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J의 시선
나이가 들수록, 세상을 좀 더 경험할수록 ‘웃음’의 중요성을 통감하게 된다. 고통스런 상황에 처했거나 영혼에 상처를 입을 만한 사건이 생겼을 때 우리의 마음을 보호해 주는 심리적 방어 기제로서의 ‘웃음’ 말이다. 여기에서의 웃음은 “sense of humour(유머 감각)"에서 비롯된다기보다 “sense of the ridiculous(우스꽝스러움을 즐길 수 있는 감성)”에 근거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듯 하다. 이 혼돈의 세상 속에서 대부분 별 이유 없이 일어나는 여러 문제와 고난들 특유의 ‘어이 없음’, ‘황당함’, ‘터무니 없음’을 받아들이며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여태껏 영화 [패치 아담스(Patch Adams)]에 굉장히 긍정적인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어렸을 때 본 작품이지만 따뜻하고 다정한 영화라는 이미지가 남아 있었고, 몇몇 장면들은 지금도 가끔씩 떠오를 만큼 아름다운 데다가, 몸의 병으로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는 의료 서비스 같은 실질적 도움뿐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살피고 어루만지는 '포괄적' 치료가 필요하다는 영화의 메시지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이 작품을 다시 본 후에는 예전과 감상이 많이 달라졌음을 느끼게 되었는데, 어렸을 때 감명 깊게 봤던 영화를 어른이 되어 다시 본 뒤 실망하게 되곤 함을 언급한 적이 몇 번 있듯 이번에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다. 영화의 줄거리를 이야기하기 전에 그 부분을 잠시 짚고 넘어가자면, 실화에 바탕을 둔 이 작품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한 주인공 "헌터 ‘패치’ 아담스"는 1945년에 태어나 지금까지 의사, 강연자, 작가, 사회 운동가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실존 인물이다. 다만 1998년에 개봉한 이 영화에 대해 실제 패치 아담스가 꽤나 비판적이었으며, 영화가 흥행을 위해 자신의 삶과 철학을 지나치게 단순화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를 굳이 ‘실화’와 비교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이 글은 실존 인물이 아닌, 영화에서 표현된 버전의 패치 아담스에 대해서만 다루고자 한다.
영화는 주인공 헌터 아담스가 정신 병원에 입원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작품 속의 그는 불행한 가정 환경에서 태어나 고질적인 우울증을 앓고 있던 인물로, 여러 번의 자살 시도 끝에 스스로 병원으로 찾아온다. 길을 잃고 표류하듯 지치고 외로운 그이지만 왠지 내면 깊은 곳에는 어떤 불꽃, 혹은 ‘반짝임’이 숨어 있는데, 이것은 결국 정신 병동의 암울함도 억누르지 못하는 장난끼를 통해 발현된다. 주위 환자들에게 연민을 갖고 그들을 웃게 만들면서 "패치"라는 별명까지 얻게 된 그는, 어느 날 밤 환각을 보는 자신의 룸메이트와 있지도 않은 ‘다람쥐’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며 룸메이트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사실 관객이 보기에는 ‘원맨쇼’ 그 자체로, 코미디 연기의 대가인 로빈 윌리엄스의 저력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패치는 그 일을 계기로 어떤 희열과 사명감을 발견하며 새로운 목표를 찾게 되는데,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을 ‘웃게’ 해 주고 싶다는 - 것이 곧 그의 목표이다.
