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anne Jul 22. 2023

플란다스의 개: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

엄마 C의 시선



유명한 명작 동화의 제목을 빌려 온 바람에 많은 이들에게 혼동을 주곤 하는 한국 영화 “플란다스의 개”는, “세계 수준의 거장”이라는 타이틀이 전혀 무색지 않게 된 봉준호 감독이 연출한 첫 장편 영화, 즉 상업 영화 데뷔작입니다. 지금이야 봉준호 감독이 칸느와 오스카의 주요 부문에서 상을 휩쓴 ‘월드 클래스’ 연출가로 인정받고 있지만 이 영화가 개봉된 2000년 당시만 해도 이름을 아는 이조차 별로 없는 무명 감독에 불과했고 특히 이런 성격의 블랙코미디에 대한 관객들의 인식 역시 부족했기에 서울 관객 5만 7천에 그친 '비주류' 작품으로 남게 되었습니다(“지구를 지켜라”, “고양이를 부탁해” 등과 함께 “저주 받은 걸작”이라 불리기도 하지요). 영화 제목을 기존의 동화 제목에서 차용한 이유에 대해 여러 설들이 무성하지만, 영화 초입부 노래방에 간 주인공이 오래전 상영된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 주제곡을 부른다는 것 외에 원작과의 별다른 연관성은 없기에, 다양한 개들이 줄곧 등장하고 “개”라는 소재가 중심인 영화의 성격과 관련된 특이하고 재미있는 제목을 떠올리다가 가장 기발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골랐을 '뿐' 아닐까 하는 것이 저의 개인적 추측입니다.


영화의 막이 오르자마자 “본 영화에 출연한 강아지들은 담당 관리자와 전문 의료인의 입회하에 안전 관리 되었습니다”라는 자막을 배경으로 한 ‘앙칼진’ 강아지의 짖는 소리가 들려오면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하게 만드는 이 영화는, 남녀 주인공인 “윤주”와 “현남”을 주축으로 – 그렇다고 연인 관계는 결코 아닌 – 한 아파트 단지 안에서 벌어지는, 세 마리의 개를 둘러싼 온갖 해프닝을 그리고 있습니다. 인문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기 위해 자리를 찾고 있으나 현재는 임신한 아내가 직장에서 벌어 오는 돈으로 눈치를 보며 살고 있는 “고윤주”가 남자 주인공이고, ‘여상(여자 상업 고등학교)’을 졸업한 후 그가 사는 아파트 관리 사무소에서 경리로 근무하는 “박현남”이 여자 주인공입니다. 두 주인공의 이름과 직업을 통해 사람들의 보편적 상식을 비틀기 좋아하는,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보이지 않는 ‘계급’을 화두로 삼곤 하는 봉 감독의 디테일이 감지된다고 하겠습니다.





세 마리의 ‘출연견’ 중 맨 처음 등장하는 개는 시추 “삔돌이”로, 안 그래도 출신 대학 전임강사 자리를 놓친 후 신경이 곤두서 있던 현주가 시끄럽기 짝이 없는 개 짖는 소리에 짜증을 내다 '그 개'를 우연히 마주치고는 아파트 지하 보일러실에 넣어 두었는데 - 죽이려고 마음먹었으나 차마 실행은 못하고 - 경비원 “변씨”가 발견해서 잡아먹어(너무 충격 받지는 마시기를!) 버립니다. 강아지를 분명히 가둬 두고 왔는데도 계속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에 놀란 현주는 삔돌이를 잃고 상심한 소녀가 아파트 곳곳에 붙여 둔 벽보를 보고서야 자기가 가뒀던 시추는 성대 수술을 받아 짖지 못하는 상태였고 그토록 시끄럽게 짖던 애는 다른 강아지였음을 알게 되지요. 혼자 사는 할머니가 키우는 두 번째 등장견 치와와 “아가”가 바로 그 개로, 다시 짜증을 참지 못하게 된 윤주는 할머니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곤 아가를 훔쳐 와 옥상에서 떨어뜨립니다(역시 너무 놀라지 마시기를… 사실은 던집니다). 세 번째의 출연견은 뜻밖에도 윤주 자신의 개인데, ”1500만 원”의 뇌물만 학장에게 주면 전임강사 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남편을 위해 퇴직금을 '투자'하기로 한 아내 “은실”이 그 금액 중 남은 돈을 들여 사오면서 얼떨결에 그의 개가 된 푸들 “순자”입니다.


