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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anne Apr 29. 2023

파이란: 불완전한 사람, 불완벽한 사랑

엄마 C의 시선



2001년 개봉되었던 영화 “파이란”은 연기력에 있어 대한민국 남자 배우 중 최고로 꼽을 수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최민식이 중국 배우 장백지와 남녀 주인공 역을 맡아 공연한, 그리고 “역도산”,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고령화 가족” 등을 연출한 감독 송해성이 두 번째로 메가폰을 잡은 작품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특별히 좋아하는 데에는 “와이키키 브라더스”처럼 출구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다룬 작품이라는 사실 못지 않게, 학창 시절 연극 “에쿠우스”에서 처음 접한 그의 소름 돋는 연기력으로 평생 팬이 된 배우 최민식의 강렬한 연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배우 본인도 자신의 배우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라고 말했다더군요). 여주인공의 이름인 “백란”을 제목으로 붙인 “파이란(白蘭, Failan)”은 아사다 지로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다는데, 일본 소설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저로서는 개봉 당시 그 사실을 모르고 – 심지어 오프닝 크레딧에 올라 있는 것도 간과하고 – 본 것이 오히려 감상에의 몰입을 더 쉽게 만들지 않았을까도 생각됩니다.


2001년 “올해의 한국영화”로 선정 되었고 39회 대종상 영화제의 감독상과 심사위원 특별상, 22회 청룡영화상의 감독상과 남우주연상 등 그해 여러 국내 영화제에서 수상을 했던 작품으로, “X사모”라는 표현이 회자되기 시작하던 당시 “파사모(파이란을 사랑하는 모임)”라는 팬카페가 생겼다는 말을 들었을 만큼 열혈팬을 생산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를 “멜로”나 “로맨스”로 분류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사실 남녀 주인공인 “강재(최민식 분)”와 “파이란(장백지 분)”이 단 한 번도 서로 만난 적이 없다는 점에서 그렇게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두 주인공이 함께 있는 모습을 유일하게 보여 주는 영화 포스터의 카피가 “세상은 날 삼류라 하고 이 여자는 날 사랑이라 한다”이기는 하지만, 비극, 희극, 심지어 ‘느와르’적 요소를 모두 갖고 있는 이 영화를 굳이 한 가지 장르 안에 가둘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인공인 삼류 건달 강재는, ‘입사’ 동기임에도 현재는 조직의 보스 위치에 오른 “용식”은 물론 까마득한 후배들로부터까지 “강재 씨”라 불리면서 무시 당하고 사는 처지입니다. 그런 후배들과 싸움이 붙은 그를 한심해 하며 흠씬 두들겨 팼던 용식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달래려고 데리고 간 나이트클럽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중, 예기치 않은 일이 그의 삶에 일어납니다. 자신들의 ‘구역’인 그 나이트클럽을 호시탐탐 노려 온 상대 조직원이 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싸움을 벌이다 이성을 잃어 살인까지 저지른 용식이 자신을 대신해 살인죄를 떠안고 자수하면 ‘한몫’ 떼어 주겠다는 제의를 해 온 것이지요. 고향을 떠나온 오래전부터 배 한 척 사서 돌아가는 것이 꿈이던 그는 고민 끝에 그 제의를 수락하지만, 자기 삶의 10년이라는 시간(예상되는 복역 기간)과 배 한 척의 맞바꿈이 나쁘지 않은 거래라고 스스로를 달래던 바로 그때, 갑자기 이름도 생소한 여성의 거명과 함께 그의 ‘아내’가 사망했다는 부고를 받게 됩니다.


