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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anne Feb 26. 2023

“발렌타인 데이”에 다시 본 로맨틱 영화 4편

* 벌써 날짜가 열흘 넘게 지나기는 했지만 2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14일은 ‘연인들의 날’이라고 할 “발렌타인 데이(Valentine’s Day)”였지요. 요즘은 한국에서도 이날을 떠들썩하게 즐기며 보내는 분위기가 젊은이들 사이에 '정착'되었으리라 짐작하지만 이곳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기억하며 축하하는 연중 기념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편의 영화 리뷰는 ‘로맨틱’한 영화라고 저희가 평소 생각하는 작품들 네 편을 골라 다루어 보려 합니다. 물론 ‘로맨틱’이라는 말에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고 또 제한된 공간이기에 다루고 싶은 영화들을 다 언급할 수 없기도 하지만, 일년 중의 몇몇 특별한 날을 맞을 때 색다른 구성으로 함께 공감해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에 시도해 본 기획입니다.



엄마 C의 선택


“패밀리 맨(The Family Man)


2000년도의 개봉작이자 주인공 “잭(Jack)” 역을 니콜라스 케이지가 연기했던 이 영화는, 경제적 성공을 추구하며 월 스트리트 최고의 투자 전문가로 더할 나위 없이 풍족한 삶을 누리던 한 남자가, 마치 꿈속에서 겪은 듯한 운명이 바뀌는 체험을 통해 자신의 지난 삶을 되돌아보며 젊은 시절 헤어졌던 연인을 다시 찾아 나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뉴욕 중심부의 초호화 빌딩에서 살고 있는 잭은 크리스마스 전날밤 '강도'의 모습으로 편의점에 나타난 “캐시(Cash)”라는 - ‘천사’라고 할 수 있을 - 인물에 의해 다음날 아침 현재의 자신과 전혀 다른 삶을 사는 모습으로 깨어납니다. 인턴십 과정을 밟기 위해 영국으로 떠나던 13년 전, 공항에서 그를 배웅하던 연인 “케이트(Kate)”가 왠지 느낌이 안 좋다며 가지 말라고 붙잡지만 잭은 그런 그녀의 우려를 일축한 채 떠나 버렸고 결국 케이트의 예감처럼 둘은 영영 헤어지게 되었었지요. 하지만 뒤바뀐 현실 속에서는 다음날 바로 영국에서 되돌아왔다는 자신이 케이트와 결혼한 후 교외의 허름한 집에서 두 아이의 아빠로, 그리고 타이어 세일즈맨으로 평범하고도 ‘누추한’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같이 낯선 상황을 곤혹스러워 하며 자신의 삶을 그렇게 '만든’ 케이트를 원망하던 잭이 결국 가족의 소중함과 사랑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깨닫고는 다시 현실로 되돌아와서도 케이트를 수소문해 찾아간다는 스토리인데, 그런 내용으로만 보면 조금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또한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크리스마스 캐럴(A Christmas Carol)”이라는 소설을 연상시키는 측면도 없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 영화를 무척 인상적인 “로맨틱 무비”로 생각하는 것은 결혼한지 13년이 지난 시점까지 - 물론 실제 결혼 생활은 아니지만 - 남편에 대한 사랑과 연애의 감정이 전혀 ‘손상되지’ 않은 멋진 아내 케이트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로맨틱 코미디가 결혼 전의 로맨스(사랑에 이르까지의 좌충우돌)를 그리고 있는 것에 반해, 13년이라는 긴 결혼 생활을 지난 후에도 한창 데이트 중인 어느 커플보다 로맨틱한 삶을 즐기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결혼을 “연애의 무덤”으로 여기는 세상적 기준과 달리 애초 ‘결혼’이라는 제도를 만드셨던 하나님의 의도에 가장 부합하는 삶을 살아 내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게다가 사랑 이야기일 뿐 아니라 삶의 매 순간 주어지는 “선택”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사실 역시 – 케이트가 즐겨 쓰는 “난 우리를 선택할거야(I choose us)”라는 말이 상징하듯 – 삶에서의 매 선택이 신앙인들에게 특히 중요하다고 믿는 제가 이 영화를 인상 깊게 기억하는 이유입니다.



