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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anne Jun 09. 2023

그린 마일: 천국까지 이르는 길

엄마 C의 시선



1999년 제작된 영화 “그린 마일(The Green Mile)”은 많은 이들에게 그 제목부터 익숙할 “쇼생크 탈출(The Shawshank Redemption)”의 연출가와 원작자, 즉 프랭크 다라본트(Frank Darabont)와 스티븐 킹(Stephen King)이 다시 뭉쳐 만든, 러닝타임 3시간의 '장편' 영화입니다. 언제고 한 번은 다루려던 이 작품을 이번에 포스팅하기로 갑작스레 계획 변경을 하게 된 것은 며칠 전 우연히 시청했던 CBS TV “새롭게 하소서”의 출연자 – 최근 방송된 “피지컬: 100”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선한 영향력으로 화제를 모았다는 – “박정호” 교도관의 간증을 들으며 하루빨리 이 공간을 통해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불현듯 '솟았기' 때문입니다. 외모에서부터 신실함이 그대로 묻어 나오고 매 순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최선을 다하는 박 교도관이 자신의 직업에 관한 비전을 두고 고민하던 중 이 영화를 통해 소명을 확신하게 되었음을 간증한 내용을 듣다 보니 안 그래도 저희가 사랑하던 이 작품에 대한 애정이 더욱 확고해지는 느낌이더군요.


1935년 미국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 당시 남부 루이지애나의 “콜드 마운틴 교도소(The Cold Mountain Penitentiary)”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그 가운데에도 사형수들을 관리하는 “E 구역”의 교도관으로 근무하는 “폴 에지컴(Paul Edgecomb)”과 두 명의 소녀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수감된 거구의 흑인 죄수 “존 커피(John Coffey)”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입니다. 폴을 선임 교도관으로 존경하며 그의 말에 잘 따라 주는 다른 동료들과 달리 주지사 아내의 조카라는(사실 “사돈의 팔촌”이라는 말에 더 가까울) ‘권력’을 내세워 교도관으로 근무하면서 악랄함의 극치를 보이고 있는 “퍼시(Percy)”로 인해 문제의 소지가 생기기 시작한 그곳에, 혐의로만 보면 ‘흉악범’이라고 불려 손색없을 존에 이어 정말로 끔찍한 흉악범인 – 임신부를 포함한 세 사람을 살해했다는 – “와일드 빌(Wild Bill)”까지 입소하면서 E 구역에는 온갖 사건들이 쉼 없이 일어납니다.





유난히 크고 엄청난 체격으로 누구에게나 위협감을 주는 외모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심성은 너무나 착하고 순수하며 어린아이 정도의 지능을 보이는 존이 감옥 안에서의 여러 상황들 가운데 나타내는 ‘기적’에 의해 사실은 그가 특별한 능력(치유의 능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오랫동안 앓던 폴의 고통스런 질병을 치료해 주고 퍼시가 밟아 죽인 사형수 “델(Del)”의 ‘반려 쥐’ “징글스(Mr. Jingles)”를 다시 살려 내는가 하면 뇌종양으로 죽어 가던 교도소장의 아내까지 치료하는데, 그런 과정을 통해 죽은 두 소녀는 사실 그가 아니고 와일드 빌에 의해 살해되었음이 밝혀지면서 교도관들 모두 그의 무죄를 확신하게 됩니다. 죽은 소녀들을 제일 먼저 발견한 후 살려 보려고 애쓰던 존이 시간이 너무 지체해 불가능함을 깨닫자 아이들을 안고 울부짖으며 “I couldn't help it!(도와 줄 수가 없었어요)”이라고 했던 ‘중의적’ 표현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라는 의미로 이해한 사람들이 – 부족한 어휘력 때문에 타인을 치료하는 일을 늘 “help”로 표현하는 그의 한계가 이 “help”를 “avoid(피하다)”로 해석되게 하면서 – 그를 범인으로 오인했던 것이지요. 흑인인데다 교육을 받지 못했고 외모까지 위협적인 그를 당시의 백인들이 앞뒤 가릴 것 없이 범인으로 단정했던 것은, 외적 요소를 판단 기준으로 삼는 우리 모두가 범할 수 있는 두려운 실수이기도 합니다.


