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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anne Mar 01. 2024

참을 수 없는 사랑: ‘참지 말아야 할’ 사랑

딸 J의 시선



2003년 작 [Intolerable Cruelty(참을 수 없는 사랑)]는 코언 형제가 연출한 영화들 중 비교적 ‘가벼운’ 작품으로, 그들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드물게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에 분류되는 영광(?)을 누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이 정통적 “로코”에서 기대할 만한 설레고 간질간질한 분위기를 찾기는 어렵다는(어쨌든 코언 형제의 작품이니만큼) 사실을 미리 밝힌다. 2주 전 지나간 발렌타인 데이를 우리 식대로 삐딱하게 기념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이 영화를 선택하게 되었음도 밝혀 두려 한다.


이 영화는 기적적인 승소율을 자랑하는 이혼 전문 변호사 “마일즈 매시”(조지 클루니)와 매력적인 이혼 희망자(?) “메릴린 렉스로스”(캐서린 제타-존스)의 전쟁 같기도, 사냥 같기도 한 사랑 이야기를 - 더 정확하게는 ‘구애의 과정’을 - 다룬다. 불륜 현장을 들켰을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남편에게 상해를 입힌 증거가 사진으로 남았을 만큼 귀책사유가 명확한 의뢰인이 도리어 남편의 재산 대부분을 분할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뛰어난 능력의 변호사 마일즈는, 그럼에도 승승장구하는 자신의 삶에 무료와 권태를 느끼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외도 사실을 들켜 아내와의 이혼 절차에 들어간 부동산 개발자 “렉스 렉스로스”가 그를 자신의 변호사로 선임하면서 마일즈는 의뢰인의 아내인 메릴린과 만나게 된다. 첫 만남에서부터 그녀에게 매혹된 듯한 마일즈는 메릴린에게 꽤나 노골적으로 개인적인 관심을 표현하지만, 동시에 사설탐정을 고용해 그녀의 뒷조사를 하는 등 재판에서 이기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결국 마일즈는 애초부터 메릴린이 위자료를 목적으로 상습적인 바람둥이이자 상당한 ‘모지리’인 렉스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메릴린은 한푼의 위자료도 받지 못한 채 마일즈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만다.





하지만 메릴린은 곧 새로운 남편감과 함께 마일즈 앞에 나타나고, 마일즈는 단순무식한 석유 부호 “하워드 도일”(빌리 밥 손튼)을 손쉽게 구워삶은 그녀의 수완(?)에 감탄하며 점점 더 그녀에게 빠져든다. 몇 개월 후, 여전히 지루하고 무의미한 나날을 보내던 마일즈는 “전국 이혼 변호사 협회” 행사에 참석하려 라스베이거스를 방문했다가 ‘성공적’으로 결혼 생활을 마무리하며 받은 거액의 위자료로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다는 메릴린과 재회한다. 부와 성공을 거머쥐었음에도 어딘가 공허함을 감출 수 없어 ‘보이는’ 둘은 서로에게 동질감 비슷한 강력한 이끌림을 느까는 ‘듯하고’, 결국 충동적 분위기에서 약식 결혼식까지 올리게 된다. 하지만 다음날 메릴린의 전남편 하워드 도일의 정체와 충격적 진실을 마주한 마일즈가 엄청난 혼란에 휩싸이면서 둘의 관계는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코언 형제의 작품치고는 뭔가 애매한(?) 느낌이 있고 그 때문인지 호불호가 갈리는 편임에도, 개인적으로는 꽤나 애정하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존하는 현실 세계에서 반 발짝 떨어진 듯한 세계관과 어딘가 살짝 핀트가 벗어났지만 멀쩡한 척하는 캐릭터들, 천연덕스럽게 펼쳐 보이는 어이없는 유머 코드 등등 코언 형제 특유의 연출적 특징이 잘 드러나고 있는 데다가, 완벽하게 어울리는 두 주연배우를 보는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관람할 가치가 있다고 느껴진다는 점에서 말이다(일단 두 선남선녀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만 봐도 흐뭇해진다).






