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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anne Apr 13. 2023

라이온 킹: 진정한 ‘왕’은 누구인가

딸 J의 시선



이번에 글을 올리는 날짜가 부활절 기간에 가까운 만큼 부활의 기사와 관련된 작품이 없을까 - 기독교 세계관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작품 중에서 - 생각하다가 갑자기 [The Lion King]이 생각났다. 혹시나 해서 덧붙이자면 2019년 개봉한 ‘실사’편(live action)이 아니라 내 마음 속 영원한 클래식이자 ‘원조’인 1994년 개봉 애니메이션 얘기다. 내가 쓰자고 추천하고도 어딘지 웃긴다 싶기는 했지만 주인공 "심바"의 여정이 예수님의 생애와 일정 부분 유사하다는 생각에 이 영화를 다루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나름대로 비평적(?) 시선으로 영화를 다시 감상하고 나니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심바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말이다.


워낙 유명하고 오래된 작품이니 내용을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되지만, 영화의 줄거리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심바의 ‘복수’기, 더 정확하게는 ‘왕좌 탈환’기 정도로 정의할 수 있겠다. 영화의 초반부, 아프리카의 거대한 땅과 그 안에 사는 동물들을 다스리는 사자 왕 "무파사"의 아들인 심바는 아버지의 보호 아래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런저런 말썽을 일으키며 "빨리 왕이 되고 싶다"는 철없는 소리를 일삼던 심바는 곧 엄청난 시련과 맞닥뜨리게 되는데, 왕의 동생이자 심바의 삼촌인 "스카"가 하이에나와 결탁해 무파사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기 때문이다. 심바가 위험에 처하도록 함정을 판 스카는 아들을 구하다가 위험에 빠진 형 무파사를 살해하고, 아버지를 잃고 절망에 빠져 있는 어린 심바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너 때문"이라는 말로 누명과 죄책감을 전가하며 고향을 떠나도록 종용한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심바는 사막에서 죽음을 맞을 뻔 하지만, 자신을 구해 준 미어캣 "티몬"과 흑멧돼지 "품바"와 함께 살면서 과거의 일들을 잊으려 애쓴다. 그러던 어느 날 어엿한 ‘어른’이 된 심바 앞에 옛 친구이자 약혼녀였던 "날라"가 나타나는데, 그녀는 무파사의 죽음 이후 왕위에 오른 스카가 그들의 구역으로 하이에나를 끌어들이고 폭정을 일삼아 고향을 황무지로 만들어 버렸다고 알려 준다. 끔찍한 소식에 고민하던 심바는 결국 그동안 외면하던 자신의 과거, 아버지와의 기억에 직면하기로 결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스카와 맞서 싸운다.


이렇게 글로 요약하고 보니 꽤나 장엄한 내용이기는 하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재미있게도 지난 글에서 다룬 [킬러들의 수다] 후반부에 나오는 연극 [햄릿]의 줄거리와도 궤를 같이 하는 측면이 있다. 물론 "부모의 억울한 죽음과 복수"라는 설정은 굳이 햄릿이 아니더라도 주위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소재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이 영화가 심바의 여정을 쫓으며 전개된다고 해서 작품의 실질적 ‘주인공’을 심바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이번 감상을 통해 생겼다. 일단 딴지를 조금 걸고 넘어가자면 심바는 객관적으로 매력적인 캐릭터는 아닌 듯하다. 아기 사자였을 당시부터 겉모습은 정말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데 하는 짓은… 음… 요즘 표현을 빌리자면 ‘육아 난이도 최상급’이다. 왕이 되면 뭐든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을 테니 빨리 왕이 되고 싶다는 말을 서슴지 않다가, 아버지의 '조언자' 격으로 듣기 싫은 충언을 종종 하는 코뿔새 "자주"에게 해고하겠다느니 어쩌니 라며 ‘갑질’을 하지 않나. 게다가 "빛이 닿지 않는 땅"에는 절대 가지 말라던 아버지의 경고를 무시하고 스카의 꼬임에 빠져 위험한 하이에나의 구역으로 들어갔다가 큰일을 당할 뻔하기도 한다. 선악과 앞에서 뱀의 꼬임에 넘어가 금지된 열매를 땄던 아담과 이브를 떠올리게 만드는 장면이다.




