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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anne Mar 04. 2023

밀정: ‘빛’ 속에 머리를 누일 수 있기를

엄마 C의 시선



영화 “밀정”은 “황옥 경부 폭탄 사건”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그리고 그 사건을 배경으로 삼은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이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져 2016년 개봉되었던 영화입니다. 일제강점기라는 격동의 시기에 일어난 실제 사건과 실존 인물들을 소재로 한 작품인 만큼 줄거리 또한 긴장감과 긴박감이 넘치는 데다, “조용한 가족”, “반칙왕”, “달콤한 인생”,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악마를 보았다” 등을 연출한 김지운 감독이 그 작품들을 통해 얻게 된 “탐미적 스타일리스트”라는 다소 ‘거창한’ 별칭에 걸맞게, 당시의 시대 상황과 어울리는 미술, 음악 등의 요소를 사용해 화면 전체를 우아하고 고풍스럽게 그려낸 점도 이 영화의 특별한 매력으로 작용했다 하겠습니다.


그보다 한 해 앞서 개봉되었고 역시 1932년에 실제로 있었던 “우가키 가즈시게(일본 육군 대장) 암살 작전”을 모티브로 했다는 영화 “암살”과 자주 비교되기도 하지만 - 제목을 비롯해 공유한 여러 유사성 때문에 - 대중성에서 비교적 우위를 점한다고 할 만한 “암살”보다 ‘예술 작품’으로서의 느낌이 좀 더 강한 동시에 삶에서 처할 수 있는 가장 큰 선택이라 할 중요한 기로 앞에 서게 된 한 인간의 심리적 갈등이 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에서 저 개인적으로는 조금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작품입니다. “이중 간첩”이라는 소재가 주는 스릴과 긴장감이 보는 재미를 더해 주는 이 영화는, 헐리우드의 대규모 제작사 워너 브라더스가 제작비 전액을 투자하고 제작은 물론 배급까지 맡은 최초의 한국 영화라고도 하지요.





상당히 길고 복잡한(러닝타임 2시간 20분) 내용을 최대한 압축해 요약하자면, 애초 상해 임시정부의 통역이었으나 배신과 밀고의 공로로 조선인에게는 쉽지 않은 “경무국 경부”라는 직책까지 올랐던 이정출은, 경무국 부장 “히가시”의 명령으로 “의열단”과 접촉하며 단체의 리더격인 “김우진(실제 인물 김시현 역)”에게 접근했다가 의열단장 “정채산(실제 인물 김원봉 역)”으로부터 도리어 ‘포섭’ 당하는 상황을 맞습니다. 미처 생각지 못한 사이 히가시의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입장에 놓인 데다 “하시모토”라는 - 조선인이면서 일본인보다 더 악랄한 작태로 젊은 나이에 일경 고위 간부까지 된 - 인물과의 '충성 경쟁'에서 밀릴 듯한 위기감까지 느끼던 이정출은 심한 갈등 속에서도 그들을 돕게 되고, 경성으로 폭발물을 운반하는 작전을 돕던 중 하시모토와 그의 부하 두 명을 사살하는 일도 벌어집니다.


경성까지 가는 기차 안에서 조직 내 밀정이던 “조회령(실제 인물 김재진 또는 권태일로 추정)”을 색출해 처단했으나 결국 조직원들이 하나씩 사살 혹은 생포되다가 마지막엔 김우진과 이정출도 또 다른 밀정에 의해 체포되기에 이릅니다. 관객들에게는 나중에야 밝혀지지만, 김우진의 부탁으로 폭탄을 대신 숨겨 두었던 이정출이 '각본대로'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고 풀려난 후, 히가시와 일본 고위 간부들이 모인 연회장에서 폭발물을 터뜨려 임무를 완수하고, 그들의 체포를 도운 밀정(“주동성”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도 마지막 부분에서 처단됩니다. 연회장 폭발 장면이 허구의 설정이기는 하지만 1920년 당시 “부산 경찰서장 폭살 사건”과 “밀양 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이 실제로 있었기에,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이라는 소설을 쓴 작가 김동진이 그 사건들에서 아이디어를 빌려 온 것으로 추측된다고 합니다.





