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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anne Oct 13. 2023

붉은 수수밭: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어두움

딸 J의 시선



어린 시절 펄 S. 벅의 소설 [대지]를 무척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몇 번이나 반복해 읽었을 만큼 좋았던 이유가 여러 가지였겠지만 그중 하나는 중국 ‘민초’들의 삶이 한국인의 그것과 닮은 점이 많다고 느꼈기 때문인 듯하다. 물론 한국이 이겨 내야 했던 고통과 수모의 역사에 중국도 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제국주의를 앞세운 일본에게 저항했던 경험을 공유해서인지 중국 민중들에 대한 이야기에는 늘 어떤 정서적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


이제는 ‘거장’이라 불리는 장예모 감독의 1988년작 [붉은 수수밭]은 이처럼 왕실의 암투나 권세가들의 다툼이 아닌, 평범한 서민들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짧게 정리해 말한다면 한 여인의 굴곡진 삶을 통해 시대의 비극과 아픔을 표현한 이야기라고 요약될 수 있겠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삶을 되짚는 내레이터의 목소리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얼마 전인 1930년대의 중국에서 결혼을 위해 고향을 떠나는 18세의 "추알(공리)"을 조명한다. 가난한 집의 아홉째로 태어난 그녀는 나귀 한 마리에 팔리다시피 십팔리 고개에서 양조장을 하는 "리씨"에게 시집을 가게 된 처지로, 리씨가 ‘문둥이’라 불리며 경멸 받는 한센병 환자인데다 나이도 50이 넘었다는 사실로 인해 큰 절망에 빠져 있다. 





하지만 신부의 얼굴을 가리는 붉은 면사포를 계속 쓰고 있어야 불행해지지 않는다는 당부에도 가마를 타자마자 홱 벗어 버리는 추알의 모습에서는 어떤 반항심, 혹은 고집스러운 의지가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자신을 낯선 남편의 집으로 데려다 주고 있는 이름난 가마꾼 위잔아오를 흘끔대며 훔쳐볼 정도의 당돌한 모습도 보여 준다. 그렇게 가마를 타고 가던 신부 일행은 씨를 뿌린 자도, 거둔 자도 없이 자라 귀신의 것이라고 불린다는 붉은 수수밭을 지나게 된다. 어딘가 으스스한 느낌에 걸음을 재촉하던 그들은 얼굴에 자루를 쓰고 권총을 든 도적과 맞닥뜨리는데, 자신을 유명한 무법자 "신창삼포"라고 소개한 그는 일행의 돈을 뺏는 것도 모자라 어리고 아름다운 신부를 수수밭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한다. 태연하게 가마에서 나온 추알은 자신이 훔쳐보던 가마꾼 위잔아오에게 미묘한 눈길을 계속 건네고, 결국 위잔아오는 용감하게 도적을 덮쳐 그녀를 위기에서 구한다. 함께 그를 제압했던 일꾼들이 난리통에 죽어 버린 도적을 살피다가 그가 실제 신창삼포가 아니며 갖고 있던 총도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동안, 다시 가마에 오르는 추알을 위잔아오가 뒤따라와 챙겨 주면서 둘은 다시 한 번 은밀한 교감을 주고 받는다.


신부의 행렬은 어찌어찌 십팔리 고개 리씨의 양조장에 도착하고, 멀리서 미련 가득한 눈빛만 교환하던 추알과 위잔아오는 결국 헤어지게 된다. 풍습에 따라 3일 후 친정으로 다니러 간 추알은 돈 많은 사위를 잘 모시라는 아버지의 속물스런 잔소리를 피해 나귀를 타고 수수밭을 지나던 중, 다시 한 번 얼굴을 가린 남자를 만나 수수밭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도망치던 그녀를 뒤쫓아 온 남자는 복면을 벗어 얼굴을 드러내고, 그가 가마꾼 위잔아오임을 알게 된 추알은 저항을 멈춘 채 붉은 신방처럼 사방이 둘러싸인 수수밭 한 가운데에서 그와 관계를 갖는다. 이후 그녀가 친정에 머무는 사이 양조장에서는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추알의 남편 리씨가 살해당한 것인데, 영화의 내레이터는 자신의 할아버지 위잔아오가 할머니인 추알을 위해 리씨를 죽였을 것이라 추정하지만, 어쨌건 증거가 나오지 않아 범인은 결국 잡히지 않는다. 





