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J의 시선
장진이 각본, 제작으로 참여한 라희찬 감독의 2007년작 [바르게 살자]는 감독이 ‘따로’ 있음에도 굉장히 ‘장진스럽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흥행에 성공했다고는 볼 수 없는 데다가 나 또한 개봉한 뒤 몇 년이 지나서야 우연히 접하게 되었던 터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약간은 생소하게 여겨질 영화일 수 있을 듯하다(물론 한국 넷플릭스에 있다고 하니 그동안 더 알려졌을 수도 있기는 하다). 사실 개인적으로 장점만큼이나 단점도 뚜렷하다고 생각하는 작품이지만, 특정한 악역이나 자극적 설정 없이 흘러가는 ‘착한’ 전개와 통통 튀는 캐릭터들의 역할로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영화이다.
영화는 ‘은행’보다 ‘마을금고’를 보유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분위기의 (가상의) 시골 도시, "삼포시"를 배경으로 삼는다. 엔딩 크레딧에서 명시되듯 작품의 ‘투톱’ 주인공은 순경 "정도만(정재영)"과 새로 부임한 경찰서장 "이승우(손병호)"로, 둘의 인연은 삼포시의 지리를 잘 모르던 이 서장이 취임 첫날 아무도 없는 도로에서 불법 좌회전을 했다가 교통경찰인 정도만의 단속에 잡히면서부터 시작된다.
삼포시는 이 서장이 "오래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선배에게 대놓고 말할 만큼 조용하고 한적한 소도시이지만, 주민들의 높은 저축률 때문인지 최근 들어 은행 강도 사건이 연일 터지며 민심이 술렁이는 상태다. 이런 상황을 전달 받았던 이 서장은 언론계에서 일하고 있는 선배와의 대화 도중 갑작스런 영감을 얻어, 미래의 강도 사건에 대비할 ‘모의 훈련’을 구상하며 유명세를 쌓고 자신의 커리어에 보탬도 될 상황을 계획한다. 그의 지시대로 삼포 경찰서는 어느 날 ‘불시에’ 시작될 은행 강도 모의 훈련을 준비하는데, 무작위의 추첨을 통해 ‘은행 강도’를 포함한 여러 ‘배역’을 정할 것이라던 처음의 안내와 달리 이 서장은 정도만 순경을 은밀하게 따로 부른다. 단속 대상이었던 자신이 서장임을 알고 나서도 흔들림 없이 교통 위반 스티커를 건넸을 뿐 아니라 형사 시절 도지사의 비리를 조사하다가 좌천되었다는 도만의 ‘올곧음’, ‘진정성’, 혹은 '열심'을 인상 깊게 본 듯한 이 서장은 도만에게 직접 은행 강도의 임무를 부여한다.
하지만 임무를 맡은 도만 자신이 “후회하실 텐데…”라며 주저하던 순간이 암시하듯, 그가 얼마나 ‘임무에 진심’인 사람인지를 과소평가했다는 사실은 결국 이 서장의 패착이 된다. 강도 역할이 자신에게 맡겨진 뒤 착실하게 범죄에 대해 공부하며 사전 준비를 하던 도만은, 모의 훈련이 시작되었다는 지령을 받자 각본대로 은행에 쳐들어간다. ‘훈련’이니 대충하다 끝날 것을 기대하는 은행 직원들은 물론 얼떨결에 휘말린 일반 고객이나 동료 경찰들이 예상하던 것과 달리 도만은 가짜 총을 들고 인질들을 ‘살해’하면서("사망"이라고 쓰인 명패를 목에 걸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인질’들의 모습이 상당히 재미있다) 은행 강도의 ‘정석’을 보여 준다. 요즘 표현을 빌리자면 “맑은 눈의 광인” 같다고 할까?