영화에서 “이정출”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배우 송강호가 연기한) “황옥”에 대해 친일파였다는 의견과 독립투사였다는 의견이 학계에서 크게 갈린다고 하니 그만큼 영화의 주인공 격인 이 인물의 'stance'가 극적 긴장과 영화적 재미에 크게 기여하는 요소라 볼 수 있겠지만, 사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인물의 실제 모습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공로’로 그렇게 높은 지위까지 올라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지막에는 영화의 내용처럼 자기 삶의 방향을 독립운동 쪽으로 '전환'했던 - 불안감과 위기의식으로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선택일지라도 - 사람으로 믿고 싶어서입니다. 어쩌면 그의 삶도 엄청난 대의나 명분보다 현실 상황에 떠밀려 자신의 현재 위치까지 이르게 된 대다수 보통 사람들의 삶에 ‘일제강점기’라는 특별한 시대상이 투영된 것뿐 아닐까 여겨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제가 “암살”보다 이 영화를 더 좋아하게 된 것도 전자의 경우 주인공 “염석진”이 독립운동가로 시작한 삶을 변절자로 마감했던 것에 반해, “밀정”의 “이정출”은 비록 '공개적' 변절자로 비난 받는 위치까지 갔었지만 결국 독립운동에 공헌하는 결론으로 끝이 맺어졌기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이정출을 설득하기 위해 밤바다에 함께 나간 정채산은 “나는 사람 말을 믿지 않습니다. 내가 한 말조차 믿지 못하겠소. 다만 내가 해야만 할 일,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믿을 뿐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어디에 올려야 할지를 정해야 할 때가 옵니다. 이 동지는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리겠습니까”라고 도전장을 내밉니다. 아마 마음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던 이정출도 그의 이 말에 나름의 결단을 내릴 수 있었겠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어느 한 사람 예외 없이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바”, “마땅히 속해야 할 곳”에 대해 결단을 해야 하는 순간이 언젠가 반드시 오게 됩니다. 이 영화 속의 이정출처럼 비록 지난 삶이 실수로 얼룩졌더라도, 그리고 비록 동기가 그다지 순수하지 못했을지라도, 결국은 돌이켜 삶의 방향을 전환함으로 '그분'의 명부 위에 이름을 올리는 우리 모두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오래전 보았던 이 영화를 이번에 다시 선택하며 출연 배우들을 기억하려 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올랐던 것이 - 주인공인 송강호나 공유가 아니라 - “정채산” 즉 “김원봉”을 연기한 이병헌이었는데, 출연 분량도 그리 많지 않은(“특별 출연”에 '불과한') 그가 왜 제일 먼저 생각났는지 영화를 다시 보면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영화 “암살”에서도 본명으로 등장했던, 그리고 한동안 공로에 합당한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김원봉 역인 그의 입을 빌어 전달된 위의 메시지가 이번 영화평을 통해 함께 나누고 싶을 만큼 강력한 것이기 때문이었음을 말이지요. 다른 어떤 화려한 장면이나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을 넘어서서 그가 던진 그 말들, 더 나아가 독립운동은 물론 그 외 모든 이념 논쟁을 초월하여 한 인간이 삶에서 선택하고 굳건히 지켜 내야 할 것에 대한 뚜렷한 소신이 저의 기억력을 그렇게 작동하게 한 이유였다는 걸 말입니다.


최근에 본 영화 “헌트“를 통해서도 인간의 제도나 이념이 목숨을 걸 만한 '가치(value)'가 되지 못함을 재차 확인하게 되었지만, 인간이 ‘만들어 내는’ 관념과 제도는 그 어떤 것도 완벽하지 않으며 또 다른 갈등과 문제점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그를 위해 자신의 모두를 바칠 가치가 있다고 할 대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직 단 하나의 불변의 진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눈뜨이게 해 주신 영원한 진리만이 우리가 목숨까지 바칠 만한 의미 있는 목적임을, 영화를 보며 또 위의 대사를 들으며 다시 한 번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죽을 가치가 없는 무언가라면 그것을 위해  가치도 없다(If it's not worth dying for, it's not worth living for)”라는, 평소 좋아하던 말도 문득 생각나더군요.