버지니아 의과대학에 입학한 그는, 학생들 내부의 ‘인간성’ 제거를 통해 완벽한 의사로 만들어 내겠다며 군인처럼 딱딱한 태도를 취하는 학장 "월콧"과,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온 오만한 룸메이트 "미치(필립 세이모어 호프만)"로 대변되는 의대의 엄숙한 분위기가 자신과 맞지 않음을 곧 깨닫는다. 하루빨리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열정으로 가득한 패치는 3학년이 되어야 환자를 만날 수 있다는 학칙에 답답함을 느끼고, 의대의 부속 병원에서 환자들을 몰래 만나며 특유의 유머 감각과 다정함으로 환자들의 마음을 달랜다. 이 사실을 들킨 그는 학교 측으로부터 몇 번이나 경고 조치를 받지만, 단념하기는 커녕 마음이 맞는 의대생 친구들과 함께 산 속의 허름한 오두막을 개조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 진료소를 세우기까지 한다.
어렸을 때는 분명 주인공의 이 거침없는 행보가 무척 고무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은데 '머리가 조금 크고 난' 지금은 어쩐지 지나치게 대책 없는 인물이라는 생각부터 먼저 든다. 물론 1970년대 당시의 의료 서비스와 환자 대응 방식이 지나치게 경직되고 비인간적이었다는 것,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는 의료 보험 제도에 더욱 심각한 결점들이 존재했으며 가난한 환자들에게 큰 부담을 지웠다는 등의 문제는 충분히 이해한다. 환자의 ‘질병’을 고치는 일뿐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는 데에도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주인공의 주장에도 물론 동의하고 말이다. 실제로 패치 아담스 같은 인물들의 활약 덕분에 환자들의 처우나 의료진의 인식에 의미 있는 개선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투병하는 어린이들의 소원을 들어 주는 “Make-a-Wish Foundation” 같은 단체들이 생긴 일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또한 패치가 사실상 죽음만 기다리고 있다고 할 병원 안의 환자들에게 창의적인 방법으로 '기쁨'을 선물하는 장면들은 상당히 아름답다. 마지막으로 사파리 여행을 소원하던 모험가 출신 노인에게는 풍선으로 만든 동물들을 고무줄 총으로 마음껏 쏠 수 있도록 해 주고, 암 투병 과정에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아 성미가 고약해진 환자에게는 오히려 '죽음'에 대한 여러 동의어를 제시하며 곧 다가올 생명의 끝을 직시함으로 마음의 문을 열게 하는 등,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인격체로 존중하며 소통할 때 일어날 '기적'의 가능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영화가 지나치게 단순한 구조를 취함으로써 – 실제 패치 아담스의 비판처럼 – 작품의 메시지를 얄팍하고 진부하게 만들었다는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이 영화의 소재는 환자를 인격체로 다루지 않는 의료진, 정신 질환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 가난한 이들에게 특히 잔혹한 의료 제도 등등 여러 복잡하고 다양한 주제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이에 대해 심도 있는 고민을 하거나 질문을 던질 생각은 없어 보인다. 냉정하게 말할 때 "웃으면 복이 와요" 정도의 메시지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이러한 측면은 영화의 후반부에 특히 두드러진다. 패치와 연인이 된 같은 반 여학생 "캐린(모니카 포터)"이 그들의 무료 진료소에 찾아오던 정신 질환 환자에 의해 살해 당한 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의사 면허증 없이 진료소를 운영한 것이 발각되며 패치는 월콧 학장에게서 퇴학 통보를 받는다.
캐린의 죽음으로 괴로워하며 진료소 일을 그만 둘 생각까지 했던 패치가 다시 병원으로 돌아오고, 퇴학 조치에 항소를 제기하여 결국 승리하기도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가 뭔가를 배우거나 깨달음을 얻으며 ‘성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무리 좋은 의도였다지만 3학년도 되지 않은 ‘초짜’ 학생이 환자를 진료했다는 무책임은 너무 쉽게 용서가 되고(환자들에게 가진 깊은 연민과 사랑의 마음만으로 모든 것이 용서될 수는 없음에도), 당신들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나는 반드시 의사가 될 것이라는 그의 선언도 감동적이라기보단 너무… '진상'스럽지 않나 싶다. 이 장면들 때문에 로스쿨 1학년 당시 교수님들로부터 누누이 들었던, 이제 법률 지식이 조금 생겼다고 교만해져서 주변에 법적 조언 같은 걸 하고 다닐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던 경고도 떠올랐고 말이다. 비유해 보자면 로스쿨 1, 2학년 학생이 무료 법률 사무소나 클리닉을 차린 것과 비슷한 상황인데… 상상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하다.
