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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anne Sep 08. 2023

죽은 시인의 사회: 살아 있는 시로 남게 되기를

엄마 C의 시선



1989년 개봉되었던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는 영화의 제목만 들어도 먼저 그의 얼굴을 떠올리게 되는 배우 로빈 윌리엄스(Robin Williams)가 주연을 맡고 - 영어 교사인 "존 키팅(John Keating)"의 역할로 – “위트니스(Witness)”와 “트루먼 쇼(The Truman Show)” 등 한국에도 잘 알려진 영화들을 감독한 노장 피터 위어(Peter Weir)가 연출을 맡은 작품입니다. “위트니스”도 제가 무척 인상 깊게 봤던 영화인 데다 “트루먼 쇼”는 저희의 글에서도 다룬 적이 있는 작품인 만큼 저 개인적으로는 피터 위어 감독의 영화에 대해 “믿고 봐도 좋다”는 어느 정도의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6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등 4개의 주요 부문에 후보로 올랐던 이 영화는 그 가운데 각본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 나머지 3개 부문을 놓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 탄탄한 스토리를 자랑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1959년을 시대 배경으로, 미국 버몬트에 위치한 보수적 분위기(성공회 산하)의 남자사립학교 “웰튼 아카데미(Welton Academy)”에 새로운 영어 선생님이 부임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는 이 작품은, 시와 문학에 대한 특별한 사랑과 자신만의 독특한 교육 방식으로 틀에 박힌 삶을 강요받던 학생들에게 새롭고 신선한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키팅 선생님과 그에 반대하는 ‘세력’ 사이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과 갈등 상황이 스토리라인의 중심을 이룹니다. 전통(Tradition)과 명예(Honor), 규율(Discipline)과 탁월함(Excellence)을 4대 원칙으로 하는 명문 사립 웰튼 아카데미는 대부분 아이비리그 출신인 학부모들이 자신의 자녀들도 그런 ‘가문의 전통’을 이어 가게 하려는 목적으로 교육을 맡긴 귀족적 분위기의 학교이지요. 학생들 모두가 기숙사 생활을 하며 학업 성적 향상에 전력을 기울이는 이 학교의 분위기는, 사실 영화의 각본가 톰 슐만(Tom Schulman)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그려진 것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영화의 내용처럼,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애쓰느라 자신이 원하는 바는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채 계속되는 학교생활의 문제점을 누구보다 절감하고 있었을 작가가 영화로나마 본인이 꿈꾸던 이상적인 학교와 교사의 모습을 – 아쉽게도 행복한 결말로 마무리되지는 않지만 – 그려 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첫 수업부터 자신들이 ‘듣도보도 못한’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키팅 선생님에게서 이질감과 공존하는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된 학생들은,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의 시 – 1866년 지어 링컨 대통령에게 바쳐졌다는 – “오 캡틴, 마이 캡틴(O Captain! My Captain!)”의 제목을 따 자신을 “캡틴”으로 불러 달라거나 “오늘을 잡아라(Seize the day)”라는 의미의 문구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삶의 모토로 삼으라고 가르치는 '이상한' 선생님에게서 적지 않은 감화를 받게 됩니다. 자신들의 학교 선배이기도 한 키팅 선생님이 학생 시절 친구들과 함께 운영했다는 고전문학 클럽 “죽은 시인의 사회”를 '계승'하고 싶은 마음에 같은 이름의 그룹을 만들어 비밀리에 활동을 시작하기도 하지요. 짝사랑하는 여학생에게 자신이 쓴 시로 사랑 고백을 하는가 하면 남학생만 있는 학교를 남녀 공학으로 바꾸자는 건의를 학보에 싣는 등 그 또래 소년들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들을 배우면서 학생들은 “본래 그랬어야 할” 삶의 모습을 찾아 가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아름다운 삶은 현실에서 오래 가지 못하는 법, 아들을 의사로 만드는 것이 목표인 아버지로 인해 큰 심적 부담을 느끼면서도 뭔가 다른 삶을 동경하던 모범생 “닐(Neil)”이 교내 연극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에서 주연을 맡으며 자신의 소망을 실현하려는 ‘꿈’을 꿔 보지만, 엄격하기만 한 아버지가 공연이 끝나기 무섭게 집으로 데리고 가선 당장 예비 사관학교에 전학시키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자 그날 밤 집에서 권총으로 자살해 버리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닐의 부모는 아들의 죽음을 자신들의 과오로 인정하지 못하고 이 일이 결국 아이들에게 ‘쓸 데 없는’ 생각을 심어 놓은 키팅 선생 때문이라며 책임을 전가하고, 교장인 “놀란(Nolan)” 역시 재학생의 자살이라는 큰 사건이 학교에 다른 파장을 몰고 오지 않게 하기 위해 키팅 선생님을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기획’합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모임의 존재를 학교에 알리고 키팅 선생님이 닐의 죽음을 유발했다며 앞장서 나섰던 “리처드(Richard)”를 포함해, 선생님의 책임을 인정하면 클럽 활동 전력을 문제 삼지 않겠다고 부모님까지 ‘대질’시켜 겁박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진술 서류에 사인한 학생들로 인해 키팅 선생님은 결국 학교에서 파면당하는 처지가 되지요.





