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anne Aug 25. 2023

아라한 장풍대작전: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

딸 J의 시선



류승완 감독의 2004년 작품인 [아라한 장풍대작전]은 엄마와 나의 ‘최애’ 코미디 영화 중 하나로, 이 영화 속의 재기발랄한 대사들 역시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사이에서 inside joke처럼 쓰이곤 한다. [베를린], [베테랑], [모가디슈] 등의 최근작들을 통해 메이저 오브 메이저가 된 류승완 감독이지만 [아라한 장풍 대작전]에서는 그의 신인 시절 두드러지던 - 예컨대 단편영화 [다찌마와 Lee] 같은 작품을 통해 - 연출된 촌스러움과 소위 "B급 감성"을 즐기는 재미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의 최근 작품이 보이는 매끈하고 세련된 멋은 부족할 망정 무더운 여름에 잘 어울리는 시원시원하고 생기 가득한 매력을 가진 영화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영화 내용의 설명에 앞선 사족으로, ‘도’와 ‘도인’이 존재한다는 세계관이 등장하기에 성경적 가치관과 다소 거리가 있다고 느껴질 만한 영화란 점을 언급해야 할 듯하다. 하지만 강동원 배우가 ‘도사’를 연기했던 [전우치]가 사실은 판타지 액션이었듯, 이 작품 또한 ‘도’나 ‘도술’을 진지하게 다룬다기보다 한국형 수퍼히어로물의 장치 정도로 쓰였다고 보는 쪽이 더 맞지 않을까 싶다.


영화의 주인공인 "상환(류승범)"은 지역구 국회의원의 차를 막아서며 교통 위반 딱지를 붙이려 들 정도로 의욕과 정의감이 넘치는 순경이지만, 안타깝게도 눈치나 실력이 열정을 따라가지 못한다. 사실은 살짝 비실비실해 보이는 체구에 걸맞게 힘이나 체력 또한 그다지 좋지 않은, 좀 ‘없어’ 보이고 푼수 같은 사람이라고 설명해야 적절할 인물이다. 어느 날 도로에서 오토바이 소매치기 현장을 목격한 그는 금방 쓰러질 것처럼 힘들어 하면서도 범인의 뒤를 끝까지 쫓는데, 그러다가 자기처럼 그 소매치기범을 쫓던, 그러나 자기와는 전혀 달리 건물 사이를 휙휙 날아다니는 초인적 무술 실력을 가진 "의진(윤소이)"과 마주치게 된다. 범인을 잡으려던 의진은 만화나 영화에 나오는 무협인처럼 장풍을 쏘다 실수를 해 - 조준을 잘못해 - 바람을 대신 맞게 된 상환이 그대로 기절해 버리자,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아버지 "자운(안성기)"과 함께 사는 집으로 그를 데려간다.





그곳에서 정신을 차린 상환은 자운을 포함한 "칠선"이라는 무도인들을 만나게 되고(‘칠선’이지만 총 다섯 명이라는 것이 함정이다), 자운은 상환에게서 흔치 않은 강한 ‘기운’을 느꼈다며 자신들의 가르침을 받아 세상을 구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영웅 "마루치"가 되라고 권한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들은 상환은 이들을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도망치다시피 자리를 빠져 나오지만, 곧 선배 경찰과 함께 신고를 받고 나간 단속 현장에서 조직의 두목 "깡통(안길강)"에게 - 부패 경찰들에게 뇌물을 주며 ‘상부상조’하던 - 수치스러울 정도로 얻어맞게 된다. 그 치욕스러운 경험 이후 ‘실전’에서 쓸 수 있는 힘과 '싸움 기술’을 원하게 된 상환은 다시 칠선들을 찾아가 무술을 배우기 시작하고, 의진과 함께 이상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훈련과 수행을 거듭한다.