도만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이 모의 훈련을 어떤 ‘쇼맨십’의 도구로만 생각했던 이 서장은 도만이 경찰들의 대응을 계속 막아 내면서 일이 점점 커지자 예상 밖의 상황에 당황하기 시작한다. 잡혀 있는 ‘인질’들이 연달아 ‘사망’하고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투입한 특별기동대의 조원들마저 도만에게 붙잡히게 되자, 시큰둥하던 지역 방송국들은 경찰의 부적절한 대응을 앞다퉈 비난하고, 설상가상으로 그곳을 지나던 ‘지상파’ 채널 취재진이 이 상황에 흥미를 보이면서 모의 훈련은 뉴스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기까지 한다.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꽤 뚜렷한 장점과 단점을 각각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우선 "Bank Heist"라는 장르, 즉 "은행 강도"물의 전형적 클리셰들을 창의적으로 변주한다는 점이 꽤 매력적이다. 대부분의 ‘heist’ 작품에는 은행으로 침입했던 강도가(혹은 강도 집단이) 인질들을 붙잡고 출동한 경찰들과 협상을 이어 가며 심리전을 펼친다는 큰 ‘뼈대’가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상황이 계속되면서 강도들이 품고 있던 숨은 동기가 드러난다거나 - 돈이 아닌 다른 '목표’가 있다는 식의 - 강도와 인질들이 서로 감화된다거나 하는 등의 다양한 플롯으로 갈라질 수는 있지만 그 뼈대 자체는 대부분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영화들과 달리 이 작품에서는 모든 상황이 연출된 ‘가짜’라는 점이 관객에게 전혀 새로운 시각을 선사한다. 관객들에게 익숙한 대다수 ‘은행 강도물’의 설정과 연출적 문법(인질과 강도 사이의 갈등, 경찰 측 협상가와 범인의 두뇌 플레이, 위압적인 무력 특공대가 투입될 때의 긴장감 등등)이 이 영화에서는 모두 무효화된다는 점, 말하자면 경찰의 정당한 ‘공무 수행’ 비슷한 무언가로 변한다는 점 때문에 특히 그렇다. 은행 강도 사건을 ‘모의 훈련’으로 풀어내는 아이디어 자체도 기발하지만, ‘경찰이 강도인 척하는’ 초유의 상황에 맞닥뜨린 등장인물들의 반응 또한 관객이 예상할 수 있는 수준의 틀을 넘어 생동감 있게 움직인다. 그렇다 보니 도만이 강도 ‘역할’을 시작하며 귀찮아하는 사람들을 어거지로 협조시키는 초중반부의 내용은 참신하고 유쾌하다. 장진의 각본다운 재치 있는 대사, 어딘가 독특하면서도 어벙벙한 등장인물들의 조합도 재미를 더하고 말이다.
뿐만 아니라 융통성은 전혀 없이 ‘바른 길’만 걷는 듯한 주인공의(이름부터가 "정도만"이니) 대쪽 같은 행보를 한심하기보다 귀엽고 유쾌한 이미지로 그려 낸다는 점에서 주인공을 꽤나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마도 그래서 떠올릴 때마다 뭔가 ‘말랑말랑한’ 기분이 드는 나름의 애정작이 된 모양이다. 사실 영화 속 정도만의 집념 어린 순수함과 성실함은 그의 주위 인물들과 관객들마저도 결국엔 "그래, 네가 이겼다" 하고 넘어가게 만드는 자기력이 있는 듯하다. 그렇게나 툴툴대던 선배 형사가 마지막엔 도만의 ‘탈출’을 돕기 위해 인질들이 탄 버스를 운전하며 경찰차 여러 대에 ‘쫓기는’ 상황에서도 교통 법규를 지키는 모습이나, 도만이 은행 금고에서 우연히 도지사의 비리에 대한 증거를 발견해 결국 수사과로 복귀하는 장면에서는,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바르게 사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옳다"는 위로와 격려를 보내는 듯한 영화의 따뜻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영화 속 은행 강도 사건이 ‘진짜’가 아닌 ‘가짜’라는 설정은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 되기도 하는데, 원래는 두어 시간 정도면 끝나야 했을 상황이 도만의 지나친 열정으로 한없이 길어지면서 영화 또한 후반부로 갈수록 꼭 필요한 ‘다급함’이나 ‘긴요성’의 부재가 부정적 요소들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도만이 ‘진짜’ 강도가 아니고 인질들도 실제로 ‘위험’에 처한 상황이 아니다 보니, 그가 계속 강도인 ‘척’하며 경찰들의 작전을 좌절시키는 것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기가 어렵다. 원래 이런 heist 장르의 영화는 강도들이 범죄에 성공하기를 바라는, 혹은 경찰의 작전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심리가 관객을 작품 속 상황에 이입시키고 영화의 마지막까지 흥미를 붙들어 놓기 마련인데, 이 영화에서는 도만이 굳이 ‘성공’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을 뿐더러 이런 상황에서의 ‘성공’이 무엇일지 정의하기조차 난감하다. 영화 역시 ‘위험’의 부재에서 오는 무료함에 대응하기 위해 도만이 "진짜 강도라면 어떻게 했을지"를 고민하며 정체성의 혼돈 비스무리한 것을 겪는 장면들로 ‘갈등’을 창조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것이 큰 효과를 거두었다고 보지는 않는다(참고로 강도와 경찰의 대치 상황이 길어지며 생기는 피로감을 아예 연출의 일부로 사용한 1975년 작 [뜨거운 오후](Dog Day Afternoon]와 2006년 작 [인사이드 맨](Inside Man) 등도 무척 흥미로운 작품들이다).