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C의 시선
“기쿠지로의 여름(菊次郎の夏)”은 1999년 개봉되었던 일본 영화로, 일본 내에서는 코미디언으로, 그리고 해외에서는 영화감독으로 더 이름이 알려져 있다는 기타노 다케시(Takeshi Kitano)가 연출과 주연을 맡은 작품입니다. “마사오”라는 이름의 초등학생 소년과 마지막 장면에 가서야 그의 이름이 “기쿠지로”임을 알게 되는 중년 남성이 주인공인 – “투톱”이라는 용어가 영 어색함에도 형식상으로는 그렇다고 할 – 이 영화는, 한국 개봉 당시 포스터에 실렸던 “9살 걱정 많은 소년과 52살 철없는 아저씨의 엄마 찾아 삼천포”라는 광고 카피에 전체의 내용이 한마디로 요약되어 있는 “로드 무비”이기도 합니다. 엄마를 찾으려 무작정 길을 떠난 소년과 그 여정에 동반한 '동네' 아저씨, 두 사람이 길 위에서 펼치는 다양한 이야기들로 구성된 영화 곳곳에 숨은 예술성 또한, “52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정식 출품작”이라는 타이틀에 고개를 끄덕이게 합니다.
할머니와 단둘이 도쿄에서 살고 있는 소년 마사오는 가게에서 일을 하며 자신을 키우는 할머니에게 한 번도 본 적 없는 - 그러나 몹시 그리울 - 부모에 대해 가끔 물어 보지만 곤란한 표정의 할머니는 “아빠는 사고로 돌아가시고 엄마는 멀리에서 너를 위해 열심히 돈 벌고 있다”는 짧은 대답을 반복합니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며 심심해진 데다가 할머니까지 일하러 나가신 집에 혼자 남겨지자 같이 놀 친구를 찾아 나섰던 마사오에게는 가족과 함께 휴가 여행을 떠나는 그들의 ‘행복한’ 모습만 목격될 뿐이지요. 자신이 아기일 때 찍은 엄마의 사진 한 장과 주소가 적힌 쪽지 하나를 배낭에 넣고 무작정 집을 나선 마사오가 동네 불량 청소년들에게 '전 재산(2천 엔)'을 뺏길 뻔한 상황에서 이웃 아줌마와 그 남편인 아저씨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 후, 마사오로부터 엄마를 찾으러 “토요하시”로 가는 중이라는 말을 듣고 안쓰러운 마음이 든 아줌마는 남편에게 돈 5만 엔을 주면서 마사오를 엄마에게 데려다 주라고 당부합니다.
아내에게 “만 엔만 더” 달라고 할 때부터 심상치 않은 ‘조짐’이 보이던 아저씨는 아니나 다를까 그 돈을 가지고 경륜장으로 가서 다 날리고는 마사오의 2천 엔까지 빼앗으며 생각나는 숫자를 대 보라고 말합니다. 우연치 않게 그가 부른 숫자들이 당첨되자 그 돈을 술집에서 탕진하고 다음 날도 또 아무 숫자나 대 보라고 다그치지만 같은 우연이 계속해서 반복될 리 없지요. 마사오에게 용돈으로 주었던 만 엔도 도로 빼앗아 주점에서 술을 마시는 등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던 아저씨는, 주점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마사오가 엄마에게 데려다 주겠다며 꾀는 할아버지를 따라가는 상황까지 벌어지자 그제서야 아이의 절박한 마음을 깨달았는지 엄마를 찾는 일에 본격적으로 나섭니다.
하지만 철이 없다고 해야 할지 대책이 없다고 해야 할지 아무에게나 경우 없이 대하는 그의 태도는 여전해서, 타고 가던 택시의 기사가 화장실에 간 사이 미터기가 계속 돌아가는 데 화를 내며 차라리 자기가 운전하겠다고 무작정 차를 몰아 고장을 내고는, 남의 차를 버려둔 채 걸어 가다 만난 호텔에서도 여러 가지 사고를 '다양하게' 일으킵니다. 다음날 아침 체크아웃을 하며 숙박비가 비싸다고 시비를 걸던 그는 호텔 직원에게 개인 승용차로 데려다 달라고 막무가내로 떼를 쓰고, 토요하시까지 데려다 줄 수는 없었던 직원이 중간에 내려 준 지점에서부터 이런저런 방법으로 차를 얻어 타 가며 ‘천신만고'라 해야 할 여정을 이어 갑니다. 길 한복판에 뾰족한 돌을 놓아 지나가던 차의 타이어가 터지게 하거나 맹인으로 가장해 동정심을 유발하는 등 온갖 술수를 쓰면서 결국 주소에 적힌 엄마의 집까지 찾아가게 되지요.