한편, 강도를 맨손으로 ‘때려 잡은’ 은행 여직원이 포상되는 장면(실제 있었던 사건인)을 뉴스에서 보며 자신도 그처럼 정의로운 일을 하는 것을 꿈꾸게 된 현남은, 아파트 단지 내 문구점에서 일하는 친구 “장미”와 옥상에 올라가 망원경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맞은 편 건물 옥상에서 아가를 던지는 윤주를 목격하고(얼굴은 보지 못하고) 그를 추격하지만 결국 잡지 못합니다. 나중에 순자를 잃어버린 윤주가 개를 찾아 헤맬 때 그의 '정체'를 모른 채 함께 다니며 벽보 붙이는 일을 돕는 아이러니도 발생하지요. 아가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돌아가신 할머니가 그녀에게 남긴 것이라며 전해진 봉투에서 – 큰돈이 들어 있을 것으로 모두가 기대한 – 옥상에 널어 둔 무말랭이 가져다 먹으라는 ‘유언’을 보고 옥상에 올라갔던 현남은, 순자를 잡아먹으려던 부랑자 “최씨”를 발견하고 우여곡절 끝에 개를 구해 윤주에게 돌려줍니다. 아내가 준비해 준 1500만 원 든 케잌 상자를 학장에게 건넨 후 마침내 전임강사 자리를 차지하게 된 윤주가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모습과 대비되어, 일 처리가 허술하고 자주 자리를 비운다며 “너 말고도 경리할 애들 쌔고 쌨다”는 말로 관리 사무소에서 해고 당한 현남이 장미와 함께 산에 오르는 장면으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영화의 시작과 끝 부분에서 뒷모습의 현주가 신록 울창한 산을 마주하고 있는 장면은, “날씨 좋다. 어디 산에나 놀러 가서 낮잠이나 잤으면 좋겠는데”라고 통화 중인 선배에게 건넸던 그의 이야기와 “어디 산에나 한 번 놀러 갈까, 숲속에서 고기나 실컷 구워 먹었으면”이라고 말하던 장미의 대사와 연결되면서, 세상적으로 '성공한' 윤주는 슬라이드 시청 수업 때문에 자기 앞에 펼쳐진 숲을 검은 커튼으로 가려 버리지만 실직자가 된 현남은 푸르른 산길을 친구와 함께 걸으며 반짝이는 거울 빛을 관객 쪽으로 향하는 마지막 장면과의 대조로까지 이어집니다. 모양과 성격에 차이는 있겠지만 윤주와 현남이 각기 선망하던 것을 '명예욕'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는데 - 윤주의 경우가 '상위 계층'인 교수직을 향한 욕망이라면 현남의 경우엔 '의인'이 되어 방송 출연을 하고 싶다는 - 결코 물욕(物慾)보다 가볍다고 할 수 없을 탐심인 이 명예욕(名譽欲)이 충족된 윤주가 아닌, 사정없이 좌절된 후의 현남에게서 도리어 자유로움과 홀가분함을 엿보게 됩니다.