우선 이 영화를 “로코”로 가정하지 않고 보는 것이 작품을 좀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이리라 생각되는데, 이 영화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로맨틱 코미디”라기보다 1930-50년대 유행했던 “screwball comedy,” 혹은 그 장르에 대한 오마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두 주인공의 사랑과 감정선에 집중하는 정통적 ‘로맨스’와 달리 screwball comedy는 그런 ‘사랑 이야기’를 풍자하며 남녀 주인공이 티격태격 싸우고 자존심을 앞세우는 “battle of the sexes”의 구도(“성 대결”을 뜻하지만 요즘의 화두인 “젠더 갈등”과는 의미가 다르다)를 나타내는 장르로,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의 관계성과 스토리 또한 그와 비슷한 구조를 택하고 있다. 마일즈와 메릴린이 처음 만난 순간부터 상대에게 매력을 느끼며 이끌리기는 하지만, 보통의 ‘로맨스’처럼 서로를 알아 가고 관계를 진전시키며 감정을 키워 나가기보다는 두뇌 싸움을 시작하면서 서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엎치락뒤치락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위자료를 ‘노리고’ 남자들에게 접근하는, 뭔가 시대착오적인 듯한 메릴린의 캐릭터 설정 또한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능하다. 물론 이 영화가 메릴린과 그녀의 친구들, 즉 부유한 남편과의 이혼을 통해 ‘뜯어낸’ 위자료로 호화로운 삶을 즐기는 여성들을 비추는 방식에서 아쉬운 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설정은 여성들이 원하는 직업에 종사하며 자주적으로 삶을 꾸리기 어려웠던 – 그래서 남성의 경제적 능력에 의지해야 했던 – 시절에 유행하던 screwball comedy의 시대적 맥락을 차용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실제로 메릴린은 영화 내내 자신이 이혼을 통해 얻으려 하는 것은 “independence”(“자립력”으로 의역할 수 있겠다)라는 말을 반복한다.





그래서 마일즈는 재미있게도 메릴린을 ‘꽃뱀’으로 폄하하거나 경멸하는 대신 어떤 경의와 존중을 표시한다. 그녀의 이혼 소송을 ‘방해한’ 과거에 대해 화해를 청하는 마일즈의 “우리는 한때 적이었지만, 둘 다 프로이기도 하잖아(We were adversaries, but we’re also professionals)”라는 대사에서 그 같은 관점이 특히 잘 드러나는데, 말하자면 그는 메릴린을 자신과 동등한 입장의 적수로 인식하고 있는 듯 보이는 것이다. 마일즈는 재판의 승소를, 메릴린은 자신에게 속아 넘어간 배우자의 재산 분할을 원한다는 차이만 있을 뿐 결국 두 사람 모두 목표물을 사냥하기 위해 숨을 죽인 채 거리를 좁히는 맹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심지어 마일즈는 메릴린의 두 번째 결혼식 당일에(그것도 피로연 도중에!) 그녀에게 성공적으로 이혼하고 나면 데이트에 응해 달라면서 ‘추파’를 던진다. 메릴린이 두 번째 이혼을 통해 어마어마한 위자료를 챙겼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She deserves every penny)”라며 그녀의 노고(?)를 치하하는 대목에서는 어떤 직업적 존경심마저 느껴지고 말이다. 그러니까 뭐랄까, ‘꾼’이 ‘꾼’을 알아보는 상황이라고 해야 할까?


다시 말해 이 영화의 재미는 알 것 다 아는 ‘선수’들이 서로가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속이고 수를 쓰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지 둘 사이의 감정적 서사를 따라가는 일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냉정하게 말할 때 이 두 인물의 관계와 감정의 발전에서 서술적 개연성은 부족한 편인데, 스크린 밖으로 흘러내릴 듯한 두 배우의 어마무시한 매력과 ‘케미’에 관객이 멱살 잡혀 끌려가게 되는 면이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나름의 변론을 덧붙이자면, 이 작품의 주요 관심사는 사실상 ‘사랑’이 아니다. 결혼, 불륜, 이혼 등등 극도로 ‘감정적’인 소재를 다루는 내용 치고는 인물들의 관계 속에서 애정 같은 감정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가장 큰 예로, 서로의 관계를 진전시키는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사랑’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는 마일즈와 메릴린이 보통의 연인들이라면 “날 사랑해?”라고 물었어야 할 상황에도 “내가 널 믿을 수 있어?(Can I trust you?)”, “내가 어떻게 너를 다시 믿을 수 있지?(How can I ever trust you again?)”라는 질문을 주고받는 장면들을 들 수 있겠다. 사실 둘의 서사에서는 상대에 대한 끌림과 애정, 심지어 ‘사랑’이라는 감정들이 그냥 기정사실화한 채 진행되는 것으로도 보인다. 