그러나 허술한 무협극, 혹은 스포츠 성장 드라마처럼 진행되던 그들의 일상은 칠선 중 하나이던 "흑운(정두홍)"이 깨어나면서 갑작스런 전환점을 맞게 된다. 흑운은 자기 스스로 "마루치"가 되어 힘으로 세상의 평화를 지키기 원했지만, 그를 경계한 다른 칠선들에 의해 용이 노닌다는 "영산"에 봉인 당했던 존재로, 지하 공사 때문에 봉인진이 깨어지면서 부활하게 된다. 흑운은 먼 과거에 칠선들이 그에게서 빼앗았던,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열쇠’를 찾기 위해 현대 칠선들을 하나씩 찾아가 그들을 제압하고, 결국 칠선들 중 막내 격이었던 자운이 지금껏 그 열쇠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흑운에 의해 선배 칠선들이 당하는 모습을 본 자운은 상환과 의진의 몸에 열쇠를 반씩 나누어 전달하고 대피시킨 뒤 혼자 남은 집에서 흑운을 맞이한다. 열쇠를 가지고 몸을 숨기려다 아버지를 두고 떠날 수 없다는 생각에 집으로 되돌아온 의진은, 흑운을 막아 내고 인질로 잡혀간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상환과 함께 흑운의 본거지인 영산으로 뛰어든다.





이렇게 삭막하게 내용 정리만 하고 보니 약간 유치하게 들리기도 하지만(사실 개인적으로도 ‘무협’이라는 장르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실제로는 ‘힘’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리게 만들 만큼 관객들에게 충분한 해석의 여지를 제공하는 작품이라고 볼 만하다. 이번에 영화를 다시 감상하며 이전에는 눈요기처럼 펼쳐지는 화려한 액션 신들 사이에서 놓치고 지나쳤던 두 개의 장면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는데, 그 둘 모두 ‘무도인’인 칠선들 간의 초인적 결투가 아니라, 모자라고 찌질한 인간들 사이, 정확하게는 "깡통"과 "상환" 사이에서 일어난 ‘쌈박질’이었다. 앞서 말했듯 영화 초반에 상환은 구역 조직이 운영하는 유흥주점에 단속을 나갔다가 조직 두목으로부터 엄청난 폭행을 당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 사회에 도인과 신선들이 버젓이 돌아다닌다는 판타지적 설정보다 더 비현실적이라고 해야 할 이 사건 속에 - 물론 조직 두목인 깡통이 부패 경찰에게 돈을 '찔러 주고' 단속 일정을 미리 귀띔 받는 등 경찰을 도구처럼 이용하는 인물이고, 다른 경찰들 역시 상환 같은 원칙주의자를 배척하며 폭력배의 편의를 봐 주는 타락한 행태를 일삼는다 해도, 같은 경찰이 폭력배에게 그토록 심한 구타를 당한다면 동료들이 가만히만 있지는 않을 테니 - 영화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숨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맥락으로, 깡통이 상환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그가 정말로 경찰을 우습게 보아서, 한갖 순경 따위를 찍어 눌러도 괜찮을 정도의 ‘빽’과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닐 것이다. 상환을 때리기 전에 내뱉는 깡통의 대사, 그들을 “깡패”라고 부른 상환에게 “경찰이 무슨 벼슬이냐”며 윽박지르는 어이없는 한마디가 특히 주목되는데, 예전에는 그냥 스쳐 지났던 말이지만 이번에는 그 말이 깡통의 불안감과 낮은 자존감, 피해의식의 표현으로 느껴졌다. 더 자세히 설명하면, 아무리 자신이 돈을 많이 벌고 경찰을 돈으로 부리듯 해도, 또 부하들을 거느리며 실질적인 영향력을 자랑한다 해도 음지 속 ‘깡패’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상환의 말을 통해 상기되었으리라는 것이다. 상환이 가진 번듯하고 떳떳한 ‘경찰’이라는 정체성을,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을 사회적 평판과 도덕적 우위를 철저히 부인하고 짓밟음으로 스스로의 결핍을 해소하려는 듯한 깡통은, 거의 발작적으로 상환을 때리고 수모를 주다가 나중에는 바닥에 쓰러진 그에게 발길질을 하며 자신의 구두를 핥으라고까지 한다. 글자 그대로 상환을 자신의 ‘발 아래’ 깔고 누름으로써 경찰인 상환이 상징하는 사회적, 도덕적 ‘힘’을 자기가 가진 ‘완력’으로 압도하고 그렇게나마 자신을 높이려는 것으로 해석되는 행동이다. 어떤 면에서 깡통은 힘이 ‘있어서’ 상환을 폭행한 것이 아니라 힘이 ‘없기에’ 더더욱 난폭하게 굴며 몸부림을 쳤다고 볼 만한 대목이기도 하다.