주인을 잃은 양조장의 일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자 추알은 그들을 붙잡고 양조장의 문을 닫을 수 없다며 설득한다. 자신을 ‘마님’이라 높여 부를 필요 없으며 모든 이익을 분배해 갖자는 그녀의 진심에 일꾼들은 마음을 열고, 그들 중 가장 연장자인 라오한이 집사의 자리를 맡아 추알을 충실히 보필하면서 양조장의 분위기는 한결 밝아진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그다지 평탄하게 흐르지 못하는데, 술에 취한 위잔아오가 나타나 자신과의 불륜 관계를 떠벌리는 통에 망신을 당하는 것도 모자라 십팔리 고개에 ‘진짜’ 신창삼포가 출몰하며 납치까지 되는 등의 고초를 겪는다. 라오한과 일꾼들이 마련해 온 몸값으로 무사히 풀려난 추알은 다시 고량주 빚는 일에 의욕적으로 매진하지만, 첫 술이 나온 감격스런 순간 위잔아오가 다시 나타나 찬물을 끼얹고 만다. 추알의 납치 소식에 분노하며 신창삼포를 찾아가기도 했던 그는 일상으로 돌아온 양조장의 모습에 심술이 났는지 고량주가 담긴 술독에 소변을 보는(!!!) 행패를 부리는데, 뜻밖에도 그것이 지금껏 담가 왔던 고량주 중 가장 달고 맛있는 술로 변하면서 양조장을 크게 부흥시킨다.


그렇게 양조장은 번창하고 추알은 위잔아오와 나름의 평안을 누리지만, 둘 사이의 아들(공공연히 "수수밭의 사생아"로 불리는)인 "두쿠안"이 아홉 살 되던 해, 중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군이 청살구까지 진군해 오며 마을의 평화는 깨지고 만다. 군용도로의 건설을 위해 수수밭 제거를 시작한 일본군은 어린아이를 포함한 마을 주민들을 수수를 밟아 쓰러뜨리는 일에 동원한 뒤,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중국인을 그 수수밭으로 데려와 본보기로 끔찍하게 처형하기까지 한다. 9년 전 양조장을 떠났던 충실한 집사 라오한이 일본군에게 잡혀 온 것을 목격한 추알은 경악하고, 그동안 공산당원이 되어 항일 투쟁에 몸담았던 라오한은 살갗이 벗겨지는 잔인한 고문을 당하며 끔찍한 고통 속에 눈을 감는다. 





양조장에 돌아온 추알이 9년 전 라오한과 함께 담았던 술을 전제물처럼 따라 부으며 위잔아오와 일꾼들에게 라오한의 복수를 요구하자 위잔아오와 일꾼들은 그녀의 말대로 고량주를 나눠 마시며 복수를 다짐하고, 한밤중 수수밭 길로 나가 폭약과 고량주를 묻는다. 하지만 다음 날 오후가 되도록 일본군의 움직임이 없어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며 수수밭에 매복해 있던 위잔아오와 일꾼들은 더위와 허기에 지치고 마는데, 복수를 끝낸 후 돌아올 그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던 추알은 어린 아들에게서 상황을 전해 듣고 음식을 챙겨 수수밭으로 향한다. 그러나 하필 그때 수수밭 안으로 들어서던 일본군 트럭이 그녀를 보자마자 기관총을 난사하고, 추알은 그 수수밭에서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 모습을 본 위잔아오와 일꾼들은 화약을 터뜨리고 불붙인 고량주 단지를 던지며 일본군 트럭을 향해 돌진하지만, 빗발치는 총알 세례와 연달은 폭발 사이에서 결국 위잔아오와 두쿠안을 제외한 그들 모두가 피에 덮인 시신으로 산화한다. 참혹하게 피로 물든 수수밭 속에서 아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한 위잔아오가 추알의 시신 앞에 멍하니 서자, 순간 일식 현상이 일어나며 하늘과 땅은 기괴할 정도로 새빨간 빛에 물든다. 온통 붉은 빛 속에서 마찬가지로 붉게 물든 수수는 바람에 휘날리고, 엄마의 '왕생극락'을 비는 어린 두쿠안의 노랫소리가 그 위로 내려앉으며 영화는 조용히 막을 내린다. 





