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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네씨 Aug 19. 2023

감정에 서서히 물들었고 그 여운 속에 침잠했다

영화 <헤어질 결심>

어느덧 영화 <헤어질 결심>이 개봉 1주년을 맞이한 지도 두 달 정도 지났다. 나는 이 작품에 마치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5번 관람했다. 나를 소위 ‘헤친놈’, ‘헤결단’ 등으로 불리는 부류로 일컬어도 무방하다. 영화관 스크린을 통해 보고, 넷플릭스에서 다시 보는 등 여러 번 돌려봤다. 매번 두근거림과 먹먹함이라는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첫 관람 당시에는 잘 몰랐는데 다음날부터 서서히 잉크처럼 영화의 여운이 퍼졌다.


마치 일요일 아침에 교회 가는 신자처럼 영화관에 조조영화를 보러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게 나의 두 번째 관람이었다. 이후 영화의 이모저모를 남겨놓기도 했다. 이제 와서 영화 <헤어질 결심> 리뷰를 남기는 이유는 <헤어질 결심>과 관련된 글로 브런치를 시작하고 싶어서였다. 마침 스스로 '영화 리뷰를 남긴 게 대략 1년 전이기도 해서'라는 좋은 명분도 있었다. 리뷰라고 하기엔 따끈따끈하지 못해서 비평이라는 단어를 선택해서 당시 펼쳐놨던 문장의 편린들을 한 데 모아서 처음 선보이려 한다.



※ 이 글은 <헤어질 결심>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 원래 로맨스 영화 안 좋아하는데?


여기서 '나'를 맡고 있습니다만, 극장에서 본 로맨스 영화 중 역대급이다. 감정선을 조심스럽게 다루는가 싶다가도 과감한 연출이 돋보인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표현될 수 있는가. 감정은 동시에 떠오르고 동시에 사그라드는 것인가. 사랑은 늘 행복한 결말로 나아가게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머릿속에서 떠다니게 했다. 관객들이 그에 대한 열쇠를 찾아가게 하는 능동적인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미결의 사건이 해준을 놓아주지 못하고 해결된 사랑은 해준의 관심 밖인 것처럼 미완의 사랑이 영원해지고 완성된 사랑은 초라해진다는 영화의 통찰이 그동안 봐왔던 로맨스 영화와는 결이 다른 통찰임을 느꼈다.



독창적인 캐릭터와 대사


중국인이지만 맞춤법 하나 틀리지 않는 꼿꼿한 서래(탕웨이), 강력계 형사답지 않게 말끔한 차림새의 품위 있는 해준(박해일). 둘만의 언어세계는 가히 매력적이다. 그밖에 '붕괴'라는 단어에 함축된 의미의 연장, 소설이나 연극에서 보거나 들을법한 문어체, 논어에 나온 공자의 말을 인용한 부분(知者樂水仁者樂山)도 무척 기억에 남는다. 아래는 영화 <헤어질 결심> 하면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대사들이다.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이 있다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 거야. - 해준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할 때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됐다. - 서래



스마트폰과 스마트워치를 활용한 씬들도 주목해서 볼 만하다. 통역 앱의 음성이 1부에서는 남성, 2부에서는 여성 목소리가 나온다. 1부에서는 해준이 '붕괴'되기 전이기 때문에 좀 더 침착한 남성 목소리가 사용되고, 여자 목소리는 2부에서 사랑의 감정을 고백하는 호미산과 이포의 바다를 위해 쓰인다. 이처럼 음역대를 통해서도 감정의 변화를 드러내고 있다.



해준과 서래만 돋보이는가?


내가 생각하는 좋은 영화란 주인공에 해당하는 배우에만 의존하지 않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수완(고경태)과 연수(김신영), 정안(이정현)은 조연임에도 불구하고 캐릭터가 그 자체로 존재감을 톡톡히 보여준다. 단지 주연을 위해 희생하고 소모되는 일회성 캐릭터가 아니라는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만 뛰어난 게 아니다. 인물들의 눈빛부터 움직임을 담는 카메라, 서래의 집을 둘러싸는 벽지와 가구, 절묘하게 비집고 들어가는 말러 교향곡까지. 관객을 감각적으로 사로잡는 요소들도 너무나도 많다. 명연기뿐만 아니라 감독의 연출과 숙련된 스태프의 노고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품이다.


각본을 집필한 정서경 작가부터 김지용 촬영감독, 류성희 미술감독, 김상범 편집감독, 조영욱 음악감독 그리고 많은 스태프에게 아낌없이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다.



함께 연상되는 작품들


남자 주인공이 직업상으로 사랑해서는 안 될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극이 진행된다는 점, 엔딩 장면에서는 바다를 바라보며 지평선에 걸친 해가 배경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박찬욱 감독의 또 다른 영화 <박쥐>가 떠오른다. 또, 억압받는 주인공이 상대를 만나면서 자신의 삶에 지대한 변화를 겪는 영화 <아가씨>의 히데코(김민희)-숙희(김태리)의 대비되는 관계로 느껴졌다.


히데코에게 숙희란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였다면, 서래에게 해준이란 '내 인생을 구하러 온 나의 파괴자'와 같았다.



메타포란 이런 것


파랑으로도, 초록으로도 보이는 오묘한 색감의 서래의 원피스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다르게 읽히는 서래라는 인물을 빗대어 나타내기 때문이다. 박찬욱 감독에 따르면 조명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 '색'이라는 개념을 활용하고자 했다고 한다.


해준이 직면하는 일련의 사건들도 이와 유사한 측면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포에서의 살인사건에 대입하자면 서래를 의심하면 피의자로 볼 수 있고, 서래를 믿는다면 용의 선상에서 제외될 수 있다. 물론 두 번째 남편을 죽인 범인은 따로 있지만 영화가 결말을 향해 다다르기까지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그러한 추측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끝으로 영화 <헤어질 결심>에 대한 별점과 한줄평을 남기려 한다.

두 가지 문장이 후보였는데 하나는 글의 제목으로 사용하고, 다른 하나를 한줄평으로 채택했다.



★★★★★

안개 속에 사무쳐 직시할 수 없었던, 파도에 덮쳐 미궁 속에 묻혀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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