“불후의 명작”


우연치 않게 같은 해인 2000년 개봉되었던 한국 영화 “불후의 명작”은, 제목처럼 필생의 걸작인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가슴에 품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경제적 문제로 엉뚱한 일을 하며 사는 - “에로 비디오”를 찍고 있는 - 감독 “인기(박중훈 분)”의 이야기입니다. 머릿속에 구상이 있어도 글솜씨가 부족해 직접 시나리오를 쓸 능력이 없음을 자책하던 인기는 글을 대신 써 줄 대필 작가 “여경(송윤아 분)”을 만나면서 사랑에 빠지고 자신의 부족함이 오히려 ‘축복’으로 작용한 것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사실 여경은 인기에게 자신을 소개해 준 선배 감독 “명준”을 짝사랑하고 있었고 명준과 결혼할 여배우의 자서전을 대필하면서 고통스런 삶을 이어 가던 중이었지요. 시나리오가 완성되고 난 후 영화사 측으로부터 연출은 다른 감독에게 맡기고 시나리오만 사겠다는 ‘충격적’ 제안을 들은 데에 이어 – 스토리는 좋지만 에로 비디오 몇 편 찍은 3류 감독의 능력을 믿을 순 없다며 – 술김에 본심을 털어 놓은 여경의 속마음까지 듣고 만 인기는 괴롭고 복잡한 심경을 주체할 수 없게 됩니다.




삼각관계나 서로의 사랑이 어긋나는 스토리가 영화와 소설에서 드물지 않게 등장하는 것이 사실임에도 줄거리만으로 이 작품을 그런 부류의 영화로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현실에서는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패배자’처럼 살고 있는 인기와 여경, 두 사람의 삶을 향한 이 영화의 따뜻한 접근 방식 때문입니다. 머릿속에 나름의 아이디어가 있어도 글을 통해 스스로 표현할 능력이 없고, 누군가의 도움으로 아름답게 표현되고 난 후에도 내세울 만한 경력이 없어 연출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3류 에로 영화 감독, 그리고 자기 이름을 떳떳이 내건 소설을 출간하고 싶지만 실제 삶에서는 연예인들의 자서전이나 대신 써 주며 생계를 이어 가야 하는 대필 작가인, 자신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현실 속에 함몰되어 사는 그들의 처지 말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특별히 사랑의 교감이라고 부를 만한 장면은 영화 내내 등장하지 않지만, 함께 작업하며 들른 적이 있는 시냇가에서 “칠월 칠석”에 다시 만나자던 장난 섞인 약속을 기억하고 찾아간 인기가 그때 보았던 반딧불이와 예전에 같이 마셨던 “바나나 우유”(여경이 먼저 와서 시냇물 속에 넣어 두고 간)를 발견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로맨틱'한 대목입니다. 아름답게 편곡되어 잔잔히 화면을 채우는 “내게도 사랑이”라는 곡의 멜로디를 듣고 있다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랑이란 영화나 소설 속 이야기처럼 낭만적이고 드라마틱한 것이 아니라 그저 평범하며 때로는 가슴 아픈, 삶의 여러 모습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도 되지요.