영화의 제목에서부터 나타나듯 이 작품의 테마와 미장센의 정점은 ‘붉은 색’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끔찍할 정도로 강조되는 비현실적인 붉은 색 외에도 영화 속에서는 ‘붉음’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추알은 붉은 옷을 입고 붉은 가마에 타고 있을 때 그녀의 연인이 될 위잔아오를 만나고, 딸을 사고 파는 악습에 저항하며 자신의 사랑(혹은 적어도 열정)에 따라 연인과 관계를 맺게 되는 여정 내내 붉은 예복을 입고 있다. 양조장을 일꾼들과 함께 꾸려 가기로 결정한 뒤 희망에 가득 차 있을 때는 붉은 종이를 가위로 잘라 방을 장식하고, 고량주를 만드는 데에 필요한 열기를 공급하는 붉은 불을 일꾼들과 함께 때며 기뻐하기도 한다. 양조장 벽에 그려진 ‘술의 신’ 벽화의 색이 붉을 뿐만 아니라, 원래는 투명한 액체인 고량주까지도 걸쭉한 피처럼 보일 만큼 붉게 연출된다. 


중국인들이 전통적으로 붉은 색을 행운의 색, ‘길한’ 색으로 여겨 왔다는 점에서, 또 현대 중국에서는 국기의 색과 공산 혁명을 나타내는 색깔일 만큼 중국의 중요한 정체성 중 하나가 되었다는 점에서, 영화에 사용되는 붉은 색, 특히 붉은 수수는 중국의 ‘민족정신’을 상징한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쉽게 꺾이지 않고 재해에 휩쓸리지 않는 키 큰 붉은 수수가 외압과 격변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다시 말해 외세를 몰아내고 ‘혁명’을 이루어 낸 민중들의 힘과 의지를 표현하는 매개로 해석되는 것이다(장예모 감독이 이 영화를 어떤 ‘선전’ 용으로 만들었다는 뜻은 아니다). 추알이 자신을 옭아매려는 관습과 혼인 제도에 반항한 곳이 붉은 수수밭이었다는 설정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마을 주민들을 공포로 억누르려 한 일본군의 잔인함이 펼쳐진 무대도, 추알과 양조장 일꾼들이 그들의 억압에 대항한 장소도 붉은 수수밭이라는 점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러 고초를 당하고도 꿋꿋이 다시 일어선 추알의, 그리고 고된 노동과 가난 속에서도 술을 빚고 노래를 부르며 일상의 고단함을 버틴 서민들의 생명력과 끈기를 나타내던 이 붉은 색은 마지막 장면에서 그로테스크해 보일 정도로 관객을 압도한다. 여기서 조금 흥미로웠던 것은 이 영화에서 쓰인 붉은 색이 ‘길함’을 넘어 ‘불길함’에까지 닿은 것 같다는 사실인데, 정확하게는 붉은 색이 지닌 ‘양면성’이 이 작품에서 가감 없이 드러났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일본군이 점령하여 쓰러뜨린 붉은 수수는 어딘가 스산한 빛을 띄기 시작하고, 쓰러진 수수 위에서 그 마을의 백정들은 고기로 사용될 짐승의 가죽을 벗기는 당연하고 자연스런 도축 대신 사람의 살갗을 벗기라는 기괴하고 비정상적인 ‘피흘림’을 강요 받는다. 그러니까 붉은 색은 신부의 예복에 쓰이고 신방을 장식하며 '복'을 기원할 때 쓰일 만큼 화려하고 매혹적인, 삶과 열정과 사랑을 의미하는 색도 될 수 있지만 인간이 인간에게 해서는 안 되는 짓들의 광기와 분노와 절망을 신호하는 색일 수도 있는 것이다. 혈관에 도는 피가 활력과 생기, 생명을 뜻한다면 몸에서 빠져나온 피, 누군가 뒤집어 쓴 피는 폭력과 죽음을 뜻하게 되듯 말이다. 


