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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anne Mar 17. 2023

블랙 팬서: ‘틀림’이 아닌 ‘다름’

딸 J의 시선



마블(Marvel)사가 “아이언맨(Iron Man)” 1편을 필두로 소위 ‘블록버스터 공장’을 세워 영화 생태계를 어지럽히기 시작한지도 어언 십여 년. 사실 2012년에 개봉한 첫 “어벤져스(The Avengers)”까지만 해도 꽤 신선한 히어로물 시리즈라는 생각에 흥미 있게 관람도 했지만 그 이후로는 마블 영화들에 별다른 관심이 생기지 않았었다. 워낙 문화적 영향력이 큰 시리즈인지라 줄거리는 어느 정도 숙지해 두는 편이었지만 그마저도 마블 세계관(Marvel Cinematic Universe)이 실사 영화를 넘어 TV 드라마와 애니메이션에까지 뻗어 나가면서 여러 차원과 평행 세계들이 동시에 공존하는 “다중우주”, 그러니까 “멀티버스(multiverse)”를 소개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것도 포기하게 되었고 말이다. 하지만 근래의 마블 영화들이 초기와 달리 그 매력을 많이 잃었다고 보고 있는 내가, 그럼에도 ‘히어로물’이라는 장르 자체에는 엄청난 잠재력과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초인적인 힘을 가진 ‘히어로’들이 가진 상징성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마블 영화인 “블랙 팬서(Black Panther)”는 바로 그 히어로물의 힘, 매력, 가능성과 작품성의 집약체라고 말할 수 있다. 굳이 한 구절로 요약하자면 "득의양양한 저항(triumphant resistance)"이라고 정의될 이 영화는 “블랙 팬서”라는 흑인 히어로를 통해 처음부터 끝까지 흑인들을, 더 넓게는 소외 당하고 탄압 받았던 모두를 위로하고 기억하며 당당하게 축하해 주는 작품이다.





앞서 말했듯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마블 세계관은 아주 복잡하지만, 이 글에서는 "블랙 팬서"라는 작품과 관련된 부분들만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주인공 “티찰라(T’Challa; 고 Chadwick Boseman 분)"는 아프리카에 위치한 (허구의) 나라 “와칸다(Wakanda)”의 왕자로, 히어로들을 노린 테러 사건에 의해 아버지를 잃게 된다. 선왕에 이어 와칸다의 왕위를 계승한 티찰라가 “블랙 팬서”라고 불리는 수퍼 히어로의 임무를 맡는데, 와칸다의 왕들은 대대로 블랙 팬서가 되어 그들의 나라를 지켜 왔기 때문이다. 와칸다는 가난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의 주변 나라들과 외적으로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세계의 어느 곳보다 발달된 최첨단 기술력과 막대한 자산을 보유한 국가이다. 마블 세계관에서 가장 강력한 희귀 금속인 “비브라늄”이 엄청난 양으로 매장되어 있는 와칸다는 그 금속을 응용해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 사실이 국외로 알려지게 되면 전세계가 비브라늄을 노려 자신들을 위협할 것을 우려해 가난한 ‘개발 도상국’으로 가장하며 어떠한 교역이나 무역도 시도하지 않는다.


모국을 사랑하는 티찰라는 아버지인 선왕이 그랬듯 와칸다의 비밀을 숨기고 국경 경비를 강화해 국가와 국민들을 보호하려 하지만, 다른 지도자들의 경우처럼 그 역시 여러 반대 의견에 부딪히게 된다. 티찰라가 여전히 사랑하는 전 애인 “나키아(Nakia; Lupita Nyong’o 분)”는 와칸다의 자원과 기술을 사용해 주변 아프리카 국가들을 도우며 난민들을 받아들일 것을 그에게 권하고, 친구이자 부하인 “와카비(W’Kabi)”는 와칸다가 지금처럼 몸을 움츠리는 대신 그 엄청난 무력을 이용해 다른 나라들을 굴복시키기를 바란다. 반면에 와칸다를 구성하는 다섯 부족 중 유일하게 왕의 통치를 거부하며 깊은 산속에 터를 잡은 자바리 부족의 족장 “음바쿠(M’Baku)”는 현재의 와칸다가 전통과 역사를 등한시하며 지나치게 현대화 혹은 기술화되고 있다면서 심하게 비판한다(아프리카 판 “흥선대원군”이라고 부를 만하다).