“어렸을 땐 교수 되려면 죽어라고 공부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라고 아내에게 말하던, 뇌물까지 동원해 교수가 된 윤주의 공허한 표정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 그리고 파스칼(Blaise Pascal)이 남겨 널리 알려진 명언처럼 -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하나님 모양의 빈 공간(God-shaped vacuum)”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채워 주실 수 있는 것이기에, 원하는 바를 추구하며 달리는 동안에는 맹목(盲目)으로 인해 깨닫지 못하던 그 빈자리가 목표 지점에 도달하고 난 후 찾아오는 허탈감을 겪으며 본래의 휑한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갈망하던 자리에 올라서고 보니 그곳에는 푸른 숲과 청명한 하늘을 가리는 어둠만이 자리잡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은 윤주가, 앞서 학장에게 줄 케잌(돈을 바닥에 깐)을 가지고 전철을 탔을 때 어려운 사정을 호소하는 쪽지를 케잌 상자 위에 올려놓은 아기 엄마에게 상자에서 만 원짜리 지폐 하나를 꺼내서 건네 주었던 것이 - 한참 망설이기는 했었지만 - 그래도 그의 삶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현주에게 '뇌물 공여'를 권하는 선배 “준표”역으로 카메오 출연한 임상수 감독이 배우를 능가하는 맛깔나는 연기를 보여 주는 장면, 아파트 경비원 역의 배우 변희봉이 지하 보일러실에서 몰래 먹으려던 '보신탕'을 순찰 나온 주임에게 들킬 위기에 놓이자 빨리 그를 내쫓기 위해 느닷없이 시작하는, 억울하게 죽은 “보일러 김씨”의 '납량(納涼) 특집' 같은 이야기가 구술되는 장면, “순자”에게 먹일 딸기 우유를 깜빡 잊었다며 방금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 수퍼마켓에 다녀오라는 아내와 거기까지의 거리가 50m네 100m네를 두고 다투던 윤주가 길이 100m로 표시되어 있는 두루마리 화장지를 굴려 거리 측정을 하는 장면 등등, 진정한 “블랙코미디”의 정수를 즐기기 원하는 관객, 유명세를 타기 훨씬 이전의 봉준호 감독이 보여 주는 잠재력의 진면모를 감상하고자 하는 관객이라면 꼭 한 번 찾아 볼 것을 권하고 싶은 영화가 바로 이 “플란다스의 개”입니다.




딸 J의 시선



2000년 개봉작인 [플란다스의 개]는 이젠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오른 봉준호 감독이 아직 ‘신예’로 불릴 당시 만들었던 영화로, 영화광인 엄마 덕분에 아주 어린 시절 접했던 작품이다. 포스팅의 첫 편에서 소개했던 [와이키키 브라더스]처럼 이 영화 또한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엄마와의 대화 중 가끔 언급될 정도의, 우리 모녀로서는 나름 애정을 가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실과 별개로 [플란다스의 개]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기 전에 약간의 경고, 혹은 사전 고지 비스무리한 것이 필요할 듯한데, 혹시라도 제목을 보고 따뜻한 내용을 기대하신 분들이 있다면… 사과의 말씀을 올린다. 일단 이 작품이 동명의 애니메이션이나 원작 소설처럼 인간과 강아지 사이의 아름다운 우정과 유대를 다루고 있지 않음을 밝히면서. 그 반대라면 또 모를까.


영화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과 선배와 '중요한' 통화를 하던 중, 어딘가에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에 짜증을 내는 "윤주(이성재)"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대학 시간강사인 윤주는 소심한 성격 탓에 은근한 로비와 ‘정치’를 잘 하지 못해 번번히 교수 임용에 탈락할 뿐 아니라, 직장에 다니며 실질적 가장 노릇을 하는 연상의 아내 "은실(김호정)"의 눈치를 보며 잔뜩 주눅 든 삶을 사는 인물이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 투성이인 상황에 놓여 있어 아파트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에 날카롭게 반응하던 윤주는,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친 강아지를 그 짖는 소리의 원천이라 여겨 납치하기에 이른다.





아파트 지하 보일러실에서 강아지를 죽이려다 버려진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본 윤주가 차마 그 행위를 이어 가지는 못하지만, 주인에게 돌려주는 대신 쓰레기 더미 속 옷장에 가둬 개를 유기한다. 그리고 얼마 뒤 술에 취해 집에 돌아왔다가 환청처럼 들리는 같은 개의 짖는 소리에 놀라 밖으로 뛰쳐나갔던 그는, 자신이 납치한 강아지의 주인인 어린아이가 정성스레 만들어 붙인 전단지를 보게 된다. 전단지를 통해 자기가 가둔 강아지 "삔돌이"는 성대 수술을 한, 다시 말해 ‘짖지 못하는’ 아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가 헐레벌떡 지하실로 다시 내려가 보지만, 강아지를 되찾아오기는 커녕 아파트의 경비 아저씨(변희봉)가 몰래 강아지를 '끓여 먹는' 모습만 숨어서 목격하게 된다.


