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J의 시선
지금까지 나름대로 꽤 많은 영화들을 보아 왔고, 그들 모두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복합적 요소가 되었다. 그럼에도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 더 정확히는 삶을 대하는 태도와 마음가짐, 또 비극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시각에 있어 나에게 가장 큰 인상을 남기며 명확한 영향을 준 작품은 단연 [인생은 아름다워]라고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 - 하마스의 전쟁이 점점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요즘, 어린 시절 이후 나에게 이정표 같은 무언가가 되어 준 이 영화가 다시 떠올랐다.
감독 겸 주연배우인 로베르토 베니니의 1999년작 [인생은 아름다워]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주인공 "귀도(로베르토 베니니)"는 어벙한 친구 "페루치오"와 시골에서 갓 상경한 청년으로, 서점을 운영하는 것이 꿈이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딪히며 숙부 "엘리시오"가 수석 웨이터로 수년간 근무했던 "그랜드 호텔"에 역시 웨이터로 취직해 생계를 이어 나간다. 조금은 우울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귀도는 특유의 낙천적 성격과 삶에 ‘즐겁게’ 대처하는 태도를 잃지 않고 뛰어난 유머 감각과 말재주(정말 듣다가 기가 빠질 정도로 말을 많이 한다), 순발력과 기발한 상황 대응력으로 호텔 손님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게 된다.
그렇게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던 귀도는, 도시로 올라오는 길에 우연히 만났던 "도라(니콜레타 브라스키)"와 계속 마주치는 과정에서 아름답고 상냥한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숙부가 창고로 쓰던 건물에서 친구와 함께 살고 있을 만큼 형편이 좋지 않은 그와 달리 도라는 엄청난 부잣집 딸인데다가 상류층의 약혼자도 있지만, 귀도는 자신의 처지에 주눅들지 않은 채 그녀를 상대로 열정적이고 대범한 구애 작전을 펼친다. 자신이 속한 상류사회의 갑갑한 분위기에, 또 진정한 사랑과 소박한 행복을 원하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 주지 않는 약혼자에게 지쳐 있었던 도라는 ‘웃음’과 ‘즐거움’으로 가득한 귀도가 보여 주는 솔직한 애정에 점점 마음이 흔들리고, 결국 그랜드 호텔에서 열린 도라의 약혼식 도중 모두가 보는 앞에서 둘이 함께 도망치며 그들의 사랑은 극적으로 결실을 맺는다.
몇 년 후, 결혼해 아들 ‘조슈아’를 낳아 살고 있는 귀도와 도라 부부는 여전히 나아지지 않은 형편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 못지않은 단란하고 끈끈한 관계를 변함없이 자랑한다. 그러나 이 가족의 평온하고 사랑스러운 일상은 도라 어머니와의 관계 회복을 앞둔 희망찬 상황에서 귀도와 조슈아, 엘리시오 숙부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붙잡혀 수용소로 이송되며 산산조각나고 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도라는 유대인이 아님에도 자진해서 수용소로 끌려가지만, 인파 속에서 눈을 마주친 귀도와 도라는 남녀가 엄격히 구분된 유대인 수용소의 환경 때문에 그대로 이별할 수밖에 없다.
이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아들을 끔찍한 현실로부터 보호하려는 귀도는, 특유의 재치와 사람 혼을 쏙 빼놓는 말솜씨를 이용해 수용소 생활을 "단체 게임"으로 포장한다. 조슈아에게 건넨 그의 설명 속에서 나치 군인들은 ‘교관’ 비슷한 인물이 되고, 그들의 규칙을 잘 따라 1,000점이라는 점수를 먼저 따내는 것이 이 ‘게임’의 목표로 둔갑한다. 어린 조슈아는 1,000점을 따내어 ‘1등’을 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탱크를 받게 된다는 아버지의 거짓말을 믿고, 그 환상이 깨지지 않도록 고군분투하는 귀도와 함께 남들과는 조금 다른 수용소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기 위해 영화들을 다시 감상하다 보면 영화의 내용이나 그 감정과는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조금 분석적인 시각으로 작품을 보게 될 때가 많다. 이 글을 ‘평론’이라고 하기엔 민망하지만 그래도 작품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있는 해석을 제시하려다 보니 단순한 스토리를 넘어 영화의 연출법, 미장센 등에 집중하며 보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영화의 내용과 전개 자체에 몰입해서 감정의 롤러코스터 위에 그대로 올라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이 작품의 연출법 자체가 그다지 화려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이 영화에선 ‘이야기의 힘’이 크다는 방증으로도 생각된다.