막상 엄마 집 가까이에 이르자 용기가 없어진 마사오가 멀리서 바라만 보는 동안 아저씨 혼자 집 앞으로 다가가는데, 순간 문이 열리며 물놀이 가는 남편과 어린 딸을 배웅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큰 충격을 받은 두 사람이 발길을 돌려 오던 길을 되돌아가면서도 아저씨는 “주소는 맞는데 저 사람은 엄마가 아닌 것 같다”고, “아마 엄마가 이사를 간 모양”이라고 아이를 위로합니다. 사진 속 엄마의 모습이 분명함을 그들 둘 다 알고 있기에 말없이 눈물을 훔치는 아이가 안쓰러울 수밖에 없던 아저씨는 “엄마가 이사 갔는지 가서 물어 보겠다”고 마사오에게 말하고 다시 집 쪽을 향해 돌아섭니다. 하지만 가까이는 가지 못한 채 멀찌감치 앉아만 있다가 마침 자신의 앞에 세워 둔 오토바이에 매달려 있던 천사 모양의 종 장식을 발견한 그는, 오토바이 주인인 두 남성에게 무턱대고 종을 달라고 조른 뒤 마사오에게 가져다 주며 “엄마가 멀리 이사 가면서 네가 나중에 올지 몰라 종을 남겨 두고 갔다”고, “슬프거나 힘들 때 종을 울리면 천사가 도우러 올 거라 했다더라”고 말합니다.
실낱 같은 희망으로 종을 울려 본 마사오에게 실제로 천사가 나타나지는 않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아저씨와 마사오의 이후 여정은 ‘천사 같은’ 사람들과의 행복한 시간으로 채워집니다. 엄마의 집 근처까지 차를 태워 줬던 떠돌이 시인 청년과 천사 종을 양보한 두 바이크족이 마사오를 친 동생처럼 아끼며 함께 놀아 주기 때문이지요. 사실 영화의 러닝타임(약 2시간) 중 엄마를 만나기까지의 시간이 70분 정도이고 나머지 50분은 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집에 되돌아가는 과정으로 채워지는 것을 생각하더라도, 슬픔과 실망이 아닌 기쁨과 희망을 전하고자 하는 영화의 의도가 관객들에게 충분히 전달됩니다. 자신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던 어린 아들이 고생을 무릅쓰고 그 먼 길을 온 줄 꿈에도 모른 채 그저 자기만 행복해 보이는 엄마의 모습에서 관객들 대부분은 분노와 허탈감을 느끼겠지만, 고맙게도 영화는 보는 이들이 예상치 못하던 전혀 다른 '회복'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니까요.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God could not be everywhere, and therefore He made mothers)”라는 키플링(Rudyard Kipling)의 잘 알려진 말이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 여러 보도를 통해 접하게 되는 입에 담기도 고통스런 엄마들의 행태를 생각하면, '어머니'라는 존재에게만, 그리고 ‘모성’이라는 본능에만 우리 아이들을 맡겨 두고 속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세상이 더 이상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영화 속 마사오도 비록 엄마와의 행복한 만남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 험난한 여정에서 ‘아빠’ 노릇을 해 준 아저씨, ‘형’ 역할을 해 준 청년들과 보낸 시간이 평생 잊히지 않는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그의 삶에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라 믿어지기에, 마사오를 보살펴 주는 영화 속 인물들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비록 ‘엄마’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천사로써 아이들을 지켜 주시는 - '모든 곳'에 계시는 - 하나님의 따스한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영화의 끝부분, 도쿄로 되돌아온 후 작별을 고하는 아저씨를 불러 세운 마사오가 이름을 묻자 아저씨는 “기쿠지로”라고 대답하고, 미소를 띤 채 달려가는 마사오의 뒷모습을 이번에는 아저씨가 지켜봐 줍니다. 