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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anne Feb 12. 2023

트루먼 쇼: 통제인가 자의인가

딸 J의 시선



“트루먼 쇼(The Truman Show)”는 지금까지도 당사자만 모르는, 어떤 연출되고 통제된 상황(예전 한국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몰래 카메라"와 비슷하게)을 설명하는 고유명사로 쓰이고 있을 만큼 문화적 영향력이 상당한 작품이다. 어렸을 때 이 영화를 처음 본 후로는 화장실 거울을 보며 원맨쇼를 할 때마다(나만 이러는 건 아니리라 믿는다) 그 장면을 떠올리며 혹시 누가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주변을 확인하곤 했었다.


"The Truman Show"는 말 그대로 같은 제목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 "Truman"은 태어났을 때부터 어른이 된(결혼하여 보험 회사를 다니는) 지금까지 Seahaven이라는 도시에서 살아 왔는데, 1940-50년대 미국 중산층의 American Dream을 대표하는 “white picket fence”의 삶(흰 울타리로 둘러싸인 그림 같은 집에서 완벽한 아내와 함께하는 평온한 일상)을 누리면서도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을 접지 못한다. 대학 시절 스치듯 만났지만 지금까지 잊지 못하는 신비로운 여자 "Sylvia"를 그리며 패션 잡지에 나오는 여성 모델들의 얼굴 사진을 조합해 그녀를 재현해 보려 하기도 하고, 단짝 친구에게 언젠가 반드시 지구 반대편에 있는 Fiji로 여행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하며 말이다.





어딘가 불만족스러우면서도 그럭저럭 큰 문제 없어 보이던 Truman의 삶은, 이미 22년 전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던 ‘아버지’를 길에서 마주치면서부터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여태껏 자신이 ‘현실’로 믿어왔던 삶이 삐걱이기 시작하고, 그 위화감의 출처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는 서서히 믿을 수 없는 진실을 깨닫게 되는데, 그건 바로 지금까지의 삶이 ‘진짜’가 아니며, 자신은 어떤 거대한 연극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엄청난 충격인 이 사실이 관객의 입장에서는 결코 “식스 센스(The Sixth Sense)”급 반전이 아니다. 영화 시작부터 관객들에게는 Truman의 삶이 "Christof"라는 프로듀서/감독이 제작한 획기적인 리얼리티 쇼일 뿐임이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Truman이 사는 도시인 Seahaven은 사실 거대한 세트장이며 그의 부모, 단짝 친구, 아내를 비롯한 주변인 모두가 정해진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들이다. 그래서 Truman과 달리 관객들은 처음부터 그의 삶을 ‘관음’하며, 모든 ‘가짜’의, ‘거짓된’ 부분들을 볼 수 있고 – 이웃 아저씨의 쓰레기통에 달린 카메라나, 일상적 대화 속에 맥주와 코코아 같은 제품을 들이밀며 생활밀착형 “PPL”을 하는 주변 인물 등의 – Truman과 함께 ‘비밀’을 파헤치는 동료의 입장이 아니라, 시작부터 불공평한 정보를 독점한 채 먼발치에서 주인공을 바라보는 ‘관객’, 혹은 ‘방관자’의 입장으로 남게 된다.





사실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테마와 메시지를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진짜’와 ‘가짜’, 또 ‘현실’이란 무엇인가에서 시작하여 예능 혹은 뉴스를 통해 ‘현실’ 사건과 ‘실재’하는 인물들의 삶을 오락물처럼 소비하는 사회에 대한 고찰 등등, 이 영화에 대해 할 말은 많다 (논문 몇 편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 이 영화를 다시 감상하는 동안, ‘신’ 혹은 ‘운명’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 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와 같은 우화로서는 이 영화가 꽤 노골적이다. 작품 속 이름들만 봐도 그렇다. 가장 먼저, 주인공의 이름인 “Truman”, 풀어 쓰면 “true man”은 '진짜’ 사람, 진실된 사람, 을 연상시킨다. “인간”을 대표한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고대 영어로는 “faithful one”, 그러니까 신실한, 혹은 충성스러운 사람이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재미있게도 그의 성은 Burbank로, LA에 위치한, 세계 대중문화의 수도라 불리는 도시와 이름이 같은데, 나는 전설적 영화 촬영소인 Burbank Studios도 함께 떠올렸다. 말하자면 허구, 허상을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구현해 내는 노력의 상징으로, 영화의 중요한 테마 중 하나인 ‘진실’ 대 ‘거짓’의 대비가 주인공의 이름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나는 셈이다).