그런 가운데 와칸다에서 도난 당한 비브라늄의 불법 매매 사건과 관련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미국 출신 범죄자 “킬몽거(Killmonger; Michael B. Jordan 분)”가 와칸다에 나타나, 자신이 선왕의 동생의 아들, 즉 티찰라의 사촌인 왕족임을 밝히면서 왕위 계승권을 건 - 와칸다의 전통에 따라 - 전투를 청한다. 태생부터 와칸다의 왕자였던 티찰라와 달리 미국 땅에서 심한 억압과 차별을 몸소 겪으며 살아 온 킬몽거는, 티찰라에게서 왕위를 빼앗아 탄압 받는 흑인들과 세계 곳곳에서 무력하게 짓밟히고 있는 이들에게 와칸다의 최첨단 무기들을 공급함으로써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주도록, 더 정확히는 ‘혁명’을 이루는 능력을 갖추도록 도우려 한다. 강경파인 티찰라의 친구 와카비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세상을 무력으로 굴복시키려는 킬몽거의 사상에 호응하는 가운데, 티찰라는 와칸다의 안전만을 도모했던 선조들의 전통과 와칸다 밖 세계에 대한 도의적 책임 사이에서 고민하며 자신만의 결정을 내리게 된다.


감히 흑인들이 겪은 박해와 수모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동양인이라는 ‘소수집단(minority)’의 일원으로 외국에서 성장한 나에게 “블랙 팬서”의 당당하고 노골적이며 화려한, ‘흑인’과 ‘아프리카’에 대한 자긍심은 황홀할 정도로 인상적인 것이었다. 최근 몇 년간 흑인들(특히 건장하다는 이유만으로도 '위협적'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흑인 남성들)에 대한 미국 경찰의 폭력이 절정에 달한 상황에서 더없이 아름답고 강인한 주인공 티찰라는 ‘존재함’ 그 자체로 흑인들의 ‘저항’의 상징이 될 만하다. 그리고 티찰라, 나키아, 슈리, 오코예, 라몬다, 아요 등 북미 문화권에서는 생소하게 여겨지는 아프리카 고유의 이름과 함께 주인공들이 아무 위화감 없이 사용하는 ‘와칸다’ 발음이 섞인 영어는, 이민 1.5 세대로 살며 ‘한국식’ 억양이 혹시라도 내가 구사하는 영어에 섞이게 될까 전전긍긍했던 기억을 가진 나에겐 신선한 충격에 더해 약간의 씁쓸함까지 불러일으켰다. 왜 나는 모국의 언어와 문화의 흔적을 지워 버리고 모든 것을 ‘서구의(Western)’ 규격에 맞춰야만 한다는 압박을 느껴야 했을까?