평생 철이 들 것 같지 않던 기쿠지로가 마사오의 엄마를 찾아 다녀오는 여정에서 아이의 아빠 노릇을 부족함 없이 해낼 수 있었던 데에는 “엄마를 한 번도 본 적 없다”는 자신과의 공통점 때문에 갖게 된 안쓰러움, 엄마를 못 만나고 돌아선 후 들렀던 축제에서 조폭들에게 실컷 얻어맞은 자신을 위해 늦은 밤 약국 문을 두드리고 약을 사 온 마사오에 대한 고마움도 있겠지만, 천사 종을 건네 준 뒤 “이제 갈까”하고 말하는 자신에게 뛰어와 손을 잡고 올려다 보던 마사오의 눈빛을 통해, 그리고 비 내리는 정류장에서 오지 않는 차를 한없이 기다리는 동안 다른 사람의 종이백에서 슬쩍 바꿔치기 한 음식을 마사오에게 건네 주고 자신은 땅에 떨어진 음식을 아이 몰래 주워 먹으며 배운 사랑을 통해 점점 '천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행 중 만난 누나가 선물한 배낭에 달린 천사 날개, 오토바이에 매달려 있던 천사 종 등을 통해 영화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그럴 것이듯, 나누지 않는다면, 공감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른이 될 수도, 하나님의 바람처럼 때로 누군가의 천사가 되어 줄 수도 없을 테니까요.
딸 J의 시선
[기쿠지로의 여름]은 영화 속 주인공 중 한 명을 연기하기도 한, 일본의 유명 개그맨 출신이라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1999년 작품이다(한국에서는 2002년 개봉되었다). 칸 영화제 본선에 진출했던 나름대로 '알아주는' 작품이지만 어쩌면 많은 이들에겐 삽입곡인 히사이시 조의 "여름(Summer)"으로 더 친근하지 않을까도 싶다. 개인적으로 영화 음악 중 가장 좋아하는 곡들 가운데 하나이다.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은 방학을 맞은 어린 소년 "마사오"를 비추며 시작된다. 부모님 없이 할머니와 도쿄에서 살고 있는 마사오는 항상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의 소심하고 주눅든 - 그러나 귀여운 - 아이이다. 친구들은 방학을 맞아 모두 가족과 함께 놀러 가지만 손주를 키우느라 일을 해야 하는 할머니와 사는 마사오에겐 꿈 같은 얘기일 뿐이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바닷가로 놀러 가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자신의 부모를 마사오가 궁금해하자 할머니는 사고로 돌아가신 아빠뿐 아니라 먼 곳에서 그를 위해 돈을 벌고 있다는 '엄마'에 대해서도 대충 얼버무리고 만다. 그렇게 혼자 쓸쓸히 시간을 보내다 할머니에게 온 택배를 대신 받기 위해 도장을 찾던 마사오는 서랍 한 켠에 숨겨진 ‘엄마’의 사진과 주소를 발견하고, 무작정 모아 둔 용돈과 "방학숙제장"(귀여워…)을 챙겨 ‘엄마 찾기’의 여정에 나선다. 나가자마자 불량한 동네 형들에게 붙잡혀 용돈을 뺏길 뻔하지만 왕년에 껌 좀 씹고 다녔을 것 같은 이웃 아주머니가 마사오를 구해 준다. 멀리 떨어진 "토요하시"로 엄마를 찾아가려고 한다는 아이의 사연을 들은 그녀는 동네 한량으로 보이는 자신의 남편 "기쿠지로"에게 여행비 5만 엔까지 쥐어 주며 마사오를 엄마에게 데려다 주게 하고, 그렇게 하여 9살 소년 마사오와 50대 아저씨 기쿠지로의 동행이 시작된다.