딸 J의 시선


이번 편의 글을 올리는 날짜가 3. 1절과 가까이 맞물리기에 독립 운동에 관한 영화를 다루면 어떨까 생각하던 중 [밀정]이 떠올랐다. 늘 흥미로운 도전을 시도하는 듯 보이는 김지운 감독이 "독립운동"이란 소재를 다룬다는 점,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두 배우, 송강호와 공유의 예기치 않은 조합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개봉 전부터 많은 기대를 하게 된 영화였다. 역시 "독립운동"이라는 같은 주제로 큰 성공을 거두었던 [암살]이 고동치는 맥박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한 ‘뜨겁고’ 열정적인 액션 영화라면, [밀정]은 차갑고 냉철한 ‘느와르’ 혹은 스파이물로 대비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텐데, 개인적으로는 [밀정]이 좀 더 취향에 맞는 듯하다(물론 [암살]도 좋아하는 영화이기는 하다).


[밀정]은 1920년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역사적 사실인 "황옥 경부 폭탄 사건"에 얽힌 이야기들을 극화한 영화지만 이 글에서는 그 실제 사건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으려 한다. 먼저 줄거리를 짧게 소개하자면, 이 작품의 두 주인공은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 이정출(송강호)과 무장 독립운동 단체 "의열단"의 실질적 리더 김우진(공유)이라는 인물이다. 완벽한 대립 구도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 둘은 일제의 주요 시설을 공격하기 위해 경성으로 폭탄을 들여오려는 의열단을 이정출이 감시하면서 아슬아슬한 인연을 시작한다. 김우진과 의열단의 뒤를 캐려는 이정출과, 그의 눈을 피해 작전을 성공시키려는 김우진은, 서로에게서 정보를 얻고 이용하기 위해 복잡하게 얽히게 되고, 의열단이 이정출을 ‘회유’하는 전략을 전개하면서 그는 일본의 편도 조선의 편도 아닌, 김우진을 돕는 ‘밀정’ 비슷한 위치에 서게 된다. 같은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이지만 이정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맹목성을 보이는 하시모토(엄태구)의 지휘 아래 일본 경찰들은 의열단을 턱밑까지 추격하게 되고, 결국 의열단 단원들과 일본 경찰, 김우진과 이정출은 각자의 비밀을 안은 채 폭탄이 실린 경성행 열차에서 마주하게 된다.