둘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그것이 어떤 해결책이나 마침표가 되지는 못한다. 마일즈가 메릴린에게 첫눈에 반했으면서도 재판에서 그녀를 ‘굴복’시키려 했듯, 또한 메릴린이 마일즈에게 마음을 쓰고 염려하는 중에도 - 친구와의 대화 속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 이혼 소송을 이어 나갔듯 이 둘에게 우위를 가리는 것, 즉 자존심을 지키고 목표한 바를 이루며 ‘승리’하는 일은 서로에 대한 사랑과는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물론 상대를 꺾겠다는 승부욕과 ‘진정한’ 사랑이 공존할 수 있는지에 의구심이 들기는 하지만 이 글에서는 영화의 세계관을 따라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전제하려 한다). 이처럼 ‘프로’인 그들은 서로의 실체(지고는 못 사는)를 너무나 잘 알기에 상대를 ‘신뢰’하기가 더욱 어렵고, 그래서 서로가 가진 사랑을 확인하려 하기보다 자신이 상대를 ‘믿어도 될지’에 대한 확답을 얻으려 드는 것이 아닐까 싶다.





여기에서 재미있는(또 조금은 슬픈) 사실은 후기자본주의의 극치인 미국답게 이 인물들이 서로의 ‘진심’, 다시 말해 자신이 상대에게 ‘신뢰 받을 수 있는’ 존재임에의 확인을 위해 사용하는 도구 혹은 은유가 “혼전 계약서(prenuptial agreement)”라는 설정이다. 하버드 로스쿨에서 연구할 만큼 완벽하다는 마일즈의 혼전 계약서에는 두 배우자가 이혼을 하더라도 서로의 재산에 손을 댈 수 없다는(즉, 위자료를 받을 수 없다는) 조건이 선재하는데, 이는 결혼 관계가 파기되어도 아무런 보상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경제적 약자 쪽의 배우자에게 불리한 계약이 된다. 영화 안에서 더 부유한 쪽이 상황에 따라 바뀌는 메릴린과 마일즈의 경우엔 이 계약서가 자신의 ‘신뢰성’에 대한 증명으로 사용되면서, 자신이 결혼 상대에 대해 다른 꿍꿍이가 없다는, 그러니까 어떤 금전적 이득을 취할 생각이 없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역할한다.


따지고 보면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연인 간의 관계 외에도) 상대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것은 인간 사이의 보편적 문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관계를 맺은 상대가 나에게 ‘진심’인지, 아니면 나로부터 어떤 이득을 취하려는 것인지 한 번쯤 의심의 마음이 드는 것은 누구나 가질 법한 자연스러운 심리일 테니 말이다. 최근 들어 결혼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 가는 이유도 상대방이 결혼 생활에 자신보다 훨씬 적은 노력을 - 감정적으로든 금전적으로든 - 쏟는다거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려 들 가능성에 대한 우려와 거부감이 큰 부분을 차지할 듯하다. 동시에 상대를 사랑(연애적 감정 외에도)하면서도 관계를 통한 ‘손해’를 피하려 하고 자신의 희생과 노력을 점수 매기듯 계산하는 것 또한 인간이 갖는 공통적 심리이리라 본다. 영화 속 인물들처럼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지기 싫어하는, 그리고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 하는 – 그래서 결국 상대가 나의 기대와 바람에 ‘굴복’하길 바라는 - 이기심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요소일 테니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경제적) ‘약자’가 된 마일즈가 화해를, 사랑의 지속을 바라며 철저히 자신에게 ‘불리한’ 혼전 계약서에 서명한 후 메릴린에게 건넸을 때 그녀는 주저 없이 그 계약서를 찢어 버린다. 비록 변호사로서의 내 자아는 아니, 저걸 굳이 찢을 필요까지는… 하는 탄식을 불러오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면도 없지 않았다. 메릴린이 진심으로 마일즈를 신뢰하게 되었다기보다 그의 진심에 대한 응답으로 그를 신뢰하기로 ‘결정’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서로의 관계에서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겠다는 헌신의 ‘의지’가, 관계로 인한 그 어떤 손실과 상처도 감수하려는 ‘용기’와 만났을 때, 비로소 서로를 향한 진실된 신뢰에의 발판이 마련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 끝에야 사랑이, 상대를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 놓으면서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랑이 있을 것이다.