한국에서는 1990년의 개봉 후 2016년 재개봉이 이루어졌고 “다시 보고 싶은 영화” 역대 1위로 꼽혔을 만큼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는 사실 자체에 답답한 교육 현실을 우려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여기에서의 진정한 문제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런 ‘문제’ 의식이 막상 자신에게 닥친 개인적 현안이 되면 – 자신의 자녀와 직결된 사안이 되면 – 그같이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지기 시작한다는 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도 영화에서는 억울하게 파면당한 선생님을 위해 그 엄한 교장 앞에서까지 학생들이 책상 위에 올라서서 키팅 선생님을 지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는 마지막 장면으로 마무리가 되지만, 실제 현실에서, 특히 한국의 교실 현장에서, 뚜렷한 소신으로 자신들을 교육하다 해고된 교사를 위해 정학이나 퇴학 등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존경심을 표할 학생이 몇이나 될까 의심하게 되는 것이, 안타까운 오늘날의 실상입니다.


암담한 한국 교육의 현실에 대해 듣게 될 때마다 개인적으로 특별한 우려를 갖게 되는 것은 40년 간 교단에 서셨던 엄마를 보며 자란 딸의 시각이라는, 남의 일로 치부하기 어려운 입장 때문일 텐데, 이제는 켸켸묵은 옛이야기가 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나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 등의 정신이 여전히 남아 있던 시대에 교직에 몸 담으셨던 분임에도 퇴직 후 1년도 채 되기 전에 암이 발병하고 또 그 이후 1년을 조금 넘겨 돌아가시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 보며 ‘교사’라는 직업의 정신적 중압감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었던 저로서는, 지금과 같이 교사의 권위가 전혀 존중 받지 못하는 - 땅에 떨어진 정도가 아니라 발로 밟힌다고 해야 할 - 시대에 교단을 지키고 계신 선생님들의 ‘마음 상태’가 과연 어떤 것일지 상상하기조차 두렵습니다.





성경에서도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Let the one who is taught the word share all good things with the one who teaches; ESV)”라는 교훈(갈 6:6)을 통해, 그리고 우리 예수님께서 가르침을 베푸는 “선생님”으로 늘 불리셨다는 사실에 의해, ‘가르침’의 수고가 얼마나 크고 귀한지 방증되어 있는 만큼, 부디 자녀들의 귀감이 되어야 할 – 영화에 등장하는 학생들이 그렇듯 모든 자녀들이 늘 기쁨을 드리고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해 드리고 싶어 하는 대상인 – 부모님들이 선생님을 “교사”로만이 아니라 “스승”으로 대우하는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문제 부모’는 있어도 ‘문제아’는 없다”는 말을 굳게 믿고 있는 저로서는 가정에서 부모들이 선생님에 대해 (무심코) 표현하는 말 한마디, 취하는 행동 하나 때문에 자녀들이 ‘문제 학생’, 선생님에게 폭언과 폭행을 가하는 학생으로 돌변할 수 있음을 우려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개봉 후 한때 크게 유행했던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라틴어 어구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키팅 선생님이 예시했던 “To the Virgins, to Make Much of Time”이라는 찬송가에서의 “Gather ye rosebuds while ye may(시간이 허락하는 동안 장미 봉우리를 거두라)”라는 가사는 “세월을 아끼라(Use your time in the best way you can; ERV)”라고 명하는 서신서의 구절들(엡 5:16; 골 4:5)을 떠오르게 하고. 무모한 용기로 교장에게 반항한 “찰리(Charlie)”를 꾸짖으며 키팅 선생님이 건넸던 “대범해야 할 때가 있고 조심스러워야 할 때가 있다(There’s a time for daring, and there’s a time for caution)”는 조언은 전도서 3장 1-8절에 기록된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는 취지의 말씀을 기억나게 합니다. 그 무엇보다, 가장 소심하고 유약한 학생이던 “토드(Todd)”가 짐을 챙기러 교실에 들른 선생님과 눈이 마주친 후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책상 위에 올라서서 “O Captain! My Captain!”을 혼자 외칠 용기를 보이는 마지막 장면은, 비록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지만 그분의 ‘다정한’ 눈빛과 마주친 후(눅 22:61) 회개의 사람으로 거듭난 베드로를 떠올리도록 하더군요. 역시 삶의 중요한 지혜와 가치는 그 정점에서 서로 만나는 모양입니다.