비슷한 이유로 이 영화의 가장 매력적인 요소 중 하나는 바로 “와칸다”라는 나라이다. 단 한 번도 식민지가 되어 본 적이 없는, 외세의 침략에 굴한 적 없는 아프리카의 자유주의 국가라니! 일제의 탄압은 물론 명나라와 원나라 등 대륙의 지배를 받은 일이 없는, 자치권을 한 번도 잃은 적 없는 ‘대한민국’이라면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상상하게 하는, 낯설면서도 달콤한 설정이다. 최첨단 기술과 아름다운 자연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와칸다의 전경과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전통 의상들, 여성과 남성이 성별의 구분 없이 부족을 이끌 뿐 아니라 왕의 친위대인 “도라 밀라제”는 아예 여성 전사들로만 구성된 모습 등은 가슴 설렐 정도로 이상적이다. 어찌 보면 작위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겠지만 ‘와칸다’가 가진 상징성을 생각한다면 이 나라가 ‘완벽해야만’ 하는 이유를 납득하게 된다. 강대국들에게 수없이 짓밟혀 온 아프리카 대륙이 내부의 혼란과 갈등까지 더해 붕괴되면서 자신들의 조상이 뿌리내렸던 곳을 떠나 전세계로 흩어지게 된 흑인들에게 와칸다는 상징적이고 낭만적인 ‘고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허구이긴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온전한, 어떤 영적인 고국으로서 말이다. 악과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인간이 질투와 고통과 부끄러움을 알게 되기 전, 옷을 벗은 채 하나님과 함께 걸으면서도 당당하고 온전할 수 있었던 "에덴"을 상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처 입은 적 없는, 그 긍지와 자기 결정력을 잃은 적 없는 와칸다가 강하고 아름다울수록 이 영화에서 티찰라의 라이벌로 그려지는 킬몽거의 입장을 더 이해하게 되는 측면도 있다. 와칸다가 그 엄청난 부와 기술력을 보유하고도 고통에 신음하는 그들의 "형제 자매들(기본적으로는 같은 흑인들을 뜻하지만 힘없는 모든 이들을 아우르는 표현이기도 할)"을 외면했다는 그의 질책 또한 틀리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킬몽거도 와칸다의 무관심, 혹은 이기심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아버지인 “엔조부(N’jobu)” 왕자는 스파이로 미국에 ‘파견’되었었는데, 미국인과 사랑에 빠져 아이를 낳았으며 미국 내 흑인들의 절망스러운 상황을 직접 목격한 뒤 ‘급진주의자화’된 인물이다. 비밀리에 와칸다에서 비브라늄을 빼내 힘없는 흑인들에게 무력적 지지가 되고자 했던 그는 자신의 형이자 티찰라의 아버지인 선대 왕의 손에 처리되고 만다. 그러나 그 진실을 묻으려 한 선왕은 동생의 아이를 와칸다로 데려오는 대신 미국에 ‘버려두고’ 왔고, 의지할 곳 없던 어린 아이는 고통과 차별이 가득한 세상에서 독기와 악만으로 살아남아 결국 와칸다의 평화를 위협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티찰라를 “와칸다 출신 흑인(African-African)”으로, 킬몽거를 “미국 출신 흑인(African-American)”으로 대비시킨 사실도 흥미롭다. 와칸다에서 태어나 줄곧 그곳에서 살았던 티찰라는, 외세의 지배를 당한 적 없이 ‘순수’하고 ‘깨끗’한, 변질되지 않은 자신의 조국에서 뒤틀림 없는 건강한 자아를 키워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차별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으로서, 존중 받는 인간 본연의 당당함과 자존감을 잃지 않은 채로 말이다. 반대로 킬몽거는 억압과 불평등에 찌들어 차별을 '받지 않는 삶을 경험해 본 적 없는' 사람이 된다. 킬몽거가 실제로 흑인 무장 단체 "블랙 팬서(Black Panther Party)"가 태동한 장소인 캘리포니아의 도시 "오클랜드"에서 왔다는 설정도 의미심장하다(여담이지만 이 영화의 감독 라이언 쿠글러도 오클랜드 출신이다).


하지만 '폭력적 저항'을 고향으로 둔 킬몽거는 결국 "와칸다의 블랙 팬서"는 되지 못한다. 킬몽거는 분명 입체적이고 안쓰러운, 공감을 자아내는 인물이지만 그는 자신의 분노와 증오에 잡아먹힘으로써 결국 패배하고 만다. 그의 울분이 합당했을지는 모르나 억압 당하는 자들에게 무기를 쥐어 주어 억압하는 자들을 살해하자는, 정복 당하는 대신 전 세계를 정복하여 와칸다가 모든 이들 위에 군림하게 하자는 킬몽거의 외침은, 그가 자신이 증오해 온 탄압자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되었음을 보여 줄 뿐이다. 살인을 행할 때마다 자기 몸에 상처로 표시했다는 킬몽거가 티찰라와의 전투 전에 옷을 벗자 울퉁불퉁한 상처로 빼곡한 피부가 드러나는 모습에서는, 오직 누군가를 억누르고 ‘죽여’서야만 이룰 수 있는 그의 목표와 복수가 그 자신에게도 얼마나 돌이킬 수 없는 흔적을 남겼는지 잘 보여 준다. 살인 ‘판매자’ 혹은 살인 ‘상인’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killmonger”를 스스로의 가명으로 선택한 것 역시 안타까운 일이다.