그처럼 '꼼꼼하게' 얻어터진 상환은 술집 화장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대고 주정을 하다가 본심을 드러내는데, 요약하면 “내가 싸움을 못하는 게 잘못”이라는 '자성적' 되뇌임이다. 피해자인 상환 또한 깡통에게 폭행을 당했던 치욕스러운 경험이 본인의 힘(이 경우엔 ‘무력’)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셈이다. 그렇다 보니 칠선 스승들에게 무술을 전수 받으며 수련을 하는 과정에서도 그는 그들이 거듭 강조하듯 “마음을 다스리는” 방식과 “자신을 버리는” 깨달음보다 당장 실전에 써먹을 수 있는 싸움 기술에만 집중한다. 오죽하면 장풍 쏘는 것만 먼저 좀 가르쳐 주면 안 되겠냐고 징징대기까지 하니 말이다(여담이지만 이때 류승범 배우의 찌질한 연기는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흘러 상환의 무술이 일정한 경지에 이르고 난 뒤 두 번째의 '중요한' 쌈박질이 펼쳐지는데, 수련을 함께 하며 제법 가까워진 의진과 상환이 식사를 하러 고깃집에 갔다가 깡통과 그 부하들을 마주치면서 벌어지는 싸움 장면에서이다. 첫 번째 쌈박질 때 상환이 깡통을 깡패라 불러 갈등이 초래되었다면 이번엔 깡통의 부하 한 명이 굳이 상환과 의진에게 다가와 시비를 걸며 싸움이 시작된다. 자신의 두목에게 ‘당하는’ 상환을 봤던 부하가 두목인 깡통의 힘이 자신의 것인 양 기세등등하게 다가와 벌어진 일이지만, 상환을 자극하던 부하는 그동안 무술 실력을 닦은 그로부터 보기 좋게 당하고 만다.


물론 이 장면이 누가 봐도 느낄 수밖에 없을 통쾌함을 선사하기는 한다. 액션 신도 시원시원할 뿐더러, 예전에 상환이 깡통에게 억울한 해를 입었던 것도, 그의 부하가 가만히 있는 상환에게 시비를 걸었던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 쌈박질 역시 씁쓸한 뒷맛을 느끼게 하는 이유는 결국 이 싸움이 상환의 ‘분풀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깡통의 부하인 폭력배는 말로 시비를 걸었을 뿐 자신에게 물리적 위협이나 위해를 가한 것이 아닌데도 상환은 그의 부하들을 자근자근 ‘밟아’ 버린다. 게다가 부하들을 모두 제압한 상환이 쓰러진 깡통을 마구 때리고 발로 찰 때는 그 모습 위로 깡통의 폭력성이 겹쳐 보일 정도이다. 예전의 깡통이 자신에게 그랬듯 상환은 더 이상 위협이 될 수 없을 만큼 무력하게 쓰러져 있는 깡통에게 - 말하자면 폭력에 대한 아무런 ‘명분’이 없어진 상태에서 - 계속해서 발길질을 하고, 그러면서 읊어 대는 "미란다 원칙"에서는 어떤 아이러니까지 느껴진다. 이것이 단지 자기가 당했던 억울한 피해와 수모의 복수이자 분풀이, 즉 ‘사적’인 응징일 뿐임에도 마치 자신이 ‘공적’인, 그러니까 정의로운 행동을 하는 양 스스로를 속이는 행동에 불과한 것이다.