딸 J의 시선



1989년 개봉작인 [죽은 시인의 사회]는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영화들 중 하나일 뿐 아니라, 2021년 4월 재개봉을 했을 만큼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관객과 평단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 온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작품에서 중요하게 쓰인 “Carpe diem"이라는 - "Seize the day"라는 뜻이며 “눈앞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 혹은 “현재를 즐겨라”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 라틴어 구문이 꽤 친숙할 것으로 생각되고 말이다. 나뭇잎이 붉게 물들며 새 학기가 시작되는 가을이 올 때마다 생각나는 영화인 데다 최근 한국 학교에서 일어나는 안타까운 비극들과도 맥락이 연결된다는 생각에 이번 편의 글에서 다룰 영화로 선택하게 되었다.


영화는 1959년 미국, 남학생들만의 기숙학교인 명문 사립 고등학교 "웰튼 아카데미"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100년의 전통을 가진 웰튼은 졸업생의 75% 이상이 아이비리그로 진학한다는 사실을 개학식 행사에서 교장이 자랑할 정도로 '노골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는 prepatory school, 말 그대로 대학 입학 준비에 총력을 쏟는 학교이다. 영화는 이번 학기에 새로 전학 온 학생 "토드(에단 호크)"의 시선을 따르면서 그의 새로운 룸메이트이자 학교 내 인기 학생인 "닐(로버트 션 레오나드)", 로맨티스트 "녹스(조쉬 찰스)", 반항아 "달튼", "피츠", "믹스" 등의 친구 무리를 고루 비춘다.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는 이들은, 록 음악이 나오는 라디오 주파수를 잡으려고 몰래 시도해 보거나 학교의 모토를 비꼬면서 자기들끼리 장난을 치는 등 지루하고 딱딱한 학교 생활 속에서 나름의 소심한 ‘반항’을 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의사나 변호사, 은행가처럼 자신들의 미래를 미리 계획해 놓은 부모님의 뜻을 어기지 못한 채 순응하며 살아가는 착한 소년들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무료한 일상은 새로 부임한 영어 교사 "존 키팅(로빈 윌리엄스)"으로 인해 신선한 변화를 맞게 된다. 지루한 설명을 늘어놓는 다른 교사들과 달리 그는 첫 수업을 복도에서 열거나 월트 휘트먼의 시를 인용하며 자신을 "캡틴(O Captain, My Captain)"이라고 불러도 좋다는 농담을 하는 등 파격적인 수업을 이어 나간다. 철저히 설계된 교육과정에 따라 ‘진도가 정확한’ 학습에만 익숙하던 학생들에게 키팅은 언어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의 중요성과 시를 읽는 즐거움 등을 가르치며 아이들이 ‘독립적으로’, 또 ‘자주적으로’ 사고하도록(think for oneself) 격려하는 독특한 교육 방식을 선보인다. "대학에 들어가고 나면" 원하는 대로 살게 해 주겠다는 부모의 압박과 달리 "현재의 순간을 흘려 보내지 말라"고 독려하면서 그들 내면에 있는 시와 문학을 향한 열정, 삶에 대한 갈망을 이끌어 내려는 키팅의 가르침을 처음에는 어색해 하던 아이들도 점차 그의 신념과 철학에 매료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아버지의 통제 아래 억눌려 있던 닐은 키팅의 지도를 갈급한 마음으로 '흡수'하면서 웰튼에서의 학생 시절 키팅이 지휘했다는 비밀 모임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를 친구들과 부활시키기까지 한다.