이 작품의 아쉬운 점(어렵고 불편한 주제는 대충 뭉뚱그리고 넘어가려는 듯한)의 근간은 흥미롭게도 영화 속의 한 대사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캐린에게 끈질기게 구애하는 영화 초반부, 의대에 입학한 이유를 그녀에게 설명하던 패치는 남을 도움으로써 스스로의 문제를 '잊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나에겐 상당히 심각하게, 또 안타깝게 다가오는 대사였다. 남을 도움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받아들인다거나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된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잊게’ 된다니. 본질적인 해결보다는 일시적이고 의도적인 ‘망각’에 중점을 둔다는 점에서 이게 과연 건강하거나 지속 가능한 태도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그 대사를 듣고 난 후부터는 환자들을 웃게 하려는 패치의 노력마저도 조금은 강박적으로 느껴졌다. 언제나 ‘망각 모드’를 켜 놓고 있는 듯한, 그러니까 항상 남을 돕고 웃기는 일에 신경을 쏟음으로 자신의 속내와 어둠을 ‘잊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모습은 아닐까 싶어서이다.
이런 의문은 "로빈 윌리엄스"라는 배우 자신에 대한 고찰로도 이어졌다. 나는 로빈 윌리엄스를 무척 좋아하며 그가 뛰어난 배우이자 희극인이라는 데에 이견이 없지만, 개인적으로 가끔은 그의 코미디 스타일에서 ‘투 머치’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발언이나 행동의 수위가 선을 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오버’스럽다고 표현할 정도로 그가 지나치게 노력을 하는 것으로 느껴졌다는 의미이다. 영화에서 사용된 표현인 "excessive happiness", 즉 "과도한 행복"과도 맥이 닿는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사실 나는 로빈 윌리엄스를 생각할 때마다 그를 ‘스타’로 만들어 준, 폭발적인 에너지의 코미디 연기보다는 [죽은 시인의 사회], [굿 윌 헌팅]에서의 그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어딘가 염세적인 듯한 피로함이 아로새겨진 표정 안에서도 따뜻한 눈빛을 잃지 않는, 주변 사람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끔찍한' 세상 가운데 웃음을 찾는 노력을 '차마' 멈추지 못하는, 조용하고 잔잔한 역할 속에서의 그의 연기가 가장 뛰어나고 그것이 그의 본모습에 제일 가깝지 않았을까 감히 추측하는 것이다.
이 배우의 마음과 생각, 투쟁과 몸부림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또한 자신 안의 어두움을 ‘잊을’ 수 있는 방식으로 코미디를, 남을 웃게 하는 직업을 택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남에게 기쁨을 주는 일에 자신을 쏟아 부었지만 그것이 진정한 치유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며 더욱 고통스럽진 않았을지. 그렇기에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함으로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나간 그를 생각할 때마다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을 궁극적으로 치유하지 못하는, 문제의 본질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웃음은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인간을 진정으로 웃게 할 수 있는 힘, 다시 말해 고통을 ‘웃어 넘기며’ 승화시킬 수 있을 만큼의 심적 여유와 능력이 부재할 때의 웃음은 또 얼마나 불완벽한 도구인가.