그 지점에서 영화는 시간을 거슬러, 엄마가 돌아가신 중국을 떠나 유일한 친척이 있는 한국으로 무작정 찾아왔던 파이란이, 그 친척들이 다시 타국으로 떠났음을 알고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인력 소개소를 찾아간 그녀에게 사무실 직원은 불법 체류를 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위장 결혼을 추천하고, 수수료를 챙기도록 주선해 준 후배이자 유일한 친구 “경수”의 중개로 강재는 파이란의 서류상 결혼 상대가 됩니다. 서류가 구비되자마자 강원도의 한 유흥업소로 넘겨질 위기에 처한 파이란은 결핵을 가장해 그 상황을 모면한 후 “거진”에 있는 작은 세탁소에서 일을 하게 됩니다. 강재가 별 생각 없이 경수를 통해 쥐어 준 빨간 머플러를 고이 간직하고 있던 파이란은 거진에 다니러 온 경수가 장난 삼아 건넸던, 강재가 자신을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그대로 믿고 추운 겨울 자전거로 세탁물을 실어 나를 때 늘 그 빨간 머플러를 두르고 다닙니다. 서류 작성 때 받았던 그의 증명사진을 책상 한 구석에 올려 놓고는 부치지 못할 편지들을 그에게 쓰기도 하지요.





그러나 잘 먹지 못하고 고된 일만 해서인지 정말로 폐결핵에 걸린 그녀는 각혈이 심할 정도로 몸이 안 좋은 상태에서 자신을 세탁소에 소개해 준 직업소개소에 찾아가 소개비 떼어 가는 것을 몇 달만 미뤄 달라고 사정했다가 거절 당합니다. 책상 위 한 구석에서 웃고만 있는 강재의 사진을 바라보며 자신의 두려운 심정을 혼잣말로 고백하던 파이란은, 마지막으로 그를 한 번 보고 싶다는 심정이었는지 그가 ‘관리’하고 있던 인천의 비디오 대여점으로 찾아갑니다. 하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려던 순간 들이닥친 경찰들에 의해 비디오 불법 유통 혐의로 잡혀 들어가는 강재와 스쳐 지나며 먼발치에서 그를 바라만 보게 됩니다. 사실 이 장면은 탁월하고 감각 있는 편집 덕분에 ‘아내’의 사망 확인과 장례 절차를 위해 거진을 찾은 강재의 앞으로 그녀의 시신이 운반되는 장면과 교차되어 보여지는데, 살아 있을 당시에는 그녀의 존재조차 잘 알지 못하던 그가 거진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그녀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 위장 결혼이 들통나지 않도록 – 그녀의 사진을 보고 그녀가 남긴 편지를 읽으며 그 생각과 감정들을 점점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는 과정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경수가 바다에 뿌리자던 그녀의 유골을 끝내 옆구리에 끼고 인천으로 돌아온 강재는 돈이 입금된 통장을 내미는 용식의 제의를 거절하며 그냥 고향으로 내려가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밝힙니다. 경수와 함께 살던 집으로 돌아와 짐을 싸는 강재에게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당부한 경수가 떠나는 형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 집을 비운 사이, 기다리던 강재는 경수가 거진에 들렀을 때 찍은 파이란의 동영상을 발견하고 VCR에 테잎을 넣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영화를 보면서도 역시 볼 자신이 없어 건너뛰고 만 그 마지막 장면에서, “파이란 봄바다”라는 제목이 붙은 영상에 빠져 있던 강재는 용식이 보낸 후배 조폭에게 목이 졸려 TV 화면에 가득 찬 그녀의 모습, 방안에 두었던 그녀의 유골을 점점 흐려지는 눈으로 바라보며 숨을 거둡니다.