포스팅할 글을 쓰기 위해 예전에 좋아했던 영화를 다시 감상하다 보면 더 이상 작품이 전처럼 마음에 와 닿지 않음을 발견하는 경우가 간혹 있기도 하지만, 다행히 이번 영화는 어릴 적 봤던 때와 똑같이 – 어쩌면 그보다 더 – 좋다는 확인을 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처음 영화 관람을 앞뒀을 땐 "죽은" 시인 운운하는 제목 때문에 뭔가 음울하고 심각한 작품을 예상했다가 실제로는 따뜻하고 유쾌한 분위기임에 '안도'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번에도 영화를 보는 내내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되는 대목이 많았다. 예전에 영화를 감상했을 때는 '오빠' 뻘, 혹은 내 또래였던 등장인물들이 이제는 한없이 어리고 귀여워 보여서인 듯도 하지만(실제로 영화 시작과 함께 배우들의 면면을 다시 보면서 “다 애기들이네”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으니) 객관적으로도 영화 속의 친구들은 ‘순수’와 ‘무해함’이라는 표현을 절로 떠올리게 만드는 아이들이다. 사춘기와 학업 스트레스라는 이중의 폭탄을 지고서도 이 아이들은 정말로 귀엽고 얌전하게 행동한다. 그나마 반항을 해 보겠다고 모여서 시작한 "죽은 시인의 사회" 활동 또한 따지고 보면 밤에 기숙사를 몰래 빠져나가 동굴에서 ‘시 낭송’을 하는 것이다. 아니 이렇게 건전한 탈선이 어디 또 있겠는가?





물론 자기들끼리 담배를 피우는 등 나름 '보편적인' 일탈을 하기도 하지만, 멤버 중 한 명인 녹스가 첫사랑 여학생을 만나러 일반 고등학교 학생들이 연 파티에 갔을 때 다들 술에 거나하게 취하고 과감한 애정 행각을 벌이는 모습에 몹시 당황하는 것만 보더라도 이 소위 ‘금수저’ 학생들이 얼마나 순진하고 성실하게 살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게다가 이 귀엽고 순수한 학생들이 키팅 선생님과 웃고 떠들고 또 고민하면서 여태껏 인생의 전부처럼 여겼던 ‘성적’보다, 그리고 미래의 '성공’보다 중요한 무언가를 조금씩 찾아 나가는, 새싹이 푸릇푸릇 돋듯 성장하는 모습은 정말로 사랑스럽게 여겨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사랑스러울수록 그들의 부모와, 또 대부분의 교사들이 그들에게 행하는 통제와 압박은 더욱 잔인하고 안타깝게 느껴진다. 대다수 부모들이 저런 자식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라고 여길 만한 아이들을 두고는 한 순간이라도 경계를 늦추면 크게 엇나가 진탕에 빠지기라도 할 것처럼 닦달하며 볶아 대는 비극이라니. 자식을 본인의 야심이나 욕망을 채워 줄, 혹은 손상된 자존심을 회복시켜 줄 ‘도구’로만 인식하는 부모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 속 부모들의(또 다른 어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아이를 ‘신뢰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학생들 스스로 생각하고 깨달으며 판단하길 권장하는 키팅에게 교장을 포함한 주위 교사들은 "고작 17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들이 어떻게 자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겠냐고 주의를 준다. 대학 입시에만 치중하면 나머지는 "저절로 될 것(the rest will take care of itself)"이라며 키팅의 교육 철학을 묵살하는 교장의 말은 그래서 더 섬뜩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아이들의 부모 또한 자녀에 대한 인식이 별반 다르지 않다. 영화 속 학생들 중 실질적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닐의 아버지에게서 이런 태도가 유난히 두드러지는데, 아들의 ‘말대꾸’를 용납 못해 분노를 터뜨리곤 할 정도로 고압적이고 딱딱한 그는, 하버드 의대에 진학해 의사가 되는 것만이 닐 인생의 유일한 목표이자 목적인 것처럼 굴면서 아이의 취미나 취향, 기쁨과 행복 등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도리어 슬프게 생각될 만큼, 잘생기고 사교적이며 공부까지 잘 하는, 전교회장에다 "엄친아" 그 자체인 닐은 아버지의 지나친 관심 ‘덕분에’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자란 학생이다. 물론 10대 청소년이기에 미흡하고 미숙한 부분도 아직 있지만, 다양한 성격의 친구들과 모두 조화롭게 지낼 만큼 뛰어난 리더십을 지녔을 뿐 아니라, 특출한 형의 그늘 아래 자라면서 소심하고 자존감이 낮아진 같은 방 친구 토드를 다정하게 품으며 자신을 밀어내려 선을 긋는 그에게 포기하지 않고 다가가기도, 형보다 못한 자기에게 무심한 부모님이 작년과 똑같은 생일 선물을 보냈다는 사실에 우울해 하는 그를 재치있게 위로하기도 하는 등 남다른 인성과 감성 지능을 보이는 아이이다. 키팅의 가르침대로 의미 있는 삶을 찾고 추구하던 그가 ‘연기’라는 오랜 꿈에 도전하기로 다짐하는 순간에는, 열정과 행복, 기대감으로 반짝거리는 그의 영혼이 아이의 눈을 통해 비춰지는 듯할 정도이다.


