심각한 사회 비판의 시각을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먼지'가 쌓여 있는 것이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독극물을 한강에 방류하도록 지시하는 의사가 그 일에 이의를 제기하는 한국인에게 한강은 넓다면서 “큰 시야를 좀 가져 보라(Let’s try to be broad minded about this)”라고 훈계하듯 말하는 대목에서는, 과연 그 “크다”는 개념이 무슨 의미이며 '누구'를 위해 그런 “시야”가 필요하다는 것인지 되묻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게 됩니다.





하지만 시작 부분에서 언급했듯 전체적인 측면에선 결국 “가족애”에 초점을 둔 영화라고 이해하는 저로서는, 여러 번 거듭해 볼수록 최종적으로 머리에 남는 주제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이나 심각한 사회, 정치적 문제 의식이 아니라 잔잔하면서도 애틋한 가족 간의 사랑입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딸 “현서”를 만나자마자 메고 있는 가방이 무거울까 봐 아빠 강두가 가방 바닥을 받쳐 주는 모습이나 - 저도 예전에 종종 그렇게 하다가 딸에게 '구박' 받은 적이 있기에 대본과 연출의 세심함에 더 탄복할 수밖에 없었던 - 딸에게 새 휴대폰을 사 주려고 모아 둔 동전을 바라볼 때의 강두의 흐믓한 표정, 괴물에 쫓겨 달리다 넘어진 후 다시 일어나 돌아봤을 때 자기의 손은 낯선 여학생을 잡고 있고 막상 자신의 딸 뒤로는 괴물이 다가 오는 모습을 목격한 강두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 등으로 대변되는 그 '진한' 사랑 말입니다.


할아버지와 삼촌, 고모가 보여 주는 현서에 대한 사랑도 그 못지 않은데, 손녀를 찾기 위해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털어 '고물' 차와 지도를 사는 할아버지나 체포 당할 위험에 직면해서도 끝까지 조카의 위치를 확인하고야 탈출을 시도하는 삼촌, 오빠와 헤어져 혼자 남은 후에도 어린 조카를 찾으려고 그 위험한 한강변을 떠나지 못한 채 헤매고 다니는 고모의 모습이 이를 증명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제 가슴을 뭉클하게 했던 것은 평소에는 바보 같은 형이자 오빠라고 무시하던 가족들이, 모두들 죽은 것으로 여기는 현서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강두의 한마디에 다른 이들은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사실 앞뒤가 맞지 않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아이를 구하기 위해 똘똘 뭉치는 모습이었습니다. “맞아, 저게 바로 가족이지”라는 생각을 절로 들게 하는 그들이 한강변 매점에 도착해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동안, 꿈인지 착각인지 밥상 한가운데에 앉은 현서가 다른 가족들이 건네 주는 음식을 받아 먹는 장면은 - 현실에서는 굶주리며 더러운 물을 받아 먹고 있지만 - 상대방의 '존재'가 곧 자신이 살아갈 이유가 되는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포착하는 '순간'인 듯합니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면서 안타까운 상황을 접할 때마다 지나치게 감정이입이 되어 “시간을 되돌려 이렇게 저렇게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자주 하는 저로서는, 강두가 현서에게 새 휴대폰을 좀 더 일찍 사 주지 못한 것이 결국 목숨을 잃는 결과로까지 이어졌을지 모른다는 아이러니가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을 아프게도 하지만, 사실 그보다 더 우려되며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한 가지 생각은,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는 현서가 과연 아빠와 할아버지, 삼촌과 고모가 자신을 찾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고 또 자신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니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해도 그러리라고 짐작하거나 그렇다고 믿고 있을까 하는, 아프게까지 느껴지는 궁금함입니다. 그 사실의 여부가 제게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아무리 절박한 입장에 있더라도 그 같은 “사랑”이 '몰려오고' 있음을 알기만 한다면 충분히 견디며 기다릴 수 있을 현서의 상황이 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의 제가 처해 있던 상황이자 어쩌면 하나님을 안다고 자부하는 지금도 제가 겪고 있는 상황일지 모른다는 '동일시'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 간절하던 바램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늘 저에게 들었던 생각은 “그러면 그렇지, 나한테 무슨 대단한 '기적'이 일어나겠어”라는 것이었습니다. '영안'으로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던 영적으로 '죽은' 상태였으니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달려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는 커녕 짐작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조금 더'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결국 괴물에게 먹혀 목숨을 잃고 만 현서에게 느끼는 저의 안타까움이 - 마침내 딸이 있는 곳을 찾아내 “현서야, 아빠야”라고 소리치며 달려 오는 강두를 볼 때마다 느껴지는 가슴 저림이 - 유난히 절절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최고의 선(善)을 이루어 내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늘 그러하듯, 현서와 함께 괴물의 뱃속에 있던 “세주”에게 “우리 현서 알아? 우리 현서랑 같이 있었어?”라고 부르짖던 강주가 그 세주를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임으로써 현서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그리고 현서에게 매점에서(먹을 것이 풍족할) 살고 싶다고 말하던 세주의 '소망'이 결국엔 아름답게 '실현'됩니다. 물론 현서뿐 아니라 가족들을 대신해 목숨을 잃은 할아버지도 가엾고, 유독가스 때문에 귀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조카를 부여안고 통곡하는 삼촌과 고모도 너무나 안쓰럽지만, 이렇게 해서 또 다른 “가족의 탄생”이 이루어집니다. 영화의 결말이 다를 수 있기를 기대하는 관객의 마음처럼, 삶의 다른 모습을 소망하는 우리의 기도를 무시하시는 듯한 하나님을 이해하기 힘들 때가 종종 있지만, 이처럼 생각지 못한 모습으로 그분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도 하는 것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딸 J의 시선