앞서 말했듯 나는 굉장한 기대를 가지고 이 영화를 처음 관람했는데, 영화를 보면서 약간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김지운 감독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감각적인 연출과 영상미가 이 영화(특히 초반부)에선 약간 지나치게 느껴졌달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트랜지션(transition)에 사용된, 조금 튄다고 할 정도로 부각된 기법들, 영화의 세트나 인물들의 의상, 색감, 대사 등에서 드러나는 세심한 조형과 의도된 ‘연출미’가 오히려 몰입을 방해한 면도 있었다. 때문에 작품의 중후반부까지 잘 적응을 하지 못한 채 영화와 낯을 가렸(?)더랬다. 그런데 이번에 영화를 다시 감상하기 전, 작품의 영어 제목인 “The Age of Shadows(그림자의 시대)”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한글 원제인 [밀정]과 전혀 다른 느낌의 이 제목이 뭔가 여운을 남겼고, 이 영어 제목을 곱씹으며 다시 영화를 보았다. 누가 ‘밀정’이고 적에게 정보를 흘리는 배신자냐는 스파이 영화의 기본적 관심 대신 ‘명암’으로 나뉠 수 밖에 없던 시대상에 초점을 맞추고 나니 이 영화가 조금 다른 깊이로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단 영화가 굉장히 –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 ‘스타일리스틱’, 그러니까 감각적인 것은 사실이다.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자연스러운’ 혹은 신선하고 기발한 촬영법을 추구하는 요즘 영화들과 달리, 좋게 말해 클래식하고 나쁘게 말하면 ‘촌스러운’ 기법들을(노골적으로 '연출'을 드러내는 듯한) 쓸 때가 있다. 또 인물들이 위치하고 있는 장소의 전체가 아니라 극히 일부만 비추는 장면이 대부분이다 보니 영화 내내 프레임 안에서의 ‘공간감’ 역시 굉장히 타이트하다. 심지어 야외에서 찍은 장면조차 그 장소의 전면이나 건물의 외관 전체를 보여 주는 경우가 많지 않은데, 이런 이유로 영화에 나오는 장소들은 비좁은 ‘세트’처럼 보이기도 한다. 카메라 또한 장소뿐만 아니라 인물들까지 타이트하게 잡아내며 그들의 얼굴과 표정에 중점을 두고, 시원하게 터지는 소수의 액션 씬 외에 영화 안의 모든 갈등과 사건은 인물들 사이의 대사나 표정, 구도 등을 통해 표현된다. 그런 만큼 영화를 보고 있자면 제한된 공간 안에서 오직 연기력과 연출력만으로 관객의 몰입감을 높여야 하는 연극 무대가 떠오르는데, 이것을 등장인물들의 ‘연출된 삶’, 그러니까 ‘진실’을 감추고 보호하기 위해 ‘거짓’을 꾸며 내고 ‘연기’해야 하는 그들의 입장과 시대의 비극을 표현하기 위함으로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그 ‘진실’과 ‘거짓’의 대비는 영화의 영어 제목에 사용된 ‘그림자’의 연출을 통해 더욱 두드러진다.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면서 가장 흥미롭게 다가왔던 부분은 이 작품 안에서 조명과 빛이 단순한 미장센이나 영상미를 위해서뿐 아니라 인물들의 심리를 나타내는 도구로도 쓰였다는 점이다. 더 재미있게도 ‘빛’은 진실을 ‘어둠’은 거짓을 상징하는 일반적 은유법과 달리, 이 영화의 장면들 대부분에서 등장인물들은 ‘빛’ 속에서 거짓을 논하고 어둠, 그러니까 ‘그림자’ 안에서만 진실된 모습을 보여 준다. 예를 들어 김우진과 이정출의 첫 만남에서 그들은 환하게 밝혀진 방 안에서 속내를 감추고 ‘연기’를 하는데, 서로 이미 정체를 거의 파악한 상태지만 모르는 척 능청을 떨다가 김우진은 무언가를 가져오겠다며 옆방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 어두컴컴한, 그림자가 깔린 방 안에서 김우진은 쓰고 있던 가면을 벗은 채 초조하고 복잡한 표정으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 비슷한 결로, 이후 김우진과 이정출은 환하게 밝혀진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대화를 나누며 친해지는 ‘연기’를 하지만, 술자리를 떠난 뒤엔 무표정해진 얼굴로 그림자 속에 숨어 상대를 탐색하며 다시 ‘진실된’ 모습을 보인다.


서로 '간을 보던' 김우진과 이정출의 관계가 크게 변화하는 계기 또한 ‘그림자’ 안에서 이루어진다. 상해에 숨어 활동하는 의열단 단장이자 이정출을 회유하자고 처음 제안했던 정채산(이병헌)은 어슴푸레한 새벽 빛, 혹은 밝은 낮의 햇빛 아래에선 "동포끼리 술이나 한 잔 하자"는 핑계로 이정출을 탐색하다가, 적절한 때 자리를 비워 김우진이 이정출에게 준비한 ‘대사’를 읊으며 설득하도록 '연출'해 둔 ‘무대’를 제공한다. 하지만 낚시를 구실로 데려간 밤바다에서, 모닥불의 희미한 빛이 드리운 그림자 속의 정태산은 이정출에게 진심을 내보인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신념을 드러내며 이정출에게 당신은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리겠냐는 질문을 던진다. 그의 이 질문은 이정출이라는 인물마저 단번에 ‘까발리는’, 그러니까 이정출이 더 이상 자기 깊은 곳의 진심을 외면할 수 없게 하는 ‘직구’이자 도전으로 느껴진다.





