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anne Mar 25. 2023

라디오 스타: 빛나기보다 빛내기를 소망하는 삶

엄마 C의 시선



이준익 감독이 연출하여 2006년 개봉되었던 “라디오 스타”는 안성기와 박중훈이라는 한국 영화계의 ‘단짝’이 주연을 맡은 일종의 “버디 무비”로, 가수와 매니저 관계인 두 사람 사이의 진한 ‘우정’이 ‘전우애’의 차원을 넘어 가족 간에나 존재할 법한 아름다운 ‘사랑’으로까지 발전하는 과정을 그린 가슴 따뜻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연출한 이준익 감독은 “황산벌,” “왕의 남자,” “즐거운 인생,” “소원,” “사도,” “동주” 등 흥행성 있는 영화와 주제 의식을 갖춘 영화를 고루 만들어 온 역량 있는 감독이며, 투톱으로 출연한 안성기와 박중훈은 “칠수와 만수,” “투캅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등의 영화에서 완벽한 ‘합’을 이루어 온, ‘국민 배우’라 불릴 만한 연기자들이지요.


80년대의 유명 가수였던, 그리고 “비와 당신”이라는 노래로 - 영화의 개봉 이후 많은 가수들이 ‘진지하게’ 해석해 부르기도 했던 - 88년 “가수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던 화려한 이력의 가수 “최곤”은, 이후 신문에까지 대서특필된 대마초 사건과 폭행 사건 등 때문에 40대의 나이로 접어든 지금은 ‘왕년’의 영광을 뒤로 한 채 미사리 카페에서 취객들을 상대로 노래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처지입니다. 그런 가운데에도 과거의 급하고 자존심 센 성격을 버리지 못해 늘 이런저런 사고를 치던 그가 마침내 한 카페의 손님과 시비가 붙고 그 일이 다시 폭행으로까지 번짐으로써 결국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되지요. 고집만 센데다 뒷일은 생각하지 않는 그의 사고 뒷수습을 담당해 온 매니저 “박민수”가 피해자와의 합의를 위해 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방송국의 국장(서울 본부의)으로부터 그가 강원도 영월 지국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DJ를 맡으면 합의금을 지원하겠다는 말을 듣고, 최곤의 동의도 없이 일단 약속을 함으로써 영화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언더그라운드 밴드 출신인 자신을 솔로 가수로, 더욱이 “가수왕”의 위치로까지 키워 준 매니저임을 잘 알기에 - 사실은 다른 대안이 전혀 없기에 - 내키지 않으면서도 민수를 따라 영월로 내려가기는 했지만 예전의 ‘겉멋’을 여전히 버리지 못한 최곤은, 본인의 이름을 내건 프로그램(“최곤의 오후의 희망곡”)임에도 지방 방송이란 이유만으로 진지한 태도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아무렇게나) 방송을 진행하면서 프로그램의 담당 PD인 “강석영”과도 심한 갈등을 겪습니다. 그처럼 다툼이 끊이지 않던 석영의 화를 돋우기 위해 방송 중 커피를 주문하고는 배달 온 다방 종업원에게 한마디 하라며 장난삼아 마이크를 건넸다가, 그 “김 양”이 어린 시절 가출한 후 소식 끊긴 엄마에게 전하는 사연이 청취자들의 심금을 울리면서 의도치 않게 그의 프로그램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최곤의 밴드 활동 시절을 기억하며 그를 숭배하다시피하는 영월 토박이 록 밴드 “이스트 리버”가 해당 프로그램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든 덕에 전국적 청취가 가능해지면서 여러 지역의 주민들이 즐겨 듣는 유명 방송이 되었고, 방송 100회 특집 공연에 참석해 크게 ‘감명’을 받은 본사의 “김 국장”이 "오후의 희망곡”을 서울 본사 방송국에서 송출하기로 계획을 세우는 가운데 대형 연예 기획사도 그와의 계약을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최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하며 그가 '잘 나가던' 때는 물론 '한물간' 옛날 가수로 전락한 지금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은 박민수는 최곤이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것을 본인의 일보다 더 기뻐하며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를 계속하지만, 기획사 측에서 시대의 흐름을 쫓지 못하는 자신이 최곤의 앞날에 걸림돌만 되리라고 비난하자 결국 그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혼자 딸을 키우던 아내에게 돌아간 민수가 그녀의 김밥 행상을 돕게 되고서야 비로소 “민수 형”의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된 최곤이, 서울로 돌아가지도, 대형 기획사와 함께 일하지도 않기로 – 강원도 영월에서 전국으로 전파를 송출하는 방식을 쓰기로 – 결정하고는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어딘가에 있을 “민수 형”을 애타게 찾고, 함께 버스에서 방송을 듣던 아내 “순영(최곤의 팬클럽 회장 출신인)”이 오히려 돌아가라고 그를 ‘설득’하자 비 내리는 방송국 앞에 혼자 서 있던 최곤에게 찾아간 민수가 그에게 우산을 받쳐 주는 장면으로 영화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라디오 스타”라는 영화의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떠올렸던 곡이자 최곤의 프로그램이 ‘전국민’에게 사랑을 받게 되면서 화면에 흐르는 “Video Killed the Radio Star”라는 곡(영국의 팝 그룹 “The Buggles”가 부른)은, 학창 시절 밤마다 듣던 “별이 빛나는 밤에,” “밤을 잊은 그대에게,” “영화음악실” 등, ‘낭만’을 구가하던 아름다운 시절의 추억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룹 “시나위”의 “크게 라디오를 켜고”와 “들국화”의 “돌고 돌고 돌고”를 비롯해, 가수 김장훈의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매니저 박민수가 늘 입으로 흥얼대는 신중현의 “미인” 같은 오래된 곡들도 지나간 시절의 정서를 새로이 일깨워 주지요.