물론 유년기의 부족함은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지만 - 어렸을 때 철없고 오만한 주인공일수록 이어지는 성장과 성숙의 스토리에서 오히려 더 강력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으니까 - 심바는 어른이 된 후에도 여전히 '어중간'하다는 게 문제다. 그는 티몬과 품바를 따라 "하쿠나 마타타(Hakuna matata)"를 삶의 모토로 삼는데, 세상을 살면서 억울하고 슬프고 나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내 힘으로 어쩔 수 없으니 그냥 아무 걱정을 하지 말자는 식의 철학이다. 언뜻 들으면 지혜로운 태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영화 속 심바는 이 개념을 모든 아픔과 고뇌, 그리고 그에 따르는 깨달음과 성장, 의무와 책임 등을 거부하는 무책임한 삶의 구실로 삼는 듯 보인다. 말하자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에 자기 삶의 방향을 ‘회피’로 정해 버린 것이다.


심바는 그렇다치고, 영화에서 그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캐릭터는 그에 맞서는 악역 "스카"이다. 솔직히 말해 지금까지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던 배역은 스카였다(제레미 아이언스 최고). 스카가 반역을 꾀하며 하이에나들과 부르는 “Be Prepared”는 이 영화의 삽입곡 중 내가 가장 애정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면서는 내가 지금껏 제레미 아이언스의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에 단단히 홀려 있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왕위에 오른 이후 그의 행보가 너무 실망스럽기 때문이다. 왕이 되고 말겠다고, 그렇게 되면 모두가 자신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포부를 다지던 그가 왕이 되고 나서는 ‘통치’의 영역에서 그냥 손을 놔 버린 모습이다. 결국 그들의 땅은 황폐해지고 ‘아군’인 하이에나들마저 계속되는 굶주림에 불평불만을 쏟아 낼 정도이니. 형의 조언자였던 자주를 가둬 놓고 노래나 부르게 시키면서 광대와 다름없이 써먹을 뿐 아니라 암사자 무리를 이끄는 전 왕비 "사라비"의 직언도 철저하게 무시한다. 무관심과 오만으로 점철된 폭정이라고밖엔 말할 수 없다. 물론 심바가 아버지의 복수 외에도 고향으로 돌아와 왕좌를 탈환해야 할 정치적, 도의적 타당성을 부여하려는 의도였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무능할 필요가 있나 싶다. 자고로 악역은 좀 빠릿빠릿하고 빈틈이 없어야 매력적이지 않은가?