P.S. 이 영화에 드러나는 코미디 배우로서의 조지 클루니의 역량을 충분히 다루지 못하는 점이 아쉽다. 작품 속에서 그는 고전적 할리우드 톱스타를 연상시키는 얼굴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screwball comedy”의 느낌을 더욱 강화하는데, ‘표정 연기’ 정도의 개념을 넘어 정말 유연하고 가단성 있는 이목구비를 관객들에게 보여 준다. 사실 조지 클루니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정통적’ 코미디가 그닥 많지는 않지만(게다가 배우 자신이 ‘웃긴’, 혹은 ‘우스운’ 역할로 출연한 작품은 더더욱 드물다) 이런 사실이 아쉬울 만큼 이 배우가 코미디 연기에도 천부적 재능을 가지고 있음을 개인적으로 확인한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출연한 코미디 영화 대부분이 코언 형제와 함께한 작품들이라는 사실인데 - 특히 2000년작 [O Brother, Where Art Thou?(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와 2016년작 [Hail, Caesar!(헤일, 시저!)]에서 그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된다 - 그런 면에서 적어도 코언 형제는 조지 클루니의 희극적 잠재력을 제대로 알아본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엄마 C의 시선 



“참을 수 없는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의역(오역?)하여 2003년 개봉되었던 영화 “Intolerable Cruelty”는 - “견딜 수 없는 잔인함”이라는 직역이 더 어울릴 듯한 - 특이하고 기발한 소재의 작품화에 능숙한 코언(Coen) 형제가 연출을 맡고 조지 클루니(George Clooney)와 캐서린 제타존스(Catherine Zeta-Jones) 등의 유명 배우들이 출연했던 로맨틱 코미디입니다. 보통 “코언 형제(Coen brothers, the Coens)”라고 불리는 이 영화의 감독 조엘 대니얼 코언(Joel Daniel Coen)과 에단 제시 코언(Ethan Jesse Coen)이 “허드서커 대리인(The Hudsucker Proxy),” “파고(Fargo),”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 “시리어스 맨(A Serious Man),” “인사이드 르윈(Inside Llewyn Davis)” 등등 수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킨 작품들의 연출자인 데다, 저희가 얼마 전 포스팅한 “굿 나잇 앤 굿 럭”에서 이미 소개했던 조지 클루니와 더불어 “마스크 오브 조로(The Mask of Zorro),” “트래픽(Traffic),” “시카고(Chicago),” “터미널(The Terminal)” 등 예술성과 흥행성으로 인정 받은 다수의 영화들에 출연해 온 캐서린 제타존스의 매력적 연기도 이 작품을 빛낸 결정적 요소 중의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앞에서 다룬 두 편의 영화가 나름 무겁고 진지한 소재와 주제를 포함했던 만큼 - 또한 며칠 전 지나간 “발렌타인 데이”를 조금 희화화하며 ‘기념’하기 위해 - 가볍고 유쾌한 내용으로 쉬어 가자는 생각에 선택한 이 작품은, 한국 사회에서 아직은 친숙하지 않을 것으로 짐작되는 “부부 재산 계약(Prenuptial Agreement)”이라는 계약법을 중심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명칭이 꽤 길다 보니 보통은 짧게 줄여 “Prenup”으로 불리곤 하는 이 계약이 미국과 캐나다 등의 북미권에는 