나는 봉준호 감독을 무척 좋아한다. 함께 '세계적' 거장으로 불리고 있는 박찬욱 감독과 그를 비교하는 이들이 많고 나 역시 둘 다 조금 뒤틀린,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시선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박찬욱 감독의 경우를 결벽스러울 정도의 냉철함과 우아함을 지닌 관점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봉준호 감독에게는 더운 날 붙잡게 된 누군가의 손처럼 불쾌할 수도, 동시에 다감한 열기로 느껴질 수도 있는 부분이 있다고 해야겠다. 인간의 초라한 본성을 정확히 간파해서 그 볼품없는 밑바닥을 가감 없이 들춰 내지만, 동시에 연민의 마음과 함께 최대한 따뜻한 빛깔의 조명으로 보여 주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한마디로 요약하면 봉준호 감독의 작품들 대부분이 보여 주는 그의 감성과 세계관이 나의 취향과 아주 잘 맞는다는 뜻이다.


그 중의 한 예인 [괴물]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생활밀착형” 판타지이다. 물론 개봉 당시만 해도 '괴수물'이 한국 영화계에선 낯선 장르였다지만 “한강에 괴물이 나타났다”는 설정의 생소함만 극복하고 나면 이 영화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한국적’인 작품이 된다. 괴물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차려진 합동 분향소에서 뒹굴며 통곡하는 유족들의 모습을 찍기 위해 기자들이 달라붙는다거나, 경비원이 들어와 주차가 잘못된 자동차 번호판을 부르며 차주를 찾는다거나, 조의를 표한다며 방문한 정치인의 사진 촬영을 위해 그 수행원들이 오히려 유족들을 밀어낸다거나, 한강 ‘소독’이라는 업무를 시작하러 들어가는 방역 업체에게 공무원이 노골적으로 뇌물을 요구한다거나 하는 모습 등을 보면 실제로도 정말 저럴 것만 같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되니 말이다.





사실 이 영화는 ‘괴물’이라는 요소를 제외한다면, 지극히 평범하고 또 실제로 있음직한,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워낙 흥행한 영화인 만큼 굳이 줄거리를 소개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되지만, 기본적인 내용만 아주 간단히 요약하자면, "어느 날 갑자기 한강에 나타난 – 한강에 버려진 독극물로 인해 생겨난 돌연변이 생물체로 추정되는 – ‘괴물’이 여중생 “박현서(고아성 분)”를 낚아채 사라진 뒤 남겨진 가족들이 아이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라고 정리할 수 있다.