자신의 고국인 중국이나 유일한 친척이 있던 한국 어디에도 피붙이는 커녕 아는 사람 하나 없던 파이란은 자신과 “결혼해 줌”으로써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준 강재라는 “친절한” 사람이 어쩌면 자기 삶을 ‘구원’해 줄 수 있을 유일한 사람이라 믿고 싶었을지 모르고, 배 한 척 살 수 있는 돈 때문에 짓지도 않은 죄를 덮어 쓰고 10년이란 세월을 송두리째 쏟아 넣을 일에 갈등을 느끼고 있던 강재 역시 자신도 누군가에게 쓸모 있고 도움 되는 사람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녀의 맹목적 사랑과 관심이 촉발한 ‘구원’에의 갈망을 느끼기 시작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결코 구원이 될 수 없음은, 한 번도 서로 만나 대화조차 나눠 본 일 없는 그들 두 사람의 경우처럼 상대에 대한 동경과 기대조차 착각 혹은 과대 평가에 기인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상대방 역시 자신과 별다를 바 없는 ‘희망 없는’ 인간에 불과함을 전혀 모를 수가 없을 테니까요. 그렇기에 있는 모습 그대로의 우리 모두에게 끝까지 기대와 희망을 버리지 않을 유일한 구원의 주체는 오직 한 분밖에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다는 결심과 분투, 서로에게 구원이 될 수는 없을지언정 상대방이 기댈 수 있도록 내주는 따뜻한 어깨가 되려는 애씀이 우리 각자에게 필요하다는 것 역시 이 영화를 보며 생각하게 되는 부분입니다. 파이란이 죽은 후에야 자신이 그녀의 존재를, 자기를 그토록 필요로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에 고통스러워하던 강재의 회한과, 자신을 아껴 주고 이해해 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말처럼 그 한 사람이 갈급해 상상 속의 인물을 만들어 의지했던 파이란의 외로움을 떠올려 보면 말이지요. 배를 타고 인천항에 들어온 사람들 틈에 섞여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는 파이란의 모습으로 시작되는 영화의 첫 장면이 상징할지 모르는, 그리고 성경의 여러 구절(출 22:21; 23:9; 레 19:34; 신 10:19)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깨워 주시는 바와 같이, 우리는 모두 이 땅에서 이방인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니까요.




딸 J의 시선



2001년 개봉했던 [파이란(Failan)]은 2021년 재개봉 되었을 정도로 팬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물론 개봉 당시 그닥 좋은 흥행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최민식 배우와 풋풋한 신인 시절의 장백지 배우를 볼 수 있는 재미도 선사한다. 이 영화는 미성년자에게 성인 영화를 판매했다는 이유로 며칠 동안 감옥에 있다가 막 출소한 깡패(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건달’) "강재(최민식)"를 비추며 시작하는데, 함께 뒷골목 생활을 시작했던 친구 "용식(손병호)"이 보스의 자리까지 오르는 동안 여전히 조직의 밑바닥을 헤매고 있는 그는 나이가 훨씬 어린 ‘후배’ 건달들에게까지 멸시와 비웃음을 받는 한심한 인물로 그려진다. 보스 용식의 표현대로 강재는 “이 바닥 체질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하는 짓을 보고 있자면 그야말로 ‘인간 쓰레기’ 같다가도 옛날 자신에게 먹을 것을 챙겨 주던 슈퍼 아주머니에게 수금을 하러 가선 심하게 대하지 못해 쩔쩔매기만 하는 등 어설픈 ‘정’이 여전히 남아 있는 사람임이 엿보이기도 한다.


배 한 척 살 수 있는 돈만 마련되면 고향으로 내려가겠다는 말을 변명처럼 반복하던 그는, 용식과 술을 마시던 어느 날 권력 다툼 중인 상대 조직의 일원을 보고 눈이 돌아간 용식의 살해 현장에 함께 있게 된다. 다음날 용식은 강재를 불러 배 살 돈을 주는 대가로 그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가기를 종용하고, 강재는 ‘호구’ 같은 자기 자신을 자책하면서도 용식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러나 자수를 준비하던 그에게 뜬금없이 ‘아내’의 부고 소식이 전해지며, 영화는 강재의 아내 "백란", 그러니까 "파이란"에게 조명을 비추면서 1년 전 과거를 되짚는다.