이미 정착된 제도이기에 이곳에서 주정부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딸의 글에서 자세히 설명되지 않을까 짐작하지만(물론 인권 부서를 담당하고 있어 전문 분야는 아니지만) 한국의 법체계에도 존재한다는 이 “부부 재산 계약”을 “결혼 의사를 가진 당사자가 결혼 전과 결혼 후 형성되는 재산의 법률 관계에 대해 결혼 전 미리 약속하는 계약”으로 요약(대한민국 민법 제 829조 1항)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법원 기록에 따르면 도입 43년 만인 2001년 인천의 한 부부가 최초로 활용했다고 하고, 7년 후인 2008년부터 매년 20건 정도의 등기가 발생해 왔다는데, 복잡하고 생소한 이 계약법의 구체적 사항을 모두 살피기에는 무리가 있는 만큼 일반의 상식선에서는 “혼전 재산 분할 계약” 정도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혼 전문 변호사”라는 그다지 자랑스럽지 못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그렇지만 그 ‘분야’에서의 뛰어난 능력과 명성으로 엄청난 부와 지위의 소유 계층들을 주 고객으로 삼고 있는 로스앤젤레스의 대형 로펌 변호사 “마일즈(Miles)”는, 부유한 부동산 개발자이면서 상습적으로 외도를 일삼는 “렉스(Rex)”의 이혼 소송 대리 과정에서 눈부신 미모가 돋보이는 그의 아내 “메릴린(Marylin)”을 처음 만나게 됩니다. 그녀에게 노골적 호감을 보이는 그가 곧바로 그녀를 근사한 레스트랑으로 초대해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장면은 관객들로 하여금 “이야기가 이렇게 빨리 진행되나” 하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키지만, 그토록 로맨틱한 식사 시간 동안 사설 탐정 “거스(Gus)”를 - 메릴린이 남편의 외도 현장 포착을 위해 고용했었던 - 그녀의 빈집으로 들여보내 자신의 ‘촉’처럼 처음부터 위자료를 목적으로 ‘멍청한’ 남편을 찾아 결혼했다는 그녀의 약점을 찾아낸 후 법정 증언으로 이어 가는 다음 장면은, 관객들을 향한 첫 번째 “뒤통수 치기”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방비’ 상태의 마일즈를 느닷없이 방문한 메릴린은 결혼을 약속했다는 석유 재벌 “하워드(Howard)”를 소개하며 “Prenup(부부 재산 계약)” 분야의 일인자인 마일즈를 통해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아마 그 동안에도 그녀를 계속 생각해 왔을, 그리고 설마 그녀가 이토록 빨리 ‘또 다른’ 결혼을 감행하리라고는 짐작도 못 했을 그의 당황함을 무시한 그녀는 계약 체결에 이어 자신들의 결혼식에 그를 초대하고, 하워드는 결혼식 도중 메릴린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표하며 그녀에게 불리한 Prenup 서류를 현장에서 찢어(!) 버립니다. 6개월 후 변호사 모임의 연설을 위해 라스베이거스의 한 호텔에 묵게 된 마일즈는, 하워드와 곧바로 이혼했다는 메릴린을 ‘우연히’ 만나 서로의 ‘속마음’을 확인하곤 즉흥적으로 결혼식을 올리지요. 자기보다 10배는 부유해졌다는 그녀의 부담을 덜어 주려는 마일즈가 자신에게 불리할 Prenup을 제안하여 사인까지 마치지만, 그를 너무 사랑하기에 이런 계약서는 필요 없다고 ‘선언’하는 메릴린도 첫날밤 그 계약 서류를 찢어(!) 버립니다. 그러나 결혼 계약서의 “잉크도 마르기 전” 지난번 만났던 하워드가 메릴린이 고용한 배우였으며 결혼식도, 그녀가 이혼 시 받았다는 엄청난 재산도 모두 거짓임이 밝혀지면서, 마일즈는 물론 관객들에게도 이 사건은 “뒤통수 치기”의 또 다른 사례로 작용합니다.  