그렇게 보면 내가 이 영화에서 느끼는 '부족한' 점들은 감독의 역량이나 각본의 수준에서 생겨난 문제점보다는 - 물론 [브루스 올마이티], [라이어 라이어], [에이스 벤츄라], [너티 프로페서]등 B급 감성의 코미디로는 꽤 ‘전설적’인 작품을 연출해 왔다고 해야 할 감독 톰 새디악이 막상 ‘웃음’의 중요성을 다루는 [패치 아담스]에서 웃음에 대한 가벼운 철학을 드러낸 듯해 의외이긴 하지만 - 본인의 힘과 의지만으로 숨구멍을 찾으려 애쓰는 인간의 노력 자체에서 오는 결함과 한계에 기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마음 안에 까맣게 곪아 있는 외로움과 분노, 억울함과 불이해가 해결되지 못했을 때, 자신의 삶에 어떤 선한 목적이 있으며 자신보다 거대하고 완벽한 누군가의 세심한 이끌림으로 향해 가고 있다는 확신이 없을 때, 나 자신도 외면하고픈 내 안 깊은 곳의 어두움과 비틀림마저 이해하고 사랑해 주는 존재가 있다는 안정감과 안도감이 없을 때, ‘웃음’마저도 그저 인간의 무의미한 몸부림 중 하나로 전락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웃는다 해도 ‘행복’에, 그리고 ‘평안’에 다다르지 못함을 깨달을 경우 그 절망은 배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의미한 웃음, 평안과 안정에 기반을 둔 ‘진정한’ 웃음으로 우리가 축복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남의 웃음, 타인의 행복을 위해 본인의 영혼을 불사르다 결국 외로운 끝을 마주하지 않았을까 싶은 다정한 배우 로빈 윌리엄스가 글을 쓰는 내내 안쓰럽다. 속이 꽉 찬, 힘이 가득한 우리의 웃음이 공허한 미소로 가장된 주변인들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길 소망한다. 빈틈없는 사랑을 받는 자 특유의 당당한 웃음으로 세상의 외롭고 고단한 이들에게 진정한 행복과 희망을 전할 수 있기를. 영화 속의 주인공이 그랬듯 절벽 끝에서 머뭇대는 그들이, 우리가 내민 손을 잡고 따뜻한 햇살 속으로 나아올 수 있기를.
엄마 C의 시선
영화 “패치 아담스(Patch Adams)”는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해 1998년 개봉되었던 영화로, 실재 인물인 헌터 도허티 아담스(Hunter Doherty Adams)라는 의사의 특이한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보여 주는 내용에 따르면, 한때 정신 병원에 입원했던 헌터가 당시 그 병원 환자이던 유명 인사 아더 멘델슨(Arthur Mendelson)의 방을 방문했을 때 뭔가 복잡한 공식을 쓰며 연구 중이던 그의 책상 위에 놓인 종이컵이 새는 것을 보고 컵 바닥에 테입을 붙여 준 이후 “패치(Patch)”라는 별명이 붙은 것으로 소개됩니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이 스토리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한 헌터 아담스를 “Wikipedia”에서 찾아 보면 “의사”라는 본업 뒤에 “작가”라는 '부업'이 덧붙여짐은 물론, “코미디언”, “사회 운동가”, “광대(clown)”라는 직함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명실공히 남다른 이력을 소유한 인물이라고 칭해도 무방할 듯합니다.