이어지는 장면에는 김우진과 이정출이 가로등 빛 정도가 전부인 거리의 어두움 속에서, ‘독립군’과 ‘일본 경찰’이라는 자신들의 본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낸 채 마주한다. 김우진은 경성으로 폭탄을 들여오려는 의열단의 작전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며 서로가 알면서도 거짓으로 덮어 놓았던 ‘진실’을 밝힐 뿐 아니라 "오죽하면 이럴까"라는, 절박함을 넘어 구차하기까지 한 ‘진심’을 내보인다. 마땅히 ‘진리’를 의미해야 할 ‘빛’이 그들을 자유케 하기는 커녕 독립운동가들의 위험을, 실패를, 죽음을 뜻해야 했던 - 또한 어둠과 그림자와 ‘거짓’ 속에 머물 수밖에 없게 했던 - 안타깝고 비극적인 시절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 기법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영화의 제목이 [밀정]이긴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 누가 ‘밀정’이냐는 어쩌면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김우진과 이정출이라는 인물들의 차이점이 단순히 일본군이냐, 독립군이냐, 밀정이냐로 나눠지지 않는 듯하기 때문이다. 외면상 ‘빛’을 피해야 했던 것과는 별개로, 김우진이라는 인물은 ‘진실’과 ‘거짓’이 명확하게 구분된 사람이다. 그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거짓을 연기하면서도 ‘진실’된 모습을 잃지 않으며, 독립을 바라는 ‘진심’ 때문에 극한의 위험에 처하는 가운데에도 자신의 정체성과 중심을 지켜 내는 일에 끝까지 흔들임이 없다. 동료의 배신으로 작전이 실패해 체포와 고문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그는 이정출에게 폭탄을 숨겨 달라고 부탁하며 그래야만 자신들의 죽음에 의미가 있을 것이라 말한다. 영화 속 정채산의 대사로도 표현된 것처럼, "비록 실패하고 실패할지언정 그를 딛고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다"고 믿는,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릴 것인지"에 대한 자신의 결단 자체에 의미를 둔 확신이 아닐까 싶다. 그런 확고한 신념 덕분에 끝까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을 터이니.





그리고 일본 경찰에게 잡힌 김우진은, 그림자 속 인간의 ‘진짜’ 모습이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곳인 고문실에서 혀를 깨문다. 아무리 자신을 고문해도 의열단의 작전에 대해 실토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그럴 가능성을 없애려는 결단의 행위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이 장면을 김우진이 자신에게서 ‘말’이라는 '연기'의 수단을 제거함으로써 더 이상 ‘거짓’을 논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한 것으로 이해했다. 다시 말해 어떤 고난과 고통이 뒤따르더라도 이제 그에게는 독립운동가라는 ‘진짜’ 모습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그에 비해 이정출은 사실 ‘진짜’와 ‘가짜’를 명확하게 분리하기조차 어려운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알아 주고" 경찰로 만들어 줬다는 히가시 부장에게 나름의 충성심이나 고마움은 가진 듯 보이지만, 의열단을 돕는 이정출을 ‘변절자’라 비난하며 죽어 간 하시모토처럼 일본에 대해 진심으로 충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김우진과 단원들처럼 모든 것을 희생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런 면에서 그가 일본 경찰이 되기 전에 일본인과 조선인을 오가는 ‘통역’ 일을 했다는 설정도 꽤 의미심장하다. 그 자신조차도 무엇이 자신의 ‘진심’이고 ‘거짓’인지를 구별할 수 없으니 자신의 행보를, 마음을 확정하지 못하고, 그렇기에 의열단을 도와 달라는 김우진을 뿌리치지도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돕지도 못한 채 돌아서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영화의 대부분에서 이정출은 그야말로 ‘그림자’ 같은, 그러니까 ‘진실’과 ‘거짓’의 경계 자체가 모호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이정출이 결국 ‘조국’을 택하게 되는 계기, 즉 ‘거짓’이 ‘진실’로 변하는 계기는 어떤 특별한 정의감이나 죄책감은 아닌 듯하다. 하나의 계기라기보다는 여러 요소들이 함께 작용한 결과라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김우진을 도왔을 때도 독립을 열망하는 의열단의 대의에 진심으로 동의했다기보다 인간적으로 마음이 가서, 조선인으로서 피할 수 없는 어떤 마음의 빚이 있어서, 한때 친구였으나 자신이 그 죽음에 일조하게 된 독립군 김장옥에 대한 죄책감이 있어서였듯. 상식적인 인간으로서 가질 법한 정도의 얕은 죄책감, 붙잡힌 의열단 단원들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 히가시 부장이 자신을 끝까지 ‘조선인’으로 보리라는 체념 섞인 깨달음, 일제의 식민 통치 아래에서 피할 수 없는 잔인함과 잔혹성에 대한 염증 등등이 주춤대는 이정출을 떠밀었던 것 아닐까 싶다. 사실 독립군을 위해 일하는 진짜 ‘밀정’이 된 후조차 이정출은 독립에 대한 확신이 없다. 그가 처단하러 간 친일파 영감의 "너 같은 놈들이 있으니 독립이 되긴 하겠지"라는 대사를 통해 오히려 매국노가 독립군보다 더 광복에 대한 확신을 가진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고 말이다([암살]의 유명한 대사, ‘독립될 줄 몰랐다’와 재미있게 비교된다).