가냘프고 아름다운 "파이란(장백지)"은 어머니를 잃고 고아가 되자 한국에 살고 있다는 이모를 찾아온 중국 여인이다. 이모가 이미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갔다는 소식을 듣게 된 그녀는 아무도 남지 않은 중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한국에 거주하겠다는 생각에 직업소개소를 찾고(그 이름이 “희망” 직업소개소라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그곳에서 체류 문제를 해결하는 방편으로 강재와 위장 결혼을 하게 된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남편'의 인적 사항이 담긴 서류와 근처 사진관에서 급히 찍은 증명사진만 받게 된 파이란에게 강재는 친한 동생인 "경수(공형진)"를 통해 빨간 목도리 하나를 적선하듯 전한다. 그 뒤 파이란은 강재처럼 건달 일을 하는 경수의 손에 이끌려 유흥업소로 팔려 갈 뻔하는 위기를 맞으나,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피를 토하는 환자 행세를 한다. 덕분에 성착취의 위험에서 벗어나 시골 세탁소에서 일하게 된 그녀는 특유의 성실함과 싹싹함을 발휘해 나름 새로운 삶에 적응하지만, 마음 붙일 곳 없이 외로운 처지여서인지 겨우 사진 하나로 남은 ‘남편’을 그리워하고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파이란의 사랑은 그녀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강재에게 닿는다. 어찌 되었건 법적 보호자로서 그녀의 사망 신고를 하고 장례 절차를 밟아야 하는 강재는 그녀가 살았던 시골 동네로 내려가는 동안 ‘남편인 척’ 정도는 해내야 한다는 경수의 닦달에 파이란의 삶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한다. 그는 그제서야 그녀가 자신에게 썼던 편지를 읽으며 세상 모두가, 자기 자신마저도 포기하고 경멸했던 강재가 파이란에게만큼은 조건 없는 사랑과 고마움의 대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 사실은 그를 변화시키고, 파이란의 장례를 마친 강재는 용식을 위해 감옥에 가는 대신 빈손으로나마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오래전 봤던 영화를 최근 다시 보면 새로운 감상을 갖게 된다는 말을 자주 했었다. [파이란] 역시 마찬가지로, 재미있게도 이번엔 부정적인 쪽의 의미가 꽤 포함된 것 같다. 예전엔 애틋하고 아름답게만 느껴졌던 영화였는데(지금도 붉은 목도리만 보면 이 작품이 생각난다) 나이가 들며 삐딱해져서인지 이번에는 영화를 보는 동안 조금 거슬리는 부분들이 있었다. 본격적인 얘기를 하기 전에 일단 딴지를 좀 걸고 넘어가자면, 플롯 자체만 놓고 볼 때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신파적인 면이 있기는 하다. 좀 더 강력하게 표현하면 1999년-2000년 즈음에 유행하던, 흔히 말하는 "세기말 감성"의 뮤직 비디오(주인공이든 상대역이든 반드시 한 명은 죽어야 했던)들과 '한끗 차이'인 듯도 하다. 믿고 보는 배우 최민식의 연기력이 아니었다면 꽤나 아쉬운 부분이었을 것이다.


주인공 파이란이 지나칠 만큼 순수함 그 자체로 그려진다는 아쉬움도 있다. 파이란의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면 "백란", 그러니까 하얀 난초인데, 이름마저 고고함과 순결함, 오염되지 않은 깨끗함의 상징인 것이다. 영화 속 등장인물 중 소수에 불과한 여성들의 대다수가 ‘유흥업소’ 종사자들이라는 점에서 ‘화장기’ 없는 얼굴과 ‘수수한’ 옷차림의 그녀가 더 대비되는 것도 우연은 아닐 듯하다. 룸살롱으로 팔려가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자해를 한 파이란이 결국은 ‘세탁소’에 취업하게 된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고통과 희생을 감수하며 자신의 ‘순수’를, 더 노골적으로는 ‘순결함’을 지켜낸 파이란이 결국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정화하는 직업을 갖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녀가 강재 같은 인물마저 ‘정화’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겠으나 여기서도 그녀의 지나치게 희생적이고 순전한 사랑에는 불편함이 느껴진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조그마한 증명사진 하나에 마음을 붙였겠나 싶어 안쓰럽기도 하고, 그 감정은 충분히 이해되면서도 돈을 받고 법적 명의를 빌려준 것 외엔 아무 것도 한 일 없는 '남편'에게 결혼해 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혼자 절절하게 사랑하는 파이란 안에 내포된 어떤 무조건적임과 맹목적임이 씁쓸하게 다가오는 것 역시 사실이기 때문이다.