대신 영화는 티찰라를 통해 ‘새로운’ 블랙팬서의 모습을 제시한다. 사랑하고 존경했던 아버지의 죄와 실책을 직시한 그는 조상들이 남긴 ‘외면’의 유산을 거절한 채 전혀 다른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아프리카의 주변국들과 바깥 세상이 겪고 있는 고통을 무시하며 자신들의 안위만 챙겼던 예전과 달리, 굳게 걸어 잠궜던 문을 열어 자신들이 가진 자원과 기술, 지식 등을 필요한 이들과 나누기로 한 것이다. 킬몽거가 세상을 증오와 폭력으로 무너뜨려 그가 온당히 "있어야 할 자리"에 올라서려 했다면, 티찰라는 자신이 온당히 "누려야 할 것들"을 내려놓고 다른 이들과 같은 낮은 자리에서 협력과 사랑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유명한 흑인 작가이자 민권 운동가였던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의 책 “The Fire Next Time”에 실린, 노예 해방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가 조카에게 쓴 편지의 한 구절을 여러 번 떠올렸다. 조카에게 백인들(인종차별을 하는)을 닮으려 하거나 그들의 인정을 받으려 할 필요가 없다고 조언하는 볼드윈은 그 대신 “그들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You must accept them and accept them with love)”라고 말한다. 그들 또한 사실은 차별과 증오라는 덫에 갇힌 이들임을 상기시키며 “이 무고한 자들에겐 그것 외에 다른 희망이 없기 때문(For these innocent people have no other hope)”이라고도 그는 말한다. 억압 당하는 자가 억압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만큼 '과격한(radical)' "저항"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이것이 온건하고 관대한 블랙 팬서 티찰라가 사실은 아주 '급진적인'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고 내가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짓밟히고 억압 당한 자들에게 지나간 상처를 떨쳐 버리고 고통과 분노의 유산을 거부하자고, 사랑과 협동을 선택하면서 똑같은 증오와 폭력으로 되갚지 말자고 권유하는 이 영화의 철학이야말로 진정한 저항이 아닐까 싶다. 그 어떤 고통과 탄압도 자신의 영혼을, 그 순수함과 ‘올곧음’을 망치지 못했다는 우월함을 상대에게 보여 진정한 승리를 거두는 일 말이다. 일찌기 십자가에 못박히시던 예수님이 자신을 죽이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듯.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Driving Miss Daisy),” “헬프(The Help),” “그린북(Green Book),” “노예 12년(12 Years a Slave)”처럼 흑인들의 고통과 굴복, 강압에 대한 영화들이 대부분 흥행하고 인정을 받았던 배경을 바탕으로 등장한 ‘블랙 팬서’가, 침략과 굴종으로 변질되지 않은 나라에서 성장해 자신이 ‘아프리카인’ 임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구호' 대상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강하고 부유하며 관대한 흑인 히어로라는 사실은 무척이나 고무적인 설정이라고 하겠다. 세상에 속해 살던 우리가 언젠가 돌아갈 '에덴'을 기다리는 데만 그치는 대신, 이 땅에서도 온전하고 순수한, 차별과 탄압이 없는 ‘와칸다’를 이루는 일에 기여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해 본다.


P.S.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나 버린 배우, 채드윅 보스만이 그립다. Rest In Power.




엄마 C의 시선



개인적으로 “마블(Marvel)” 시리즈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기에 지금껏 본 마블 영화라고 해야 “토르(Thor)”와 “스파이더맨(Spider Man)”, “원더 우먼(Wonder Woman)” 정도가 고작인 제가 이 “블랙 팬서(Black Panther)”에 유난히 흥미를 갖게 된 것은 역대 “마블 코믹스(Marvel Comics)” 가운데 처음으로 흑인이 주인공 역을 맡은, 최초의 “흑인 수퍼 히어로” 영화라는 사실에 관심을 느껴서였습니다. 이전에도 액션 코믹스의 등장인물 중 흑인들이 있기는 했다지만 주로 백인 주인공의 곁에서 도움을 주는(초능력이 없는) 조연급의 역할이었다면 이 “블랙 팬서”라는 캐릭터는 미국 만화에 등장한 첫 흑인 “메인 스트림” 수퍼 히어로일 뿐더러,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 American)”이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의 토착민(African descent)”이라는 특이점까지 가졌다는 것이지요. 21세기에 들어선지도 20년이 가까운 시점에 이르기까지 – 영화의 개봉 연도가 2018년이었기에 – ‘흑인’이 주인공이란 사실을 화젯거리로 삼게 되는 현실이 무척 안타깝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만화’ 주인공으로서의 “블랙 팬서”가 탄생한 1966년 당시의 미국은, 갈등과 혐오 등 온갖 사회문제와 더불어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베트남전까지 더해져 국가적 혼란이 극심하던 격동의 시기였는데, “판타스틱 포(Fantastic Four)”를 통해 독자들에게 처음 선보인 “블랙 팬서”는 공교롭게도 급진 흑인 운동 단체 “흑표당(BBP: Black Panther Party)”이 공식 창당(1966년 10월)하기 3개월 전(같은 해 7월) 동일 명칭을 먼저 사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둘 모두 미국 사회에서 흑인 인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던 시절 그들의 목소리를 본격적으로 드러냈다는 공통점을 지니기는 하지만, 급진 운동 단체가 주는 과격한 이미지로 인해 좋지 않은 인상을 심게 될까 봐 “블랙 레오파드(Black Leopard)”로 캐릭터의 이름을 바꾼 일도 있었다고 - 그후 이름이 갖는 영향력이 미미해서 결국 원래의 이름으로 다시 되돌리게 되었다고 - 하고 말이지요.