찝찝하게 어물쩍 넘어간 강아지 납치 사건 이후로도 윤주의 삶은 나아질 기미가 전혀 없는데, 이에 더해 과 선배는 학장에게 천오백만 원을 뇌물로 건네면 교수가 될 수 있다는 ‘조언’까지 그에게 건넨다. 아내 은실에게 돈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 고민만 하던 윤주는 자신을 괴롭히던 소음이 아래층 할머니의 개에게서 비롯된 소리였음을 깨닫게 되고, 다시 한 번 그 강아지를 납치하는 것도 모자라 이번엔 옥상에서 떨어뜨려 죽이기까지 한다.





또 다른 한편에는 이 영화의 '여자' 주인공이자 윤주가 사는 아파트 관리실에서 경리로 근무하는 "현남(배두나)"이 있다. 단조로운 직장 생활과 넉넉지 않은 형편 속에 답답하고 지루한 나날을 보내는 그녀는, 강도를 맨손으로 잡아 영웅이 된 은행 직원을 부러워하며 자신도 "용감한 시민상"을 타고 TV에 출연하는 것을 유일한 꿈으로 삼고 산다. 그러던 어느 날, 근처 문구점에서 일하는 친구와 함께 아파트 옥상에서 망원경을 가지고 놀던 현남은 건너편 옥상에서 개를 떨어뜨려 죽이는 의문의 남성(관객들은 그 사람이 윤주임을 알지만)을 목격하고, 반드시 그를 잡아 영웅이 되고자 하는 사명감을 불태운다.


쫓고 쫓겨야 했을 둘의 관계는 윤주의 아내 은실이 어느 날 돌연히 푸들 "순자"를 집에 데려오면서 이상한 쪽으로 방향을 바꾸는데, 순자를 산책시키다 소독차의 연기 속에 강아지를 잃어버린 윤주가 이번에는 실종된 강아지 '주인'의 입장으로 아파트 관리실을 찾게 되기 때문이다. 윤주는 자신이 납치했던 강아지의 주인들이 그랬듯 동네 곳곳마다 전단지를 붙이며 순자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현남 또한 윤주가 강아지들을 죽게 한 범인임을 꿈에도 모른 채 그를 도와 순자를 찾으러 다닌다.