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 두 캐릭터의 ‘매력 없음’이 사실 오래전 극에서 퇴장한 무파사와의 비교에 기인하는 '상대평가'라는 것이다. 무파사는 영화의 초반에 잠깐 나왔다가 곧 사라지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이 두 ‘주연’ 캐릭터들을 지배한다. 일단 스카의 (무능력한) 폭정은 무파사의 영향을, 그가 남긴 유산을 완전히 거부하려는 노력에 기반을 두고 있다. 무파사가 멀리하고 통제했던 하이에나들과 결탁하고, 누가 무파사의 이름을 언급만 해도 경기나 하듯 치를 떤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가 왕위에 오른 뒤 직접적으로 휘두르는 ‘폭력’은 누구든 스카 앞에서 무파사의 이름을 입에 올리거나 그를 무파사와 비교함에서 촉발되는 것들이다. 무파사의 존재를 철저히 배척하고 거부하고 잊고 덮어 버리려 함으로써 오히려 무파사의 그림자에 눌려 헤어나지 못하는, 그의 영향력 아래 갇힌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스카의 정체성이 무파사의 ‘부정’ 혹은 ‘부재’로 정립된다면, 반대로 심바의 정체성은 무파사와의 '일체감'이라고 할 수 있다. 친구들과 더불어 ‘속 편히’ 살고 있던 심바 앞에 과거의 상징인 날라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부터 계속 그에게 디밀어지는 정체성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무파사의 아들"로서의 그이다. 날라가 그에게 돌아와 왕이 되라고 부탁하는 이유도 그가 무파사의 자식이기에 왕좌의 ‘정당한 주인’이라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그를 고향에 데려가려고 찾아온 예언자(?) 원숭이 "라피키"도 "내가 누군지 이젠 잘 모르겠다"는 심바를 "무파사의 아들(Mufasa’s boy)"로 정의한다. 라피키가 보여 준 신비한 공간 안에서 심바는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아버지 무파사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목격하는데, “네가 누구인지 잊지 말라(Remember who you are)"고 당부하는 무파사의 환영(혹은 영혼) 또한 "너는 내 아들이고 ‘그러므로’ 적법한 왕"이라고 말한다. 심바 자신이 왕의 '재목’이어서라기보단 그가 ‘왕의 자식’이기에, 왕으로부터 그 자리를 ‘계승했기에’ 왕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심바처럼 ‘고향'을 떠난 주인공들의 ‘영웅적' 여정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는 출애굽기를 모티브로 한 영화 [이집트 왕자](Prince of Egypt)처럼,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고향’(충성을 바친 조국, 명예로 여기던 가문, 자랑 삼던 선조들의 문화적/역사적 유산, 존경하던 부모 등의 ‘뿌리’)의 숨겨진 비밀이나 추악함을 깨닫게 된 주인공이 지금까지 자신을 규정하던 그 ‘뿌리’를 거부하고 떠나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반지의 제왕]의 "아라곤"같이 애초 자신의 고향, 혹은 그에 따른 책임과 직무를 거부한 채 방황하던 주인공이 결국 자신의 ‘뿌리’로 돌아가 본래의 ‘유산’을 이어받는 경우이다. 물론 이 중 어떤 경우이든 주인공은 시련을 통해 그리고 그에 의한 깨달음을 통해 자신만의 진가와 가치를 증명하는 결말로 마무리되곤 한다. ‘고향’을 거부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 쪽의 주인공은 물론, 한때 떠나왔던 ‘고향’의 유산을 결국 이어받는 주인공들도 자신이 그럴 만한 ‘재목’임을 입증하며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정체성과 가치, 능력을 보여 주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심바는 그런 독립적인 성장을 보이지 않는다. 그가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여태껏 외면하고 있었던 자신의 '정체성(‘무파사의 아들’이라는)'을 되찾기로 했기 때문이다. 스카와 맞서는 장면에서도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누명 때문에 주춤거리고, 그러다 다시 ‘각성’하게 되는 순간 역시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는’ 진실이 드러났을 때이다. 냉철하게 말하면 심바의 모든 성장과 행동은 아버지 무파사의 존재에 비춰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심바 자신이 무리에서 떨어져 사는 동안 혼자 직접 일구어 낸 능력이라거나 용기, 깨달음 등이 부각되는 순간은 영화 속에서 찾아 보기 어렵다.