파이란의 죽음도 비극이라기엔 너무나 서글픈 설정이었다. 룸살롱에서 환자인 척을 하기 위해 일부러 입 안을 깨물어 피를 흘렸던 그녀는 어느날 세탁소에서 실제로 기침을 하다 피를 흘리며 자신의 ‘병’을 깨닫게 된다. 당시 가짜로 만들어 냈던 질병에 실제로 걸리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파이란이 정말로 ‘목숨’을 바쳐 그녀의 순결함을 지켜낸 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룸살롱에서는 그렇게 기지를 발휘하여 끔찍한 상황에서 탈출했던 파이란은 자신이 ‘아픈’ 것을 깨닫고 난 후 갑작스런 무기력함을 보이고 만다. 꼬박꼬박 돈을 받아가는 직업소개소 소장에게 5개월만 소개비 '수금'을 멈춰 달라고 부탁하지만 매몰차게 거절 당하자 그대로 포기하고,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소장에게 몇 번이고 꾸벅 인사를 하며 나가기까지 한다. 파이란이 조신하고 소심한 여인으로 그려져 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까지 ‘순종적’인 인물이었던가 싶어 서글퍼진다. 그러니까 여성은 자신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선 대범해질지언정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는 용기를 내거나 반항하면 안 되는 것인가?


이 순백의, 누구도 밟지 않은 눈 같은 여인의 - 파이란이 하얀 눈이 내려 앉은 겨울에 사망한 것도 우연은 아니리라 본다 - 죽음, 희생, 순애보로 인해 한심한 ‘밑바닥’ 인생을 살던 남자가 비로소 ‘각성’하고 ‘변화’하게 된다는 점도 조금은 안타깝다. 여성(연인, 아내, 혹은 어머니)의 헌신이나 죽음으로 말미암아 각성하는 남성 주인공들이 넘쳐나는 문화적 역사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영화에 시비를 거는 일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겠다. 앞서 말한 아쉬움들과 별개로 주인공 "파이란"이 내가 애틋해 하고 애정하는 영화 속 인물들 중 하나임은 분명하니까. 그녀가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이상화된, 어떤 구시대적 ‘여성성’을 함유한 듯한 측면도 분명히 있지만 동시에 그녀는 응원을 보내며 공감할 수 밖에 없는 고결함 또한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영화는 파이란을 통해 ‘사랑’의 고귀함, 고결함을 표현하는 듯하다. 세상을 원망할 용기도, 그렇다고 사랑할 용기도 없어 어정쩡한 ‘호구’가 되어 버린 강재와 달리, 파이란은 누군가를 증오하거나 자신의 마음을 ‘닫아’ 버림으로써 고통을 피하려 들지 않는다. 외롭고 힘든 삶의 한가운데에서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하기로 선택하고 ‘희망’하기로 결정한다. 물론 강재에게 쓴 편지에도 토로했듯 그런 사랑과 희망은 그녀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 충동적으로 강재에게 편지를 부친 파이란은 혹시 찾아올지 모르는 남편을 위해 칫솔을 두 개 사 놓고 가슴 설레 하지만, 남편을 위한 칫솔은 1년이 지나도록 새것으로 남는다. 웃고만 있는 사진 속의 강재를 향해 그녀는 자신이 죽어 간다고 고백하며 조용히 절망한다. 그런 고통과 절망을 감수하며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무척이나 용감한 일임이 분명하다. 비록 파이란은 쓸쓸하게 숨을 거두지만, 그 작고 수줍은 마음을 다해 사람을 사랑했던 그녀의 삶이, 욕심과 증오로 친구도 과거의 은인도 스스로 놓아 버린 용식 같은 자의 삶보다 보잘것 없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고 강재는 그 사랑의 고귀함 혹은 고결함에 결국 ‘함락’된다. 서류상 관계에 불과한 그녀의 사망을 귀찮아만 하던 그는 점점 '아내'의 죽음을 안타까이 여기며 그 삶의 과정을 궁금해 하고, 그녀에게 무심하고 무정했던 주위 인물들에게 분노하면서 그녀의 과분했던 사랑의 흔적에 무너져 내림으로 새로운 길을, 이전과는 다른 삶을 선택하게 된다.