영화의 내용 가운데 가장 가슴 찡한 장면과 대사는 “청록다방”의 “김 양”이 엄마에게 - 방송을 듣고 있을지조차 알 수 없는 - 보내는 고백과 매니저인 박민수가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가수 최곤에게 건네는 충고/교훈입니다. 김 양은 엄마를 향해 “엄마, 그거 알아? 나 엄마 미워서 집 나온 거 아니거든. 그때는 내가 엄마 미워하는 줄 알았는데 집 나와서 생각해 보니까 세상 사람들은 다 밉고 엄마만 안 밉더라. 그래서 내가 미웠어”라며 오래 묵혀 왔을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다가 끝내 “엄마, 보고 싶어…”라며 울음을 터뜨리고, 영월의 천문대에 간 박민수는 함께 별을 보던 최곤에게 “별은 말이지, 자기 혼자 빛나는 별은 거의 없어. 다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거야”라면서 폐부를 찌르는 한마디를 던집니다.





우연찮게 방송을 하게 된 그날처럼 자신이 집을 나오던 날에도 비가 내렸다며, 비 오는 날이면 엄마가 해 주던 부침개를 해 보곤 하는데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봐도 그때 그 맛이 안 나더라”는 김 양의 말은 가슴이 납으로 만들어진 사람이라도 듣다 보면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없게 하려니와, 그 말을 듣던 민수가 멀리 있는 가족들 생각이 문득 났던지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비도 오는데 딸에게 부침개 좀 해 주라고 부탁하는 말 역시 들을 때마다 가슴을 먹먹하게 하곤 합니다. 아빠를 찾는 소년 “호영”의 사연을 전하던 최곤이 갑자기 자기도 사람을 한 명 찾는다면서 보고 싶은 민수 형을 향해 “형, 돌아와... 천문대에서 별 볼 때 그랬잖아, 자기 혼자 빛나는 별은 없다구. 와서 좀 비춰 주라”라며 울먹이는 장면도 물론 그렇고 말이지요.


