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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anne May 27. 2023

스카우트: 같은 상황, 다른 선택

4.19 즈음이던 4월 중 유사한 맥락의 사건을 다룬 영화로 “스카우트”를 올리려다, 이 작품의 주연 배우가 일으킨 사회적 물의 때문에 준비했던 내용을 포스팅하지 못하고 지나간 일이 있었습니다. 다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즈음을 보내는 시기가 되고 보니 한국 역사에서 그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는 사건을 의미 있게 다뤘음에도 출연 배우의 개인적 문제로 묻혀 버리고 말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영화라는 생각이 들기에, 작품 전체의 주제와 흐름에 중점을 두면서 그 내용을 읽으시는 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포스팅을 결정했습니다.



딸 J의 시선



찬란하고 또 잔혹했던 오월의 봄이 다가올 때마다 생각나는 영화 중 하나가 [스카우트]이다. 2007년 개봉되었던 이 영화는 김현석 감독이 연출한 작품으로, 언젠가 다루려 예정하고 있는 [YMCA 야구단]이 바로 이 김현석 감독의 데뷔작이다. 두 작품의 시대 배경이나 전체 내용은 물론 다르지만, '야구’라는 소재를 통해 한국의 근현대사를 되짚는다는 공통점뿐 아니라 [스카우트]의 주인공 이름인 "이호창"이 [YMCA 야구단]에서 송강호 배우가 연기했던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다는 사실, 그리고 심지어 두 영화가 동일한 배경음악을 사용한다는 점 등에서 [스카우트]와 [YMCA 야구단]을 같은 맥락으로 연결되는 작품들이라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다시 말해서, 내용이 이어지는 식의 ‘후속편’은 아닐지라도 [스카우트]를 [YMCA 야구단]의 정신적 계승자, 정도로 생각하는 일은 무방하리라는 것이다.


방금 지적했듯 이 영화의 주인공은 "호창"으로, 대학 시절 나름 촉망 받는 야구 선수였으나 현재는 대학 야구부원 시절 자신의 코치였던 선배의 부하 직원이 되어 Y대학 야구부 '사무직'에서 근무하고 있다. 1980년 5월, 오랫동안 미뤄 온 휴가를 앞두고 잔뜩 신이 나 있던 호창은 차 사고를 당한 코치 대신 광주로 내려가라는 갑작스런 특명을 받게 된다. 라이벌 대학에 3연패를 당한 뒤 인재 영입에 혈안이 된 학교 측에서 당시 고교 야구계의 대스타인 학생을 자신들 쪽으로 데려오려 계획한 것인데, 호창이 ‘스카우트’해야 할 이 학생은 다름 아닌 전설적 괴물 투수, 광주일고 3학년 시절의 "선동렬(선동열)"이다.