이처럼 남들에게도 보이는 아이의 찬란함이 부모의 눈에만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슬프고도 아이러니하다. 닐이 오디션을 통과해 연극 무대에 서게 되었음을 뒤늦게 알게 된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뜻에 ‘거역’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자녀가 연기자라는 불안정한 직업보다 안정된 의사의 길을 택하기 바라는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닐의 아버지가 아들의 꿈을 무시하는 이유는 바로 아이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들이 스스로의 판단으로 자신이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는, 또 그런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의 변덕 정도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심지어 키팅이라는 그 새 교사가 너에게 헛바람을 넣었냐,는 식으로 아이의 자아를 무시하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인간의 약함과 악함을 가장 정확히 아시면서도 당신의 부족한 자녀들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신, 그들이 스스로 선한 길을 택해 이루어 낼 가능성과 잠재력을 신뢰하신 주님을 생각하면, 오만을 넘어 기만으로까지 느껴지는 태도이다.





그래서 그 다정하고 지혜로우며 단단하던 닐은 아버지 앞에서만은 주눅 들고 볼품없어진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은 결국 자신의 의지대로 연극 공연을 - 성공적으로 - 마친 아들을 몰아세우는 아버지 앞에서 닐이 하고 싶던 말을 속으로 삼켜 버리는 대목인데, 아이가 아버지로부터 이해와 신뢰를 얻는 일을 포기하며 ‘자신’을 놓아 버리는 순간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닐의 아버지는 아이의 내면과 자아의 힘을 믿지 않음으로, 주체적으로 삶을 선택하고 일궈 낼 수 있는 주체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열정적이고 생기 넘치던 아이를 너무도 무력하고 초라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자기 자신’을 아버지로부터 부정 당한 닐이 아버지의 권총을 이용해 자살하게 된다는 사실도 퍽 의미심장하다. "네가 네 삶을 망치게 놔두지 않겠다"는 명목으로 휘둘러지던 부모의 독단이 결국은 자식의 삶을 망쳤음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을 테니.


이 글을 준비하는 동안 인공지능의 도약적인 발전에 따라 한동안 화두가 되었던, AI가 교사를 대체할 수 있느냐는 주제가 다시 대두되었다. 개인적으로도 그랬지만 많은 사람들이 – 특히 많은 부모들이 – 그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로봇이 사람을 대리하는 것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 외에도 아이를 가르치는 일이 단순하게 지식을 ‘전달’하는 행위, 혹은 특정 시간 동안 아이를 ‘돌보는’ 임무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근본적 믿음 때문이리라고 생각된다. 지식 전달과 돌봄을 넘어선 교사의 의무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영화 속 키팅의 교육 철학으로 대변되는 견해에 가장 크게 공감하는 입장이다. 한마디로 아이가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교육의 궁극적 목표라는 의견인데, 달리 말하면 아이가 주체적 인격체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모든 교육과 조력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신념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런 면에서 나는 부모님과 선생님이 아이의 삶에서 똑같은 역할을 나누어 갖는다고 믿는다. 부모와 교사가 아이에게 주어야 할 도움이 사회적으로 선망되는 직업과 지위를 쟁취해 ‘잘 살 수’ 있도록 지식과 노하우를(혹은 편법을) 전수하면서 닦아 놓아 주는 길은 아님이 분명하며,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이 치열하고 혼란한 세상 속에서 아이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길을 가게 되더라도 – 그러니까 좀 ‘못 살게’ 되더라도 – 본질적 염려는 할 필요 없는,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며 주어진 것들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도록 이끄는 가르침일 테니 말이다.