조금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에서 귀도가 조슈아에게 ‘환상의 세계’를 보여 주기 위해 - 그러니까 유대인 수용소에 갇힌 그들의 현실 대신 ‘거대 게임장’이라는 환상을 믿게 하기 위해 - 정말 눈물겨운 노력을 하는 것과는 별개로 작품 속 현실의 ‘묘사’는 꽤 적나라하다는 것이다. 유사한 맥락에서 홀로코스트, 나치 정권의 끔찍함을 ‘웃음’과 ‘판타지’로 승화시킨 2019년작 [조조 래빗](Jojo Rabbit)이 어린 주인공의 상상 속 세계를 스크린 위에 구현하면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뒤섞어 놓은 것과 달리, 이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시종일관 잔혹하고 지저분한, 회색 재가 휘날리고 사람들은 생기를 잃은 수용소의 ‘현실’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만들어 내는 세계는 귀도의 말과 웃음, 그리고 그 말을 믿는 조슈아의 순수한 눈망울 안에서만 존재할 뿐, 관객들이 볼 수 있는 스크린 속의 세상에선 전혀 목격되지 않는 것이다. 아버지가 말하는 ‘환상’과 눈으로 보이는 ‘현실’의 괴리감은, 아들을 지키려는 귀도의 노력이 이 끔찍한 역사의 흐름 속에 사실상 얼마나 무력한지를 암시하는 것으로도 보이지만, 늘 가벼운 장난꾸러기의 모습만 보여 주던 귀도가 실제론 얼마나 엄청난 노력과 의지를 부어 인생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지켜 왔는지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다.
귀도의 이런 노력과 의지는 영화의 서술적 구도에도 반향되는 측면이 있다. 앞서 말했듯 이 작품이 특이한 연출 기법을 많이 사용한 것은 아님에도 "복선 회수"로 설명할 수 있을 연출적 도구는 영화의 곳곳에 영리하게 배치되어 있다. 이 연출법은 사실 유명한 코미디언이기도 한 감독의 경험이나 역량과도 직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코미디에는 가벼운 말장난과 재미있는 표현 한마디가 즉각적 반응을 이끌어 내는 유형도 있지만 인내를 동반한 꼼꼼한 설계가 요구되는 구조와 분야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관객들에게 상황을 세팅하며 충분한 ‘build-up’을 쌓은 뒤, 그 상황과 배경을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펀치라인"을 제공하는, 즉 ‘웃음’으로 가기 위한 세밀한 기승전결이 존재하는 형식도 있다는 것이다.
감독이 이 구조를 쌓아 올리는 데 꽤나 공을 들였음을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 여러 군데 있는데, 귀도의 이웃집 여자가 매일같이 창문 아래로 남편에게 집 열쇠를 던져 주는 일상이나 귀도가 친구 페루치오의 고용주가 쓰는 고급 모자를 슬쩍하는 습관들이 ‘빌드업’되다가 귀도가 도라에게 구애하는 로맨틱한 빗속 데이트 장면에서 하나하나 시기적절한 ‘결실’을 맺는 과정이 특히 경이롭다. 코미디로서도 뛰어난 연출이지만 언제나 충동적이고 약간 뺀질대는 듯 보이던 귀도가 얼마나 뛰어난 재치와 순발력을 가지고 있는지, 또 인생의 ‘중대사’에 관해서는(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을 얻는 일 같이) 얼마나 현명하게 자신의 길과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낼 수 있는 사람인지를 보여 주는 측면도 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과 결실을 맺고, 꿈꾸는 대로 서점을 열었던 귀도는 결국 전쟁의 막바지, 군인들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아내 도라를 구하러 가던 과정에서 사살되고 만다. 어찌 보면 자신만의 ‘노력’과 ‘의지’로도 원하는 것을 쟁취해 낼 수 있었던 예전의 '아름답던' 인생과 달리, 수용소 안에서의 그의 삶은 ‘실패’였다고 볼 수도 있게 하는 대목이다. 특유의 말재주와 상황 대처 능력으로 아들을 지켜 온 그이지만, 호텔 웨이터로 근무할 당시 좋은 관계를 맺었던 손님 "레싱 박사"를 나치 군의관의 신분으로 조우하며 품게 된 탈출에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직접 아내와 아이를 수용소 밖으로 꺼내려던 그의 노력마저 죽음으로 좌절되기 때문이다. 그가 사망한 직후 연합군이 수감자들을 구출하는 장면이 곧바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귀도가 자유를 코앞에 둔 채 사망했다는 사실도 무척이나 안타깝다.