이렇게 글로 요약하고 보니 꽤나 껄끄러운 소재를 다룬 영화임은 확실하지만(특히 애견인으로서 더욱 그렇다) [플란다스의 개]는 재미있는 관전 포인트가 많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면서 느끼게 된 특별한 감상은 이 작품이 정말로 "봉준호스럽다"는 – 너무 당연한 소리같이 들리겠지만 – 것이었다. 아직 신인이던 시절 연출한 작품임에도 훗날 차기작들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을 감독다운 감성과 화풍, 살짝 비틀린 유머 감각 등이 이미 이 영화에서 거의 완성형으로 나열된 듯 한데, 봉준호 감독의 시그니처라고도 생각되는 "일상적 기괴함(혹은 "생활 밀착형 잔혹함")"이 여러 장면과 캐릭터에서 짙게 배어 나온다는 점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윤주가 처음 납치했던 강아지 삔돌이를 옥상에서 던지려다 무말랭이를 말리러 온 할머니 때문에 머쓱하게 실패하는 장면이나 그 뒤 지하실로 내려가 다시 강아지를 죽이려고 시도하는 장면, 아파트의 으스스한 지하실에서 경비원이 꽤나 익숙한 듯 여러 도구들을 사용해 보신탕을 끓이는 장면 등등 말이다. 특히 보신탕을 먹으려던 그가 지하로 내려온 관리실 직원과 맞닥뜨리자 요리의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고 "보일러 김씨"에 대한 괴담을 들려 주며 주의를 돌리는 장면은 이 영화 최고의 명장면이라 생각되는데 - 헛소리를 그토록 진지하게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 봉준호 감독 특유의 감성, 그러니까 뭔가 기괴하고 끔찍한 상황을 태연하고 무미건조하게 비춤으로써 오히려 어이없고 우스꽝스럽게 그려내는 시선이 잘 활용되고 있다. 사실 이 영화는 기법과 연출 등에 관해 할 말이 무척 많음에도 시간과 공간 부족으로 다 다룰 수 없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하지만 이번 글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싶은 내용은 사실 윤주라는 인물을 통해 표현되는 "폭력의 일상성", 더 정확하게는 "잔혹함의 평범성"이다. 흥미롭게도 나는(분명 이 영화를 여러 번 봤음에도 불구하고) 윤주가 강아지를 ‘죽이기까지’ 했다는 설정은 완벽하게 잊은 채 그를 그저 적당히 평범하고 찌질한, 동시에 측은하고 ‘미워할 수 없는’ 인물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윤주가 굉장히 평범할 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피해자’라고도 분류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영화에서 윤주가 교수 임용에 실패하는 이유는 능력이나 성취의 부족 같은 상식적이고 납득 가능한 것들이 아니기에, 그는 단지 ‘아부’와 ‘로비’ 활동, 그러니까 부패하고 타락한 시스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피해를 보고 있는 ‘약자’ 혹은 ‘피해자’에 가깝다. 그래서 영화 초반의 윤주는 약간 한심하거나 찌질할지언정 ‘안쓰러운’ 마음 또한 들도록 만드는 인물이었다. 그가 가진 불만이나 짜증에 어떤 ‘정당성’이 허락되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윤주가 ‘피해자’라는 자신의 위치가 부여하는, 본인의 울분에 대한 ‘정당성’을 악한 행동의 명분으로 이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발생한다. 개 짖는 소리에 짜증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 있지만 윤주는 그에서 한발 더 나아가 강아지를 납치하고 해를 끼치기까지 한다. 지극히 평범하며 소심하기조차 한 윤주가 강아지를 죽일 정도의 폭력성과 잔혹성을 보이게 되는 데에는 사실 별다른 계기나 사건이 없다. 평범한 줄만 알았던 윤주가 사실은 사이코패스적인 성향이 있었다거나 하는, 그러니까 그가 사실은 평범함을 벗어난 특이한 인물이었다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윤주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피해자’로서의 분노의 ‘정당성’을 무기 삼아 이기심을 표출하기 시작한다. ‘내’가 억울하고 ‘내’가 짜증이 나는 상황에서 ‘나’를 화나게 하는 소음의 원인, 그러니까 "짖는 강아지"를 없애는 것은 정당하다는 생각이 기반에 있기에 윤주는 특별한 악당의 모습을 띄지 않고서도 ‘악한’ 짓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 사실 씁쓸한 - 점은 그가 처음으로 납치한 강아지는 짖지도 못하는 아이였을 뿐더러 두 번째로 납치했던 ‘짖는’ 강아지 또한 그에게 직접적 위해를 가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Barking Dogs Never Bite”라는 점도 재미있다.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는, 그러니까 시끄러운 상대일수록 사실 위험하지는 않다는 의미의 표현이니까). 영화를 보는 내내 “Kick the dog”이라는 영어 속담도 생각났는데, 이는 자신보다 힘센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한 인물이 그 사람 대신 강아지를 걷어찬다는, 그러니까 자신의 분노와 억울함을 죄 없는 약자에게 푸는 행위를 빗댄 말이다. 