반면에 의진은 상환과 달리 ‘최소한’의 힘만 이용한다. 덤벼드는 깡통의 부하들을 간단히 제압하고, 혈을 눌러 무력화시키는 것으로 상황을 정리하는 그녀는 불필요할 정도의 힘과 난폭함을 쏟아 내는 상환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럼에도 사실 여기에서 더 ‘세 보이는’ 것은 오히려 의진 쪽이다. 첫 싸움 때의 깡통처럼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힘이 없어서’ - 혹은 힘이 없었을 때의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 상대를 때리고 난동을 부리는 상환의 행동과 대조되기 때문이다. 싸움판이 정리되고 난 후 “누굴 그렇게 이기고 싶으면 네 자신부터 이기라"며 상환에게 쏘아붙이는 의진의 말은, 힘을 상대에게 무기처럼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상환과 달리 힘은 다른 누구보다 자신을 ‘절제’하는 데에 써야 한다는 - 어찌 보면 힘은 "쓰지 않음으로 인해 의미를 갖는다"는 - 그녀의 가치관을 드러내 준다.


이 차이가 영화의 주된 갈등과도 맞닿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작품 속 악역인 흑운 역시 힘을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사실 흑운은 칠선 중의 하나, 그러니까 신선 '비슷'하게 어떤 깨달음과 선함의 경지에 이르렀던 존재이며, 그를 움직이게 하는 동기 또한 흔히 추측할 만한 악한 것들이 아니다. 과거의 그는 "천륜을 거스른 자"가 세상을 다스릴 힘을 지닌 열쇠로 혼돈을 초래하면서 인간계에 생겨난 고통과 불의에 함께 괴로워했던 인물이며, 평화와 질서를 지키려는 목표(충분히 납득 가능하며 ‘대의’라고도 부를 수 있을)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평화’를 위해 싸우는 과정에서 점점 이성을 상실한 그가 결국 분노에 사로잡혀 길을 잃었던 것인데,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힘을 잃었기에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힘에 적합하지 못한 존재가 된 것이다. 이처럼 흑운 또한 자신의 힘을 상대와 상황을 통제하고 휘두르기 위한 ‘무기’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가능케 하는 '도구'로 여기는 모습을 보인다. 그의 대사에서 엿보이듯 힘은 제대로 '이용'되어야만 의미가 있다는 것이 흑운의 철학인 셈이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도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한다. 힘을 가졌다면 그것을 쓰고 휘두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조금의 불편과 불이익도 참지 않으려는 태도, ‘사이다’ 전개와 ‘참교육’을 부르짖는 문화 역시 힘은 마땅히 이용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가치관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물론 불의를 참아야 한다는, 특히 약자를 향한 불의와 폭력에 침묵해야 한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이런 세상이라면 싸우지 않음으로 이길 수 있다는 믿음, 상대보다 나를 다스리는 데에 힘을 써야 한다는 가르침이 외면 당하는 일은 어떠면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 수련 과정을 답답해 하고 장풍 쏘는 것이나 빨리 배우고 싶어 하는 상환의 태도에는 우리 대다수의 모습이, 심지어 많은 크리스천들의 모습이 담겨 있을지 모른다. 주님께로부터 ‘힘’을 전해 받기를 구하며 기도할 때 우리가 진정 바라는 것이 ‘내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힘, 나를 버리고 제어하는 지경에 이를 때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인내할 수 있는 능력일지, 아니면 일상의 불이익과 갈등 상황이라는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는 기교로서의 한입 거리 계시와 기적일지 돌아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후반부, 마침내 각성한 상환의 모습은 꽤나 고무적이다. 남을 제압하여 자신의 우위를 증명하려고, 상대를 "죽일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달려들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버리고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각오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방식으로 힘을 쓴 순간 진정한 '힘'을 그가 얻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흑운과 맞선 그는 상대가 무력해진 다음에도 계속 발길질을 하며 화를 내던 과거와 달리, 흑운이 더 이상 반격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쓰러지자 자신의 주먹에서 힘을 푼다. 이용함을 통해 가치를 부여 받고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힘이 아닌, 이용하지 않음으로 의미를 드러내고 할 수 있으나 “하지 않는” 힘에 대해 드디어 그가 깨우쳤음을 보여 주는 순간이다.