존의 무죄를 알게 된 - 하지만 자신의 위치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 폴이 “심판의 날 주님 앞에 섰을때 왜 당신의 ‘기적을 죽였느냐고 물으시면 어떻게 답할 것인가”를 두려워하며 우회적으로 탈옥을 권유했을 때 존은 친절을 베풀었다고 말하라”라고 대답합니다. “비 맞은 참새처럼 홀로 떠도는 것, 삶을 나눌 친구가 없다는 것”에 더해 “매일 사람들의 추악한 행태를 보며 세상 속에서 듣고 느끼는 고통에 지친” 자신의 처지를 고백하면서 말입니다. 존의 신비한 초능력을 연거푸 보여 주는 이 영화가 “판타지”의 장르로 분류되기도 하고, 또 아무런 죄 없는 존이 타인의 죄를 대신 지고 처형 당해야 했던 것과 기적적 치유의 능력을 지녔다는 점을 들어 예수님의 표상으로 해석하며 원작자인 스티븐 킹의 종교적 시각이 반영되었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지만, 작가의 개인적 신앙(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 큰 반감을 보이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아픈 사람들을 치유하고 – 육체의 질병을 가진 환자에 대한 '치료'만이 아니라 마음의 상처와 정신적 고통으로 신음하는 이들을 '돌봄'으로써 – 그 아픔을 함께 느끼는 ‘능력’은 특별한 초능력이라기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사랑과 자비의 권능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박정호 교도관도 언급한 사례지만, '다채로운' 전력의 재소자들로부터 얼굴에 침을 뱉거나 음식물을 뿜어내는 등의 기습을 당했을 때 이성을 잃을 만큼 화가 날 수 있는 것은 단지 불결한 것이 몸에 닿았다는 불쾌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존엄이 손상 받았다는 자존감의 위협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 속의 폴과 실제 삶의 박 교도관이 그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참아 넘길 수 있는 '힘'은 늘 뒤에 든든히 버티고 계신 주님이 주시는,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과 자존감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재소자들에게 소리를 질러 대는 퍼시를 향해 이미 충분한 압박감 속에 사는 그들에게 그처럼 행동하는 일의 위험성을 경고하던 폴이 “우리의 임무는 조용한 대화이지 고함치는 것이 아니다(Our job is telling, not yelling)”라고 조언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말이라 여겨집니다. 아무리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중죄인이라도 함부로 다루지 않고 인격체로 대해 줄 수 있는 자세 역시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에게만 허락된 성숙한 태도일 것입니다.


사형수들이 스스로 “스파키(Sparky)”라 부르며 조소를 보내는 사형대(전기의자)까지 이르는 길을 보통 “라스트 마일(Last Mile)”이라고 부르는데, 영화 속의 사형수 감옥 E 구역은 복도 바닥이 초록색이라 그 마지막 길(last mile)을 “그린 마일(Green Mile)”이라고 부른다는 데서 붙여진 것이 이 영화의 제목입니다. 많은 나라에서 사형 제도가 점차 사라지고 있기는 하지만 어쩌면 사형수들에게는 닥칠 시기와 경로가 분명할 이 “라스트 마일”, 즉 죽음까지 이어지는 길이 자신에게 언제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지 불명확한 것은 오히려 교도소 담장 밖의 우리들일 것입니다. 그 길에서 결코 예외일 수 없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 역시, 영화 속 사형수들이 폴과 다른 교도관들로부터 그런 배려를 받으며 걸어갔듯, 우리가 건네는 눈길의 다정함과 마음의 따스함을 느끼며 주님 품으로 평안하게 다가갈 수 있기를, 그럴 수 있도록 우리 모두의 기도와 사랑이 멈추지 않기를, 바라고 꿈꾸는 마음입니다.