현서를 잃은 후 그녀의 가족들, 즉 할아버지 "희봉(변희봉 분)"과 아빠 “강두(송강호 분)”, 삼촌 “남일(박해일 분)”, 고모 “남주(배두나 분)”는 실의에 빠진다. 강두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한강 매점에서 설렁설렁 일을 하며 손님에게 나가야 할 오징어의 다리를 몰래 뜯어 먹을 정도로 '아무 생각 없는' 사람이지만, 그와 동시에 낮잠을 자다가도 지나가는 학생의 “아빠”라고 부르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고 딸에게 새 휴대폰을 사주기 위해 컵라면 용기에 몰래 동전을 모아 둘 정도로 딸을 사랑하는 아빠이다. 동생인 남일과 남주에게는 그저 한심한 형이자 오빠일 뿐이기에, 안 그래도 그다지 화목하지 못한 가족 관계는 모두가 사랑했던 아이의 ‘죽음’ 때문에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듯하다. 그러나 죽은 줄 알았던 현서에게서 온 전화를 강두가 받은 이후, 박씨 삼남매와 아버지는 한강 하수구 어딘가에 있을 현서를 찾기 위해, 괴물이 옮긴다는 ‘바이러스’를 들먹이며 그들을 격리하려던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위험지역으로 선포된 한강으로 돌아간다.





[괴물]은 환경오염의 심각성과 안일하고 무능한, 비인격적인 공권력에 대한 비판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는 제국주의, 식민주의의 잔재에 대한 고찰 같은 여러 테마들을 다룬다. 현서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강두와 가족들의 호소를 아이가 '사망자 명단'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망상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찰과 의료 기관의 모습은, 슬프게도 무척이나 ‘현실적’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세계가 몸살을 앓았던 지난 몇 년간 때문인지 ‘바이러스의 숙주’로 설명되는 괴물과 그에 연관된 음모, “misinformation”으로 표현되는 사실상 “가짜 뉴스”를 다루는 부분들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위험한 독극물을 한강에 버리면서 모든 사태의 주범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괴물’에 대한 중요한 정보들을 한국 정부와 공유하지 않고 본국에만 전송하는 ‘미군’과, 이 상황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처를 신뢰할 수 없다는 식으로 개입하려 드는 미국 정부나 WHO(세계 보건 기구)를 보고 있자면 허구의 내용임을 알면서도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 다시 영화를 보면서 나는 '비극'이라는 것의 어쩔 수 없는 "개인화(personalization)"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경찰과 정부, 또 국제 사회가 더 적극적으로 이들을 돕지 못한 것은 분명한 잘못이지만, 현서의 실종이 궁극적으론 박씨 가족의 지극히 ‘개인적인’ 비극일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국가와 사회가 그 구성원들을 도와야 하는 법적이고 도덕적인 책임이 있는 것은 분명하나 그것이 현서의 아버지, 할아버지, 삼촌과 고모가 느끼는 절박함이나 다급함과 똑같은 '온도'가 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비극은 그 당사자들(주로 소수의 인물인)에게만 국한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비록 국가나 사회는 그럴지언정, 자신과 상관 없는 비극에도 당사자들과 같은 온도의 침통함과 간절함을 가지려는 자세가 신앙의 본질이겠지만, 또한 그것이 진정한 신앙인으로 사는 일을 어렵게 느끼도록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그래서 현서의 가족들은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오히려 정부의 추적을 당하면서 현서를 찾으려 분투한다. 할아버지가 가진 돈 전부를 털고, 가족이 가진 모든 것과 목숨까지 걸어 가며 아이를 찾는다. 나는 현서가 사랑하는 자식, 손녀, 조카를 넘어선 어떤 순수하고 완전한 "희망"의 상징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자식들, 특히 큰 아들을 잘 키워 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진 할아버지에게, 모자라고 변변찮아 보이는 강두에게, 민주화 운동 당시 열심히 데모하며 신념을 위해 싸워 왔지만 그 과거 때문에 취직조차 되지 않아 이제는 술을 입에 달고 사는 남일에게, 재능은 뛰어나지만 화살을 쏘기 전 지나치게 머뭇대느라 번번이 금메달을 놓치는 양궁 선수 남주에게, 현서는 그들의 삐걱대는 인생에서 유일하게 오점 없는, 가능성과 잠재력으로만 가득한 사랑스러운 미래이자 희망이었을지 모른다.