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본 후 내용을 곱씹는 가운데 지금까지 가졌던 생각과 조금 다른 해석을 하게 된 측면도 있다. ‘바름’과 ‘올곧음’, 즉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는 않는 ‘정도’를 상징한다고 생각했던 정도만이 생각처럼 ‘선한’ 인물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관점에서 말이다. 물론 도만은 갓 부임한 경찰서장도 교통법규를 어기면 딱지를 떼고(예전에 다룬 [아라한 장풍 대작전]의 주인공과도 비슷하다), 알고 보니 도지사의 비리를 조사하다가 수사과에서 교통계로 좌천된 배경이 있는, ‘정의로운 경찰’ 클리셰의 종합체이긴 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는 자신에게 강도 역할을 맡기겠다며 우회적으로 신뢰를 표현하는 이 서장에게 “저 시키시면 후회하실 텐데…”라고 대답한 바 있으며 좌천된 처지를 자기보다 더 슬퍼해 주는 친구 앞에서 별다른 동요도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으니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여서라기보다는…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달까? 심지어 모의 훈련이 점점 산으로 가는 상황 중, 도만은 이 서장에게 “그만 할까요?” 하고 여러 번 묻기도 한다. 그러니 그를 정의감에 불타 도덕적 이유로 ‘선’을 추구하는, 혹은 아예 눈치가 없어서 무슨 일이든 FM대로 처리하는 사람으로보다 그냥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 모르는’ 인물로 이해함이 더 옳을지 모른다. 본인도 그런 ‘답답한’ 자신을 알고 있기에 강도 역할을 자기에게 맡기려는 이 서장을 넌지시 만류하기도 하고, 점점 예상치 않던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의 훈련을 ‘멈출지’에 대해 이 서장의 결정을 기다리기도 했을 것이다. 끝까지 폭주만 하는 자신의 성향을 잘 아는 만큼 누군가 대신 브레이크를 밟아 주기를 기다렸을 것으로 추측되는 모습이다.
그렇기에 정도만은 언제나 ‘최선’을 다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최선’이 반드시 ‘선’이 되지는 않는다. 경찰 임무에 몸담고 있을 때는 좌천을 감수하면서까지 비리를 파헤치치만, 그의 임무가 ‘강도짓’일 때는 또 그것에 최선을 다한다. 정부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입장이다보니 너무 ‘공무원’적 사고 방식을 갖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도만이 계속 ‘강도 노릇’을 이어 가느라 모의 훈련이 끝나지 않는 것을 보며 나도 모르게 울컥 짜증이 올라오기도 했더랬다. 다들 퇴근도 못하게 하고 저게 뭐하는 짓이냐! 사실 그가 정말로 ‘선했다’면 본인에게 주어진 '배역'을 잘 해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은행 직원들에게도 경찰들에게도 계속해서 민폐를 끼치는 짓은 피하려 하지 않았을까 싶다. 진정한 ‘선함’에는 사고의 유연성도 포함되어야 하리란 믿음에 근거할 때, 정도만은 정말로 주어진 일에 ‘최선만’ 다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다. 물론 그가 끝까지 ‘경찰’로서의 정체성을 잃지는 않지만, 그의 이러한 성격과 성향 앞에서는 선과 악의 구별까지도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며 "정도만"이라는 인물을 되짚어 보는 동안 약간 섬뜩해지는 부분이 있었다. ‘선’과 ‘악’의 구분, 그런 명확한 기준 없이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닥친 임무에 ‘최선을 다하기만 하는’ 일은 얼마나 위험한 것일까 싶다. 다가오는 고통에, 불의와 불이익에, 가까스로 이루어 놓은 것들을 집어삼키려는 파도에 대항해 몸부림치며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악을 행했을지, 그러고도 그것을 깨닫지조차 못했을지 모른다.
나 자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가 ‘착하게’ 살고 있다는, 적어도 ‘나쁜 짓’은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생각으로 오만함에 사로잡힐 때가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 안에 있는 창조주의 흔적과 형상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선’을 바라고 추구하게 되는 갈망으로 꽃핀다는 사실을 믿는다. 하지만 우리가 ‘선하게’, 혹은 적어도 ‘악하지 않게’ 살고 있다면, 그것은 내 자신의 고유한 ‘선함’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최선’이 곧 ‘선’이 될 수 있도록 모든 환경과 상황을 마련하신 그분의 자비 덕분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자주 ‘최선을 다해서는 안 되는’ 세상을 살고 있으니.
