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J의 시선
[스텝맘]은 줄리아 로버츠와 수잔 서랜든이 '투톱'으로 - 요즘의 표현법으로 - 출연한 1998년 작품으로, 내겐 어렸을 적 VHS(!!!)로 돌려 보던, 나름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영화다. [해리포터] 시리즈 1, 2편을 연출한 감독으로도 유명한 크리스 콜럼버스의 작품일 뿐만 아니라 줄리아 로버츠, 수잔 서랜든 두 주연배우가 제작자로도 참여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가정의 달인 5월을 맞아 '가족'이라는 주제의 영화를 생각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작품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영화는 늦잠을 잔 이사벨(줄리아 로버츠)이 두 아이를 제시간에 등교시키기 위해 허둥대며 고군분투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정신없이 서두르는 이사벨과 달리 느긋하게 앉아 있는 딸 "애나"는 묘하게 적대적인 분위기이고, 애나의 장난꾸러기 남동생 "벤"은 찬장 안에 숨거나 옷 입기를 거부하는 등 영 통제가 되지 않는다. 이사벨이 벤에게 옷을 입히기 위해 거실 바닥에서 아이와 몸싸움을 하는 도중 "재키(수잔 서랜든)"가 현관문을 열고 '우아하게' 등장하는데, 그녀를 본 남매가 "엄마!"하고 부르며 반기는 모습에서 아이들의 비협조적 태도와 이사벨의 미숙한 아이 다루기의 이유가 저절로 설명된다. 애나와 벤의 아버지 "루크(에드 해리스)"의 전처인 재키가 - 이사벨이 아닌 - 아이들의 '진짜' 엄마라는 것을 말이다. 루크의 애인인 젊은 '미혼' 여성 이사벨은 이혼한 부모 사이를 오가는 남매가 아빠에게 올 때마다 아이들의 보호자 노릇을 해야 하는 애매하고 어정쩡한 처지이다.
아이들의 입장에선 엄마 아닌 새 연인이 아빠에게 생겼다는 사실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는 데다, 특히 사춘기를 앞둔 애나는 육아 경험이 전무한 이사벨이 실수를 저지르거나 까칠하게 구는 자신과 부딪힐 때마다 그녀에 대한 '원한'을 쌓아 가는 중이다. 친 엄마 재키 또한 아이들 앞에서 이사벨의 흉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그녀와 잘 지내 보라고 아이들을 격려하는 등 나름 성숙한 태도를 보이고는 있지만, 전남편의 '어린' 연인에 대해 그닥 호의적인 감정이 없음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한다.
재키는 이사벨이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그리고 이사벨은 재키가 남매의 양육 문제에서 지나치게 고압적이고 오만한 태도를 보인다고 생각함으로써 둘의 관계는 계속해서 삐걱이게 된다. 사실 이사벨과 재키는 이런 관계로 만나지 않았더라도 애초부터 친해지기 어려웠을,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인물들로, 결혼과 출산을 겪는 동안 일을 떠나 육아와 살림에 집중하는 전업주부로 살게 된 재키와 달리 이사벨은 패션 잡지 화보를 담당하며 성공 가도를 달리는 인기 사진작가이다. 상대를 이해하거나 접점을 찾기 어려운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한 은근한 무시와 반감을 바탕으로 아슬아슬한 긴장 상태를 이어 가던 중, 변호사인 루크의 바쁜 스케줄 때문에 아이들을 도맡게 된 이사벨이 어쩔 수 없이 남매를 자신의 일터(센트럴파크 안의 패션 화보 촬영지)로 데리고 갔다가 잠시 잃어 버리는 소동이 발생한다. 사실 이사벨이 일하는 동안 가만히 기다리지 못하고 말썽을 일으킨 벤의 잘못도 없지 않고, 아이들이 금방 발견되어 경찰의 보호를 받는 등 '해프닝' 정도로 일단락될 수도 있는 사건이었지만, 소식을 듣고 경찰서로 달려온 재키가 이사벨에게 분노와 원망을 쏟아 내면서 둘 사이의 갈등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재키가 다시는 내 아이들 근처에 얼씬거릴 생각도 말라는 투로 퍼부으며 남매를 데리고 떠난 이후 이들의 관계는 완전히 깨어질 듯 보이지만 영화는 곧 예상치 못하던 국면으로 전개된다. 루크가 이사벨에게 프로포즈를 함으로써 그녀가 아이들의 '정식' stepmom, 그들의 '진짜' 새엄마가 되는 상황이 벌어져서이기도 하지만, 보다 결정적으로는 갑작스럽게 암 선고를 받은 재키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엄마의 역할을 해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투병을 시작한 재키는 어쩔 수 없이 이사벨에게 아이들의 돌봄을 의존하는 상황이 되고, 그러면서 아이들은 이사벨에게 차차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워낙 오래전에, 또 굉장히 어렸을 때 봤던 작품이라 영화를 다시 보면 어떤 감상이 들지 사실 많이 궁금했다. 