Truman Show의 감독, 프로듀서, 제작자이자 ‘설계자’인 Christof 역시 대놓고 예수, 그러니까 “Christ”를 표방한다(이름의 뜻도 “bearing Christ”, 즉 “그리스도를 품은, 걸머진, 혹은 나타내는 자”이고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Seahaven 세트장을 벗어나 ‘진짜’ 세상으로 나가려는 Truman을 잡기 위해 Christof는 세트장의 ‘하늘’을 통해 그와 대화하는데, 하늘에서 빛이 내리며 목소리만 들리는 형식이 전통적으로 하나님, 혹은 ‘신’이 표현된 방법들을 노골적으로 차용하는 셈이다. Truman이 살고 있는 가상의 도시 Seahaven 또한 “haven”이라는 단어의 뜻 그대로 안식처, 휴식처가 될 수 있겠지만 어찌 보면 see heaven, 그러니까 "천국을 보라", "이곳이 천국이다" 같은 의미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할 듯 싶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인간이 얼마나 지배, 통제, 혹은 ‘자의’를 무시하는 ‘운명’으로부터 벗어나는 플롯에 열광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주인공이 자신의 운명, 필연성, 혹은 한계를 넘어서는 내용의 “영웅적 서사”로 분류될 수 있을 수많은 창작물 가운데에도 특히 ‘자의’를 강제하려 드는 어떤 신적 ‘존재’의 영향력을 벗어던지는 발버둥이라는 관점에서 말이다. 가장 먼저 떠올랐던 이야기는 “The Matrix” 시리즈로, 잘 알려져 있듯 인공지능의 설계에 의해 인간의 의식을 가두어 둔 가상 세계에 대항하여 모든 인간들의 의식이 ‘현실’로 돌아갈 수 있도록 ‘자유’를 주려는 Neo의 투쟁이 주된 내용을 이루는 영화이다. 물론 그 외에도 비슷한 내용들은 넘쳐나지만 말이다 (영화 자체는 그저 그랬지만 줄거리는 매력적이던 “The Adjustment Bureau”도 그렇다. 수트를 입은, 공무원 비스무리한 ‘운명’의 요원들이 정해진 궤도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지 못하도록 인간을 조종하고 통제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두 주인공은 결국 ‘정해진’ 미래를 거부하고 본인이 ‘자의’로 ‘운명’을 결정해 나가길 택한다). Truman 또한 ‘완벽한 아내’ 그 자체를 연기하는 Meryl과 결혼해 살면서도 결국은 본인이 ‘자의’로 원했던 Sylvia라는 여인을 계속 그리워해 온 것과 같이, Christof가 설계한 안온하고 포근한 ‘가짜’ 세상을 떠나 자신이 결정하는 ‘진짜’ 현실(그것이 아무리 두려울지라도)을 살기로 선택한다. 실제로 Sylvia는 그에게 Truman Show의 실체를 알리기 위해 Seahaven에 왔었던 것으로 밝혀지며, 그의 삶에서 유일하게 ‘진실’이나 ‘현실’을 상징하는 인물이 된다.