장대한 스케일과 엄청난 스펙터클을 자랑하는 영화들도 물론 좋아하고 즐겨 보기는 하지만 이렇게 소소하고 잔잔한 일상을 그리는 영화들을 접할 때 “삶”에 대해 그리고 “사람”에 대해 보다 더 깊이 있는 사색을 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 인간이 애초 그렇게 대단한 일을 성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만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수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한 사람은 “가수왕”이 되고 싶을 테고 발명을 업으로 삼는 사람은 “발명왕”이 되고 싶겠지만, 사실 세상의 “왕”은 단 한 분이면 족할 것(슥 14:9; 롬 5:17; 계 11:15)이고, 그외의 모든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은 서로 기대고 의지하며 시리고 상한 가슴을 보듬어 줄 누군가와 어울려 살아가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스타”가 되기를 꿈꾸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겠지만 그 역시 서로에게 빛을 비추는 작은 별이 된다면 충분하지 않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한웅재 목사의 “소원”이라는 찬양에 등장하는 “저 높이 솟은 산이 되기보다 여기 오름직한 동산이 되길, 내 가는 길만 비추기보다는 누군가의 길을 비춰 준다면”이란 노랫말처럼 말이지요.




딸 J의 시선



예전에 올렸던 [가족의 탄생] 편의 표현법을 따른다면 [라디오 스타] 역시 가슴이 ‘따땃해지는’ 영화이다. 개인적으로 이준익 감독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호불호의 편차가 심한 편인데 - 풀어 말하면 “사도,” “황산벌,” “동주” 등등은 무척 좋아하는 반면 그 외 몇몇 영화는 작품성과 관계없이 내 취향에는 크게 맞지 않는데 - 이 [라디오 스타]는 ‘극호’로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좋아하는 영화에 해당한다.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80년대 인기 가수였던 “최곤(박중훈 분)”과 그의 매니저 “박민수(안성기 분)”의 이야기이다. 한때 “가수왕”의 타이틀을 거머쥘 정도로 인기를 누렸던 최곤이지만, 지금은 미사리 카페에서 불륜 커플들을 앞에 두고 과거의 히트곡 “비와 당신”을 부르고 있는 소위 ‘한물간’ 신세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여전히 그때 그 시절의 ‘스타’인 것처럼 무도하게 구는데, 이를 가능케 한 것은 지난 20여 년동안 그를 어느 톱스타보다 극진히 ‘모셔' 왔던 매니저 박민수의 태도이다. 그러던 중 카페에서 시비가 붙은 최곤이 유치장까지 가게 되고, 합의금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박민수는 지인인 방송국 국장을 통해 최곤이 강원도 영월의 라디오 DJ 자리를 맡는다면 돈을 내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싫다는 최곤을 어르고 달랜 박민수의 ‘충정’으로 둘은 결국 영월의 작은 지방 방송국으로 내려가 “최곤의 오후의 희망곡”이라는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게 된다.