영화는 호창이 선동렬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광주로 내려간 5월 8일부터 17일까지, 그의 9박 10일간의 여정을 쫓는다. 호창은 이미 라이벌 대학과 계약 직전 단계에 있는 선동렬을 어떻게든 빼내 오려 하지만, 경쟁 대학에서 이미 손을 써 놓은 탓에 "동렬이"의 얼굴조차 보기 힘든 상황이다. 라이벌 대학이 선동렬을 ‘숨겨 놓은’ 병원에 잠입하기도, 동네 건달들의 도움을 받아 동렬의 병실을 덮쳐 보기도 했으나 번번이 실패를 거듭하던 호창은, 결국 선동렬의 부모님을 공략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동렬의 아버지(백일섭)를 졸졸 쫓아다니며 산에도 함께 오르고, 체하지 마시라고 약수물에 나뭇잎도 띄워 주고, 목욕탕에서 등도 밀어 드리는 등 온갖 아부를 하는 모습이 눈물 겨울 정도이다. 그에 더해, 동렬이를 뺏길 생각이 전혀 없는 라이벌 대학 스카우터이자 대학 야구 선수 시절 경쟁 상대였던 "병환(김희원)"과 사사건건 부딪히면서 온갖 다이내믹한 사건들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액션 코미디나 모험 활극에 가까울 정도의 스카우트 경쟁을 벌이는 호창이 그 열흘의 시간 동안 ‘로맨스’ 분야까지 섭렵하는데, 서울에서 일하다 고향인 광주로 돌아와 YMCA에서 근무하고 있는 옛 연인 "세영(엄지원)"과 재회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소위 ‘캠퍼스 커플’이었던 둘은 한때 눈꼴이 실 정도로 다정한 연인이었으나 - 실제로 회상 장면을 통해 그려지는 그들의 연애는 꽤나… 가관이다 - 세영의 갑작스럽고 일방적인 이별 통보, 이후 그녀의 ‘잠수’로 인해 어영부영 헤어지고 만 사이이다. 누가 봐도 세영에게, 또한 확실하게 끝을 맺지 못한 자신들의 관계에 여전히 미련이 남은 호창은 스카우트 임무로 바쁜 와중에도 그녀의 곁을 계속 맴돌고, 세영을 짝사랑하는 동네 깡패(이며 굉장한 실세인 듯한) "곤태(박철민)"의 견제와 협박을 받으면서도 그녀가 자신을 떠난 '이유’를 알아내고자 애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는 가운데 정체된 듯하던 호창의 ‘스카우트’ 작전은, 세영의 배려로 선동렬의 어머니를 만난 그가 가족들의 호감을 얻으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어머니를 통해 ‘빈틈’을 비집고 들어간 호창이 동렬의 아버지에게 아들의 미래(성공적인 프로 야구 선수 생활)를 위한 전폭적 지원과 도움을 약속함으로써 결국 그의 마음을 돌리는 일에 성공한 것이다. 그렇게 호창은 꿈에도 그리던 "동렬이"와 마주할 수 있게 되지만, 그와의 계약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전혀 예기치 못했던 사건이 발생한다. 동렬이 입고 있는 야구복의 줄무늬가 호창의 기억 아주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어두운 ‘과거’를 회상시키며 세영이 자신을 떠난 이유를 그 스스로 깨닫게 됨으로 인해서이다. 결국 호창은 자신이 사활을 걸었던 ‘스카우트’ 임무를 뒤로 한 채 세영을 향해 달려가고, 5월 18일 시작되는 거대한 흐름에 온몸을 맡기게 된다.


사실 [YMCA 야구단] 속 구한말 시대를 살던 "호창"이 그랬듯, [스카우트] 속 1980년의 호창은 역사의 암흑기에도 단순한 일상을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YMCA 야구단]에서의 "정림"과 "대현"처럼 [스카우트]에서의 "세영"도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하는 데 반해, 주인공 호창은 세상 돌아가는 문제나 사회, 정치적 상황에 별다른 관심을 가진 인물로는 보이지 않는다 - 세영이 오랜만에 재회한 호창 앞에서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라며 쏘아 붙일 정도로 말이다. 호창의 시선을 따라가는 영화 또한 작품의 많은 분량을 광주에서의 평온한 일상과 선동렬을 찾아 헤매는 스카우트 ‘활동’에 할애하는 구조를 보인다.