다만 타이밍을 놓친 둘의 마음은 끝내 비극일 수 밖에 없을 듯하다. 파이란의 사랑은 결국 강재의 삶의 근간을 뒤흔들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그녀는 이런 그의 ‘응답’을 듣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강재를 변화시키며 지금껏 살아오던 ‘삼류’ 인생에서 ‘구해’ 내는 파이란의 순수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이 그를 끝내 ‘구원’하지는 못한다. 고향에 내려가겠다는 강재를 용식이 그대로 내버려 둘 리 없다. 경수와 살던 집에서 짐을 싸던 강재는 과거에 경수가 찍었던 파이란의 영상을 발견하고 그녀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던 중 용식이 보낸 부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조금 못되게 얘기하자면 강재의 심경 변화를 야기한 그녀의 사랑이 그의 죽음에 일조했다고 볼 수 있겠다. 마지막 장면에서, 죽어 가는 강재의 시야에 화면 속 파이란의 얼굴이 뿌옇고 흐릿하게만 보이는 것은 맞닿지 못하고 계속해서 어긋나는 둘의 관계를 상징하는 듯도 하다.





그렇다고 파이란이 죽지 않았더라면 무언가가 달라졌을까? 그녀의 사랑이 강재를 구원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아니리라고 본다. 영화 속에서 파이란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어 강재를 만나러 간다. 그가 관리하던 비디오 가게 앞까지 다다른 그녀는 강재를 보곤 설레는 마음으로 화장까지 고친 뒤 그의 앞에 서려고 하는데, 하필 그때 단속을 위해 나타난 경찰들에게 강재가 잡혀감으로 둘의 만남은 무산되고 만다. 둘의 이 엇갈림은 비극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장치였겠지만 강재와 파이란이 사실은 만나선 ‘안 되는’ 사람들임을 암시하는 장면이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만약 그들 둘이 만나게 되었다면 막연한 ‘이상’을 사랑하던 파이란은 강재의 실제 모습에 실망했을 테고, 강재는 그녀의 사랑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을 테니까. 어떤 면에서 파이란의 죽음은 둘의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든 동시에 그들의 사랑을 '완성'시켰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둘의 사랑이 비극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들에게 죽음이라는 ‘단절’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의 사랑은 ‘불완벽’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가치임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부족함 투성이인 사람끼리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구원이 되지 못한다. 육체적인 죽음, 혹은 관계의 죽음에서 오는 단절을 피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는 더욱더. 대답조차 기대할 수 없는 사랑, 상대를 해치는 일에 일조하는 사랑을 피하는 것만 해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지.


완전한 존재에게서 받는 완벽한 사랑에 대해 새삼스레 감격을 느낀다. 온 마음을 다 쏟아부어도 ‘보답’할 수 없는 성격과 분량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 감히 닿지 못했을, 영영 어긋나 만나지 못했을 그분이 모든 어두움과 죽음을 넘어 우리와의 ‘단절’의 가능성마저 허물었다는 것. 이런 완벽한 사랑을 누리는 덕에 불완전한 존재들과의 불완벽한 사랑도 비극으로만은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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