실제로도 영화의 대부분에서 긍정적인 의미로 쓰였던 – 일본군의 등장 전, 나름대로 순수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나타냈던 – 붉은 색은 작품의 후반부에서부터 부정적인 혹은 폭력적인 의도로 사용된다. 추알의 새로운 시작이나 여럿이 함께 나누는 삶을 나타내던 붉은 고량주는 일본군을 죽이겠다는 분노에 찬 맹세의 증표로, 술을 빚어 삶을 윤택하게 하는 데 사용되었던 빨간 불길은 함정과 습격, 살해를 위한 도구로 바뀐다. 한때 추알과 위잔아오에게 자유를 허락했던 붉은 수수밭도 시체가 뒤엉킨 지옥이 되고, 지금까지 그들의 많은 잘못을 따스하게 비춰 주던 붉은 태양마저 차가운 눈길로 죽음과 고통이 가득한 참혹한 광경을 지켜볼 뿐이다.





사실 감독의 시선으로는 이 광기 어린 ‘붉음’마저 민중의 맥동하는 열정과 의지, 원시적 생명력과 열기로 찬탄되는 대상 쪽에 더 가깝다고 생각되지만, 나에게는 삶과 죽음이, 열정과 광기가 뒤섞인 이 새빨간 ‘혼란함’이 무척이나 안타까운 무언가로 다가왔다. 이 작품 속의 붉은 색과 붉은 수수가 민족정신을 나타내는 도구로 쓰인다고 앞서 말하기는 했으나, 개인적으로 나는 씨 뿌린 이 없고 거둔 이 없이 자라난 영화 속의 수수밭이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그러니까 인간이 보기엔 명확한 인과관계 없이 때로 재앙처럼 때로는 축복처럼 우리에게 ‘일어나는’ 운명의 잔혹성과도 닮은 면이 있다고 느끼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이 구원자 없이 스스로 운명을 더듬으며 나아가야 하는 삶의 무질서와 혼돈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추알의 삶이 안타깝게 다가오는 본질적 이유는 그녀가 굴곡진 인생을 살았기 때문도,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 짓눌려 고통 받았기 때문도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스스로를 '구원'하려 애썼으나 결국 실패로 끝난 삶의 이야기가 주는 안타까움 때문일 듯하다. 타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삶을 살던 그녀는 처음엔 자신의 구원을 위해 연인을 선택하지만, 그 연인은 불편하던 자기의 남편을 '죽여 주었'을지언정 그녀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지는 못한다. 추알을 사랑했음이 분명해 보이는 위안자오는 그러나 본인의 체면과 자존심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기에, 일꾼들 앞에서 그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추알의 명예를 실추시킬 뿐 아니라, 독립적으로 양조장을 꾸려 가려는 그녀의 노력에 재를 뿌리고 “이제부터 술은 내가 빚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주인 행세를 시작함으로 그녀의 자율권까지 빼앗아 간다. 위잔아오와 달리 추알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양조장의 ‘주인’으로 대해 주었던 라오한 또한 그녀에게 구원자가 되지는 못한다. 위잔아오가 양조장의 실질적 주인 노릇을 하려 들자 라오한은 그날로 미련 없이 떠나 버리고, 항일운동을 하다 잡힌 뒤로는 도리어 추알이 복수심에 휩싸여 파멸에 이르도록 하는 촉매가 되고 만다.