재미있게도 이번에 영화를 보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 모두가 '사랑 받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초반에 이사벨을 경계하고 미워하지만, 사실 그 이유가 '엄마의 자리'를 이사벨이 빼앗았기 때문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사벨이 자신들에게서 '아빠의 사랑'을 덜어 갈까봐, 그들 남매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부부 관계가 깨지면서 지금까지 받아 오던 사랑과 관심을 더 이상 받지 못할까 봐 불안해 하는 모습으로 비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처음엔 루크의 사랑을 잃지 않으려고 그의 아이들을 '견뎌' 준다는 느낌이 강하던 이사벨은, 이후로는 아이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강아지를 입양하거나 애나에게 그림을 가르쳐 주는 등의 노력을 한다. 애나와 벤에게 진심으로 애정을 가지게 된 후엔 아이들의 삶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 재키의 존재감에 질투심을 느끼기도 하고 말이다. 꾸준한 노력으로 자신의 진심이 아이들에게 가닿았다고 생각하다가도 너무 쉽게 그들의 관심과 사랑을 다시 '채 가는' 재키를 지켜봐야 하는 이사벨의 복잡한 표정은, 애나와 벤에게 '사랑 받고' 싶어 하는 - 재키만큼, 어쩌면 재키보다 더 많이 - 그녀의 속내를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비슷한 맥락에서, 재키가 이사벨과 명확히 비교되는 '완벽한' 엄마의 모습을 보이는 것 또한 자식들에게 사랑 받고 싶어 하는 그녀의 욕구에 기인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아이들이 이사벨을 싫어하던 당시에는 그녀와 잘 지내라면서 기회를 줘 보라고 남매를 다독이던 재키가, 막상 아이들과 이사벨의 관계가 개선되자 불안해 하고 속상해 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자신이 아이들의 사랑을 독점하고 있음이 분명했을 때, 그래서 마음의 확신과 여유가 있었을 때는 제법 관대할 수 있었지만 암 투병을 시작하며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하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아이들이 이사벨에게 마음을 열자 그 모습을 보며 불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안 그래도 죽음을 눈앞에 둔 자신이 '대체 가능한' 존재로 전락해 버릴까 봐, 이사벨이 자신의 역할을 완벽히 대신하게 될까 봐, 그로 인해 자신이 더 이상 자식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닐까 봐 걱정하는 것은, 달리 말하면 아이들의 사랑을 '잃게' 될까봐 두려움에 빠진 모습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그래서 재키는 다시 한 번 이사벨과 싸우게 되는데, 흥미로운 점은 이사벨이 아이들을 잠시 잃어 버렸던 '센트럴파크 사건' 당시 그녀의 분노가 "왜 엄마 노릇을 똑바로 못 하느냐"에 근거하고 있었다면, 영화의 후반부에서 보이는 그녀의 분노는 "왜 엄마 노릇을 하려고 드느냐"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재키가 이사벨에게 화를 냈던 이유는 남자 친구에게 차인 애나를 위해 이사벨이 속 시원한 '복수'를 연출해 주었기 때문인데 - 포토그래퍼로서의 연줄을 이용해 멋진 '모델 오빠'를 섭외하고 새 남자 친구 역할을 맡기는 방법으로 - 처음엔 딸에게 그런 식의 '편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나쁜 교훈을 주었다고(틀린 말은 아니라고 본다) 이사벨에게 화를 내던 재키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 이사벨 때문에 싸움이 고조되자 결국 감추고 있던 속마음을 표출하고 만다. 그녀가 '쿨하고' 멋있는 방법으로 애나의 속상함을 해결해 주며 '영웅' 노릇을 함으로써, 교과서적 충고만 거듭했던 자신은 고루하고 지루한 엄마로 비춰지도록 만들었다는 것 말이다. 그 말은 곧 이사벨이 자신에게서 애나의 사랑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사실에의 분노와 불안을 에둘러 드러낸 표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재키가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데에는 물론 의심의 여지가 조금도 없다. 