물론 최곤이 그대로 순순히 넘어갈 리가 없다. ‘촌 동네’인 방송국에서 영월 주민들만을 상대로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된 것이 불만스러운 그는 자기 멋대로 방송을 하면서, 생방송 도중 저지른 실수 때문에 영월로 좌천된 “강 PD(최정윤 분)”와도 사사건건 부딪힌다. PD가 써준 대본을 무시하질 않나, 방송 중 자리를 박차고 나가질 않나… 박민수가 아무리 중재하려 노력해도 ‘막 나가기’를 계속하던 최곤은 나중엔 라디오 부스로 커피 배달을 시키고, 그렇게 들어온 ‘다방 아가씨’를 즉석 게스트로 방송에 출연시키기까지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PD를 골탕먹이기 위해 충동적으로 출연시킨 다방 직원 “김 양”은 뭉클한 사연을 털어놓아 청취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며 최곤의 의도와 다르게 ‘성공적인’ 방송을 만들어 낸다. 이날의 방송은 프로그램뿐 아니라 진행자인 최곤에게도 큰 전환점이 되고, 지역 주민들과의 자유롭고 따뜻한 소통을 새로운 방향점으로 잡은 “최곤의 오후의 희망곡”은 영월을 넘어 전국적으로 인기와 관심을 끌게 된다. 이로 인해 대형 기획사가 최곤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그에게 재기의 기회가 생기는 듯하지만, 옛날 가수 최곤을 “반짝 상품” 정도로 여기는 소속사는 몇십 년 동안 그의 곁을 지켰던 매니저 박민수를 내치려고 든다. 고민하던 박민수는 결국 "곤이"를 위해 그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라디오 스타]는 감독의 전작 [왕의 남자]와 거의 180도 다르다고 할 수 있는, '잔잔한 분위기'가 특징인 영화이다. 다큐멘터리 형식처럼 보이기도 하는 ‘힘을 뺀’ 연출과 자극적이지 않은 플롯이 자칫 밋밋하게 보일 수 있음에도, 이준익 감독 특유의 통통 튀는 유머 감각과 ‘캐릭터’들의 노련한 활용 덕분에 그 매력을 전혀 잃지 않는다.


일단 “최곤”과 “박민수”의 역할을 박중훈 배우와 안성기 배우로 각각 캐스팅한 것 자체가 ‘반칙’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실제로 80-90년대 영화계의 ‘스타’였을 뿐 아니라 나이 든 지금도 장난기 많은 소년 같은 모습이 남아 있는 박중훈 배우는 철없고 싸가지도 없는, 과거의 영광 속에 멈춰 서 있는 모습의 “최곤”을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내가 정말, 정말 좋아하는 안성기 배우는 인생의 무게에 짓눌린 듯 피곤한 표정과, 최곤의 앞에서 보이는 다정다감하면서도 푼수 같은 두 얼굴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한국 영화 역사상 최고의 조합 중 하나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두 배우의 ‘케미’와 문화적 ‘역사’ 또한 - [칠수와 만수(1988)]를 시작으로 [투캅스 시리즈(1993, 1996)],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등에 함께 출연하며 쌓아 온 - 최곤과 박민수 사이의 끈끈한 유대감이 실감나게 표현되도록 돕는다.





이런 사실들은 매우 중요한 이 영화의 강점인데,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영화 속 최곤과 박민수의 관계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한 부분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라디오 스타]라는 영화의 주연은 최곤과 박민수 두 사람이지만, 영화 속 세상 안에서 최곤은 언제나 ‘주연’으로(실질적 인지도와 관계없이) 사는 반면 박민수는 철저한 ‘조연’의 위치에 있다. 최곤이 공연할 때 박민수는 늘 무대 아래에서 그를 지켜보며, “가수왕”이 된 최곤이 수상을 위해 무대로 나가는 것을 따라가려다 경호원들에게 제지 당하기도 한다. 나이가 든 지금도 박민수는 아내와 어린 딸을 버려 둔 채 최곤의 뒤치닥거리만 하러 다닐 정도로 - 심지어 그의 아내는 최곤의 팬클럽 회장 출신이기까지 하다 - 인생 자체가 ‘최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어찌 보면 박민수는 그 자신의 인생에서조차 ‘주연’이 아닌 셈이다.