하지만 귀도의 궁극적인 목표가 ‘탈출’ 아니었으리라는, 그래서 죽음을 포함한 수용소 안에서의 그의 모든 노력들을 ‘실패’로 단정지을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귀도는 죽임을 당하러 가는 길에서도 숨어 있는 아들과 눈이 마주치자 그에게 윙크하고 익살스럽게 걸으며 이 모든 것이 ‘게임’이라는 환상을 잃지 않도록 애를 쓴다. 그러니까 자신이 아이에게 만들어 준 환상의 세계를 지키는 일에는 끝까지 '성공'한 셈이다. 귀도가 목숨을 걸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은 오로지 아이의 생명과 동심만이 아니라 그것들을 넘어선 궁극적 ‘인간성’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이 모든 것이 게임이라는 거짓말, 극한의 피로와 절망 중에도 웃음과 농담을 잃지 않는 귀도의 연기는 아이에게 ‘최소한의 인간성’이 여전히 살아 있는 세계를 만들어 주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일 듯하다. 심지어 이런 노력은 귀도가 나치 정권의 ‘인간성’을 보호하고 포장하는 아이러니한 결과로도 이어지는데, 다른 수감자의 탄식을 들은 조슈아가 "군인들이 우리를 ‘단추’와 ‘비누’로 만들고 ‘땔감’으로 쓸 것"인지 묻자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냐며 귀도가 부인하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자신들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면서 스스로 ‘인간 된 도리’를 내다 버린 억압자의 눈먼 증오와 잔인함, ‘비인간성’을, 도리어 억압 당하는 자가 부인해 주는 모습이라니.
사실 영화 속에서는 이 탄압과 폭력에 대한 ‘분노’도 별달리 감지되지 않는다. 나치 정권이 벌인 참극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이 영화의 초점이 ‘억압하는 자’ 그 자체에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전쟁과 차별, 부당한 증오와 폭력의 한 가운데에서 짓밟히면서도 아이에게 그 참혹함과 억울함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일깨워 주는 대신, 사랑과 희망, 인생의 즐거움과 아름다움만을 선물하려 했던 아버지의 노력에 초점을 둔다. 그 모든 역경에서도 어떻게든 파릇파릇한 새싹을 피우고자 노력하는, 다시 말해 어떤 부당한 취급과 억압 아래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은 삶이야말로 이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가 아닐까 싶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전쟁이 발발한 이후 이처럼 ‘반복되는 역사’에 대한 두려움과 안타까움을 더 크게 느낀다. 나치 정권의 대학살과 국제 사회의 외면이라는 고통을 겪으며 땅 없는 설움을 절절히 경험한 이스라엘도, 뿌리 내리고 살던 땅을 떠나 고립과 차별, 가난과 폭력 속에 갇히게 된 팔레스타인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만큼 더더욱 복잡하고 비극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감히 말을 얹기도 조심스럽지만,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들 스스로가 만들어 낸 문구를 곱씹게 된다. “Never again.” 다시는 그런 학살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이지만, 더 나아가서는 그렇게 끔찍했던 ‘비인간성’의 시대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야 한다는 선포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부당하고 잔인한, 결코 있어서는 안 될 폭력과 테러의 여파로 정당한 슬픔과 분노를 겪고 있는 이들이, 그럼에도 자신들마저 그 ‘인간성’을 잃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연합군이 수용소 안으로 몰고 온 탱크를 보며 깜짝 놀라는, 아버지의 말대로 자신이 게임에서 ‘1등’을 했다고 굳게 믿는 조슈아의 환희에 찬 얼굴이 뇌리에 남아 잊혀지지 않는다. 귀도의 ‘거짓말’이 ‘진실’이 된 그 순간 말이다. ‘평화’와 ‘인간성’을 위한 부르짖음이, 뺨을 내주고 옷을 양보하며 목숨까지 내놓는 희생적인 사랑의 호소가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겐 그저 뜬구름을 잡는 ‘거짓말’ 취급을 받는 요즘. 스스로의 ‘인간성’만은 지켜 내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거짓이 진실이 되는 그런 순간이 오지 않을까.