말하자면 마사오의 "엄마 찾아 삼만리"라고 할 수 있을 이 영화는 사실 무척 단순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으며, 일반적 기승전결의 방식을 따르면서 갈등 고조와 문제 해결이라는 한 가지 서사에 집중하기보다 ‘사건들의 연속’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구조를 취한다. 목적지를 향하는 여정에서 만나는 사람과 사건들에 중점을 준 로드 무비, 혹은 모험극의 형태를 띠는 이 작품의 경우 큰 갈등이나 자극적 요소 없이 잔잔하면서도 재치있게 펼쳐지는 연출 방식을 매력 요소로 들 수 있겠다. 일본식 소년 만화, 혹은 애니메이션을 연상시키는 측면도 많은데, 일상적 상황들이 시각적 유머를 위해 과장되게 연출된 장면이나 - 수영을 못 하는 기쿠지로가 호텔 수영장에 들어갔다가 다리를 허공에 띄운 채 상체가 물속에 ‘처박힌’ 꼴이 되는,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만화적 포즈가 사용된다거나 - 장면과 장면 사이를 연결하는 방식 등이 특히 그렇다. 어떤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연출되면 주변 인물들이 만화의 한 컷, 혹은 애니메이션의 정지 화면처럼 가만히 멈춘 채 그 상황을 직시하는 ‘리액션’ 샷으로 연결되고, 한 장면에 집중하던 카메라 포커스가 서서히 줌아웃되면서 재미있는 상황이 조금씩 드러나는 식의(등장인물들이 잔디밭에서 즐겁게 노는 그림 같은 풍경에서 줌아웃을 하면 "출입금지" 표지가 점차 보이게 되는 등) 연출 방식이 자주 사용되면서 말이다.
영화가 "챕터" 별로 진행된다는 것도 흥미로운 점인데, 각 챕터의 제목을 알려주는 컷신이 아예 책이나 극작품처럼 들어가 있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 한 가지의 긴 스토리보다 여정 중의 다양한 사건들을 따라가는 구조여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덕분에 만화나 애니메이션처럼 ‘에피소드’식으로 진행되는 느낌도 준다. 어떤 면으로는 콩트 형식의, 웃음 포인트를 위해 줄거리가 존재하는 짧은 ‘코너’ 여러 개를 한 데 꿰는 개그맨 시절의 연출법을 감독이 이 작품에서 차용한 것으로도 보인다. 소년 만화, 스럽다는 표현이 적절할 만큼 청량하고 ‘무해한’ 기운이 가득한 이 영화의 등장인물 대부분은, 보는 내내 착해… 귀여워… 라는 말을 연발하게 만들 정도로 순하고 선한 사람들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막상 주인공인 기쿠지로가 지나치게 한심하고 뻔뻔한 인물이라 그 선한 주변인들에게 잔뜩 민폐를 끼친다는 점인데, 사실 마사오가 엄마를 찾으러 가는 여정이 이렇게 다이내믹해진 것도 기쿠지로의 탓이 크다. 버스 몇 번, 기차 몇 번 탔으면 끝났을 법한 일이지만 기쿠지로는 아내가 준 여행 경비를 경륜에 탕진하지 않나, 마사오를 데리고 소위 ‘룸살롱’에 가지 않나, 아이를 혼자 뒀다가 이상한 할아버지에게 유괴 당할 뻔하지 않나, 택시 기사가 화장실에 들른 사이 미터기를 보며 요금이 비싸다고 투덜대다 차를 절도하지 않나(심지어 중간에 망가뜨려서 결국 걸어가야 했다), 뭐 별의별 사고를 다 친다. 결국 어느 호텔에서 남은 경비를 모두 써 버린 기쿠지로 때문에 두 사람은 외진 도로의 누추한 버스 정류장에서 히치하이킹이나 시도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이다. 그러는 내내 옆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는 마사오가 얼마나 안쓰러운지 모른다.