그 때문에 현서가 결국 사망하고, 아이를 애타게 찾던 아빠와 삼촌, 고모가 현서의 시신을 안고 울부짖는 장면에서는 더더욱 가슴이 미어진다. 솔직히 이럴 때 보면 봉준호 감독은 관객들에게 정말 너무한다 싶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속이 시원했을까? 나는 가끔 영화를 풀어 나가는 봉준호 감독의 방식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호한 "신"의 개념을 닮았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영화 속의 창조된 공간에서 그가 아주 냉철하고 공정한 신의 모습을 취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에서는 인과관계가 뚜렷하고(이 영화에서 인간이 환경에 해를 끼치며 창조해 낸 ‘괴물’이 다시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구도처럼) 각자의 무지와 실수에 대한 대가를 철저히 지불하게 하며(남은 총알 개수를 잘못 계산한 강두 때문에 그 아버지에게 일어나는 비극과 같은) ‘기적’이나 ‘우연’에 따른 승리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 것이 그 예다. 얼마나 철저하게 현실적인지 강두와 가족들은 갖은 고생 끝에 현서의 위치를 알아내고도 결국 한발 늦게 그곳에 도착한다.





다만 ‘복선’은 충실히 회수되고 논리적인 ‘성장’은 허락되는데, 데모하던 과거에 발목을 잡혀 살던 남일이 그때의 경험 덕분에 경찰의 포위로부터 도망치거나 화염병으로 괴물을 공격하고, 경기 때마다 머뭇대며 시간을 끌던 남주가 결정적인 순간 망설임 없이 불화살을 날려 괴물을 맞추는 일 등이 그러하다. 가장 상징적인 예는 영화 초반에 표지판이 붙은 장대로 괴물을 때렸지만 죽이는 데엔 실패했던 강두가 결국 끝에 가서는 비슷한 장대를 이용해 괴물을 처치한 일일 듯하다. 한심해 보이던 강두는 딸을 찾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 변해 가고, 마지막엔 ‘괴물’을 무찌른 뒤 그 입 속에서 현서의 시신과 함께 끌어낸 남자아이 “세주”를 딸 대신 키운다. 이처럼 봉준호 감독은 어떤 “시적 정의(poetic justice)”는 착실하게 이루어 내지만 우리가 원하는 따뜻하고 이상적인, 그러니까 현서와 가족이 재회해 행복하게 사는 식의 엔딩에는 큰 관심이 없는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불신하고 원망하는 ‘신’의 모습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괴물]을 다시 감상한 지금, 의외의 인물들을 통해 나는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목격할 수 있었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런 영화 속 상황을 볼 때나 끔찍하고 비참한 실제 사건에 대해 들을 때 주로 피해자의 입장에만 몰입하게 됨으로써, 그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듯한, 보이지 않는 ‘신’을 원망하곤 한다. 만약 현서가 괴물의 은신처에서 기도했다면, ‘신으로부터의 구원’을 기대했다면, 결국 그는 끝까지 응답하지 않은 신으로만 남게 되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 비극의 참여자, 그러니까 피해자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그들을 구하고 도우려 애쓴 사람들, 다시 말해 현서의 가족 같은 사람들의 모습에 하나님을 대입해 생각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을 듯하다.





나는 끝까지 밝고 강하며 용감했던, 본인은 결국 목숨을 잃었지만 자신보다 어린 세주만큼은 기어이 지켜 낸 사랑스러운 현서의 모습에서 문득, 우리에게 그리 하신 예수님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강두와 희봉, 남일과 남주를, 당신의 아들을 내어 주면서까지 우리를 구명하길 원하셨던 하나님의 모습으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유 의지’를 잘못된 곳에 사용하여 이기적이고 잔인한 결정들을 내림으로써 우리가 직접 ‘탄생’시킨 많은 비극과 고통들이 갑자기 우리를 덮쳐 오는 날, 하나님이 무능하시거나 혹은 무정하셔서 끔찍한 공포와 위험 속에 우리를 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절망과 사랑을 토해 내며 개개인의 비극을 막고자 달려오고 계신 중이라면… 그럼에도 불완전하고 죄 많은 세상이, 또 우리들 각자가 영화 속 공권력처럼 그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라면… "신이 계시다면 왜 이런 비극들이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애초부터 대상을 잘못 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현서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내걸었던 가족에게 관객들이 미안함 외에는 그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죄가 세상에 들어오며 함께 따라온 비극들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신’적인 존재의 초월적인 개입이 아니라 남의 아픔을 자신의 것처럼 받아들이는, 다시 말해 비극을 ‘개인적(personal)’ 문제가 아니라 ‘공동의(communal)' 현상으로 이해하는 사랑을 되찾는 일이 아닐까 싶다. 우리에게 달려오시는 하나님의 발 앞에 그를 저지하는 어떠한 방해물도 존재하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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