     


결혼식 바로 다음날, 이제는 ‘자기 집’이 된 마일즈의 집으로 가기 위해 짐을 싸던 메릴린은, 그의 모든 것을 빼앗겠다는(‘복수’의 결의를 다지는)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히고 그의 곁을 떠납니다. 사랑의 마음은 여전함에도 자기의 전 재산을 뺏길 수는 없었던 마일즈가 청부업자 “위지(Wheezy)”를 집으로 보내 그녀를 ‘없애려는’ 계획에 착수한 직후, 메릴린의 전남편 렉스가 예전의 유언장(그녀에게 전 재산을 남긴다는)을 고치지 않은 채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세 번째 “뒤통수 치기”가 - “뒤통수”까지는 아니고 ‘반전’ 정도가 어울릴 수도 있겠으나 – 이어집니다. 이제 메릴린을 죽일 이유가 없어진 마일즈가 허겁지겁 위지에게 계획 취소를 통보하려 애써 보지만 그는 이미 메릴린에게 들켜 붙잡혀 있는 처지입니다. 결국 어찌어찌 문제가 해결된 후 이혼 수속을 위해 다시 마일즈의 사무실에서 마주 앉은 그들이 ‘그제서야’ 자신들의 솔직한 본심(사랑)을 확인하면서 그간의 모든 긴장 관계를 해소하고 진정한 부부의 모습을 되찾는 것으로 영화는 조금 ‘맥없이’ 끝을 맺게 되지요.    



 


늘 통통 튀는, 세련되면서도 냉소적인 분위기의 코언 영화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여러 번 ‘비틀기’를 반복하며 재미와 긴장을 유지해 온 영화의 결말이 조금은 ‘유치한’ 모습으로 마무리된다는 사실에 실망할지 모르지만, 사실 사랑이란 본래 ‘유치한’ 것’입니다. 또 다른 반전을 제공하는 영화의 속편이 제작되지 않는 한 – 물론 그럴 가능성도 전혀 없지만 – 이 이야기의 결말은 “그래서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가 될 테지요. “눈먼 사랑”이라는 표현이 한심하거나 위험한 사랑의 관계를 의미하는 말처럼 종종 사용되곤 함에도 사실 눈이 멀지 않고서는 애초에 사랑 자체가 시작될 수 없다는 – 인간이란 존재가 본시 이기적 속성을 지닌 죄인이기에 –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Reckless Love”라는 찬양의 제목처럼 “무모한 사랑”으로까지 일컬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인간의 사랑에 있어서도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은 물론, 남녀 간의 사랑 역시 “무조건적인,” “앞뒤를 따지지 않는”’이라는 수식어로 시작되지 않는 감정을 사랑으로 부르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에 빠진 후 지금까지의 완벽한 이미지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이혼 변호사 협회 연설회의 강단에 오른 마일즈가 “사랑은 두려움을 없애 주는 것”이고 “사랑은 또한 부끄러움을 없애 주는 것”이라면서 “사랑은… 좋은 것입니다. 이런 말이 이 자리에서는 냉소적으로 받아들여지겠지만... 앞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료 법률 상담을 하며 살겠습니다”라고 했던 ‘충격 선언’이 바로 무조건적이고 앞뒤 따지지 않는, 눈먼 사랑을 처음 경험한 이들이 보이는 ‘변화’의 대표적 형태일 것입니다. 이 영화를 “로맨틱 코미디” 아닌 “돈에 관한 블랙코미디”로 분석하는 시각이 있는 것도,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돈’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물질에의 포기이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그 사랑의 지속이나 성숙은 또 다른 문제로, ‘눈먼’ 달콤함이 사라졌을 때 “사랑이 끝났다”는 말과 함께 미련 없이 상대방을 떠나는 것이 정직하고 현명한 행동이라 여기는 세상적 사랑과 달리, 신앙인들이 추구하는 사랑은 ‘감정’만이 아닌 ‘의지’의 문제라는 본질을 늘 기억하며 의도적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데에 근본적 차이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지식인(지성인)’의 두 종류를 “무신론자 지식인”과 “기독교인 지식인”으로 이름 붙일 수 있겠는데, 하나님의 신묘막측하신 개입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육안(肉眼)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은, 아무리 아는 바가 많고 지식과 지혜가 뛰어나다고 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랑’을 이해하거나(롬 1:22; 고전 1:25; 3:18-19) 그 사랑에 가 닿을 수 없다는 한계를 갖습니다. 영원하고도 변함없는 ’계약’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약속하신 그 은혜를 경험했기에 눈먼 사랑, 무조건적 사랑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우리가, 세상의 ‘냉소’에도 불구하고 미련 없이 포기하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지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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