하지만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사실 마사오가 아닌 기쿠지로다. 영화 안에서는 거의 끝날 때가 되어서야 기쿠지로가 마사오의 성이 아니라 아저씨의 이름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약간의 반전이 일어나는 셈인데, 엄마를 찾는 이 여정의 주체는 마사오지만 영화를 관통하는 성장극의 중심은 기쿠지로인 것이다. 그런 맥락으로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며 인상 깊었던 대사가 있었는데, 지나가는 차들이 태워 주지 않아 정류장에서 계속 시간을 보내던 중, 태어나서 한 번도 엄마를 본 적 없다는 마사오의 말에 갑자기 진지해진 기쿠지로가 자기 무릎을 베고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며 “나랑 똑같구나” 하고 말하는 대목이다. 착하고 소심한 소년 마사오와 민폐와 주책을 탑재한 중년 기쿠지로에게 접점은 없어 보이지만 사실 둘은 비슷하게 ‘소외된’ 사람들이다. 영화의 초반부, 할 일이 없어 평소처럼 축구부 연습을 하려 학교 운동장에 온 아이에게 코치 선생님이 나름 친절하게 방학이니 바닷가라도 놀러가라, 하고 말하는데, 오히려 이 말을 통해 정형화된 ‘가족’에, 그러니까 사회적 안전장치와 제도적 안정성에 속하지 못한 마사오의 현실이 두드러진다. 누군가는 당연히 여기는 것을 이 아이는 누리지 못하고 있는 셈이니까. 기쿠지로 또한 영화의 초반부, 아내와 나누는 패륜적(?) 만담을 통해 엄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는 사실이 암시된다. 전형적인 ‘가족’의, 더 정확히는 사회적으로 요구되고 인정되는 규격 밖에서 지내 온 그가 마사오를 보며 "나랑 같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기쿠지로 안에 존재하는, 마사오 또래의 어린아이가 보이는 것도 같다.
그렇기에 기쿠지로가 점점 마사오를 진심으로 위하고 상냥하게 대하게 되는 변화는 ‘철 없는 어른’이 어린아이를 보살피며 ‘철들어 가는’ 식의 성장이라기보다, 자신과 비슷한 마사오를 돌봄으로써 마사오 안에 있는, 어릴 적 상처 그대로 나이만 먹어 버린 ‘자신’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과정으로 설명하는 게 더 맞지 않을까 싶다. 둘은 결국 토요하시의 엄마 집을 찾아내지만, 사진 속 마사오의 엄마와 똑같이 생긴 여자가 새로운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만 먼발치에서 확인하게 될 뿐이다. 마사오는 엄마가 자신을 ‘버렸음’을, 게다가 다시 꾸린 가족과는 방학을 함께 즐기고 있음을 보면서 자신에게서 ‘앗아 간' 사회적 소속감과 안정감이 새 가족에게 주어졌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당황한 기쿠지로는 얼른 마사오를 근처 바닷가로 데려다 놓은 뒤 그 집에 가서 확인해 봤더니 사실 그 여자는 네 엄마가 아니었다고, 네 엄마는 멀리 이사가셨다더라며 위로한다. 뻔히 알 수 있는 거짓말이지만 지금까지의 이기적이고 생각 없는 듯 보이던 기쿠지로의 모습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라고 해야 할 이 말은, 그래서 더욱 아이의 마음을 지켜 주려는 ‘평범한’ 어른의 ‘당연한’ 배려와는 결이 다르게 느껴진다. 갑자기 기쿠지로에게 어른으로서의 성숙함이 생겼다기보다 마사오를 통해 보이는, 그러니까 자신의 어린 시절과 같은 상황에 놓인 마사오 안의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클라이맥스’라고도 볼 수 있을, 엄마를 찾고 그녀에 대한 진실을 깨달은 순간 영화가 곧바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사오와 기쿠지로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꽤 긴 시간 보여 주는 것도 인상적인 점 중 하나이다. 기쿠지로는 마사오의 할머니와 자신의 아내가 기다리는 도쿄로 곧장 돌아가는 대신, 여정 중에 만난 사람들 몇몇을 어찌어찌 모아 마사오와 함께 놀아 주며 며칠 간 시간을 보낸다. 오는 도중 그들에게 차를 태워 주었던 방랑 시인, 우락부락한 인상과 달리 순둥순둥한 폭주족 두 명(어느 정도로 순하냐면 그들의 오토바이에 달린 장식품 "천사의 종"을 기쿠지로가 ‘삥 뜯어’ 가서 이사 간 엄마가 널 위해 남겨 두고 간 것이라는 거짓말과 함께 마사오에게 주는데도 찍 소리조차 못한다)은 일면식도 없었던 아이를 위해 과감히 망가지고, 이런저런 놀이들을 가르쳐 주며 마음을 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비현실적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순하고 ‘서윗’한 인물들이다.