P.S. 팔레스타인 주민의 인권 문제와 가자 지구에서의 휴전을 위해 활동하는 미국계 유대인 단체 “Jewish Voice for Peace”가 하마스의 기습 공습 이후 올린 글 중, 마음에 깊이 들어왔던 글귀를 여기에 남긴다.
“It is simply another way of asking that we treat Palestinians with the empathy and decency that we ourselves long for. . .”
“우리 스스로가 받을 수 있기를 갈망해 온 존중과 연민, 공감으로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대하기를 부탁드릴 뿐입니다.”
엄마 C의 시선
원제는 “La Vita è Bella”이고 영어 제목과 한국어 제목은 원제를 그대로 번역해 “Life Is Beautiful,” “인생은 아름다워”가 된 이 영화는, 연출과 각본, 주연배우로서 ‘1인 3역’을 한 로베르토 베니니(Robert Benigni)가 감독을 맡고 빈센조 세라미(Vincenzo Cerami)가 공동 각본 작업을 한 1997년 작 이탈리아 영화입니다. 영화의 장르를 말할 때 “블랙코미디”라는 명칭이 남발되는 경향이 없지는 않지만, 이 영화에 관한 정보를 찾아 보면 “코미디 드라마,” “멜로드라마,” “슬랩스틱” 등과 함께 “비극,” “스릴러,” “전쟁” 등의 장르에 모두 포함이 되어 있는 데다가, 한 신문의 평론 기사에서 “영화를 보는 내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렵도록” 관객들을 웃기고 울리면서 “비극적 삶을 잔인할 만큼 아름답게” 그려 낸, 그래서 “보는 이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영화라고 요약한 내용을 생각하면, 이 영화의 장르를 한마디로 정의할 때 역시 “블랙코미디”라는 말이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홀로코스트(The Holocaust)”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흥행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미국에서 개봉된 비영어 자막 영화로 역대 흥행 1위(할리우드가 투자 제작한 “와호장룡”을 제외하고)를 기록한 데다가, 1998년 51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그랑프리) 수상, 1999년 71회 아카데미 시상식 7개 부문 후보에 남우주연상, 음악상,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등 3개 부문 수상이라는 큰 업적을 기록하며 90년대 이탈리아 영화를 대표하는 명작으로 불리게 된 이 작품은, 한국에서도 1999년 개봉 이후 2016년 봄 재개봉하며 역시 예술성과 흥행성 양면에서 역량을 인정 받은 영화가 되었습니다. 지난 번에 소개했던 “붉은 수수밭”과 유사하게 주인공 “귀도(Guido)”의 아들 “죠수아(Giosuè)”가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내레이션 형식으로 이어 간 이 영화는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의 이탈리아를 시간적, 공간적 배경으로 하여 118분간의 긴 이야기를 펼쳐 냅니다.
영화의 기본 줄거리나 중심 메시지에 관하여는 위에 적힌 딸의 글에서 충분히 설명이 되었을 듯하기에 제가 맡은 부분에서는 이 영화를 보며 머릿속에 오버랩되었던 오늘날의 복잡다단한 국제 정세와 한국의 상황 등에 관해 몇 가지 언급하고자 합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발을 들이기 시작하면서, 아니 일찍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고향”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인도하시는 땅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게 되면서부터 ‘국가’ 혹은 ‘영토’와 관련된 문제는 유대 민족의 풀기 힘든 숙제, 깊이 박혀 있는 가시와 같은 난제가 되었습니다. 본시 유대인들을 일컫는 또 다른 표현인 “히브리(Hebrew)”라는 명칭 자체가 “에벨/에베르(עֵבֶר)”라고 하는 단어에서 - “건너다(cross over)”라는 뜻의 동사, 혹은 “건너편 지역,” “강을 건너온 자”를 의미하는 명사로 그 어원이 추측되는 - 파생한 말로, 성경이 설명하고 있듯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살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내 사라, 조카 롯과 함께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가나안” 지역에 정착했기에, 가나안 원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건너편 지역”에서 온 사람들, “강을 ‘건너온’ 자”들이라는 관점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국가의 3대 요소가 “국민,” “주권,” “영토”임은 수업 시간에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 배운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앞의 두 요소를 다 갖추고도 - 특히 하나님을 자신들의 ‘주권자’로 인정해 온 그들임에도 - ‘영토’를 확보하지 못한 채 떠돌고 있었다는 근본적 문제 때문에 2차 대전 당시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던 “히브리”인들이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던 것이기에, ‘본래’ 자신들의 땅이었던 지역을 되찾겠다는 그들의 강력한 의지와 버젓이 잘 살고 있던 지역에서 내몰려 온갖 어려움을 겪고 있는 ‘원주민’이 혼재하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상황은 사실 언제 터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시한폭탄을 품에 안고 있는 듯한 위험과 위기의 복합체라 이를 만합니다. 실상 이 영화의 제목은 러시아 혁명주의자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의 유언장 끝부분에 적힌 “(그래도) 인생은 아름답다”라는 말을 인용해 붙여졌다고 하는데, 이런 말이 ‘그런’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 못지않게 두렵고 절박한 현실로 가득한 이 영화의 제목이 “Life Is Beautiful”인 것도, 역설과 반어법의 극치라는 점에서는 서로 상통한다고 해야겠지요.