“결혼 이야기(Marriage Story)


제목만으로는 서로를 사랑하는 두 남녀가 결혼에 ‘골인’하는 스토리를 담고 있을 듯한 이 영화는, 사실 남편 “찰리(Charlie)”와 아내 “니콜(Nicole)”이 결혼 생활의 파국을 맞고 이혼에 이르는 과정을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2019년에 개봉되었기에 지금까지 다룬 영화들 중 가장 ‘최신작’이라고 해야 할 이 영화는 “기생충”이 주요 4개 부문을 석권했던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각본상” 부문에 함께 후보로 올랐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나래이션으로 등장하는, 남편에 대해 담담히 들려 주는 니콜의 이야기는 “엽기적인 그녀”의 한 장면이 떠오를 만큼 달콤하게도 느껴지지만, 나중에 알고 보면 이 대사는 결국 “부부 클리닉”을 방문한 그들이 상담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서로의 장점을 기록한 - 이혼을 결정하기 전에 상대의 장점을 적으면서 과거 결혼하던 당시의 마음을 다시 기억해 보라는 취지에서 – 내용입니다. 적은 내용을 서로에게 읽어 주라고 전문가가 요청하자 남편 찰리는 기꺼이 읽으려 하지만 아내 니콜은 불같이 화를 내며 끝까지 읽기를 거부하지요.



연극 연출가와 배우로 만나 함께 일했기에 누구보다 상대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입장임에도, 서로의 일을 잘 아는 것에 비례해 상처도 그만큼 깊었는지 결국 그들의 관계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엇나가게 되고, 니콜이 변호사까지 선임하고 난 후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집니다. 나름대로 이성을 지키며 ‘고상하게’ 이혼의 과정을 통과하려던 그들은 결국 서로를 향해 절대 해선 안 될 수위의 발언까지 쏟아내며 “진흙탕 싸움” 자체인 이전투구를 벌이고서야 마침내 이혼에 이르게 되지요. 이혼 후에도 어린 아들 때문에 가끔 만나야 하는 그들 사이에 남은 것이란 원망과 증오뿐일 듯하지만, 예전 부부 클리닉에서 적었던 니콜의 글을 아들이 우연히 발견해 읽는 장면에서 – 한창 읽기 연습에 빠진 나이이기에 – 그녀가 왜 그 글을 읽지 않으려 했는지 뒤늦게 알 수 있는 '반전'이 일어납니다. 더듬더듬 읽다가 아빠에게 끝부분을 읽으라고 넘겨준 글의 내용이란 바로, “그를 만난 후 2초만에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앞으로도 평생 사랑할 것이다. 물론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만…” 이었던 것이니까요.





울먹이며 글을 읽는 찰리(“스타워즈”에서 악역을 맡았던 Adam Driver가 가슴 찡한 열연을 펼친)를 목격하게 되는 마지막 부분 때문에 ‘로맨틱’ 영화로 주저없이 선택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글로 썼던 그 내용은 '이중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내면을 여실히 드러내는 반증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 무엇보다 자신의 느낌을 소중히 여기고 본인의 감정에 충실하길 원하면서도, 동시에 사랑하는 대상 혹은 어떤 다른 타인에 의해서도 자기 마음을 다치거나 손해 보기를 감수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더 강한 인간의 본성 말입니다. 두 사람 모두 아직 서로를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사랑이 주는 '위험 요소(risk)'가 싫어 그런 가능성을 피하고자 내린 결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마음이 무척 씁쓸해집니다. “자아중심주의(自我中心主義,  Egocentrism)”라는 개념으로까지 요약되는 인간의 이러한 죄성 때문에 결혼 생활이든 일정한 조직체 안에서 융화하며 살아야 하는 삶이든, 나를 대신해 돌아가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되뇌어야만 그럭저럭 삶을 이어 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과 함께 말이지요.




딸 J의 선택


[빌리지(The Village)]


이번 주는 평소와 조금 다른 형식의 글을 쓰게 되었다. 전세계적 기념일이 '되어 버린' 발렌타인 데이를 맞아 평상시처럼 하나의 공통된 영화를 다루기보다 엄마와 내가 각자 원하는 "로맨스" 영화에 대해 자유롭게 쓰는 특집 비슷한 기획을 시도하기로 했는데, 서로 어떤 영화를 고를지에 대해서는 미리 상의하지 않았으며 다룰 작품의 개수에도 특별히 제한을 두지 않기로 했다. 읽는 분들께 흥미롭게 느껴지면 좋겠다.