영화의 제목인 “블랙 팬서”는 특정인의 이름이 아니라 아프리카에 위치한 나라로서 소개되는 가상 국가 “와칸다(Wakanda)”의 지도자를 일컫는 호칭인데, 영화의 시작에서 언급되듯 이 와칸다는 아프리카 대륙이 처음 생겨날 당시 그들의 땅에 “비브라늄”이라는 운석이 떨어지면서 놀라운 기능을 가진 신비한 금속 비브라늄(마블 시리즈에 친숙한 이들은 이미 잘 아는 물질이라는)을 다량으로 보유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풍부한 자원에 힘입어 고도의 기술과 문명을 이룩한 와칸다는 주변의 아프리카 국가들이 불안정한 정치 체제와 빈곤한 경제 상황으로 고통 받을 때에도 자신들의 풍요함을 드러내지 않은 채 안전하게 살아 왔지만, 세월이 흐르며 제국주의를 앞세운 서구 열강이 아프리카를 침공하자 극도의 과학 기술을 사용하여 바깥 세상으로부터 자신들의 능력을 숨기는 동시에 외부 정세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고립주의를 원칙으로 삼음으로써, 21세기가 되어서까지 대외적으로는 이 와칸다가 아프리카 군소 국가들 가운데의 하나, 그중에서도 “세계 최빈국”으로 알려져 있다는 설정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티찰라(T'Challa)”는 아버지이자 선대 “블랙 팬서”인 “티차카(T'Chaka)” 왕의 사망으로 후계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 테러로 발생된 아버지 죽음 이전의 '가정사'가 적잖이 복잡합니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보여지는 과거(1992년) 상황에서, 티차카의 동생이자 티찰라의 삼촌인 “엔조부(N'Jobu)” 왕자는 외국에 파견되어 정보를 수집하는 “워독(Wardog)”이라는 신분으로 미국에 잠입해 있었지만, 그곳에서 가정을 이루어 정착한 이후 현지의 흑인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목격하면서 와칸다의 비브라늄과 무기를 이용해 백인들에게 복수하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고, 그즈음 일어난 비브라늄 도난 사건의 배후로 그를 의심한 형 티차카가 동생의 집으로 직접 방문했다가 뜻하지 않게 그를 살해하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지요.





현재로 시점이 바뀌며 보여지는 재미있는 장면은 엔조부의 아들인 “킬몽거(Killmonger)”가 성장해 복수를 하러 와칸다로 찾아 오는 과정에서 한국의 “부산”이 등장하는 모습을 꽤 오랫동안 볼 수 있다는 것인데, 자신의 아버지가 왕이던 시절부터 비브라늄을 훔쳐 온 “클로(Klaue)”라는 악당을 체포하기 위해 주인공 티찰라와 그의 옛 애인 “나키아(Nakia)”, 보디 가드 격인 장군 “오코예(Okoye)” 등이 한국의 부산으로 ‘출동’한 후 그를 사로잡기 위해 벌이는 자동차 추격 장면에서 부산의 골목골목이 카메라에 잡히기 때문입니다. 클로와 함께 범죄를 공모했던 킬몽거가 여러 복잡하고도 아슬아슬한 상황을 거치며 체포되었던 클로의 도주를 돕지만, 사실 그것은 자신의 아버지(엔조부)가 받은 오해의 원흉인 그를 죽이기 위해 킬몽거가 꾸민 전략이었기에 클로를 탈주시킨 후 곧바로 자신의 손으로 사살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그의 시신을 가지고 와칸다에 나타나지요.