마지막 장면에서의 의진과 상환은 ‘힘’에 대한 공통된 시각과 가치관을 마침내 보여 주는 듯하다. 영웅적 투지로 세상을 구한 두 사람은 여전히 미용사가 될 공부를 하고 경찰관으로서의 근무를 수행하는 중이다. 힘으로 대단한 경지에 이르고서도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고, 영화 초반부에 나왔던 소매치기범과 동네 양아치들(여기서 류승완 감독이 껄렁한 양아치로 카메오 출연을 한다)이 나쁜 짓 못하게 겁 주는 '소소한' 용도로만 장풍을 날리면서 말이다. 어떻게 얻은 능력인데 좀 아깝지 않나 생각될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들이 가진 엄청난 '힘'을 소비하기에는 가장 적합한 방식일지 모르겠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어마어마한 ‘힘’의 잠재력을 가진 우리에게도 그들의 삶의 방식은 좋은 팁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세상을 살며 피할 수 없는 불이익과 불편들을 이 정도의 귀엽고 사소한 반항으로 대응하면서 그저 툴툴대는 정도로 해소하는, 힘을 쓰지 않음으로 진정한 힘을 누리는 삶을 사는 것도 괜찮은 일이 아닐지.




엄마 C의 시선



만화영화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제목을 가진 – 실제로도 그런 요소가 적지 않은 – 2004년 개봉작 “아라한 장풍대작전”은, “주먹이 운다”, “부당거래”, “베를린”, “군함도”, ”베테랑”, “모가디슈” 등을 통해 이제는 탄탄한 지명도를 자랑하게 된 류승완 감독의 작품입니다. 액션 영화로 점철되다시피 한 초기 작품들 때문에 “충무로 액션 키드”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던 류승완은 자신의 연출작을 포함한 총 10편 정도의 영화에 배우로 출연했을 만큼 연기 분야에도 일가견을 보이는 감독으로,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 함께 자라다 보니 배우의 길로 이끌지 않으면 사고나 치고 다닐 것 같았다는 동생 류승범의 범상치 않은 연기력을 생각할 때, 두 사람의 그 같은 재능은 타고난 능력이 아닐까 짐작하게 됩니다.