딸 J의 시선



1999년도 작품인 [그린 마일]은 이후에 다룰 예정인 [쇼생크 탈출]과 마찬가지로 작가 스티븐 킹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두 작품 모두 ‘감옥’을 배경으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쇼생크 탈출]에서의 간수들 대부분이 우악스럽고 탐욕스러운 인물들로 그려지며 주인공과 다른 죄수들의 영혼을 억압하는 구조적 폭력의 한 요소로 표현된 반면, [그린 마일] 속의 주인공들은 그와 달리 평범하고 온건한, 게다가 '서윗'하기까지 한 교도관들이라는 점이 흥미로운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쇼생크 탈출]에서는 감옥의, 더 정확하게는 ‘교정 제도’의 잔혹성과 비인간성에 대한 회의가 짙게 묻어 나왔다면 [그린 마일]에서는 그에 대해 훨씬 더 복합적인 감정이 엿보인다는 생각이 드는데, [쇼생크 탈출]의 원작 단편 소설은 1982년에, [그린 마일]의 원작 소설은 10년이 훌쩍 넘은 1996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 기간 동안 작가의 관점이 조금 더 성숙해졌음을 은연 중 드러내는 일이 아닌가도 싶다.


내용을 한마디로 짧게 요약하면, 이 영화는 1930년대의 대공황 시절, 미국 남부 교도소 "콜드 마운틴"의 사형수 감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영화의 실질적 주인공인 고참 교도관 "폴(톰 행크스)"은 자신의 ‘오른팔’이라고 할 동료 "브루터스(데이비드 모스)", "해리(제프리 드먼)", 막내 교도관 "딘(베리 페퍼)" 등과 협력하며 사형수들의 마지막 남은 인생을 함께하는 임무를 성실히 수행 중이다. 사형을 선고 받았을 정도의 ‘흉악범’들이 모인 감옥이지만 수감자들을 인정으로 대하는 교도관들 덕분에 나름 조용하고 평온하게 흘러가던 일상은 어마어마한 덩치의(정말 거인 같다) 사형수 "존 커피(마이클 클라크 던컨)"가 수감되면서 예기치 못한 전환점을 맞는다. ‘백인’ 여자아이 둘을 성폭행하고 살인했다는 죄로 사형을 선고 받은 ‘흑인’ 존은 그 끔찍한 죄목과는 달리 무척 유순할 뿐더러 어린아이 수준의 지능을 가졌다는 생각이 들 만큼 순진하고도 어눌하다. 밤에 잘 때 불을 꼭 꺼야 하느냐고 물으며 "어둠이 무섭다"고 수줍게 말하는 모습에 잔뜩 긴장했던 교도관들의 맥이 확 풀릴 정도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던 존이 어느 날 갑자기 폴을 강압적으로 잡아채며 의외의 모습을 드러내는데, 처음엔 버둥이며 저항하던 폴은 몇 개월 간 자신을 끈질기게 괴롭히던 요로 감염증이 씻은 듯이 치유되는 ‘기적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이후 폴은 존의 실제 모습에 대해, 그리고 그런 심성의 사람이 정말 그토록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을지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하고, 폴이나 동료들과는 달리 악독하고 치졸한 교도관 "퍼시"가 밟아 죽인, 사형수 "델"이 애지중지 키우던 쥐(미스터 징글스)를 존이 다시 살려내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꾼다. 폴이 존경하는 상사의 아내 "멜리사"의 불치병(뇌 깊은 곳에 위치한 악성종양)마저 존이 신비한 능력으로 ‘치유’하고 나자, 자신이 그의 사형을 집행한다면 "신의 진실한 기적"을 죽이게 되는 셈이라는 생각에 폴은 큰 갈등과 괴로움을 느낀다.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교정 제도의 ‘비윤리성’을 신랄하게 파헤친 [쇼생크 탈출]과는 달리 수감, 교화, 사형 등등 현 사회에 존재하는 형사사법제도의 핵심 요소들을 복잡미묘한 시선으로 다루고 있다. 일단 영화에 등장하는 사형수들이 주로 흑인, 외국인, 미국 원주민과 같이 소수집단의 일원이라는 설정이나, 백인에게(특히 ‘백인 여성’에게) 위해를 가했다는 누명을 쓴 ‘흑인 남성’의 표본이라 할 - [앵무새 죽이기]와 최근 다시 화두에 올랐던 "에멧 틸 피살 사건"을 연상시키는 - 존을 보고 있자면 힘없고 소외된 자들에게만 죄를 묻는 듯한 사회의 편견과 제도적 억압에의 씁쓸함이 느껴진다.