엄마 C의 시선
“바르게 살자”는 저희가 예전에 다룬 영화 “킬러들의 수다”를 연출했던 장진이 각본과 제작을, 그리고 그의 조연출로 일하면서 ‘신임’을 얻은 라희찬이 감독 데뷔 작품으로 연출을 맡은 2007년 작 한국 영화입니다. 대학로와 충무로에서 충분한 지명도를 쌓아 온 연출가 장진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지만 – 이미 소개한 바 있을 뿐더러 앞으로도 그의 작품을 다룰 기회가 종종 있을 터이기에 – 대다수 관객들에게 생소한 이름으로 느껴질 라희찬의 경우는 “아는 여자”와 “박수칠 때 떠나라” 등에서 장진의 연출부를 거친 후 단독 연출로는 이 영화에서 처음 자신의 이름을 내걸게 되었으며 이후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긴 하나 적어도 “바르게 살자”라는 이 작품에서만은 관객들로부터의 호평과 상당히 높은 평점을 얻으면서 나름 뚜렷한 인상을 남기는 일에 성공한 감독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은행 강도 사건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삼포시”라는 가상의 도시에 새로 부임하게 된 경찰서장이 제법 ‘참신하게’ 낸 아이디어인 “강도 사건 모의 훈련” 과정이 전체 내용의 주축을 이루는 이 영화는, 1991년 개봉되었던 “노는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遊びの時間は終らない)”라는 일본 영화(이것 역시 원작은 토이 쿠니히코(都井邦彦)의 동명 소설이라는)를 원작으로 삼은 코미디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정도만”은 – 그 이름만으로도 “정도(正道)만” 걷는 사람임이 분명히 암시되는 – 복싱 신인왕전 출신의 교통경찰로, 본래는 수사과 형사였으나 그 지역 도지사가 범한 비리를 ‘정도대로’ 파헤치던 중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는 상황 때문에 교통과 순경으로 좌천되었던 인물입니다. 이처럼 ‘정도만’ 걷는 도만인 만큼 경찰서장 “이승우”의 부임 당일 출근길에서 법규 위반 단속에 잡힌 그가 신임 서장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밝혔음에도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스티커를 발부함으로써, “민방위 훈련”을 ‘벤치마킹’해 모의 훈련을 계획하게 된 서장이 ‘강도’ 역할을 충실히 해낼 인물로 제일 먼저 그를 떠올리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정치적 야망이 워낙 커 이번 경찰서장 인사를 중앙 요직 입성의 중간 과정쯤으로 여기던 이 서장이, ‘보여 주기’식 이벤트로 어수선한 민심을 수습하고 눈에 띄는 업적을 만들어 스스로를 홍보하는 기회로 삼고자 했던 애초의 계획과 달리, ‘적당히,’ ‘대충대충’이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만은 범행 관련 서적과 동영상들을 총동원해 충분한 예습을 하는가 하면, 자신이 털게 될 은행을 찾아 사전 답사까지 하는 등 철저한 준비를 마칩니다. 처음부터 그럭저럭 시간을 ‘때우다가’ 훈련이 끝날 것이라 기대했던 참가자들이기에 모의 훈련에 열심히 참여할 리 없음에도, 도만은 그런 은행 직원들과 인질 역할의 인물들을 ‘설득’까지 해가며 자신이 준비했던 모든 부분들을 활용해 “강도”라는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합니다.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으로 사태가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특수기동대가 투입되는가 하면 훈련 실황이 TV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 되는 일까지도 벌어지지요.
사실 일을 이렇게 크게 벌린 정도만에게만 뭐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 애초 자기를 불러 임무를 맡기는 이서장에게 자신이 미리 알아야 할 시나리오 같은 게 있느냐고 – 즉 ‘어느 선’까지 해야 하며 ‘어느 시점’에 ‘어떻게’ 잡혀야 하는지 등등 – 그가 물었을 때 이서장은 “실전을 대비한 훈련이니 실감나게 최선을 다하라”고만 대답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도만의 사람됨을 알지 못했던 서장으로서는 그냥 모의 훈련이라고만 하면 장난처럼 여기고 진지하게 임하지 않을까 봐 한 말이었겠지만, ‘웬만큼’이라는 단어가 자신의 사전에 들어 있지 않고 무슨 일이든 ‘정도’대로 최선을 다하는 그의 입장에선 “최선을 다하라”는 서장의 말을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기에, 오히려 소극적인 다른 참가자들도 자기처럼 ‘최선’을 다하도록 격려, 독려하면서 실제 사건보다 오히려 더 ‘실제적’인 상황을 만들어 가게 되었던 것이니까요.