그렇기에 일본군의 만행에 분노한 추알이 복수와 응징을 요구하고 독려한 일은 그때까지 온전한 자의로 한 행동이 거의 없던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스스로 내린 결단, 다시 말해 그 누구도 구원자가 되어 주지 않은 삶에서 자신을 직접 구원하려 한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끔찍한 운명의 흐름 안에서 스스로 구원자가 되려 했던 추알의 행동은 결국 지금까지 그녀에게 삶과 일과 열정을 뜻했던 모든 붉은 것들이 광기와 위험과 죽음으로 뒤바뀌는 혼돈을 초래하게 한다. 누가 죽고 누가 살았는지 분간할 수 없는 기이한 붉음 속에 바람을 따라 고요히 나부끼는 붉은 수수는 그래서 그저 무력하게만 보인다. 그 어떤 폭발적 생명력과 혈기도, 강한 의지나 결단도 결국은 죽음, 절망, 광기와 표피 한 장 차이일 뿐인 이 세상의 새빨간 혼란 속에서, 스스로 길을 내고자 발버둥치는 인간은 영영 흔들리며 헤매일 수 밖에 없음을 암시하는 듯한 결말이다.




엄마 C의 시선 



1988년 발표된 중국 영화 “붉은 수수밭(紅高粱; Red Sorghum)”은 중국 최초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된 작가 모옌의 첫 장편소설 “홍까오량 가족(紅高粱家族)”을 – 한국에서도 “붉은 수수밭”이라는 제목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번역, 출간했던 –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이제는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오른 장이머우(張藝謀)의 첫 연출작이자, 아시아권을 넘어 할리우드에까지 영향력을 미치면서 “대륙의 별”이라 불리게 된 궁리(鞏俐)의 데뷔작이기도 합니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0년대를 시대 배경으로, 짧지만 다사다난한 인생을 살다 갔던 한 여인과 그 주변의 수많은 민초들의 삶을 당시의 봉건제도, 항일 투쟁과 연결해 그려 낸 이 작품이 강렬한 색상과 이미지 등 환상적 미장센으로 중국 예술영화를 세계 수준에 올려 놓았다고 평가 받으면서, “중국 5세대 영화”로 명명된 사조가 큰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고 장이머우와 궁리라는 두 인물도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일본 영화에 대한 선입견 못지 않게 중국 영화들에 대한 편파적 이미지 - 주로 황당한 ‘무협 활극’이라는 - 때문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가 “부용진(芙蓉鎭: Hibiscus Town)”이라는 셰진(謝晋) 감독의 작품을 우연히 접하게 된 이후 천카이거(陣凱歌)의 “현(絃) 위의 인생,” “패왕별희”와 함께 장이머우의 “국두,” “홍등,” “귀주이야기,” “인생,” “책상 서랍 속의 동화,” “집으로 가는 길” 등을 찾아 보게 되면서 소위 “5세대 감독”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작품 수준에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마오쩌뚱의 “문화대혁명”으로 폐교되었던 “북경전영학원(Beijing Film Academy)”이 다시 문을 연 1978년에 입학해 1982년 졸업생이 된, “문화대혁명”과 “톈안먼 사건(천안문사태)”을 경험한 세대인 이 감독들은, 리얼리즘을 통해 민중들의 삶을 상징적으로 대변하고 새로운 영상 언어와 미학을 추구하면서 이러한 명칭을 얻게 되었는데, 그들이 연출했던 위의 작품 모두가 여러 국제 영화제의 다양한 부분에서 수상했을 만큼 우열을 가리기 힘든 역작들이어서 중국 영화를 처음 소개하는 시점에 어떤 영화로 시작해야 할지 ‘고민’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지난번 “영상이몽”에 포스팅했던 작품이 잔잔한 톤과 분위기였기에 이번에는 기조를 좀 바꾸는 것이 어떨까 하는 의도로 결정하다 보니 다소 ‘파격적’이고 ‘획기적’인 장르 변화가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화면에는 등장하지 않은 채 - 목소리 연기만으로 - 할머니가 중심인 자신의 가족사를 소개하는 손자의 내레이션으로 내용이 전개되는 이 영화에서, 주인공 역할인 열여덟 살 처녀 “추알”이 나귀 한 마리에 팔려 한센병(나병) 환자인 양조장 주인에게 ‘붉은’ 가마에 실려 시집가는 모습으로 그녀의 기구한 인생 여정이 시작됩니다. 가난한 집의 아홉 번째 아이로 태어난 ‘죄’ 때문에 얼굴도 모르고 50세가 넘도록 장가도 들지 못한, 무엇보다 누구나 꺼릴 만한 질병을 가진 “리씨”에게 팔려 가게 된 그녀는, 가마를 타고 “십팔리”의 시댁으로 향하는 길 어귀에 있는 “청살구” 수수밭을 지나다 그 지역의 흉악한 도적으로 유명하던 “신창삼포”를 자처하는 가짜 도둑과 맞닥뜨리는데, 이 과정 중 자신을 태우고 가던 가마꾼 중 한 명인 – 인근에 잘 알려진 이름난 가마꾼이기도 하다는 – “위잔아오”에게 도와 달라는 눈길을 보내면서 미묘한 ‘심리적 연대’를 맺게 됩니다.  