정확히 이 말처럼 윤주는 실제로 자신에게 부당한 대우를 했던 학장, 또한 자신을 만만하게 대하는 아내에겐 그들이 상대적 ‘강자’라는 이유로 대들지 못하고, 그 대신 자기보다 훨씬 약한 입장에 있는 강아지들에게 ‘화풀이’를 한다. 그로 인해 강아지뿐 아니라 강아지의 주인들도 해를 입게 되고, 심지어 두 번째 강아지의 주인인 할머니는 강아지를 잃은 충격에 쓰러졌다가 결국 숨을 거두기까지 한다. 제도의 부패와 불합리함에 억눌린, 힘 없는 ‘피해자’였던 윤주가 스스로 ‘가해자’의 위치로 자리바꿈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현남은 윤주와 완벽하게 대비되는 인물이다. 사실 현실적인 조건으로 따지면 현남도 윤주 못지않게 사회와 세상에 대한 ‘정당한’ 울분을 가질 법하다(어쩌면 나름 중산층의 삶을 누리고 있는 윤주보다 현남이 훨씬 불리한 조건에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윤주가 자신을 괴롭히는 구조적 불이익에 ‘이기심’으로 반응하는 반면 현남은 ‘이타적’ 행동과 시선으로 자신의 환경을 대한다는 차이를 보인다. 앞서 언급했듯 현남의 꿈은 "용감한 시민상"을 받는 것으로, 맨손으로 강도를 때려 잡은 은행 직원을 소개하는 뉴스를 보며 "내 돈도 아닌데" 굳이 저럴 필요 없다고 냉소적 반응을 보이는 친구와 달리 "멋있다"면서 감탄을 연발한다. 실종된 강아지를 찾기 위해 자기 일도 내팽개치고 몰두하는 현남을 보고 있자면 약간 오지랖이 넓은 성격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어찌 되었건 그녀를 움직이게 하는 동기가 타인을 도우려는 마음이라는 것만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강아지를 찾기 위해 자기 일처럼 뛰어들었던 현남은, 결국 아파트 지하에 사는 노숙자가 데리고 있던 순자를 찾아내어 윤주에게 돌려준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일’을 하고서도 그녀는 실질적 보상을 전혀 받지 못하는데, 사무실에 붙어 있지 않고 밖으로만 쏘다닌다는 오해로 직장에서 해고될 뿐더러, "강아지 도둑을 잡은 인물"로 인터뷰를 한 뉴스 내용이 통편집되면서 TV 출연이라는 평생의 꿈까지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이와 정반대로 윤주의 경우는 지나치게 일이 잘 풀려나간다. 자신이 납치해 죽였던 강아지들은 경비원이 잡아먹어 ‘증거 인멸’이 된 데다가 순자를 데려간 노숙자가 지금까지의 강아지들을 모두 훔친 도둑이라는 누명을 대신 쓰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을 무시하고 부려 먹기만 하는 듯 하던, 경제권을 쥔 ‘강자’ 입장의 아내 은실이 사실은 임신을 이유로 해고되었고, 회사에서 받은 퇴직금을 윤주의 교수 임용을 위한 ‘청탁금’으로 쓰려 했다는 사실까지 밝혀지며 그의 앞에는 탄탄대로가 열린다. 결국 윤주는 뇌물을 바치고 원하던 대로 교수가 된다. 따지고 보면 상당히 불합리하다고 할 이 결말은 남이야 어떻든 ‘나’만 잘 되면 된다는, ‘내 이익’ 쫓기를 미덕으로 여기는 현대 사회의 관점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다만 영화에서 그리는 윤주와 현남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 그들의 현실적 조건이 해피엔딩의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원하던 대로 교수가 되었음에도, 강의실 커튼이 닫히며 창밖으로 보이던 자연의 풍경 대신 어둠 속에 묻히게 되는 윤주의 표정은 왠지 착잡함이나 복잡함에 가까워 보인다. 스스로 창조한 죄책감의 감옥 안에 갇힌 듯한 윤주와 달리, 직장도 잃고 ‘꿈’도 좌절된 채 여전히 구질구질한 현실 속에 남은 현남은 오히려 탁 트인 자연을 벗삼아 산속 곳곳을 자유롭게 누빈다. 윤주는 애초 ‘피해자’로 시작했을지 모르나 결국은 ‘이기심’을 택하고 본인도 똑같은 ‘가해자’가 됨으로써, 자신을 억압하고 괴롭히던 제도를 이겨내고 초월하는 대신 그에 휩쓸리고 굴복한 모습이다. 부당함에 순응해 뇌물을 바치고 교수가 된 그가 이제는 그 불평등하고 부패한 시스템에 다른 방식으로 억눌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와 달리 비슷한 상황에서 ‘이타심’을 택한 현남은 강자가 약자를, 약자가 더한 약자를 학대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그저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가게 된 것일지 모른다.





무료하고도 불공평한 일상의 잔인함 속에 고이는 분노, 짜증, 증오를 타인에게 표출하고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수레바퀴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현남이 짓는 홀가분한 표정을 통해 애꿎은 강아지를 걷어차는 사람보다는 잃어버린 강아지를 함께 찾아다니는(별 보상을 얻지 못할지언정)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그분의 말씀 또한 우리가 드넓은 산에서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그 거리낌 없는 자유를 누리기 바라시는 심성에 궁극적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은 혹 아닐지.

작가의 이전글 패치 아담스: 웃음, 그 공허함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