하지만 역사의 비극이란 평범한 사람들조차 시대의 흐름에서, 제도의 탄압과 폭력으로부터 비껴갈 수 없음에 기인하는 일임이 분명한 모양이다. 영화 후반부에서 호창은 (앞서 말했듯) 동렬의 야구단 유니폼을 보고 대학 야구부에서 선수 생활을 하던 시절의 기억을 문득 떠올리는데, 이것은 아마 스스로도 잊고 싶어 무의식 저편 깊은 곳에 눌러 숨겨 두었을, ‘트라우마’라는 표현이 적합할 만한 사건이었다. 대학 시절 호창은 운동부라는 이유로, 그리고 학교 측의 재정적 후원을 받는 입장이라는 이유로 거의 ‘용역’처럼 동원되어, "독재 타도"를 외치며 평화롭게 시위 중이던 다른 학생들에게 무력을 휘둘러야 하는 순간이 있었다. 처음엔 쭈뼛대며 주저하던 호창도 상황이 격해지면서 후배 선수가 폭력에 휩싸이자 이성을 잃은 채 야구 배트로 자신의 학우들을 마구 때렸고, 시위자로 현장에 있던 세영은 그런 그의 모습을 고스란히 목격한 후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거의 모든 분쟁(특히 내란)이 다 그렇겠지만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적 사건들이 갖는 가장 안타까운 부분은 같은 민족, 같은 공동체가 서로를 적대하며 ‘갈라서게’ 됨에서 온다는 생각을 한다. 남북 분단의 비극, 지역 감정이 낳은 분열, 군인이나 경찰들이 자신이 지켜야 할 시민을 향해 총부리를 들이대는 일, 같은 학교를 다니는 또래 학생들이 서로에게 폭력을 가해야 하는 일 등 말이다. 그런 면에서 호창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세영이 그에게 이별을 통보한 뒤 도망치듯 사라졌다는 설정은 둘의 ‘헤어짐’이 그저 연애적 결별이 아니라 폭력과 강압으로 쪼개진 사회의 분열을 상징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영화의 말미, 평온하고 유머러스하게 흐르던 전개가 무색할 만큼 주인공들을 향해 갑작스레 폭발하는 공권력의 폭력성이, 바로 이해와 화해(reconciliation)의 도화선이 된다는 사실이다. 과거를 기억해 낸 호창은 그토록 애타게 바래 왔던 선동렬을 뒤로한 채 북받치는 감정을 안고 세영에게로 달려간다. 민주화 운동 중 경찰에게 잡힌 세영은 다른 여러 시민 운동가들과 함께 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는데, 호창은 무장 경찰이 시민들에게 가하는 폭력을 보며 자신이 여태껏 외면해 왔던 과거의 진실, 그리고 현 사회의 무정함과 잔혹성을 동시에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꼭 독재 정권의 추악한 면모를 드디어 깨달았다는 식의 거시적 깨달음이라기보다 자신의 지극히 ‘개인적인’ 잘못과 죄를 인지하는 방식, 오랫동안 ‘미스터리’로 남아 있던 연인과의 이별 사유가 ‘스스로’에게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무슨 이유에서건 자신이 다른 학생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사실, 그 폭력에 자기가 사랑하는 야구가 ‘매개체’로 쓰였다는 사실, 또 그 폭력을 연인 앞에서 자행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호창은 세영이 자기를 버린 '가해자'이고 자신은 버림을 받은 ‘피해자’라고 여기던 지금까지의 억울함과 ‘떳떳함’을 잃는다. 단순히 세영의 ‘편’인 시위자들을 구타했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비정의에 순응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신의를 저버리고 '추락'했으며 그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큰 실망과 상처를 주었다는 ‘진실’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영을 ‘구하기' 위해 제발로 들어간 경찰서 안에서의 호창은 대학 시절과 똑같은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7년 전 그 당시, 좁은 학교 복도에서 시위 중이던 학생들을 호창이 구타하며 ‘죄’를 지었던 때와 동일한 구도로, 이번엔 좁은 경찰서 복도에서 무장 경찰들로 대표되는 공권력이 세영을 포함한 민주화 운동가들을 탄압하고 있는 중이다. 경찰서로 들어간 호창은 처음엔 무장 경찰들의 뒤편에 서 있게 되는데, 대학 시절의 그가 세영과 ‘적대적인’ 입장에 서 있던 상황을 연상하게 만드는 장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때의 호창은 과거와 달리 세영의 반대편에 머무는 대신 그 아수라장을 넘어 그녀 쪽으로 가기를 택하고, 심지어 무장 경찰들의 ‘폭력’의 상징인 진압 방패를 발판 삼아 디뎌 밟고 그녀에게로 향한다. 그렇게 호창은 세영을 그 위험한 곳에서 ‘구해’ 내고, 경찰서 밖 안전한 장소에 도달하자 아이처럼 무너져 내려 울면서 그 어떤 변명의 말도 없이 미안해, 미안해 하고 사과를 거듭한다. 그런 모습을 본 세영이 내가 더 미안해, 하고 함께 사과하며 둘은 같이 엉엉 우는데, 영화를 볼 때마다 그랬지만 이번엔 특히 더 그 장면을 보며 울컥했더랬다. 이 장면에 ‘연인 간의’ 사랑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이 완성되는 순간이 담겼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며 하는 대부분의 후회는 과거의 어느 순간 자신이 만든 ‘잘못된’ 선택을 되돌릴 수 없어 하게 되는 일일 것이다. 현명하지 못한 결정을 성급하게 내렸다거나,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말 혹은 행동을 했다거나... 등등의 경우 말이다. 요즘 들어 "회귀"라는 주제를 다루는 창작물이 많은 이유도 과거의 후회되는 순간으로 돌아가 그때와 ‘다른’ 선택을 하고 싶다는 우리의 공통된 마음 때문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그런 식의 ‘두 번째 기회’가 없기에 우리의 후회는 더욱더 짙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호창은 사실상 ‘두 번째 기회’를 얻는다. 대학 시절의 잘못으로 그는 세영에게 상처를 주고 자신 또한 상처를 받으며 오해와 원망으로 얼룩진 이별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광주의 잔혹함이 그들 둘에게만은 도리어 "같은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 것이다. 호창은 대학 시절처럼 순응하며 외면해 버리는 대신, 인간적 도리와 신의를 무심히 저버리는 대신, 탄압과 폭력을 거부하고 세영의 곁으로 가는 쪽을 택한다. 대학 시절보다 훨씬 큰 위험 부담이 따르는 일임에도(실제로도 호창이 경찰에게 끌려가 큰 고초를 겪으리라는 사실이 영화 속에서 암시된다) 말이다. 그리고 오래전 호창의 폭력적 모습에 충격을 받은 세영이 울면서 그를 "모르는 사람 같다"고 밀어냈던 때와 달리, 지금의 그는 세영이 사랑했던, ‘사랑할 만했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으며 자신을 사랑했던 그녀의 마음에 당위성과 가치를 회복시킨다. 과거의 선택을 없었던 일로 지울 수는 없지만 그때의 상처와 실망감을 예전과 다른 선택으로 덧씌우며 새 살을 돋게 할 수 있는, 오히려 더욱 성숙해질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경찰들을 밟고 디뎌 자신에게로 오는 호창을 바라보는 세영의 얼굴에서는, 마치 이제야 드디어 그 옛날 자신이 사랑했던 ‘진짜’ 호창을 마주하는 듯한, 생경함이 포함된 경이로움까지 드러나 보인다.