Truman이 Seahaven을 떠나는 여행이 어떤 면에서는 인간이 신을 거부하며 ‘에덴’을 벗어나는 모습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된다. ‘신’이나 어떤 위대한 권위의 지배 아래에 놓이기보단 나의 세계, 내가 일구는 길을 찾아나서는 여정으로 말이다. 그렇게 마주한 현실이 아무리 냉엄할지라도. 말하자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결정하고 싶은 마음이랄까? 그 결과가 무엇이든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한 갈망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식의 해석에서 주인공의 목표는 negative freedom, 그러니까 ‘소극적/부정적 자유’로 표현해야 할 것 같다. 타인이나 사회, 국가, 혹은 신념 체계나 제도로부터 간섭 받지 않을 자유, ‘나’라는 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선택과 행동을 하는 것에 - 그것이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다시 말해 내 ‘자의’로 선택하며 살 수 있는 ‘자유’ 말이다. 그런 자유를 추구하자면 어떤 도덕적 체계,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규정하며 세상과 인간의 삶을 ‘설계’하는 듯 보이는 전지전능한 존재는 억압의 한 종류로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장 누가 뭘 하라고 하면 바로 하기 싫어지는 내 청개구리 심보만 봐도 ‘자의’, 혹은 ‘자기 결정권’에 대한 집착은 인간의 보편적 욕구일 듯하다. 다만 나는 Truman, 이 ‘진실된 자’의 Seahaven 탈출기를 한번 더 “꺾어서” 이해했는데, 내게 믿음이 생기기 전, ‘나의’ 의지대로 사는 줄 알았던 삶이 오히려 세트장에서의 그 거짓된 삶과 비슷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Seahaven을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는 Truman의 여정은 눈에 보이는 것만 ‘현실’ 혹은 ‘진실’이라 믿고 살다가 거하게 뒤통수를 맞은 나의 그것과 닮은 면이 있다(‘나의 의지’보다 우선하는 권위를 인정한 후의 삶이야말로 ‘자유’로웠다는 점에서는 정반대지만). 물론 더 다이내믹한 만큼 더 혼돈스럽기도 하다. 다시 한 번 Matrix에 비유하면 하나님을 따르기로 한 내 선택이 Neo가 빨간 알약을 먹고 진짜 ‘현실’에 눈을 뜬 것과 같게 느껴진달까?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른 채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고 믿었던 때가 사실 더 ‘속 편하기’는 했었다 (Matrix에 나오는 인물 Morpheus도 비슷한 말을 하긴 했다, “아오, 그냥 파란 약을 먹을 걸” 하고).


그러나 진리는 더 이상 세상을 예전과 같은 눈으로 볼 수 없게 만듦으로써 우리를 ‘자유케’ 하며, 이미 자유를 얻은 자는 되돌아가지 않는 법이다. 내가 생각하는 ‘자유’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도록 모든 ‘금제’를 벗어 던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또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는 ‘각성(awakening)’이니 말이다.