스카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왕좌를 차지하는 과정도 ‘심바’ 자체의 승리보다는 심바가 대표하는, 혹은 심바의 내면에 잠재하는 ‘무파사’의 승리, 혹은 귀환으로 보이는 면이 있다.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제대로 된 후계자 수업도 받은 적 없는, 여태껏 한량처럼 살던 심바가 갑자기 통치를 잘할 리 있겠나? 티몬과 품바와 사는 동안 사냥도 하지 않고 벌레만 찾아 먹던 심바가 맹수인 사자들을 다스리는 일이 가능할까? ‘심바만의’ 노력이나 잠재력에 대한 설명 없이 이루어진 왕좌 복귀, 이후 과거의 풍요를 되찾은 고향의 ‘회복’은 심바가 무파사로부터 아무런 노력 없이 ‘물려받은’ 권한과 능력에 기대는 일을 의미한다. ‘무파사의 아들’이라서 왕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무파사의 아들’이기에 모든 것을 이뤄 내는 구도라고나 할까. 모두가 "죽은" 줄만 알았던 심바가 무리로 돌아오며 "부활"했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심바가 돌아와 왕위에 오르면서 진정으로 부활하게 된 것은 ‘무파사’의 유산과 영향력, 다시 말해 무파사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찐’ 주인공, 혹은 정신적 토대는 사실 무파사라고 해야겠다. 글의 초반부에 ‘심바’가 예수님의 부활 기사를 따르는 듯하다는 말을 했었는데, 이 영화에서 예수님의 ‘포지션’에 가장 근접한 '인물'도 사실은 무파사인 것 같다. 그렇게 이해했을 때의 스카는 잘못된 교리, ‘종교인’들의 죄와 위선, 가부장적 권위주의 등등에 질려 신적 존재를 거부하고 ‘죽여' 버린, 신적 전능자의 ‘부재’라는 세계관을 선택한 이들을 대표하는 존재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왕좌에 오른 뒤 보여지는 스카의 ‘무능력한’ 행보 또한, 신의 ‘권위’와 ‘규율’처럼 자신들이 혐오하는 모든 ‘억압적 질서’를 거부하느라 신이 존재해야만 성립할 수 있는 진정한 선함과 아름다움, 확실성까지 함께 내다 버린 사람들의 ‘방황’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나님을 거부하느라 하나님의 '사랑'마저 포기하고 만 세계관과 철학은 결국 황폐해질 수 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도 되고.





같은 맥락에서 심바는 세상의 고난과 고통을 애써 피하며 무시하려 하는 소심하고 겁 많은 '보통 신자'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나 싶다. 그렇게 되면 심바가 '아버지' 무파사 없이는 - 심지어 그가 죽은 후에도 -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설정이 너무나 공감된다. 자신만의 ‘독립적인’ 능력이나 자질이 보이지 않는 심바의 모습을 보면 그저 우리 ‘안에 계신’ 아버지의 힘을 빌려다 쓸 뿐인 우리 자신의 모습이 절로 떠오르니 말이다. 심바의 주된 정체성이 무파사의 "아들"인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라는, 지극히 의존적인 정체성을 통해서만 오롯한 ‘나’를 찾을 수 있다는 패러독스도 그렇고.


사실 "무파사(Mufasa)"는 아랍어로 ‘왕’을 뜻한다고 한다. "심바(Simba)"는 스와힐리어로 ‘사자’라는 뜻을 가졌다고 하고. 좀 지나치게 직관적인 작명이기는 하지만 앞선 해석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진실된 ‘왕’인 무파사와 왕의 힘을 빌린 평범한 '보통 사자' 심바. 이처럼 아프리카의 언어로 된 아름다운 이름을 지닌 무파사나 심바와 달리, 스카는 말 그대로 ‘상처’(scar)라는 뜻을 가진, 식민지 정책의 주관자이자 가해자의 언어인 영어 이름이라는 사실도 어딘가 의미심장하다. ‘왕’을 - 다시 말해 ‘신’을 - 거부하고 배제한 세계관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려는 노력에서는 결국 상실과 고통만이 그 정체성과 삶의 방향으로 남게 되리라는 암시는 혹 아닐지.





심바의 귀환을 통해 결국은 무파사가 ‘부활’했듯, 믿음을 가진 평범한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으로 새롭게 돌아올 때마다 그분이 끊임없이 부활하심을 믿는다. 그를 통해 상처뿐이던 황무지들 역시 아름다운 낙원으로 회복될 수 있음도.