결과로만 따지자면 호창이 역사의 흐름에 대단한 영향을 미친 것은 물론 아니다. 더구나 호창과 세영은 그 이후 다시 만나지도 못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중년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세영을 통해 그녀가 다른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호창과 인연 없는 삶을 살고 있음을 관객들은 목격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며 나는 그들의 사랑이 결국 ‘이루어졌다’고 확신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호창이 과거와 "같은"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하며 둘 사이의 ‘신의’가 회복된 이상, 매듭짓지 못했던 오해와 상처가 ‘치유’되면서 서로를 사랑했던 마음이 후회 아닌 아름다움으로 남게 된 이상, 그들의 사랑은 분명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호창과 세영이 연인으로서 이루어지느냐 아니냐에는 사실 큰 의미가 없을 듯하다. 지긋한 나이의 세영이 TV에 나온 선동렬 ‘감독’을 보며 짓는 미소는 그래서 더 따뜻하고 애틋하게 다가온다.


광주의 봄을, 또 한국과 세계 각국에서 일어났던 비슷한 아픔들을 곱씹으며 우리에게 주어지는 ‘두 번째 기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약하고 악한 인간들이 만들어 가는 역사 속에서 암흑의 시대가 반복되는 것, 같은 사회의 구성원끼리 물리적, 언어적, 감정적 폭력을 가하는 비극이 되풀이 되는 것, 다시 말해 우리가 살면서 같은 죄를 거듭해서 짓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반복되는 그 고난과 고통들 속에, 사실 우리가 약자를 품지 못하고 정의를 지켜 내지 못했던 과거와는 "다른 선택"을 하면서 그저 순응하고 휩쓸리는 삶을 거부할, 두 번째 기회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세 번 당신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똑같이 세 번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며 과거의 죄를 지우셨던 그분이 우리에게도 같은 기회를 허락해 주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모든 아픔을 그저 역사의 퇴보라고 안타까워만 할 것이 아니라, 두려워서 불의를 외면했던, 약자의 편이 되지 못했던, 스스로 목소리를 낼 힘이 없는 이들을 위해 나서기를 꺼렸던 과거와 "다른 선택"을 함으로써, 사람들 사이를 갈라 놓은 상처를 치유하고 사랑과 신의를 회복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계속 주어지고 있음에 감사해야 옳을 것이다.


우리가 반복되는 선택 안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를 놓치지 않길 바래 본다. 같은 상황과 마주할 때 다른 선택을 하는 용기를 갖게 되기를. 그리하여 되풀이되는 비극이 치유와 화해의 계기로 탈바꿈할 수 있기를. 목숨까지 내어 주신 그분의 사랑이 이 혼란한 세상 속에서도 우리를 통해 마침내 이루어지기를.