나는 ‘로맨스’ 영화를, 더 정확하게는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하는 편이다. 두 주인공 사이에 감정이 피어날 듯 말 듯 할 때의, 그러니까 연애 초반(혹은 ‘썸’ 초반)의 간질간질함과 비교적 무겁지 않은 줄거리 등 '덕분에' 별다른 감정 소모 없이 즐길 수 있는 매력적인 장르라고 생각해서이다. 로맨틱 코미디의 전성기였다고 할 만한 80-90년대의 작품들은 요즘도 가벼운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찾아 보는 “comfort movie”이기도 한데, 큰 갈등 요소나 ‘악역’이 없는 잔잔하고 ‘따땃한’ 작품들, 예를 들어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유브 갓 메일]처럼 노라 에프론 감독 특유의 감성이 묻어나는 영화들을 특히 선호한다.





그런데 막상 ‘로맨스’ 영화를 다루려고 판을 깔고 보니 굳이 그런 영화들을 다루고 싶지는 않다. 너무 뻔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게다가 내가 로맨틱 코미디를 즐겨 보는 것과는 별개로 주인공들의 사랑이 진심으로 ‘로맨틱’하다고 느껴지는 작품은 사실 드문 편이다. 물론 영화 속의 드라마틱한 상황이나 구도(계속 엇갈리던 연인들이 극적으로 재회하는 엔딩이나 여러 장애물을 극복하고 ‘사랑’을 이루는 마무리와 같은)가 불러 일으키는 순간의 감동과 설렘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주입식(?) 감정이 잦아들고 나면 저렇게 난리쳐 봐야 얼마나 오래 갈까 하는 '꼬이디 꼬인' 생각이 들 때도 많다. 주인공들의 '연애 감정적' 사랑을 의미하는 로맨스가 작품의 뼈대 자체로 모든 흐름을 장악하다 보니 오히려 그 ‘로맨스’의 부족한 부분들(주인공들의 인간적 결점이나 그들 사이의 감정에 대한 개연성과 설득력 부족, 혹은 나의 개인적 연애관과 잘 맞지 않는 부분 등)이 두드러져 보인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정말로 ‘로맨틱’하다고 생각하는 영화들은 표면적으로 ‘로맨스’라는 장르에 속하지 않은 작품들, 그리고 ‘연애 감정’이라는 의미로의 ‘로맨스’가 영화의 줄거리와 흐름에 주요소로 작용하지 않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나에게 긴 여운으로 남았던 작품들을 다시금 돌아보면 인물들 간의 관계와 유대감(연애 감정 외에도 가족애, 신뢰, 우정, 충성심 등 여러 종류의 사랑을 아우르는)이 그들의 모든 행동과 결정, 성장을 설명하고 형상하는 ‘기반’인 것들이 주류를 이룬다. 관객들이 로맨스 영화에 기대하는 달콤한 대사나 확실한 구애는 존재하지 않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이 가장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형태로 편재하는, 다시 말해 "로맨스인 듯 로맨스 아닌 로맨스 같은" 영화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렇게 거창한 서두와 함께 다루려는 영화는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2004년 작품 [빌리지](The Village)로, 무려 ‘공포/스릴러’물로 분류되는 작품이다. 개봉 당시 흥행에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알고 있으며 나도 객관적으로 뛰어난 작품성을 가진 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더구나 [식스 센스]로 유명한 샤말란 감독을 개인적으로 그다지 선호하는 편도 아니다. 그럼에도 영화 속 가장 인상 깊었던 ‘로맨스’를 논할 때는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 영화가 떠오르곤 하는데, 작품 속 남녀 주인공의 관계가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이고 ‘낭만적’인(다시 말해서 ‘로맨틱’한) 사랑을 그리고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생소할 수 있는 영화이니 줄거리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빌리지]는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정확한 시대 배경은 알 수 없지만 전기와 자동차, 페니실린 등 근대의 과학적 발전이 이루어지기 이전 시간대로 보이는 이곳에서 소수의 주민들은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며 잔잔하고 목가적인 삶을 이어 간다. 하지만 평화로워 보이는 이 마을의 사람들은 사실 언제나 긴장과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데, 마을을 둘러싼 숲속에 정체불명의 생명체, "언급해선 안 되는 존재(those we don’t speak of)"라고 불리는 괴물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 마을 주민들이 괴물들에게 끔찍한 공격을 당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는 숲속의 생명체들과 마을 주민들 사이에 기괴한 ‘휴전’이 이어지는 중으로, 주민들은 절대 숲속에 들어가지 않을 뿐더러 숲 근처에서는 괴물들이 싫어한다는 노란색 옷만 입고 괴물들이 좋아한다는 붉은색은 극도로 피한다. 괴물들이 숲을 나와 마을을 덮칠 것에 대비해 마을과 숲의 경계선에는 망루가 세워져 있고, 수상한 기색이 감지될 때 파수꾼이 종을 울리면 주민들은 집 안의 문을 걸어 잠근 채 조용히 숨어서 괴물들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린다.