엄마 C의 시선



이제는 너무 큰 거대 기업이 되어 각각의 이름을 구분하기도 쉽지 않지만, 어쨌든 “월트 디즈니 피처 에니메이션(Walt Disney Feature Animation)”에서 제작하고 “월트 디즈니 픽처스(Walt Disney Pictures)”에서 배급(1994년 7월)했다는 “라이온 킹”은, 디즈니에서 제작한 32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이자 그 가운데 최초로 자신들의 순수 창작 각본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라고 합니다. 개봉 당시 “Circle of Life”, “Hakuna Matata”,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 “Be Prepared” 등의 주제곡이 크게 흥행하며 아이들은 물론 음악을 사랑하는 어른들로부터도 많은 호응을 얻었을 뿐 아니라 이 곡들로 인해 아카데미 음악상과 주제가상을 수상하면서 유명세를 확장한 영화이기도 하지요. 사자가 주인공이고 모든 등장인물(?)이 동물들이라는 점도 ‘특이 사항’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이 작품은, 뮤지컬은 물론 실사로도 다시 제작되었을 만큼 디즈니 영화 중에서도 각별한 관심을 받은 애니메이션입니다.


주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대다수가 – 특히 “신데렐라(Cinderella)”,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Snow White and the Seven Dwarf)”, “101마리 강아지(One Hundred and One Dalmatians)”, “인어 공주(The Little Mermaid)”, “알라딘(Aladdin)” 등과 같이 잘 알려진 작품들이 – “권선징악”을 주제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라이온 킹” 역시 ‘선한’ 편이 ‘악한’ 쪽의 억압에 의해 수난과 고통을 겪다가 결국 악을 물리치고 선을 이루는 내용을 중심에 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고 그 아들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복수한다는 기본 줄거리는 “햄릿”에서 차용했다고 볼 수 있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도 나름의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 저희가 부활절을 즈음해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입니다.





영화의 배경은 아프리카의 동물 왕국 “프라이드 랜드(Pride Lands)”로, 그곳의 왕인 “무파사(Mufasa)”가 어린 아들 “심바(Simba)”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는 의식을 소개하며 첫 장면이 시작됩니다. 평온하게만 보이는 이 왕국의 숨겨진 문제는,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 조카가 태어나면서 자신이 승계할 줄 알았던 왕위를 ‘느닷없이’ 빼앗기게 된 사실에 분노하는, 무파사의 동생이자 심바의 숙부인 “스카(Scar)”의 존재입니다. 외모와 이름에서부터 ‘악한’ 쪽이라는 분위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스카는 자신이 잃게 될 왕권을 탈취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데, 무파사가 심바에게 접근을 금지한 “프라이드 락(Pride Rock)” 근처의 코끼리 무덤으로 조카를 유인해 죽이려던 첫 번째 계획이 무산되자 다시 새로운 계략을 생각해 내고는, 심바를 한 골짜기로 데려가 엄청난 숫자의 영양(wildebeest) 떼들이 그를 향해 돌진하도록 상황을 '연출'한 후 무파사에게 가서 심바가 위험에 처해 있다고 알립니다.


아들을 구하기 위해 그곳으로 갔던 무파사는 결국 스카의 계획대로 영양 떼에 밟힌 후 죽음을 맞게 되고, ‘제때’ 나타난 스카의, 아버지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는 말에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난 심바는 스카의 부하인 하이에나들을 피하다 사막 한 가운데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집니다. 다행히 그를 발견한 미어캣 “티몬(Timon)”과 멧돼지 “품바(Pumbaa)”에게 구조되어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어른 사자로 성장한 심바는, 먹이를 찾아 그 지역까지 온 어릴 적 여자 친구 “날라(Nala)”와 반가운 재회를 나누게 되지요.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책감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심바가 스카의 집권 이후 처참한 지경이 되었다는 고향의 소식을 날라에게 전해 듣고도 돌아가기를 주저하지만, 그가 살아 있음을 알고 찾아온 - 자신의 후계자 지명식을 거행했던 - 원숭이 “라피키(Rafiki)”의 설득으로 그들과 함께 프라이드 랜드로 돌아갑니다. 어머니 “사라비(Sarabi)”와 다투고 있던 스카와의 대결 과정에서 그간의 모든 사태가 그의 간계에 의한 일이었음을 알게 된 심바는 분노에 차 스카를 공격하고, 절벽에서 떨어진 스카는 자신이 배신한 하이에나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합니다.