소위 성공했다는, 유명 영화들 가운데 실화에 바탕을 둔 작품들이 적지 않은데, 물론 '성공 스토리'에 열광하는 헐리우드적 화법 때문에 그런 소재들이 영화로 자주 제작된다는 이유도 들 수 있겠지만, 그뿐 아니라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가공의 이야기보다는 아무래도 실재하는 인물들의 삶을 통해 전달되는 감동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크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있어 흥행이나 작품성의 면에서 부각되곤 하기 때문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화의 줄거리를 아주 간략히 요약하자면, 불행한 가정 환경에서 성장하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자살 시도까지 했던 “헌터”가 스스로 입원한 정신 병원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삶에의 소명, 그리고 그 일에 뛰어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 후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의대에 들어가 공부를 하며 겪게 되는 여러 일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몸담은 의대 부속 병원 환자들을 특유의 유쾌함으로 돌보면서 환자는 물론 그 가족과 간호사들로부터도 인정을 받고, 짝사랑하던 같은 과 여학생 “캐린(Carin)”과의 사랑이 어렵사리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자격이 되지 않는 신입생의 입장에서 환자를 돌본 사실이 발각되며 퇴학을 당할 위기에 처하고, 사랑하던 캐린이 정신 질환자로부터 살해되는 일 등을 겪으며 얻은 절망감으로 잠시 병원을 떠났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마침내 맞는 졸업식으로 영화가 마무리됩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자막으로 소개되듯 졸업 이후의 그가 15,000명이 넘는, 병원 문턱을 넘기 어려운 환자들을 무료료 치료했고, “패치 운동(Patch’s cause)”에 동참하기 위해 대기 중인 의사만도 1,000명 이상이라는 사실(영화 개봉 당시)로 보면 당시로는 상당히 획기적인 발상과 기획을 했던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할 만함이 사실인 만큼이나, “헌터 아담스”라는 인물의 실제 삶에 비해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희화화된 방식의 묘사가 이루어졌다는 비판 때문에 영화에 대한 평가도 크게 갈리게 된 것 또한 사실이기에, 이번 글에서는 영화의 전체적 의미나 작품성보다는 저에게 인상 깊었던 – 지엽적인 부분일 수도 있겠지만 – 장면들을 중심으로 몇 가지 측면을 짚어 볼까 합니다.
첫째는 헌터의 의과 대학원 입학 직후 학장인 “월콧(Walcott)”이 신입생들을 모아 놓고 했던 연설 내용과 관련한 부분인데, 인간을 믿지 못할 존재라면서 “실수하고 거짓말하고 겁 많고 쉽게 싫증 내고 지름길을 택한다”고 성격 규정한 월콧은 학생들로부터 ‘인간성(humanity)’을 제거하여 '진짜 의사’를 만들어 주겠다고 호언합니다. 물론 인간이 믿거나 의지할 만한 대상이 못 되는 약하고 악한 존재라는 것은 성경에서도 지적하는 바이기에 크게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만, 영화에서도 풍자되었듯 환자와 상담하며 눈도 맞추지 않는 정신과 의사의 옅은 미소조차 찾기 어려운 사무적 태도나, 의대 교수가 학생들을 데리고 회진하면서 환자의 질병에 대해 설명할 때 '생생한' 표현을 직접 들으며 두려워 떨고 있는 눈앞의 환자를 전혀 개의치 않는 양 – 마치 나무 토막 하나가 옆에 있기라도 한 양 –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 서글픈 마음이 절로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화적 설정이고 극적 과장이 포함되었다고 넘겨 버리기엔 우리의 실제 삶에서도 드물지 않게 경험하는, 환자는 고장 난 기계이고 의사는 그 고장 부위를 고치는 기술자(technician)라고 여기는 듯한 의료 현장의 분위기를 씁쓸한 마음으로 되돌아 보게 되니 말입니다.