감독 류승완과 배우 류승범에 대해 제가 개인적으로 남다른 ‘친밀감’을 느끼는 이유가 한 가지 있는데, 저희 딸의 어린 시절 이제 막 새로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서울종합촬영소”에 – 지금은 “남양주종합촬영소”로 명칭이 바뀌었다지만 – 가족들이 방문했을 때 “다찌마와 Lee”라는 단편영화를 촬영하던 그들의 모습을 우연히 목격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당시엔 영화 제목뿐 아니라 류승완 감독이나 류승범, 임원희, 안길강 같은, 지금은 가까이에서 얼굴 보기도 쉽지 않을 배우들이 모두 낯설기만 하던 터라 “이 사람들이 지금 뭘하고 있는 건가” 정도로 생각하며 무심히 지나쳤지만, 시간이 꽤 지난 후 저희가 목격한 것이 '희대의 걸작’을 촬영하던 그들의 모습이었음을 깨닫고 나니 당시의 장면들을 사진으로라도 남겨 둘 걸 하는 아쉬움이 있더군요. 복고풍, 신파조의 분위기를 추구하는 그 영화에서 의도적으로 유치하게 만든 대사 가운데 “우리들의 지금까지 삶은 '하얀 까마귀'와 같은 삶이었다. 백로가 되고 싶어 온몸에 밀가루칠을 한 하얀 까마귀... 그러나 그 까마귀는 비가 오는 날이면 두려움에 떠는 것이다. 자아! 우리 이제 맹세하자꾸나! 양과 같이 순한 삶을 살기로!”라는 부분은, 그저 웃자고 하는 말로 넘겨 버리기에는 나름 ‘성경적인' 가르침도 숨어 있다고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서론이 좀 길어지긴 했지만, “한국형 도시무협” 영화를 표방하는 “아라한 장풍대작전”은 동양 문화권에서 ‘영적’ 힘에 대해 다룰 때 종종 언급되곤 하는 “기(氣)”라는 것의 존재와 그 '사용 방식’에 초점을 두고 있는 작품입니다(물론 코미디이기에 주로 해학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신참 경찰인 “상환”은 국회의원 차량에도 주저 없이 신호 위반 스티커를 발부하고 조폭과 공생하며 뇌물을 받는 선배 경찰에게 강력히 항의할 만큼 정의감과 준법 정신이 투철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그 의원의 운전기사에게 반말이나 듣고 조폭들에게 비오는 날 먼지 날 만큼 얻어맞기나 할 만큼 힘없고 어리버리한 청년입니다. 교통 단속 중 목격한 소매치기범을 쫓다가 그 범인을 먼저 쫓아와 혼내 주고 있던 또 다른 주인공 “의진”의 장풍에 잘못 맞아 기절한 후, 자기도 모르게 ‘실려 갔던’ 그녀의 집에서 수상한 중년 남녀에게 둘러싸여 깨어났던 그는, 스스로를 “칠선(七仙)“이라 자처하며 자신에게서 남다르고 특별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부추기는 그들에게 조소를 보내곤 곧장 그 집을 떠나 버립니다.


그러나 조폭들에게 무참한 폭행을 당한 뒤 장풍을 배워 그들을 혼내 주겠다는 '결기'에 찬 상환은 다시 의진의 집으로 찾아가고, 이후 길고 지루한 수련 기간을 보내면서 자신이 전혀 모르던 사실들에 대해서도 듣게 됩니다. 보통 사람은 잘 깨닫지 못하지만 세상에는 ‘도’의 경지에 이른 이들이 여기저기에 있는데 – 영화 속 설명에 따르면 고층 빌딩에서 외줄을 타고 작업하는 노동자, 여러 층의 쟁반을 머리에 이고 음식을 나르는 식당 아주머니, 산처럼 쌓인 물건을 흔들림 없이 실어 나르는 오토바이 배달 기사같이 “자기 분야에서 끊임없이 노력해 도의 경지에 이른 사람도 그 도인들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것으로 – 그 가운데에서도 인간과 신선의 사이에 위치하는 득도한 남녀가 “마루치”와 “아라치”이고(‘국산’ 애니메이션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에서 따온 명칭인), 이 마루치와 아라치의 경지에 오른 자가 아라한(阿羅漢: 깨달음을 얻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성자를 일컫는다는)의 열쇠를 가지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위치와 능력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상환의 연마를 돕는 칠선들은 이 열쇠가 악의 무리에게 넘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이들로, 그들 가운데 하나였지만 무력으로 평화를 지키겠다는 생각에 악의 화신이 되어 버린, 이후 특정 지역에 가두어진 “흑운”의 봉인이 얼마 전 깨지면서 '부활'했다는 사실과 함께 말이지요.