다만 아이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기가 세상에서 없어져도 아이들이 아무 결핍 없이 행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아이들만 행복하다면 자신이 다른 누군가로 '대체' 되어도 전혀 상관 없다는, 말하자면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정도의 마음을 갖게 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아이들이 밝고 행복하게 자라기를 바라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을 필요로 해 주기를, 아이들에게서 계속 '사랑 받기를' 원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으로 볼 때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다.
영화 속에서 자세히 다루어지진 않지만 그들의 대사를 통해 유추해 볼 때, 루크와 재키의 관계에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자로서의 '사랑'을 기대하다 파국을 맞은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변호사로 일하느라 바쁘고 피곤한 루크가 아내의 위로와 이해, 즉 그녀로부터의 '사랑'을 기대한 반면, 재키는 재키대로 육아와 살림에 지쳐 남편이 그 부담을 함께 져 주기를, 가족들과 조금 더 함께해 주기를 - 다시 말해, 그런 형태로 표현되는 남편의 '사랑'을 - 기대했을 것이다. 서로가 '사랑'의 결핍에 지쳐 가는 동안 결국 재키는 루크를 몰아내고 루크는 그녀에게 돌아가려 하지 않음으로써 둘의 결혼은 막을 내렸을 것임이 분명하다.
어쩌면 '가족'이라는 공동체 내부에서 사랑을 '받고' 싶다는 욕구가 다른 집단에서보다 훨씬 더 크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가족을 '사랑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전제하지만, 그 이면에는 가족이야말로 나를 '사랑해 줘야' 하는 존재라고 여기는 마음도 동시에 공존할 테니 말이다. 가족이 서로에 대해 사랑을 '베풀' 존재로 생각하기보다 내게 사랑을 '줘야 하는' 존재로 여기면서 원하는 만큼 돌아오지 않는 사랑에 분노하고 절망할 때 가정 안의 수많은 상처와 원망과 고통과 비극이 생겨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랑 '받고자' 하는 욕구가 인간의 본성인 만큼이나, 아무런 기대 없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성품 또한 우리 안에 존재하는 심성이라고 믿는다. 이사벨에게 화를 내던 재키는, 자신이 미숙할지언정 "아이들의 best interests(그들에게 가장 유익한 것)"를 바라는 마음만은 진심이라는 이사벨의 고백에 - 아이들을 향한 이사벨의 '사랑'에 - 순간 멈칫한다. 그날 밤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던 그녀는 '사랑 받기'보다 '사랑하기'를 우선순위에 두기로 선택하고, 이사벨을 불러 처음으로 속마음을 내보이며 진심 어린 화해를 청한다. 여기에서 인상적인 대사는 딸 애나가 자신이나 이사벨 중 한 명을 고를 필요 없이 둘 다 사랑하면 된다는 재키의 말이었는데, 이사벨을 '새엄마'로 인정하는 것으로 들리는 이 말은 자신이 딸에게 최우선으로 '사랑 받기'를 포기한다는 선언으로도 해석된다. 딸이 행복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위해서는 자식의 사랑을 '잃어도' 상관없다는(사랑이 이런 식으로 양을 분배해야 하는 감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결단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가족 간의 사랑을 '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사랑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영적, 감정적 상해가 도처에서 발견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방적 사랑을 요구하는 가족들로부터 상처 입은 모든 이들이 '받는 사랑'을 통해 치유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가족 사이에서 사랑 받기만을 기대하던 이들도 먼저 사랑하기를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우리의 자의로는 상상도 하기 어려웠을, 사랑으로 가득한 삶을 다 함께 살 수 있기를 또한 바란다. 서로에게 그토록 날을 세우며 상처를 주고 받았음에도 마침내 카메라 앞에서 손을 맞잡은 채 진정한 '가족사진'을 찍게 된 재키와 이사벨이 그럴 수 있었듯.