엄마 C의 시선



2007년 개봉한 한국 영화 “스카우트”는 역시 '야구'를 소재로 한 “YMCA 야구단”을 연출했던 김현석 감독의 작품입니다. 그 영화로 연출 데뷔를 한 김 감독은 애초 “공동경비구역 JSA”와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등의 시나리오를 쓰며 각본가로 영화계에 입문했다가 이후 “광식이 동생 광태”, “시라노 연애 조작단”, “쎄시봉”, “아이 캔 스피크” 등 흥행에도 제법 성공한 작품들을 통해 연출력을 인정 받았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작품성에서 가장 뛰어나다고까지 평가 받는 “스카우트”가 흥행에서는 참패를 면치 못했는데, 이 영화를 사랑하는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분석에 따르면 포스터나 광고 문구에서 “코미디”, “야구 영화” 등의 이미지가 강하게 부각되는 바람에 가벼운 “스포츠 코미디”를 기대하고 봤던 관객들이 그 ‘가볍지 않은’ 주제에 당황하며 벌어진, 홍보상의 패착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연세대 출신이라는 김현석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가 당시 ‘괴물’로 불리던 광주일고 3학년생 “선동렬” 선수를 스카웃하려는 연세대와 고려대의 경쟁을 전면에 내세우며 그 가운데 좌충우돌하는 주인공의 희극적 감성을 부각하다 보니 실제 ‘가치’에 비해 평가절하된 측면이 없지 않지만, 사실 이 영화는 - 5.18 민주화운동 발발 열흘 전(1980년 5월 8일)에 시작된 이야기가 18일 0시 시점에 마무리되도록 맞추어진 시간선(timeline)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 당시의 복잡한 시대 상황으로 어긋날 수밖에 없었던 청춘들의 안타까운 사랑, 무력적 공권력의 행사가 빚어낸 평범한 사람들의 상처 받은 삶 등을 다룬, 상당히 깊이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학교들의 이름은 정확히 언급되지 않지만(그럼에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상황이 설정되어 있지만) 실존 유명 선수/감독의 이름을 명시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할 뿐더러, 그 시절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열광했던 광주 출신 유명 인물에게 실제로 있었을 법한 상황을 이 사건과 연결해 구성한 스토리도 무척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다양한 특징들을 내면에 담고 있기에 역시 하나의 장르 안에만 가두기에는 – “스포츠”, “코미디”, “사회 저항” 등과 같이 – 무리가 있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1980년 봄, 라이벌인 “안암동”과의 경쟁에서 3년 연속 고배를 마셔 온 Y대학 야구부는 그 불명예의 설욕을 위해 당시 가장 큰 유망주로 기대를 모으던 투수 “선동렬”을 영입하기로 결정하고, 책임자인 부장에게 광주로 내려가 무슨 수를 써서든 그를 스카웃해 오라는 엄명을 내립니다. 하지만 고민하는 직속 상관 “부장”을 나몰라라 하며 시위가 한창이던 서울의 최루가스를 피해 밀린 휴가를 몰아 여행을 다녀오려던 야구부 직원 “호창”은, 광주로 내려가던 부장이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하는 바람에 그 중요한 ‘임무’를 대신 떠맡게 됩니다. 무작정 광주로 내려간 호창이 선동렬의 소속 학교인 광주일고를 찾아갔다가 ‘무인도’로 전지훈련을 떠났다는 그를 만날 수 없어 속수무책으로 시간을 보내던 중, 대학 시절 ‘캠퍼스 커플’로 만났지만 어느 날 일방적 이별 통보 후 떠나 버린 옛 연인 “세영”을 7년 만에 그곳에서 다시 만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대학 재학 당시 같은 과(도서관학과) 선후배로 만난 세영은 사투리를 많이 쓰던 광주 출신 학생으로, M.T. 이후 급격히 가까워진 두 사람이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이유 모를 갑작스런 결별 통보를 세영은 호창에게 던지고, 인사불성이 될 만큼 술을 마신 호창이 광주에 있는 그녀의 본가로 찾아가 세영의 일방적 행동이 '예의 없는',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이라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항의하다 “상처 받은 건 우리 딸”이라는 말과 함께 뺨을 맞고 돌아온 것으로 둘의 사랑은 끝을 맺고 말았습니다. 답답하고 고통스럽던 그 이별이 호창의 마음에 커다란 응어리로 남아 있는 만큼이나, 우연히 다시 만난 – 서울의 직장이던 출판사를 그만 두고 낙향해 광주 YMCA에서 강사 일을 하고 있다는 – 세영에 대한 그의 태도는 ‘맺힌’ 부분이 많은 사람의 그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7년 전 세영이 호창에게 보낸 '이유'를 알 수 없는 이별 통보와 그로 인해 만들어진 호창의 뿌리 깊은(해결되지 않은) 앙금, 그리고 그 쓰라린 감정이 7년 후 다시 만난 그들의 관계를 통해 ‘해결’되어 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 영화에서, 열흘 동안 수많은 사건들을 함께 겪으며 영화의 마지막 즈음 그가 깨닫게 된 과거 그녀의 이별 통보 '사유'가 시위 중인 같은 학교 학생들을 해산시키려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던 그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그녀의 실망감 때문이었음이 밝혀지고, 그 사실을 깨달은 호창의 마음 자세는 원망과 분노에서 부끄러움과 자괴감으로 급전환합니다. 그저 잠시 ‘즐기는’ 사이로 자신을 ‘데리고 놀았던’ 것이었나 라고까지 생각하며 배신감과 모욕감을 떨쳐 버리지 못하던 호창이, 그들의 사랑이 그 같은 모습으로 끝나게 된 이유가 자신이 그녀에게 주었던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실망으로 인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이해'하면서 완전히 정반대의 방향으로 마음 자세를 바꾸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런 그의 모습을 보며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이유를 알 수 없는 – 혹은 이유가 이해되지 않는 – ‘버림 받음’이나 부당한 대우에 대해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인간의 본성이, 자신과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합당한 이유를 찾고자 모색하는 자세를 늘 갖게 만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영화 속 호창처럼 스스로에게 가장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이유를 알 수 없던 일에 대한 해답을 얻으며 '인간적 구원'으로 이르는 다행스런 경우도 있겠지만, 대다수 사람들의 보편적 삶에서는 도무지 불명확하던 상황들에 대해 그처럼 명확한 이유가 주어지는 일은 실제로 그다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이해(reasoning)와 납득(convincing)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받아들이려 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숙고를,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아무런 ‘이유 없이’ 받은 구원을 두고도 자꾸 특별한 이유를 찾아 내려 드는 태도에 대한 고찰로 연결하다 보면, “예정론(Predestination)”, “결정론(Determinism)”, “숙명론(Fatalism)” 등의 구분으로도 모자라 “예지 예정”과 “예정 예지”에 “이중 예정”, “절대 예정”까지, 듣기만 해도 머리 아픈 개념들을 만들어 내며 자신의 논리와 이성을 최대한 가동하려 드는 우리의 죄된 본성에의 ‘묵상’으로 이어 가게도 됩니다. 단지 ‘추측’에 불과한 이런 식의 이론을 인간이 자꾸 만들어 내게 된 것은, 어쩌면 “나는 ‘버림’ 받지 않았다, 나는 ‘선택’ 받았다”라는 안도감과 더불어 그 이유를 분명히 밝혀 확인 ‘도장’을 찍어 두고 싶다는 심리에 연유하지 않았을까 감히 유추해 봅니다. 