요즘 세상에선 참된 ‘스승’을 찾기가 어렵다는 말이 여전히 들려 온다. 물론 한때 교사라는 위치를 악용해 과하고 무분별한 체벌, 신체적 혹은 정서적 학대를 가하는 인물이 아이들에게 상처를 남기는 일도 분명히 있기는 했다. 모든 교사들이 교직에 적합한 인성과 감수성을 가진 것은 아닐 테니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신뢰를 당연한 권리처럼 요구하는 것 또한 옳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아이들에 대한 사랑 하나로 자신의 자리에서 지금도 분투 중인 많은 선생님들에게 진정한 ‘스승’이 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아이를 신뢰하고 그 내면과 자아를 보호하는 대신 "대학에만 가면 다 해결될 것"이란 식으로 성적과 입시에만 중점을 두느라 그와 의견이 다른 많은 교사들의 영혼을 그저 꺾어 버린 것은 아니었을지. 어린 자녀가 학급에서 조금이라도 ‘불이익’을 당했다고 생각되면 분노하며 민원을 제기하는 일부 부모들의 심리는 결국 자신의 아이에게 그 어떤 스승도 필요치 않다는 의사 표현으로 간주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타인, 또래 친구는 물론 선생님을 포함한 주위 어른들까지 내 아이를 잘 먹고 잘 살게 하기 위한 여정 속에서의 도구, 혹은 방해물로만 여기는 인식의 일부이기도 하고 말이다. 바꿔 말하면 이들에게는 자신의 아이가 어떤 불편이나 곤란, 속상함 등을 혼자 이겨 내면서 옳음과 그름, 합리와 불합리를 구분할 능력을 얻을 자존적 존재라는 신뢰가 없는 것이다. 아이가 아주 작은 어려움을 겪는 것조차 질색하기에 바빠, 그를 사랑으로 채우고 단단하게 자라도록 지탱해 주는, 영혼에 날개를 달아 줄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자기 손으로 쫓아낸다는 역설이 서글플 뿐이다.


닐의 자살로 혼란에 빠진 웰튼 아카데미는 책임과 오명에서 벗어나는 탈출구로서, 독특한 교육 방식 때문에 이미 미운털이 박혀 있던 키팅을 제물로 삼게 된다. 닐의 죽음을 미처 슬퍼할 겨를도 없이 교장과 부모들의 강압에 시달려야 했던 토드와 그 친구들은, 키팅이 학생들의 탈선과 부적절한 행동을 조장했으며 닐에게 연기에 대한 집착을 불어넣어 결국 죽음에 다다르게 했다는 진술서에 서명하게 된다. 아이들이 스스로 일구어 낸 자유와 즐거움을 향한 추구는 어른들의 잘 짜여진 각본에 의해 철없던 시절 한때의 실수, 악한 자의 유혹으로 입은 피해쯤으로 전락하고 만다. 아끼던 제자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키팅 또한 해고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물건을 가져가기 위해 마지막으로 교실에 들렀다가 제자들과 마주치게 된다.





아이들은 죄책감에 그의 눈길을 피하지만, 토드는 결국 참지 못하고 키팅에게 학생들 모두 억지로 진술서에 서명한 것이라며 사과를 전한다. 그의 입을 막으려는 교장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토드는 책상 위에 올라서서 키팅을 "캡틴"이라 부른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던 토드가 키팅에게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존경과 사랑의 표현인 셈이다. 그의 행동에 용기를 얻은 다른 학생들도 토드를 따라 책상 위로 올라서서 키팅을 배웅하는 유명한 장면이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오래전엔 [Spartacus], 좀 더 최근에는 [변호인] 같은 작품에서 쓰인 연출적 문법이 이제는 조금 진부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집단을 따라가는 ‘관습적 순응’에의 경각심을, 그리하여 독립적인 자아를 일깨우려 애썼던 키팅에게 아이들이 주체적 ‘공동체’로서의 연대를 보여 주었다는 점이 가슴 뭉클하게 느껴진다. 닐을 잃고 비탄과 자기 회의에 빠져 있었을 키팅에게 그의 방식이 틀리지 않았고 분명한 ‘의미’를 가졌으며, 아이들의 영혼을 통해 ‘결과’를 낳았음을 보여 주었다는 사실 또한 관객 모두에게 위로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서로를 바라보는 키팅과 제자들의 얼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지만 더없이 다정하고 따뜻한 빛과 온기가 흐른다. 키팅이 돌아서서 교실을 떠났음에도 그들이 ‘이별’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이유이다.


젊은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과 상처로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난 선생님들 또한 분명 자신의 학생들에게, 또 누군가에게 이런 '의미'와 '결과'를 남겼으리라 확신한다. 언젠가는 반드시 드러날 그 열매를 보게 될 때까지 견디는 일마저도 힘겨웠을 만큼 이 사회가 그들에게 시리고 매정한 곳이었다는 사실이 가슴에 사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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