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교도관이 선하고 ‘좋은’ 사람들이라는 사실도 그들이 ‘업무’의 한 부분으로 사형을 집행하는 장면에서 더 큰 괴리감을 불러일으킴과 함께 말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정의 구현’의 필요성, 그러니까 자신이 저지른 죄의 ‘귀결’을 감당해야 하는 '의무' 또한 시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 속에서 사형을 당하는 수감자는 존 외에도 두 명이 더 있지만 관객들에게는 끝까지 그들의 ‘죄목’이 알려지지 않는다. 그들이 과연 ‘죽음에 합당한’ 죄를 저질렀는가에 대한 판단 자체를 할 수 없이 그들의 죽음을 당연한, 혹은 불가피한 전제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사형장으로 그들을 인도하는 교도관들 역시 수감자들과 쌓은 인간적 관계 때문에 안타까움을 보이는 것과는 별개로 큰 흔들림 없이 자신들의 의무를 수행해 낸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이 작품을 사형 제도 같은 특정한 체제에 대한 찬성이나 반대의 의미로 해석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하고, 그것이 오히려 더 영화의(또 원작자의) 깊이와 가치를 나타내는 점이 아닌가도 여겨진다. 이 영화가 탐구하는 주제는 ‘사형’이 혹은 ‘처벌’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일차원적 논쟁을 넘어 - 물론 그것이 아주 중요하며 꾸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문제임은 분명하지만 - 우리가 이 불안정하고 잔혹한 세상에서 ‘정의’와 ‘질서(order)'를 이루기 위해 더듬더듬 서툴게 나아가는 동안 ‘잊지’ 않고 ‘잃지’ 말아야 할 본질에 대한 추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이 영화를 다시 보는 내내 사형 집행 용 전기의자에 앉은 사형수의 머리에 교도관이 얹는, 물에 젖은 ‘스펀지’가 눈에 들어왔는데, 사형수들이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사망에 이르도록 '돕는(전기를 전도함으로써)' 이 물체가 예전과 달리 ‘효율성’의 기구가 아닌 ‘자비(mercy)'의 도구로 느껴져서였다. 스펀지를 물에 흠뻑 적셔 사형수의 머리 위에 올려 놓는 행위가 "세례"와 비슷한 의식으로 보이면서, 죄를 사면하고 감옥에서 풀어 주는, 그러니까 목숨과 자유를 되돌려 주는 것(사실 예수님 밖에 하실 수 없는 일인)만이 ‘자비’이고 ‘긍휼’이라고 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죄를 지었으면 그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 마땅할지언정, 누구라도 그 고통스런 과정 속에서 ‘물에 젖은 스펀지’ 정도의 자비와 사랑은 받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시사였을지도.





사실 이 영화에 대해서는 할 말이 너무 많아 이 글에서 일일이 다 다룰 수 없음을 밝혀야 할 것 같다. 너무 수박 겉핥기 식으로 넘어가는 듯하기에 아쉽지만 영화를 보며 떠올랐던 생각을 한 가지만 더 언급하고 싶은데, 신비로운 힘을 지닌 존 커피가 누군가를 ‘치유’하는 방법이 그들의 고통과 질병을 ‘흡수’하는 것이라는 부분이다. 시각적으로는 존이 병든 폴과 멜리사, 죽은 미스터 징글스의 몸에서 무언가를 ‘넘겨 받은’ 뒤, 날파리 떼 처럼 보이는 불길한 무언가를 다시 토해 내는 것으로 영화 속에서 그려진다. 성경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치유 방식과도 맞닿아 있을 뿐더러, 존이 치유의 기적을 행한다는 설정 자체가 그를 예수님의 ‘상징’으로 보이게도 한다.