한국 사회에서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라는 – 혹은 “고지식한 사람”이라는 – 지칭은 뭔가 중요한 능력이 부족한, 꼭 필요한 품성 하나가 결여된 사람이라는 의미로 통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물론 실생활에서는 ‘융통성’이라는 단어 대신 일본어에서 유입되어 마치 한국말처럼 사용되는 “유도리(ゆとり)”라는 표현이 더 많이 쓰이는 듯도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융통성이든 유도리이든 그것을 “어느 선”까지 “어떤 방식”으로 발휘할지에 대해 각자가 가진 기준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그렇다 보니 설령 호의로 시작된 ‘융통성’이라 해도 결국 그 ‘운신’의 폭은 “각자의 판단에 옳은 대로,” “저마다 자기 보기에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whatever seemed right in their own eyes)"라는(삿 17:6; 21:25) 지극히 주관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엄격한 잣대가 자기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어떤 일에서 상대의 “대충,” “적당히,” “웬만큼”의 기준이 자신의 기대보다 ‘넉넉할’ 경우 의외의 선처에 기뻐하는 상황도 생길 수 있겠지만 반대로 상대의 기준이 자기가 기대했던 정도에 못 미친다면 그 “적당히”가 ‘적당’하지 않고 “웬만큼”이 ‘웬만’하지 않아 불만스러운 경우도 당연히 발생하겠지요. 역으로 생각하여, 이 서장이 제시한 “최선을 다하라”는 조건 역시 각자가 가진 ‘최선’의 기준이 저마다 다르다는 데에서 근본적인 괴리가 생겨납니다. 어떤 이의 최선은 보여 주기 식 ‘쇼’를 계획했던 이 서장의 기대에조차 못 미치는 것일 수 있는 반면 이 영화의 도만에게 있어 최선은 “무엇을 하든 그것을 하다가 ‘죽을’ 사람처럼 하는 것”일 수 있으니 말이지요.
이처럼 혼란스럽다 못해 당황스럽기까지 한 모호함 속에서도 우리에게 정확한 ‘지침’이, ‘모범 답안’이 주어져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자신의 “적당히”나 “웬만큼” 뒤에 숨어 혼탁한 세상에 또 하나의 혼탁을 보탤 일도, 스스로가 세운 기준에서의 “최선”을 다하기 위해 능력이나 역량이 미치지 않는 수준까지 ‘악’을 쓰며 고생할 필요도 없이, 정확한 ‘지침’과 ‘정답’ - 그럼에도 그 바탕에 사랑과 자비가 녹아들어 있는 - 즉 ‘모범 답안’대로만 살면 어떠한 혼란이나 갈등도 끼어들 여지가 없는 삶이 우리에게 이미 제시되어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바르게” 사는 삶에 있어서의 ‘올바름’이라는 기준 역시 스스로가 정하겠다고 애를 쓰거나 억지를 쓸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만드신 분, 우리 모두를 지으신 분의 ‘메뉴얼’대로 살기만 하면 ‘오답’과 ‘시행착오’의 염려가 없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삶(요 8:32)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은, 말 그대로 기쁜 소식(Good News) 그 자체입니다.
오래전 한국에 살았을 때 저희 집이던 아파트에서는 신호등이 있는 건널목이 내려다 보였습니다. 당시 주위의 뜻이 맞는 분들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모임을 갖고 있던 제가 그분들과 함께 낸 작은 문집에 “건널목”이라는 제목으로 올린 시가 있었는데, 얼마전 이곳의 집에서 밤늦은 시간 밖을 내다보다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집에서도 그때와 거의 같은 각도로 건널목이 내려다보인다는 사실을 뒤늦게야(왜 지금까지 그 생각을 못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깨달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어줍잖은 감상으로 적어 올렸던 당시의 시가 생각나면서 지금의 제가 그때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는 사실에 - 삶에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신호등의 색이 알려 주듯 명확한 지침과 정답을 제시해 줄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막연히 갈구하던 사람이 이제는 아니라는 사실에 - 깊이깊이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20년도 훌쩍 지난 과거에 썼던 너무도 부끄럽고 조금은 유치하게 느껴지는 시이긴 하지만, 건널목을 내려다보며 최근에 느꼈던, 그리고 “바르게 살자”라는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되새겼던 상념들을 나누려면 필요하겠다는 생각으로, 시작 부분의 두 문단을 여기에 남겨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