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알카라스의 여름>
여름의 끝에서 생각난 영화가 있다. 기억을 되짚어가며 리뷰를 남기려 한다. 지난해 11월에 관람한 카를라 시몬 감독의 영화 <알카라스의 여름>가 그 주인공이다. 개봉하자마자 한번 봤고, 라이브러리톡으로 두 번 봤다. 번영주 감독과 김도훈 기자가 게스트였는데 어떻게 예매를 안 합니까. 웬만한 예능 프로그램보다 더 웃긴 케미인 것 다들 인정하실 거라 생각한다. 흐릿해진 기억의 한줄기를 붙잡고 영화 <알카라스의 여름>와 관련된 분석과 지브이(GV)에 대한 소감을 남겨본다.
※ 이 글은 <알카라스의 여름>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적인 쾌거에 대해 말하기 앞서 영화 <알카라스의 여름>은 역사적, 민족적, 젠더적으로 다소 특이한 지점을 가지고 있다. 작년 2월에 개최된 제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차지했는데, 스페인 영화로서는 39년만이다. 나아가 카탈루냐어를 사용한 작품 중에서 최초로 황금곰상을 받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출연자의 상당수도 현지 주민이라고.
연출 및 각본은 카탈루냐 출신의 여성 감독 카를라 시몬이 맡았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쥘리아 뒤쿠르노의 영화 <티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오드리 디안의 영화 <레벤느망>에 이어 여성 감독으로서의 저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휩쓸었다는 공통점을 가진 세 작품은 신선한 소재와 촘촘한 각본을 토대로 높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 술술 읽히는 스토리는 아닐지라도 끊임없이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측면이 있다.
이 작품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자면 스페인 카탈루냐의 알카라스(Alcarràs)라는 작은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3대째 복숭아 농사를 해왔던 어느 가족이 마지막 수확을 거두는 이야기를 그린다. 줄거리만 봤을 때는 전통적이고 뻔한 내용 같겠지만 나는 어떤 묵직함을 느꼈다. 상당히 고결하고 미학적인데 한편으로 다큐멘터리 같고 각본이 정말 미칠듯이 섬세하다.
영화 <알카라스의 여름>은 드넓게 펼쳐진 자연을 비추면서 녹슨 폐차 안 상황극을 하며 노는 아이들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아이들은 외계인, 전쟁 등을 놀이 소재로 삼는데 이는 카탈루냐의 분리독립에 대한 열망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또, 에스까르보를 먹는 장면도 나온다. 대표적인 프랑스권 음식인데 이걸 스페인에서 먹는다니. 이 역시 카탈루냐라는 지역색을 아주 명확히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변 감독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상경한다는 말이 서울로 올라간다는 뜻인 것처럼 흔히 카탈루냐 지방에서 도시로 간다는 건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가 아니라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가리킨다.
어쩐지 스페인 영화치고 대사가 잘 안 들리고 불어로 떠드는 것마냥 발음이 뭉개듯이 들렸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영화는 카탈루냐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카탈루냐 사람들도 스페인어를 쓰는 경우가 없진 않다. 그런데 정말 카탈루냐어는 우리나라 지역 사투리 이런 개념이 아니라 그냥 아예 다른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마드리드를 기점으로 하는 스페인에 종속된 것도 그리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건 바스크나 바르셀로나 같은 지역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의 놀이는 결국 예전의 방식으로 현재를 살아온 어른들이 미래 세대에게 무엇을 유산으로 전할 것인지 이야기하고, 궁극적으로 변화하는 세상과 가족에 맞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다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해서 공동체 해체주의로 결말이 나아가거나 전통적 가족주의를 호소하는 건 아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는데 그 가운데서 우리는 선악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정치적인 선언을 부르짓지는 않으나, 다큐멘터리적인 접근으로 대가족 일원의 감정 하나하나 들여다보게끔 한다.
할아버지는 과연 원래부터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을까. 그는 훗날 과수원의 나무가 뿌리뽑혔을 때 아들에게 어떤 위로를 전해야 할까 고민하는 것만 같았다. 예전의 방식으로 현재를 살아온 원죄를 품은 죄수처럼 아버지는 매우 조용하게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듯했다. 자식들과 땀흘려가며 일궈낸 농장인데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던 걸지도.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을 꼽으라면 어머니(안나 오틴)가 아들(알베르트 보쉬)과 아버지(조르디 푸홀 돌체트)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다. 어머니의 따귀는 작품 속 여성 캐릭터가 처음으로 감정을 표출하는 행위이다. 이 작품은 여성주의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지만 내 기준 작년 영화 중에서 가장 여성주의적인 시선과 접근으로 가부장주의에 침착한 따귀(!)를 때렸다고 본다.
아버지가 우는 장면도 빠뜨릴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무너뜨리지 않되 가장 극렬한 감정선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주의적인 해석으로 바라볼수록 이러한 장면은 일종의 클리셰로 적용될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고결한 방식으로 해당 캐릭터의 방점을 찍는다. 가부장의 껍질을 벗기기까지 하기에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시퀀스라 말할 수 있다. 아버지는 아이들 앞에서 처음으로 울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뺨을 처음 때렸으며, 아이들은 처음으로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렇듯 가족 모두의 감정선을 보여주지만 현실의 면면을 드러내는 데에도 탁월하다.
복숭아 농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는 흑인 청년들은 어느 대사조차 없이 수확에 참여하는데 현대사회의 이주노동자의 노동환경을 짐작하게 한다. 사실 산업화와 자본주의로 인한 농경의 파괴는 전혀 새롭지 않은 이야기다. 그런 익숙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와서 다르게 찍어내고, 인물별로 시퀀스를 할당시킴으로써 인물 각각의 심리를 조명하는 감독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심지어 세트 촬영도 전무하다시피 올로케이션으로 끌고가는데, 이는 감독의 전작 <프리다의 여름>에서도 두드러진다.
영화 <알카라스의 여름> 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하는 데에 있어 화면과 소리가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선 4:3 화면비율, 전통적인 화면으로 촬영한 이유를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첫째는 제작비 문제다. 사이즈가 넓어지면 필연적으로 돈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올로케이션이다. 세트가 아닌 곳에서 사이즈를 장악해야 하는데 미장센도 그만큼 신경써야 한다. 셋째는 출연진을 한 화면에 다 보여주게 되면 이 영화의 매력이 급감한다.
인물이나 대상과는 달리 사이즈 바깥의 소리는 담아내고 있다는 특이점이 있다. 잡음을 제거하지 않은 게 바로 다큐같다고 느끼게 하는 큰 요소이다. 예컨대 할머니들의 대화는 중요하고 좋아하고 옳다해서 가져오는 게 아니라 사운드로써 영화에 가져온 것이다. 반면에 기중기 소리는 무너지는 요새를 지켜만 봐야 하는 아이들의 심정을 강조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영화 <알카라스의 여름>은 기존의 가족 시스템이 유지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권력적이지 않고 서로를 배려하며 신뢰가 쌓인 대가족의 모습으로 우아하게 표현한다. 심지어 다큐멘터리가 지닌 요소와 미학적인 측면까지 남김없이 챙겨간다. 이 작품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로 인해 인류애 박살난 현대인들에게 피부에 와닿는 가족 공동체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달하는 것만 같았다.
끝으로 영화 <알카라스의 여름>에 대한 별점과 한줄평을 남기려 한다.
★★★☆
현실 앞에서 물러터지는 어른들과 대지 위에서 더 단단해지는 아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