당시의 풍습대로 혼인 3일 후 친정 나들이를 했던 추알이, 이번에는 본인이 강도로 위장한 위잔아오와 수수밭에서 은밀한 관계를 나눈 후 다시 십팔리로 돌아가지만, 마지 못해 돌아간 그곳에는 이미 숨진 남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화의 내용상으론 단서가 발견되지 않아 범인을 잡지 못한 채 사건이 묻힘에도, 이 사실을 내레이션하는 손자는 자신의 할머니 추알에게 마음을 둔 위잔아오(결국 자신의 할아버지가 된)가 벌인 사건이리라 추측합니다. 원래의 주인이 죽고 없는 곳에서, 더욱이 낯선 여성 밑에서 일하기를 원치 않던 양조장 일꾼들이 그곳을 떠나려 하자, 나이에 비해 현명하고 성숙한 추알은 그들 중 가장 연장자인 “라오한”에게 집사 일을 맡기면서 수익이 생기면 다 함께 나누자는, 그리고 자신을 “마님”이 아닌 이름으로 불러 달라는 말로 남아 줄 것을 설득하지요. 이렇게 다시 양조장의 체계가 잡혀 갈 즈음 술에 취한 모습으로 나타난 위잔아오는 자신과 추알의 관계를 떠벌이며 안방 차지를 하려 들고, 바로 그때 등장하는 진짜 “신창삼포”에 의해 납치되는 소동까지 치른 후 추알은 홍까오량주(紅高粱酒) 빚는 일에 앞장서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첫 술이 만들어지던 날 다시 나타나 본격적으로 바깥 주인 노릇을 시작하는 위잔아오로 인해 집사 직을 맡았던 라오한은 그날 밤 조용히 그곳을 떠납니다. 