엄마 C의 시선
영화 “스텝맘(Stepmom)”은 감독 크리스 콜럼버스(Chris Columbus)가 연출하고 두 사람의 유명 스타, 줄리아 로버츠(Julia Roberts)와 수잔 서랜든(Susan Sarandon)이 주연을 맡았던 1998년 개봉작입니다. 여러 흥행 작품에서 연기력을 인정 받아 온 두 배우에 대해서는 굳이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고, 감독인 크리스 콜럼버스(Chris Columbus)는 연출자 본인의 이름보다 전세계적으로 알려졌을 “나홀로 집에(Home Alone)” 1, 2편과 역시 널리 알려진 코미디 “미세스 다웃파이어(Mrs. Doubtfire)”, 그리고 “해리 포터” 시리즈의 1, 2편인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Harry Potter and the Sorcerer's Stone)”,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Harry Potter and the Chamber of Secrets)” 등 자신이 만든 유명 영화의 제목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라고 말해야 보다 적절한 소개가 될 것 같습니다.
5월을 “가정의 달” 분위기로 보내는 것은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마찬가지라고 생각되지만, 한국에서 애초 “어머니날”로 지정되었던 5월 8일이 “어버이날”로 명칭이 바뀐 ‘덕분’에 아버지들도 배제되지 않는 기조가 형성된 것과 달리, 5월 둘째 주 주일이 “Mother’s Day”이고 6월 3째 주 주일이 “Father’s Day”인 북미권에서는, “Mother’s Day”가 외식, 소비 등이 연중 최고치에 가까울 만큼 특별한 날인 데 반해 “Father’s Day”는 대부분의 가족이 딱히 축하하거나 기념하지 않는 – 아버지들이 ‘자신들의 날’을 따로 제정해 준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 별 의미 없는 날로 ‘전락한’ 느낌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그 사실이 새삼 기억되었던 이유는, 어머니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두 여배우 사이에서 연기력으로 따지면 그들보다 조금도 뒤질 것 없는 아버지 역의 에드 해리스(Ed Harris)가 얼핏 찬조 출연 정도의 존재감으로 느껴진다는 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제목에 이미 많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고 할 이 영화는, 젊고 아름다운 새 애인과 나이 든 중년의 옛 아내, ‘잘 나가는’ 현직 패션 사진작가와 결혼, 출산의 과정에서 집안에 ‘들어 앉게 된’ 전업주부의 구도로 대비되는 두 여성이, 한 남자의 두 아이를 사이에 두고 “새엄마”와 “친 엄마”라는 이름으로 반목과 갈등을 거듭하다가, 친 엄마이자 옛 아내의 위치인 후자에게 닥친 갑작스런 현실(죽음)에 함께 직면하면서 서로에 대한 미움과 몰이해를 점차 해소하고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짧게 요약될 수 있습니다.