영화 속에서 헌터가 환자들을 대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그려졌다고 느끼며 그렇게 단순할 수만은 없는 인간의 실제 삶을 이 작품에서 너무 단편적으로 그린 것이 아닌가 싶다가도, 의사 '가문'에서 성장했다는 자부심과 자만심으로 헌터를 무시하며 동시에 질투했던 기숙사 룸메이트 “미치(Mitch)”가 캐린의 사망 후 회의에 빠져 병원을 떠나려는 그를 붙잡으며 하는 말인, 스스로 완벽한 의학적 지식을 가졌고 누구 못지 않게 유능하다고 자부하는 자신임에도 삶의 의욕을 잃고 식사를 거부하는 환자에게 음식을 먹도록 만들 수는 없음을 인정하는 내용을 듣다 보면, '사람'을 다루는 일인 치료는 역시 의학적 지식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님을 새삼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로는 캐린이 사망한 후, 자신의 미래 계획을 알려 주기 위해 그녀를 데리고 갔던 계곡으로 다시 찾아간 헌터가 하나님을 향해 “내게서 무엇을 원하는 거냐”고 따지면서 “당신은 인간을 창조했지만 그들은 고통 속에 살다 죽을 뿐이니 인간에게 좀 더 연민을 가져야 하지 않나”라며 항의성 질문을 던지는 부분인데, 대답 없는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그런 행동이 아무 의미 없다는 듯 포기한 표정으로 돌아선 헌터의 눈에 훨훨 나는 나비 한 마리가 들어오는 장면도 의미심장합니다. 캐린이 죽기 얼마 전, 그러니까 헌터가 에둘러 사랑을 고백했을 때 그녀는 자신이 어린 시절 겪은 성폭행을 간접적으로 언급하면서, 때때로 창밖의 애벌레를 보며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고, 과거의 모습이 어떻든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날아다닐 수 있는 그들을 부럽게 느꼈다고 말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를 연출한 “톰 새디악(Tom Shadyac)”은 코미디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Bruce Almighty)”의 각본과 연출 역시 담당했던 감독으로, 헌터의 '항의' 후 나비가 등장하는 장면을 보는 동안, 그 영화에서 “짐 캐리(Jim Carrey)”가 연기했던 주인공 “브루스”가 하나님에게 가시적 '사인(sign)'을 요구하자 하나님께서 '삐삐(beeper)' 문자로 그의 주목을 끌고자 애쓰시면서 도로 위 간판이나 표지판의 문구를 통해서도 계속 '사인'을 보내시는 장면이 연상되더군요. 코미디 장르이기에 상당히 과장되게 그려진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는 그것을 사인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브루스가 “Send me a sign”, “Give me a signal”이라고 계속 외쳐 대지만 말입니다. 다행히 “패치”는 “브루스”와 달리 하나님의 '응답'을 알아들은 듯한데, 아마도 이런 장면은 기독교인임을 공언하는 새디악이 그처럼 '징조'와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을 보며 평소 느꼈던 안타까움 때문에 영화에 포함시키게 된 내용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 등장하는 헌터의 독백 중 모든 사람들이 “집”으로 향하고 있는데 자신만은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면서 “집(home)”에 대한 사전적 의미인 “근원지, 시작 장소(the place of origin)”, 그리고 동시에 “목표(goal)이자 목적지(destination)”라는 정의를 제시하는 부분도 흥미롭습니다. “단테”의 “신곡 (La Divina Commedia)” 가운데 한 구절로 인용된 “인생의 행로 한가운데서 어두운 숲속에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른 길(the right path)”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라는 대사에서는 궁극적으로 돌아갈 “집”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어두운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얼마나 목적지 없이 떠돌 수밖에 없는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이 영화를 촬영할 당시에는 감독도, 또 배우들도 짐작조차 못했겠지만 헌터 역을 맡았던 배우 로빈 윌리엄스(Robin Williams)와 룸메이트 미치를 연기한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Philip Seymour Hoffman)이 각각 자살과 약물 중독으로 같은 해(2014년) 사망한 사실 역시 위의 독백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귀결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들 삶의 구체적 상황을 타인이 알 수도 함부로 판단할 수도 없겠지만, 그의 죽음을 기억할 때마다 한때 한국에서 “행복 전도사”로 유명했던 분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일도 함께 떠올리게 되는, 밝은 표정과 유머 감각을 트레이드 마크로 삼던 로빈 윌리엄스의 경우나, 헐리우드의 그 누구보다 ‘야망’이 컸다고 평가되는 필립 호프만의 죽음을 되짚다 보면, 삶의 끝에서 돌아갈 분명한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불안정한 인생의 위태로움 또한 이 영화를 생각할 때 함께 떠오르곤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