아슬아슬한 ‘평화’가 유지되던 중, 숲속 괴물들 때문에 주변 세상에서 고립되고 있는 마을의 처지를 답답하게 생각하던 남자 주인공 루시어스 헌트(호아킨 피닉스)가 숲으로 들어가야 할 상황이 발생한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마을 청년을 위해 숲 너머 세상에서 약을 구해 오려던 루시어스는 어릴 적부터 세뇌 비슷하게 학습했던 공포심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마을로 되돌아오는데, 그가 숲에 들어갔다 온 뒤부터 각 집들의 현관이 피로 붉게 칠해지고 생가죽이 벗겨진 여우의 사체가 곳곳에서 발견되는 등 괴물들의 ‘직접적인’ 위협이 시작된다. 이처럼 미스터리, 혹은 스릴러물로 규정하는 것이 적절할 이 영화를 내가 ‘로맨틱’하게 느끼는 이유는 남녀 주인공, 루시우스와 아이비 워커(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의 관계 때문이지만, 사실 러닝타임 내내 이 둘이 직접적으로 만나거나 대화하는 장면은 많지 않으며, 사랑을 고백하거나 연인끼리의 일반적 행동 양태인 ‘애정씬’을 보이는 경우는 전무하기까지 하다. 심지어 루시우스는 넘치는 책임감과 의협심과는 별개로 지나치게 무뚝뚝하고 재미 없는 성격이라 ‘로맨스’의 남자 주인공으로는 적합하지 않고, 아이비는 털털하고 명랑하긴 하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이기에 루시우스를 끈질기게 쫓아다닐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 둘은 지금까지 내가 본 영화의 주인공 중 가장 인상적인 연인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최소한의 장면과 대사만으로도 얼마나 깊은 감정과 서사를 압축해 넣을 수 있는지 보여 주는 표본인 데다 몇 개의 작은 사건에 의해 그들 둘의 사랑 이야기에 완벽한 설득력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이들의 관계가 ‘신뢰’에 기반한다는 것은 영화 초반부터 명확히 설명되는데, '기세 좋게' 루시우스에게 고백했던 아이비의 여동생이 '보기 좋게' 차인 후의 장면에서 아이비는 자신을 향한 그의 마음에 대해 맹랑하다고 할 만큼의 ‘확신’을 드러낸다. 고백 사건이 있은 후 우연히 마주친 루시우스에게 그가 사실 자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임을 다 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아이비는, 어렸을 땐 앞이 보이지 않는 자신을 위해 언제나 팔을 잡아 주던 그가 어느 순간부터 그러지 않더라며, 가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남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한다, 고 말하기도 한다. 당당한 건 좋은데 혹시 착각하는 거 아니야? 싶을 정도의 당돌함이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재미 없게 구는 루시우스를 봐도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렇듯 착각처럼 보일 수 있는 아이비의 믿음은 곧 그 깊이가 드러난다. 영화의 ‘명장면’이라 할 수 있는 부분에서, 숲속의 괴물들이 마을로 들어오자 공포에 휩싸인 주민들은 모두 안전한 실내에 몸을 숨기지만, 아직 밖에 있는 루시우스를 염려하는 아이비는 닫지 않은 문가에서 그를 기다린다. 루시우스를 좋아했던 아이비의 동생마저 제발 문을 닫으라고 애걸하는데도 그녀는 루시우스라면 우리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반드시 올 것"이라고 확신에 차서 말한다.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에게는 더더욱 위협적일 불길한 어둠을 마주한 아이비는 한없이 무력해 보인다. 그러나 아이비는 두려움에 질려 덜덜 떨면서도 그가 반드시 올 것을 확신하며 보이지 않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미지의 괴물이 성큼 다가오는 순간, 루시어스는 그녀의 믿음대로 나타나 아이비의 손을 잡고 안전으로 이끈다.