어찌 보면 이정출은 어어 하다가 얼떨결에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서 확신에 찬 김우진과 전혀 다른 행보와 서사를 갖게 되지만, 그럼에도 그의 ‘거짓’이 결국 ‘진실’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어둠과 야만의 시절, 상황에 휩쓸려 어어 하다가 못 이긴 척 매국을 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듯 어어 하다가 얼결에 애국을 한 사람도 있어야 옳을 터이니. 사실 믿음도 그렇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김우진 같은 인물들이 가진 굳건한 신념, 그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는 확신이 없을지라도 어어 하며 휩쓸려 간 척, 어쩔 수 없는 척으로라도 ‘정의’와 ‘진실’의 편에 서는 것. 실패와 실수를 거듭하고 가끔은 의심과 회의에 빠질지라도, 차라리 관성적으로나마 옳은 길을 떠나지 않는 것. 대단한 무언가를 이뤄 내지 못하더라도 우리를 휩쓸어 가시는 주님께 덩달아 어어 휩쓸려 가며 그의 발자욱을 따라가는 일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어슴프레한 빛 속에서 멀어지는 이정출은 김우진이 그랬듯 ‘연기’하고 있지만 이제 적어도 ‘진실’과 ‘거짓’이 명확하게 나뉜 삶만은 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마침내 ‘진짜’ 모습만이 남게 된 김우진을 통해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제시된다. 스스로 언어를 잃고 독방에 앉아 있던 김우진은 호의적인 간수로부터 의열단이 계획하던 거사를 이정출이 성공시켰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그제서야 몸에 힘을 빼고 휴식을 취하듯 눕는다. 온통 어두운 독방 안에서, 실낱 같은 빛이 한 뼘쯤 비추이는 바닥에 그는 머리를 누인다. 온몸은 어둠에 잠겨 있을지라도 머리는 금빛으로 빛나는 곳에 누운 김우진이 눈을 감은 채 웃는 얼굴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독방의 벽에 그가 새겼을 "단원들, 이곳에 다녀가다"라는 글귀와 함께. 이 감옥에서 그와 동료들이 어떤 끝을 맞이하든 그것이 진짜 ‘끝’이 아니라는 암시이자 다짐을 머리 위에 둔 채로. 그리고 그 모습은, 한때는 김우진이 피하고 두려워해야 했던, 모든 것을 드러내는 빛과 진리가 드디어 그를 ‘자유케’ 했음을 상징하는 듯하다. 비록 그가 이제 마주해야 할 것이 죽음, 혹은 그보다 더한 고통일지라도. 그것이야말로 진실된 항거이자 승리가 아니었을지.


정의를 위해, 진실을 지키기 위해 거짓을 입어야만 했던, 빛을 마다해야 했던 그림자의 시대를 생각한다. 여전히 너무 많은 이들이 어둠 속에서 고통 받는 세상이지만 적어도 우리는 머리를 빛 속에 누일 수 있는 엄청난 특권을 누리면서 살고 있다. 그런 우리가 "어느 역사에 이름을 올릴지"에 대해서만큼은 추호의 의심도 망설임도 없기를 바란다. 손에 잡히지도 않는 이상을 위해, 존재하지 않던 나라와 후손을 위해 연극 무대 위의 삶을 살며 거짓된 가면을 쓴 채 잊혀져야 했던 수많은 의인들을 기억한다. 자유로운 조국에서 누리는 우리의 삶이 그들의 희생 안의 모든 그림자를 거둬 낼 수 있기를.


*해비타트 코리아에서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위한 주거 개선 캠페인을 꾸준히 진행 중이다. 자세한 정보는 해비타트 사이트에서 찾을 수 있다.

Habitat : 그날의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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