“새엄마”, 심지어 “계모”라는 – 원래는 전혀 나쁜 의미를 가진 말이 아님에도 동서양의 여러 동화와 곳곳에 실재하는 일부 악한 ‘계모’들로 인해 상당히 나쁜 이미지가 덧씌워진 – 단어를 제목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를, 뒤집어 생각하면 그 단어와 관련된 여러 ‘편견’에 저항하는 작품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젊은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더 갖고 있다거나 직업여성이 전업주부보다 더 능력 있는 여성이라는 편견, 반대로 아이를 낳아 본 경험이 없는 새엄마는 ‘전처’의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어려우며 설사 진정한 사랑의 마음이 있다 해도 경험 부족 때문에 엄마 노릇에서도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등의, 사람들이 흔히 갖게 되는 여러 모양의 편견 말입니다.
너무 개인적인 감상으로 영화를 평하다 보면 새로운 의미의 “가족의 탄생”을 소개하는 - 앞으로의 사회에서는 더욱 흔하게 생겨날 - 주제의 본질을 흐리지 않을까 우려스럽기도 하지만, 하나님께 올리는 감사의 고백을 위해 그냥 '강행'하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오래전, 저희 딸이 영화 속의 “애나(Anna)”보다 좀 더 어렸을 당시 이 작품을 보며 남달리 복잡한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저희 엄마께서도 - 이후에는 이모까지 - 친 엄마 역할인 “재키(Jackie)”가 앓는 임파선암(Lymphoma)으로 돌아가셨다는 사실로 인한 ‘과도한’ 감정이입 때문이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던 그녀가 애나의 어린 시절 사진들을 헝겊에 프린트해 퀼트 이불로 만들어 주는 모습을 보면서 “손재주 없는 나는 저런 것도 못 해 줄 텐데” 싶어 괜히 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이제 아이들의 엄마 역할을 맡아야 할 “이사벨(Isabel)”과 마음을 터놓은 후의 재키가 “나는 아이들의 과거를 소유했지만 당신은 그 아이들의 미래를 함께할 수 있잖아요(I have their past, and you can have their future)”라고 하던 (의도적으로 '멋있게' 만들었을) 대사도 그저 가슴 아픈 '구절'로만 다가왔었지요.
아직 어려서 엄마가 온 우주처럼 느껴질 아이에게 단지 '과거'의 기억으로만 남게 되면 어쩌나,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지 모르는 아이의 '미래'를 함께할 수 없으면 어쩌나, 영화 속에 잔뜩 함몰된 채 가슴 저려 하기도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후에도 저에게 많은 시간을 허락하시고 그때는 상상도 못하던 빛나는 미래까지 직접 눈으로 목도할 수 있는 은혜를 더해 주셨습니다. 당시 느꼈던 과도한 감정이입과 이번에 다시 영화를 접하면서 갖게 된 ‘감상(感傷)’을 바탕으로 한마디 덧붙인다면, 자녀가 자신의 앞날을 책임지며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장성할 때까지 곁에서 지켜볼 수 있는 시간을 하나님께 허락 받은 사람이라면 그것만으로 감사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부모라는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최고의 선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한동안 알리지 않았던 자신의 병세에 대해 가족들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난 후 충격에 빠져 우울해 있는 딸 애나와 아들 “벤(Ben)”을 위로하기 위해 재키가 아이들과 함께 춤을 추며 부르는 “오르지 못할 산은 없습니다(Ain't No Mountain High Enough)”라는 – “시스터 액트(Sister Act) 2”에도 등장했던 – 흥겨운 곡의 노랫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인 우리들이 절망했을 때 주시는 격려의 말씀으로 저에게는 매 구절마다 느껴집니다. 실제로는 어떤 의미이든 그런 관점에서 번역해 보려 합니다.
If you need me, call me 내가 필요하다면 불러 주거라
No matter where you are 네가 어디에 있든지
No matter how far 혹 아주 멀리 있더라도 말이다
Don't worry, baby 아무 걱정 말거라
Just call my name 그저 내 이름을 부르기만 하렴
I'll be there in a hurry 내가 곧장 너에게 달려갈 테니까
You don't have to worry 걱정할 필요 없단다
No wind, no rain 거친 바람과 세찬 비
Or winter's cold 춥고 추운 겨울 날씨라 해도
Can stop me, baby 결코 나를 멈출 수는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