아버지(엔조부)의 복수를 위해 와칸다로 찾아온 킬몽거는 왕족인 자신의 신분을 밝히면서 사촌 티찰라에게 왕위를 건 도전장을 내밀고, 선왕인 자신의 아버지가 그의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던 티찰라는 심리적 부담으로 결투 과정 중 감정을 앞세우다 절벽(폭포) 아래로 던져지고 마는데, 이후 주변 부족들의 도움으로 부상에서 회복되어 다시 킬몽거와 싸워 승리하고, 킬몽거는 도와 주겠다는 티찰라의 제의도 거절한 채 죽음을 선택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 됩니다. 최대한 간결하게 축약한 이 줄거리에 비하면 - 세부 내용을 다 기록하면 읽는 분들이 너무 혼란스러울 듯해서 - 실제 이야기는 훨씬 복잡한 동시에 많은 생각 거리도 제시하고 있지만, 제한된 공간에서 다 다루기에 무리가 있는 만큼 이 글에서는 주요 쟁점이 될 수 있는 두 가지 측면만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자신이 옳다고 믿는 '대의'를 추구하고 성취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방식'을 취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부유하고 안전한 모국 와칸다에서 성장하며 국왕인 아버지 밑에서 평탄한 삶을 영위해 온 주인공 티찰라와, “워독(Wardog)”이라는 불안정한 신분으로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에서 활동하던 엔조부의 아들로 태어나 자랐던 킬몽거 사이에는 옳다고 믿는 바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관점에서 큰 차이가 발생했습니다. 폭력을 수반하지 않는 온건하고 이성적인 방식으로 조국의 안전과 평화를 수호하기 원하는 티찰라와 달리, 부당한 대우와 극심한 차별을 경험해 온 킬몽거는 자신이 당했던 것과 동일한 수준의 폭력으로 상대를 응징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인데,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자신들을 억압하는 로마제국에 저항하는 방식을 두고 각기 다른 형태의 양극단을 취했던 “에세네파(Essenes)”와 “젤롯파(the Zealots)”, 미국의 흑인 운동 역사에서 한 획을 그었다고 할 만한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와 “말콤 엑스(Malcolm X)”의 차별점을 떠올리게도 하는 설정입니다.


세속의 삶과 분리된('경건'에 기초한) 생활 방식을 통해 세상과 거리를 둠으로써 로마의 지배권에서 벗어나기를 꿈꿨던 “에세네파”와 달리 “열심당”이라고도 불리는 “젤롯파”는 로마제국을 상대로 한 테러와 암살을 자행하며 무력으로 정권을 무너뜨리려 했다는 극적 차이와 유사하게, 두 사람 모두가 '흑인'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면서도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고 유수한 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까지 받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는 달리 어린 시절 아버지가 KKK단에 의해 살해된 이후 비참한 성장 과정을 겪으며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과격분자로까지 변모하게 된 “말콤 엑스”의 삶을 생각해 보면, 자신이 당한 부당하고 억울한 현실을 타개함에서 어떤 입장과 방식을 취할 것인지의 선택이 각자에게 남겨진 몫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둘째는, 자신과 '다른' 개인과 집단을 대하는 태도에서 어떠한 '방식'을 취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인종'이나 '성별'과 같이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 하나님께서 결정해 주신 - 서로 다른 정체성(identity)을 가지고 사람을 구별 짓거나 차별하는 것은 지적 무지와 윤리적 타락의 문제를 넘어 심각한 범죄라고 불릴 만한 행위입니다. 한국의 유명 연예인과 운동 선수들조차 해외에서 인종차별을 당하는 일을 목격하며 분개하곤 하는 우리가 막상 특정 인종이나 특정 국가 출신의 사람들을 무시하며 차별하는 일을 무의식 중 자행하는 현상도 시급한 각성이 필요한 부분이고 말입니다. 이 영화의 여러 장면에서 '흑백'이라는 인종의 차이뿐 아니라 '남녀'라고 하는 성별의 차이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것 역시 같은 문제 의식에 기인하는 것이리라 추측해 봅니다.


성경을 꼼꼼히 읽을수록 더욱더 분명해지는 사실은, 하나님 안에서의 모든 인간의 동등함과 존귀함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사랑'과 '화합'의 메시지와 궤를 같이 한다는 점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서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표준새번역 (Do nothing from selfishness or empty conceit, but with humility consider one another as more important than yourselves; NASB)”라고 바울을 통해 주신 권고(빌 2:3)는 물론, “형제가 함께 한마음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선하고 얼마나 보기 좋은가!; 우리말성경 (How good and pleasant it is when God’s people live together in unity!; ESV)”라며 다윗의 입을 빌어 건네신 권면(시 133:1)에 의하여도, “주님께서 그곳에서 복을 약속하셨으니, 그 복은 곧 영생이다; 새번역 (there the Lord commanded the blessing, even life for evermore; NKJV)”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약속(시 133:3)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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