앞서 말했듯 이 정도라면 비현실적일 정도의 애정이자 의리이다. 이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중 과연 몇이나 될까? 남을 받쳐 주는 ‘조연’같은 존재로만 평생을 보낼 사람이 말이다. 심지어 박민수 덕에 계속 ‘주연’으로 살아올 수 있었던 최곤은 ‘조연’인 박민수에게 고마워하기는 커녕 그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며 온갖 투정과 화풀이의 대상으로 삼는다. 배은망덕의 극치라고나 할까. 이렇게 고마워하지도 않는 상대를 위해서 ‘조연’의 역할을 자처하는 이는 더더욱 없을 듯하다. 사실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은 ‘조연’보다 ‘주연’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더 많이 갖고 있을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인정 받고 싶고, 드러나고 싶고, ‘첫 번째’로 앞세워지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런데 영화는 박민수의 대사를 통해 조금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어느 아름다운 밤, 별이 가득한 영월의 하늘을 최곤과 함께 올려다보며 박민수는 “자기 혼자 빛나는 별은 없다”고 말한다. “별은 다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것”이라고. 이 대사에 박민수라는 인물의 '인생' 철학은 물론 이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듯하다. 우리 모두는 서로서로 빛을 비춰 주어야만 – 그러니까 누군가에게서 빛을 받아야만, 또 누군가에게 빛을 비춰 주어야만 – 빛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박민수는 자신이 빛나는 것만큼이나(어쩌면 그보다도 더) 다른 이를 빛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에 최곤에게도 그 만큼의 헌신과 사랑을 줄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이런 시각을 통해 세상을 볼 때 '주연’과 ‘조연’이라는 구별 또한 무의미하게 된다.


그렇기에 이런 사랑과 ‘빛’을 받은 최곤의 ‘성장’은 다른 이들과 상호작용하며 "함께 빛나는 법"을 터득해 가는 여정으로 표현될 수 있을 듯하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독식하던 그는 점점 다른 이들에게도 그 빛을 나눠 주는 것에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최곤의 오후의 희망곡”은 서울에 간 자식을 그리워하는 할아버지, 화투를 치면서 서로 주장하는 ‘규칙’이 달라 싸움이 붙은 할머니들 등등 수많은 ‘조연’들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창구가 됨으로써 인기를 얻는다. 영월의 (아마도) 유일한 펑크록 밴드 “이스트 리버" - 실제로는 “노브레인”이란 이름의 밴드 멤버들이 연기한 - 또한 이 ‘조연’들 중의 하나로, 최곤을 우상시하는 그들의 역할은 줄곧 최곤을 ‘빛내는’ 것이었지만, 라디오 프로그램의 인기가 치솟으며 콘서트를 포함한 야외 방송이 기획되자 이번엔 최곤이 그들에게 큰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들 또한 ‘주연’으로 빛날 수 있도록 빛을 비춰 준 셈이다.





박민수는 최곤에게 빛을 비춰 주기 위해 오랫동안 자신을 희생해야 했으나, 최곤은 결국 그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비추고 또 다른 사람들의 빛을 반사하며 진정한 ‘스타,’ 그러니까 ‘별’이 된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후반부, “다시 돌아와서 자신에게 빛을 좀 비춰 달라”며 라디오 방송 도중 박민수에게 애절하게 부탁하는 최곤의 울먹임은 다행히 더 이상 철없는 투정으로 들리지 않는다. 박민수의 빛에만 의존했던 과거와 달리 이젠 “함께 빛나고 싶다”는 소망에 더 가까울 것이기 때문이다.


빗줄기를 뚫고 돌아온 박민수와 최곤이 재회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둘의 사이는 여전한 것 같으면서도 - 내심 좋음에도 툴툴거리는 최곤이나 그의 머리 위에만 우산을 펼쳐 주는 박민수의 모습을 보면 - 동시에 새로운 관계의 시작을 기대하게 한다. 서로 빛을 비추는 관계, ‘주연’과 ‘조연’의 구분이 없는 관계. 영화 포스터의 글귀를 인용하자면 “서로 ‘최고’라고 말해 주는 상대가 있어 행복한 관계” 말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을 반사해야 하는 우리 또한 홀로 빛나기보단 다른 이를 비춰 주는 일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 모두가 밝게 빛나 어둠이 사라진 세상이라면 누가 더 강하게 빛나는지 그보다 조금 덜 빛나는지 굳이 구분할 필요조차 없을 테니까.

작가의 이전글 블랙 팬서: ‘틀림’이 아닌 ‘다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