The Village (2004) - He will come back to make sure we are safe (HD, ENG sub) - YouTube


이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이렇듯 주인공이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위험도 죽음도 불사하는 모습은 여러 로맨스 영화에 등장하던 흔한 광경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3년 정도가 "유통기한"이라는 ‘연애 감정적’ 사랑, 그러니까 상대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게 만드는 ‘콩깍지’가 벗겨지고 난 후에도 인간이라는 이기적 존재가 그렇게 무모하게, 그렇게 온전히 이타적으로 행동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종종 든다. 그래서인지 나는 영화 속 연인들이 서로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에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편인데, [빌리지]에서의 이 장면만은 특별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이비의 루시우스에 대한 기다림은 상대를 ‘연인’으로 ‘사랑’해서가 아니라 루시우스 그 ‘자체’로 ‘신뢰’해서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염려로 죽음도 무릅쓰는 무모함이 아니라 다른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신뢰, 다시 말해 그는 반드시 자신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올 사람이라는 그의 ‘본질’에 대한 신뢰가 있기에 두려움을 견딜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혹여 그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해 그녀가 괴물에게 당했더라도 그가 ‘그런 사람’이라는 확신은, 그 신뢰만은 변질되지 않았으리라 본다. 그 정도의 굳건한 신뢰가 있었기에 그녀는 벌벌 떨면서도 문을 닫지 않고 기다렸을 테니 말이다.





상대를 ‘연인’으로뿐 아니라 - 혹은 ‘부모’, '자식' 같은 어떤 혈연적 관계로만이 아니라 - 그 사람 그 자체로, 한 영혼이자 인격체로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이렇게 ‘신뢰’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서로의 상황과 조건이 바뀌어도, 애정의 강도나 형태가 변하더라도 상대의 본질을 확신하여 그 어떤 두려움도, 현실적인 걱정과 어려움도 결국 넘어설 수 있는 것. 그런 신뢰를 인간의 힘으로 형성하는 일이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이미 그렇게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 그 이상을 예시하는 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굉장히 낭만적인 사실임이 분명하다. 우리 또한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손을 내밀고는 하지만 그때마다 늘 손을 잡아 주는 누군가가 있음을 확신할 수 있으니까.