하지만 이번에 영화를 보면서는 존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께, 혹은 대신 느낌으로써(다시 말하면 ‘공감’하고 나눔으로써) 그들을 치유한다는 설정에 보다 더 집중하게 되었다. 우리 모두에게 죽은 쥐를 되살려 내거나 악성종양을 없애 버리는 초자연적 능력은 없겠지만, 상대의 고통과 상실을 ‘나의’ 것처럼 깊이 공감하고 함께 느낀다면 그를 통해 영적 ‘치유’가 이뤄지는 ‘기적’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 힘은 존에게 버겁고 고통스러운 짐이기도 하다. 그의 신비로운 힘(어찌 보면 지나치게 발달한 공감 능력) 때문에 그는 매 순간 사회에 만연한 불행, 고통, 죄와 증오를 느끼고 아파하게 된다. 자신이 "너무 지쳤다(I’m tired, boss. Dog-tired)"는 말을 반복하던 그가 오히려 사형을 통해 그런 삶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음을 기꺼워하는 모습이 충분히 이해되는 이유이다.





인권 변호를 하고 싶다는 '호기로운' 패기을 안고 로스쿨에 진학했던 당시도 더불어 기억났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고 믿었고 - 여전히 그렇다는 생각은 한다 - 나름의 정의감과 긍휼심, 세상에 대한 사랑을 가득 안고 출발한 길이었지만 실제로 3년 내내 그와 관련된 일과 공부를 하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소외된 공동체들 속에 내 자신을 계속해서 던지다 보니 나중에는 사람들의 아픔과 세상의 불의에 공감하고 감응하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게 느껴졌었다. 여전히 인권 보호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지만 그 당시 느꼈던 무력감과 탈력감은 지금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그때 깨달았던 듯하다. 다시 그 사랑을 회복하는 여정 중에 있음에도 아직 상대의 고통에 공감하며 고난을 나누는 일에 주저할 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존이 ‘죽음’ 직전 전기의자에 앉아서도 오히려 “heaven, I'm in heaven”이라는 노랫말을 흥얼거리는 것도, 그 모습을 지켜보던 폴이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하는 것도 더욱 씁쓸하게 다가왔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남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결국은 그 마음이, 하나님을 닮은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 죽어 가도록 놔두는 모습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존 커피는 사형을 당하고, 폴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 넘겨 받았던 존의 ‘신비로운 힘’으로 인해 생명이 지나치게 연장되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아주 긴 삶을 살아가게 된다. 폴은 이것을 "신의 기적"인 존의 죽음을 방조한 자신이 받은 ‘저주’라고 표현하지만 이번에 영화를 보면서는 우리가 우리의 영혼 안에 내재된 하나님의 마음과 그 사랑을 소멸시킨 결과로도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원했던 ‘천국’에 결국 다다른 존과 달리 폴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곳에 이르지 못한다. 세상을 사랑하고 공감함으로써 받을 고통과 상처가 두려워 그런 '사랑’을 잊고 잃은 우리 또한, 자신의 그 선택 때문에 이 세상에서 천국을 경험하지 못한 채 떠돌고 있는 것은 아닐지.



* 마지막 소원을 묻는 폴에게 존은 “활동사진(flicker show)”이라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말하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안쓰러운 표정의 교도관들과 함께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영화 감상 시간을 갖습니다. 그리곤 뮤지컬 영화 “톱 햇(Top Hat)”의 한 장면, 사랑에 빠진 주인공이 춤을 추며 부르는 “여기가 바로 천국(I'm in Heaven)”이라는 노래(Cheek to Cheek)가 스크린 가득 울려 퍼지지요. 존이 사형을 받기 직전 읊조린 노래가 바로 이 곡입니다.


https://youtu.be/uGzl6RG-8i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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