엄마 C의 시선



많은 이들이 친숙히 알고 있을 “트루먼 쇼”는 지금부터 소개하게 될 영화의 제목이자 그 영화 안에서 상영되는 “리얼 드라마”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태어나던 순간부터 방송국에 – 사실상 “크리스토프(Christof)”라는 이름의 연출자에게 – 입양된 아기 “트루먼”이 인위적으로 조성된 주변 상황과 인물들에 둘러싸여 성장하며 살아가는 모습(일거수일투족)을 쉼 없이 송출하는 프로그램이 영화 속 드라마 “트루먼 쇼”라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과 결혼 등의 보편적 행로를 따르면서 30세가 될 때까지 이런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트루먼이 '완벽'을 자부하던 통제 상황에 발생한 문제로 인해 자신의 실체를 알아 가고 또 그로 인해 '변심'하는 과정을 다룬 것이 실제 영화 “트루먼 쇼”입니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그 영화 속 “리얼 드라마”의 주인공이기도 한 “트루먼” 역의 짐 캐리(Jim Carrey)가 본래 코미디 영화에 특화된 희극 전문 배우로 인식되는 데다 이 영화 역시 코믹 터치가 상당 부분 가미되어 있어서인지 – 물론 “블랙코미디”라고 해야겠으나 – 그다지 진지한 작품으로 인식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상 이 영화가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고 넘길 작품이 아니라는 것은 감독을 맡은 피터 위어(Peter Weir)의 다른 영화들, 즉 “위트니스(Witness)”나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 등의 성향으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곧바로 영화 속 드라마 “트루먼 쇼”를 기획, 연출한 크리스토프가 자신의 드라마에 대한 자부심을 내비치면서 “이 이야기는 진짜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지요(It's genuine, it's a life)”라고 “작품 소개”를 하고, 친구 '역할'을 맡은 “말론(Marlon)”이라는 이름의 ‘배우’가 “이것은 모두 진실입니다. 전부 실제이고요. 이 프로그램의 어떤 부분도 가짜는 없습니다. 단순히 통제된 것일 뿐이지요(It's all true. It's all real. Nothing you see on the show is fake. It's merely controlled)”라며 지나칠 정도로 '사실성'을 강조하는 반면, “트루먼 쇼”라는 ‘드라마’가 시작될 때 화면에 오르는 오프닝 크레딧(Opening Credits: 영화나 드라마의 시작 전 주요 인물의 이름과 배역을 안내하는 자막)에서 “주인공”인 트루먼만 “트루먼 버뱅크(Truman Burbank)”라는 실제 이름으로 소개될 뿐 아내 “메릴(Meryl)”과 친구 말론 등 다른 '등장인물'들은 모두 보통의 영화나 드라마처럼 '배역'의 이름과 배우의 진짜 이름이 다르게 적혀 있는 모습은 이 이야기가 결코 '진실'일 수 없으며 온통 가짜로 꾸며진 거짓 “쇼”에 불과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모험심이 강하던 트루먼이 자신의 “행동반경”으로 제한된 – 태어난 이후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 “씨 헤이븐(Seahaven)”이라는 섬을 떠나려 할까 봐, 배를 타고 먼바다를 탐험하기 원하던 그로 인해 아버지가 익사하는 상황을 '설계'함으로써 그의 머릿속에 죄책감과 물에 대한 트라우마를 깊이 각인한 연출자의 처사를 생각하면, 30세의 생일을 앞두고 먼 곳으로의 여행을 다시 꿈꾸게 된 트루먼이 친구에게 여행을 떠나겠다고 말하기가 무섭게 그가 트는 TV 채널에서 “집을 떠나 여행을 해 봤자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정의 소중함을 확인하고 돌아오게 될 뿐”이라는 내용의 영화 소개가 방송되는 장면이나 이후 찾아갔던 여행사의 벽에 비행기가 번개에 맞는 사진과 함께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It could happen to you!)”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는 장면 등을 보며 그 상황을 가볍게 웃어 넘기기가 어려워집니다.


역시 영화 속 드라마의 오프닝 크레딧 중 “크리스토프”가 제작, 연출했다는 사실을 “created by”라고 표현한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Christof”라는 이름 자체에서 누구나 감지할 수 있을 것이듯, 이 영화 속 드라마의 연출자를 하나님 혹은 예수님(신)에, 그리고 그가 만든 “땅” 씨 헤이븐을 연출자(하나님)가 '완벽하게' 통제하는 세상에 비유하고 있는 듯한 영화 전반의 암시는 기독교인 관객/시청자에게는 불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트루먼이 씨 헤이븐을 - 사실은 “자신”의 통제를 - 벗어나려 하자 그의 목숨을 담보로 하면서까지 막으려 하는 크리스토프의 모습은, 자비심이란 전혀 없이 인간을 통제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신의 모습을 그리려는 이들의 시도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대학 시절 짧고 아쉽기만 한 관계로 끝내야 했던 “실비아(Sylvia)”와의 만남 중 그녀의 겉옷 배지에 쓰인 글귀를 통해 제시된 “어떤 결말이 될까(How's it going to end?)”라는 ‘복선적’ 질문은, 결국 트루먼이 “자유”를 찾기 위해 길들여졌던 씨 헤이븐을 ‘용감하게’ 탈출하는 것으로 답변되지만, 주인공이 익숙하고 편안한 환경일 망정 계속적 통제가 예견되는 삶에서 벗어나고자 자신의 자유의지를 구현할 수 있는 '낯선 곳'으로 떠난다는 결말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의지의 발휘가 불가능한 상황 아래에 둔 채 어떤 방식으로든 당신의 뜻에 따르도록 만들며 통제하는 분이라는 설정과, 하나님 안에 머물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마치 자유의지의 발휘가 불가능한 상황을 감수하면서라도 모든 위험과 가변성이 완벽히 통제된 – 악과 통제 불능으로 가득한 '바깥 세상'과 달리 – 씨 헤이븐 같은 '온실' 속에 살고 싶어 그런 결정을 하는 것이라는 듯한 전제가 근본적 문제 아닐까 생각됩니다.