루시우스와 아이비가 이렇게 위험을 피한 이후, 루시우스는 차마 곁을 떠나지 못하고 그녀의 집 밖을 지킨다. 이를 눈치 챈 아이비는 밖에 나가 그의 곁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러다 갑자기 "우리 결혼식 날 나랑 춤 춰 줄 거냐"라고 물으며 프로포즈 아닌 프로포즈를 한다. 뭐 말이 프로포즈지 ‘통보’라고 표현하는 편이 맞을 듯하다. 솔직히 좀 본받고 싶을 만큼의 박력이다. 언제나 뚱한 듯하던 루시우스가 그 말을 듣고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소스라치는 '신체적' 반응을 보일 정도인데 - 이 영화에서 호아킨 피닉스가 작은 몸짓이나 눈짓에 실린 미세한 감정 등으로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루시우스’의 캐릭터를 색칠해 나가는 것도 재미있는 감상 포인트다 - 너무나 당황한 루시우스는 항상 꼭 그렇게 앞서 나가야겠냐며 결국 ‘폭발’한다.





이 고백 없는 고백 씬, 프로포즈 없는 프로포즈 씬에서 부각되는 ‘이해’와 ‘몰이해’의 조합이 상당히 흥미롭다. 루시우스를 그 자신보다 더 정확히 이해하는 듯한 아이비와는 달리, 감정의 폭이 고요하고 잔잔한, 언제나 자기 자신을 억누르는 듯한 루시우스가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고 당돌한 아이비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가 그녀를 흘끔거리며 보는 시선도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애정 어린 눈빛이라기보다 어떤 ‘미지의 존재’를 쳐다보는 데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너무나 쉽게 자신의 마음을 꿰뚫고 있는 아이비에게, 감정 표현이 능숙치 않은 자신과 달리 하고 싶은 말은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녀에게, 자기 마음을 그렇게 다 파헤쳐야만 "속이 시원하겠냐"는 원망 아닌 원망을 쏟아 내는 모습에서 그와 그녀가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 얼마나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인지도 짐작하게 된다.


하지만 이 장면이 ‘로맨틱’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루시우스가 ‘그럼에도’ 아이비를 사랑하기 때문인 듯하다. "도대체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다"로 해석될 수 있는 원망 혹은 투정을 내뱉던 루시우스가 그녀에게 건네는 마지막 말은, 결국 그녀가 원하는 대로 결혼식 날 함께 춤을 추겠다는 약속이다. 역시 프로포즈 아닌 프로포즈로, 사랑 고백이라기엔 좀 김이 빠지지만 그럼에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아이비를 사랑한다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려 하는, ‘이해’하려는 노력의 표현이 아닌가 싶다. 이것이 영화 속 둘의 관계를 조용하고 무뚝뚝한 남자와 발랄하고 씩씩한 여자의 ‘로맨스’, 즉 ‘정반대인 사람들이 서로에게 끌리는’ 정도의 진부한 설정으로 느껴지지 않게 해 주는 요인이기도 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이란 결국 이렇게 ‘이해’와 ‘몰이해’가 균형을 이루는 관계일지도 모르겠다. 상대를 평생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몰이해’를 인정하는 동시에, 최대한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상대의 본질을 ‘신뢰’하면서도 그의 정체성이나 가능성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일. 이해가 안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과정. 우리가 영원히 완벽하게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을 그분을, 그럼에도 확신을 가지고 사랑하고 있듯.


그리고 두 주인공의 이런 '복잡한' 사랑은 결국 [빌리지] 전체의 핵심을 관통하게 된다. 루시우스가 크게 다쳐 생사의 기로를 헤맬 때 아이비는 그녀의 연인이 실패한 일(공포의 숲을 지나 그 너머의 세상에 닿는 것)을 해낸다. 눈이 보이지 않는 신체적 한계와 공포를 말 그대로 ‘사랑’의 힘으로 극복하는, 그야말로 ‘로맨스’의 정석 같은 전개를 통해 샤말란 감독 특유의 변칙적인 플롯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로맨스보다 더 로맨스 같은 영화라고 부른다.


P.S. 사실 [빌리지] 말고도 다른 영화를 몇 편 다룰 생각이었는데 분량 조절에 처참히 실패했음을 밝힌다. 영화 속 비중도 특별히 많지 않은 연인들에 대해 이렇게나 할 말이 많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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