우리는 흔히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기쁜 일을 맞을 때나 슬픈 일을 당했을 때 구분 없이 사용하곤 하는데, 며칠 전 있었던 이태원 참사 1주기 추도식에서 작년 이맘때 참담하게 자녀를 잃고 분향소를 쓸쓸히 지키고 계시던 한 어머님이 “내가 '유가족'이라는 신분으로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에 아직도 '현실감'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며, 뜻하지 않은 불의의 재난과 참사가 유난히 빈번한 한국 사회에서 “앞길이 구만리 같은” 자녀를 하루아침에 잃은 부모님들이 그래도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그렇게 실감이, '현실감'이 뼈저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일지도 - 그 예쁜 아이들이 “지금이라도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올” 것만 같은, “‘엄마, 아빠’하고 부르며 달려올” 것만 같은 ‘희망’을 여전히 놓아 버리지 못하는 마음 때문일지도 -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모든 날들이 꿈일 것”이라고, “단지 길을 잘못 들었던 것일 뿐”이라고 믿고 싶어 하던 귀도의 심정과 마찬가지로 말이지요.
물론 인간이 가진 이런 안타까운 ‘희망’이 심리학에서는 “자아방어기제(自我防禦機制)”라고 불리는, 그리고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인간을 위해 준비해 두신 하나님의 자비라고 해석할 수 있는 일정한 본성 때문이겠지만, 그 같은 하나님의 자비에 기대어 하루하루 심호흡을 하면서 버티라고 강요하기에는 너무나 냉혹한 ‘현실’이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세월호 참사에 이어 이태원 참사에서도 그 누구 하나 제대로 책임을 통감하며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없기에 유가족이나 살아 남은 이들이 오히려 죄책감을 느끼며 상처 치유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던 어느 청년의 뼈아픈 지적처럼, 유대인들에게 끔찍한 핍박을 가했던 독일이 이후 철저한 회개와 자책으로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에 반해 아무런 죄의식도, 조금치의 반성마저 없는 일본에 문제 제기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국가로 인해 온 국민이 안고 있는, 전 세대가 공유하게 된 오랜 상처가 치유의 시작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조슈아에게는 그 모든 위험과 두려운 현실에의 각성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준 아버지 귀도가 있었고, 우리에게는 늘 그 역할을 담당해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곁에 계시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그런 아버지의 은혜를 누리며 사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렇다고 하여 그 ‘현실’이 바뀌는 것도 아닌 만큼, 그처럼 믿기 어려운 비극을 스스로 감당할 힘이 없는 당사자가 아니라 자신의 일처럼 발벗고 나서 상처의 치유를 도와 주는 주변 사람들의 수고로 인해, 오늘 고통 받는 그들도 언젠가는 “그래도 인생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날이 올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건너다,” “건너온 자”라는 의미의 단어 “히브리”가 갖는 의미처럼, 사랑과 관심을 잃지 않는 모두가 힘을 모으고 보탬으로 현재의 절망과 고통을 함께 “넘어설” 수 있는, 어제와는 조금 다른 내일의 삶으로 “건너갈(cross over)” 그날을 이제는 소망해도 좋을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