기본 줄거리는 “햄릿”에서 차용했음이 분명하지만 그 밖의 다른 측면에서도 나름의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고 제가 앞에서 언급한 것은 무파사와 심바 간의, 혹은 그들의 관계와 관련된 대화들에서 발견되는 ‘신앙적’ 교훈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일컫는 “Lion and the Lamb”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그리고 C. S. 루이스의 소설 “나니아 연대기(The Chronicles of Narnia)”에 등장하는 사자 “아슬란(Aslan)”이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과 같이,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왕이자 아버지인 무파사와 그 왕위를 계승하는 아들 심바가 떠올려 주는 주님의 이미지 또한 그런 메시지의 매개체 역할을 합니다. 라피키의 말대로 연못을 들여다보던 심바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통해 깨닫게 된 아버지의 음성에서 “너는 내 아들이자 유일무이한 진짜 왕(the one true king)”이라는 선포를 듣고, 그 모습을 본 라피키가 “왕이 돌아왔다(The King has returned)”라며 기뻐하는 장면은 부활의 의미에 정확히 부합되는 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도 생각되니까요.


왕인 자신의 명을 어기고 코끼리 무덤에 갔던 아들을 꾸짖으며 “아빠처럼 용감해지고 싶어” 그랬다는 심바에게 무파사가 건넨 대답, 즉 “난 필요할 때만 용감해진단다. 용감하다는 건 일부러 위험을 찾아다니는 게 아니야”라는 대사에서도 발견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사실 심바는 위험의 요소가 산재한 코끼리 무덤에 굳이 갈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필요하게’ 위험한 곳을 찾아가 자신의 용맹성을 과시하려다 화를 자초한 것이지요. 신앙인의 입장에서 우리는 유혹에 맞서고 대항해 '이기는' 것이 용감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가 “나는 유혹 외에는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I can resist everything except temptation)”라는 말을 남겼듯, 그에 더해 릭 워렌(Rick Warrant) 목사 또한 “유혹에 맞서라/대항하라(resist temptation)”라는 구절은 성경의 어디에도 없다”고 지적했듯, 믿는 자인 우리 역시 유혹을 피하지 않고 '찾아다니며' 그에 맞설 수 있는지 스스로 '시험'하다 넘어지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행동에 불과합니다(교회 유머 중 유흥가에 가서 “사탄아 물러가라”를 외치던 기독교인에게 사탄이 나타나 “여기는 내 구역이니 네가 물러가라”고 했다는 대목도 생각납니다).





명령을 어긴 데 대한 꾸중을 끝낸 후 다시 아들과 장난을 주고 받다가, “아빠는 두려운 게 없잖아요”라고 하는 심바에게 “아까는 나도 두려웠단다”라면서 “널 잃는 줄 알았으니까”라고 솔직히 말하던 무파사의 '고백' 또한 제 귀에는 우리에게 건네시는 하나님의 음성처럼 다가왔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두려움을 느끼시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가장 싫어하시고 또 '두려워하시는' 일은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과 멀어지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잃게 되는 일일 테니까요. 어리석은 선택이나 불필요한 오만으로 하나님 마음을 아프시게 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겠다고, 부활절을 맞고 보내는 이 즈음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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