이 살짝 판타지스러운 상황이 그럼에도 아름답고 흐뭇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이와 놀아 주는 어른들 모두가 기쿠지로처럼 사회에서 소외된, 그 규격에서 벗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안정된 정착지 없이 차를 타고 전국을 누비며 글을 쓰는 시인, 바보 같을 정도의 순수함에도 험악한 외모와 스타일 때문에 오해를 받는 폭주족 등의 ‘사회 부적응자’들이 마사오에게 보여 주는 호의와 다정함은 지금까지의 여정에서 아이에게 친절하게 대했던 다른 평범한 어른들의 그것과는 전혀 질이 다르다. 이 소외된 자들 모두가 마사오 안에서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기에, 자신들의 결핍을 공유하는 아이가 본인들과 다른 성장을 하며 그들이 입은 상처는 피해 가길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 아닐까 싶다.
덕분에 마사오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깨닫고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식의 실제적이지만 가슴 아픈 성장 대신, 그 상처를 더 좋은 기억으로 덮음에 의해 치유와 회복을 얻는다. 영화의 후반부까지 아이는 불쌍할 정도로 고개를 숙이고 다니지만 - 특히 자신에게 잘해 주던 어른들과 이별해야 할 때 고개를 푸욱 숙이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 아저씨들과 놀며 꿈 같은 한때를 보낸 이후로는 그들과 차례차례 헤어지면서도 목을 꼿꼿이 세우고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나눈다. 여행 중 만났던 누나가 준 가방을 메고, 기쿠지로가 준 천사의 종을 달랑이며 집으로 뛰어가는 마사오의 마지막 모습에선 아이가 앞으로 엄마 없이도, 그동안 만난 소중한 인연들에게 듬뿍 받았던 사랑을 바탕으로 행복하고 당당하게 살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이 보인다. 마찬가지로, 마사오를 위로하던 기쿠지로에게도 변화가 일어나는데, 집에 돌아오는 길의 그가 한 요양원으로 나이 든 자신의 ‘엄마’를 보러 가는 것이다. 마사오가 그랬듯 엄마에게 다가가지 못한 채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모습이 안타깝긴 하지만, 지금까지 마사오의 상처를 보듬던 기쿠지로가 자신의 똑같은 결핍과 상처를 마주할 결심을 한 것이 아닐지, 또 그로부터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을 뗀 것은 아닐지 기대하게 된다.
지난 몇 년 간 사회에서 큰 화두가 되고 있는 힐링(이젠 조금 남발되는 경향도 없지 않지만)이라는 표현이 영화를 보는 내내 떠올랐다. 사실 이 영화를 설명하는 단어로는 가장 적합한 것이 아닐까 싶은데, 보면서 마음이 따땃해지고 위로를 얻게 되는 잔잔한 ‘힐링 영화’의 장르적 개념도 있지만 이 작품이 그려 내는 모든 것을 결국 ‘치유'로 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가진 결핍으로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가진 상처에서 나의 아픔을 발견하고 공감하는 것, 자신은 받지 못했던 위로를 타인에게 건네주는 것. ‘남’ 안에 있는 ‘나’를 위로하고 사랑함으로써 결국 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기적적인 치유 말이다.
세상을 알게 되면 될수록 우리를 둘러싼 많은 결핍과 상처에 더 큰 고통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모든 것을 통하여 선을 이루시는 그분의 은혜로 인해 결국은 상처 또한 사랑의 도구로 쓰일 것임을 믿는다. 아픔을 가진 우리 모두가 상대에게서 자신과 같이 상처 나고 불안한,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를 발견할 수 있기를, 그렇게 ‘네’ 안에 있는 ‘나’를 사랑하여 결국 함께 치유에 이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