“나 같은 사람을 대체 ‘왜’ 구원해 주셨을까”에 대한 이유가 어느 누구 못지 않게 궁금했던 저도 seminary 재학 시절 과제물의 주제를 이와 관련된 것으로 정하고 '연구'해 보고자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결국 교수님으로부터 무안만 당한 채 그만두고 만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구원에 대한 이유가 특별히 따로 있고 또 그 이유가 우리의 이해력으로 납득되는 것이라면 속은 좀 시원할지 모르지만, 정말 그렇다면 그런 '신'은 “우리가 헤아려 알 수 없는(beyond our understanding) 하나님(삿 13:18; 욥 36:26; 37:5)”이실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구원해 주셨고, 그 부름에 응답하지 않으려는 이들 역시 끝없는 인내로 기다리시는 것에는 무한한 사랑 외의 다른 어떤 ‘이유’도 없다는 사실을, 머리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일 진정한 은혜만을 구할 수밖에 없겠지요.





세영을 짝사랑하는 ‘동네 건달’ 역의 “곤태”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 방식에의 정답을 배우게 됩니다. 자신을 하루에 몇 번 생각하느냐고 세영에게 물은 뒤 “글쎄요, 서너 번?”이라고 그녀가 대답하자 자신은 세영을 하루에 '딱 한 번만' 생각한다는 뜻밖의 말을 건넨 곤태는, “아침에 눈뜨자마자 생각나서 잠들 때까지 안 그친다”는 감동적인 대사로 '심금'을 울리니까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도 영원히 그와 같은 모습으로 이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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