뛰어난 무술 실력을 습득하게 된 상환이 자신에게 모욕을 가했던 조폭 집단에게 똑같이 복수하는 액션 신을 제외한다면, 이후 대부분의 내용은 “마루치”와 “아라치”, 즉 상환과 의진이 “흑운”과 대결하면서 아라한의 열쇠를 지키기 위해 처절히 싸우는 장면들로 채워집니다.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소수의 악랄한 특권층과 선하지만 약한 대다수 소외 계층 간의 갈등 구도를 그리곤 하는 감독 류승완의 작품인 만큼, 더운 계절에 '가볍게' 볼 수 있는 액션/코미디 장르로 선택한 영화임에도 그 안에서 발견되는 메시지들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상환의 직속 상관인 “최 경장”이 임무 수행에 최선을 다하려 애쓰는 그에게 “열심히 뛰는 것보다 사람들 보는 앞에서 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조언을 하거나, 조폭들에게 실컷 맞고 나온 상환을 향해 “세상이 원래 그런 거야, 너무 세면 부러져” 같은 말을 대놓고 건네는 등의 장면을 통해서 말입니다.


나름대로 ‘영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영화이기에 신앙인의 시각에서 적용되는 부분도 – 비록 제작자들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더라도 – 적잖이 발견됩니다. ‘맑은’ 기운과 ‘탁한’ 기운으로 양분되는 ‘기(氣)'라는 것 간의 충돌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적 전쟁에 대입시킬 수 있는 측면이고, 처음에는 신선들 중 한 명이었지만 자신의 ‘의’에 빠져 스스로 “아라한”이 되겠다고 나서면서 폐쇄 지역에 봉인되는 “흑운”은 애초 천사였다가 악마로 전락해 암흑 속에 갇히게 된 타락 천사(벧후 2:4; 유 1:6)의 존재를 연상시킵니다. 물론 한국을 포함한 동양권에서는 ‘영(spirit)’의 영역을 ‘기’라는 개념으로 해석하며 주술적, 샤머니즘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전통적 접근 방식이기는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그런 사고 자체도 신(gods) 중의 신(God)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해 생겨난 왜곡된 관념일 뿐 본시 같은 본류를 근간으로 하는 신념 체계이리라 추정합니다. 역시 동양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아라한”이라는 존재(세상에 숨어 있는 신성한 기운을 ‘깨워’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한다는)의 표상처럼 그려지는 상환이 처음에는 평범하고 어리숙한 인물에 불과했지만 점차 잠재된 자신의 '힘'을 발견하며 놀라운 능력을 보여 가는 -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의 주인공 “네오(Neo: One/the One의 알파벳 순서를 뒤섞은 이름인)”를 떠올리게 하는 - 과정도 ‘구원자(Saviour)’라는 존재를 향한 인간의 잠재적 열망을 시사하는 요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영화에서 “흑운”의 분노한 모습과 오버랩되며 보여지는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 여러 건물들에 발생한 화재 현장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물론 그와 같은 사고들 모두를 '사탄’이 일으킨 재앙으로가 아니라 미리 점검하고 예방할 수 있었던 인재(人災)로 이해해야 함은 분명하지만, 공사비를 줄여 착복하겠다는 욕심, 그런 부패 행위를 눈감아 달라며 건넨 뇌물을 챙기는 탐심 등이 야기한 부실 공사, 부실 행정의 결과인 만큼, 결국 악한 일의 배후에는 어둡고 타락한 ‘영적’ 세력이 도사리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본향인 천국에 이를 때까지 우리가 머물어야 하는 이 세상이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the ruler of the kingdom of the air)”, 즉 “지금 불순종하는 이들 가운데 활동하고 있는 영(the spirit who is now at work in those who are disobedient)”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음은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는(엡 2:2) 새삼스러울 것 없는 사실이지만, 한 세대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끔찍한 일들이 매일 뉴스를 채우는 세상이 되고 있는 현실 자체를 어두운 영의 득세가 점점 심해진다는 신호로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화에서 언급하는 “손자병법”도 가르쳐 주듯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로울 것이 없다(知彼知己 百戰不殆)”는 사실을 특히 명심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 여기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물론 하나님께서 '대신' 싸워 주시는 전쟁을 치루고 있는 우리는 그보다 더 높은 경지인 (스스로 나서) “싸우지 않고 이기기(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의 ‘묘책’을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기쿠지로의 여름: ‘네’ 안에 ‘나’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