물론 이 영화를 그런 종교적 측면에서보다 비인격적이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방송 매체들의 속성과 “관찰 예능” 같은 매스미디어의 맹점을 지적하는 날카로운 비판으로 보는 관점도 있습니다. 결말 부분에서 트루먼이 '자아'와 '자의'의 “쟁취”를 꿈꾸며 씨 헤이븐과 그곳의 안온함을 뒤로 한 채 과감히 떠나기로 결정하는 장면이 나오자 전세계의 시청자들이 기뻐하면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결국 몇 분 지나지 않아 “다른 데 뭐 볼 거 없나?”라면서 리모콘으로 채널을 돌리는 모습은 그토록 대단해 보이던 그들의 '애정'과 '공감'의 깊이가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를 잘 보여 주는 상징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큰 틀로 봤을 때 트루먼의 부모와 친구, 학교와 직장, 결혼 문제까지 결정해 온 연출자 크리스토프가 그의 삶 전체를 마치 줄인형을 움직이는 조종자처럼 주관한 것으로 묘사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인간의 운명과 의지를 통제하려는 신, 그리고 그에 굴복하지 않는 강한 정신력(?)을 가진 인간을 대비시키며 “인간 승리”의 드라마로 그리려던 것이 보다 본질적인 목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선악과 나무를 에덴 동산의 한가운데에 두고 선택의 기회를 부여하신 예까지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우리 스스로의 '선택'과 '자유의지'를 세상 그 누구보다 중시하는 분이십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자신을 싫다고 하는 상대에게 억지로 사랑을 강요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결함이나 이상이 있는 사람 외에는 절대로 - 자존심 때문에라도 - 하지 않을 일인데 당신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그 어떤 행위보다 의미 있게 생각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과 귀를 틀어막고 거짓으로 속이기까지 하면서 애정의 관계를 구걸하실 리는 만무하겠지요. 더욱이 이 세상이 “천국”이 될 수 있는 조건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한 의지마저 완전히 통제해 “인큐베이터”로 만드심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결단한 올바른 선택을 활용하여 비록 지옥과 같은 현실 속에서도 사랑과 희망을 창출하는 기적을 일궈 낼 수 있는가의 여부에 달린 문제입니다. 이 영화의 각본을 썼다는 앤드류 니콜(Andrew Niccol)의 개인적 종교나 신앙까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있으면서도 그분의 품성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없이 드라마에 극적 '서사성'을 부여하려다 보니 내용이 왜곡될 수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영화의 전반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트루먼이 아침마다 거울을 보며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장면은, 가끔 무심히 거울을 들여다 보다가도 거울을 통해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내”가 "나”라는 사실이 종종 낯설게 느껴지곤 하는 저의 “유체이탈”을 반추해 보게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지금 하고 있는 이 ‘생각’이라는 것이 언젠가 내 ‘몸’을 떠나게 되면, 낯설다고 느끼는 바로 이 ‘생각’은 과연 어디로 갈 것인지” 너무 막연하다 못해 막막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습니다. 그 두 가지가 '분리'되고 나더라도 나의 그 “생각”이라는 것이 어디로 가서 어떻게 될지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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