9년의 시간이 흐른 후 “십팔리 홍고량”으로 이름 붙여진 술이 인근 지역에서 유명한 술로 자리 잡고 추앙과 위잔아오 사이에 태어난 아들 “두쿠안”도 어느새 아홉 살이 되는 등의 평안한 나날이 이어질 즈음, 중일전쟁에서 우위를 점한 뒤 청살구로 진군해 온 일본군이 군용도로를 건설한다며 수수밭을 제거하기 시작합니다. 작업에 비협조적인 중국인들을 공개 처형하는 과정에서 신창삼포와 함께 잡혀 온 라오한은 – 양조장을 떠난 뒤 공산당원이 되고 항일 게릴라를 조직해 일본군과 싸웠다는 – 입에 담기도 힘든 잔인한 방법으로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고, 끔찍한 광경을 직접 목격한 추알은 그의 원수를 갚자며 결의를 다집니다. 그날 밤 위잔아오와 일꾼들은 일본군이 지나갈 수수밭 도로에 폭약과 고량주를 묻고 숨어서 밤을 새우지만 다음날 한낮이 되도록 일본군은 나타나지 않고, 허기진 일꾼들을 위해 음식을 가지고 추알이 밭에 나간 순간 때맞춰 나타난 일본군이 그녀를 향해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추알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맙니다. 아내의 죽음에 분노한 위잔아오와 일꾼들은 묻어 두었던 화약을 터뜨리고 고량주 단지에 불울 붙여 일본군 트럭을 향해 던지며 돌진하지요. 추알의 일꾼들이 기관총에 맞아 모두 숨을 거두는 동안 일본군들 역시 화염에 싸인 트럭 속에서 목숨을 잃고, 수수들이 마구 꺾인 채 온통 시신으로 가득한 벌판에서 위잔아오가 아들 두쿠안의 손에 이끌려 먼 하늘을 바라보는 것으로 영화는 그 막을 내립니다. 


격랑의 시대사를 배경으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의 주요 역사를 대서사시적으로 그렸다거나 중일전쟁과 일본의 침략상을 거시적 관점에서 다루었다기보다 구석진 산골의 한 마을에서 태어나 살다 숨진 여성의 삶에 앵글을 맞춰 그녀의 희노애락을 그려 냈다고 할 이 작품을 통해, 세상의 풍파를 온몸으로 견디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대다수 ‘소시민’들의 현실을 주인공의 모습에 투영해 보게 됩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일식(日蝕) 현상, 즉 달이 태양을 가리면서 온통 붉던 화면이 잠시 어두워지는 장면을 보며 - 본래 의도는 사랑하는 아내 추알의 죽음을 맞은 위잔아오의 참담한 심정을 대변하기 위한 장치였을지 모르는 - 믿는 자의 입장에서 들었던 생각은, 하나님께 의지하는 사람은 그 같은 “일식”이 삶에서 잠시 일어난다 해도 매일 아침 새로운 태양이 뜨듯 그 상황이 자신의 삶을 계속 잠식하지 못하는 반면,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이들의 경우라면 설령 본인은 깨닫지 못할지라도 끝없이 이어지는 일식으로 가려진 인생일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더불어 신앙인들의 일식은 그것이 일어나고 있는 순간조차 ‘태양’의 일부분만이 가려진 “부분일식”일 뿐, ‘그분’ 전부가 가려진 “개기일식”일 수는 결코 없다는 안도감도 함께 들었고 말이지요.     





“등장인물”과 “화자”가 구분되는 내레이션 형식의 기법을 채택한 작품임에도 그 화자가 ‘3인칭의 시점’이라기보다 ‘제 3의 서사 시점’을 취하는 방식으로 “주관적인 내면 묘사와 객관적인 관찰자적 묘사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표현의 영역을 확장했다”고 원작을 분석한 평론이 마음에 와닿았던 이유는, 이 영화에서 서술자 역할을 맡은 손자가 할머니인 추알이 겪은 외적인 삶의 모습을 다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녀의 내면적 고뇌와 아픔까지 알고 있는 것으로 전제된 설정이, 전지(All-Knowing)하시고 무소부재(All-Present)하시기에 세상의 모든 상황과 현상을 파악하시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의 삶에 보여지는 객관적 측면들은 물론 하나님과 본인만 아는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부분까지 빠짐없이 지켜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몰랐던 주인공 추알은 손자가 요약해 주는 삶으로 생이 정리되었지만,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는 그분께서 서술해 주시는 아름다운 문장들로 매일매일이 기록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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