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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네씨 Aug 25. 2023

비겁함이라는 알을 깨고 성장하다

영화 <지옥만세>

학교폭력은 현실판 지옥이다. 자신의 금전을 빼앗기고 친구들 앞에서 왕따, 괴롭힘을 당하기 일쑤다. 그런 지옥에서 벗어나려는 학폭 피해자들은 때때로 자살을 계획하고 시도한다. 한편 사이비 교단은 천국을 부르짓지만 그건 소수에게만 진짜 천국일뿐 신도들은 지옥에서 살고 있다. 전재산을 헌납하고 소중한 가족이나 지인들과 등질 것을 강요당한다. 그런 지옥을 겪어내고 신도들은 구원을 약속하는 교주를 향해 기도할 뿐이다. 이처럼 학교폭력과 종교집단은 서로 닮은 구석이 있다. 지옥의 피해자들이 외치는 만세란 과연 어떤 의미일까.


※ 이 글은 <지옥만세>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등학생 나미(오우리)와 선우(방효린)는 채린(정이주)에게 지독한 학교폭력을 당했던 피해자로, 채린이 서울로 떠난 이후에도 다른 학생들에게 학교폭력을 당하고 있다. 수학여행을 떠나는 날, 나미와 선우는 자살을 시도하려다 이내 실패한다. 선우로부터 따돌림의 주동자였던 채린이 서울로 이사를 가 행복하게 지낸다는 이야기를 전해듣자 억울함이 솟구쳤기 때문이다. 나미는 채린의 인생에 흉터를 내기로 결심하고, 수학여행을 제껴둔 채 선우와 함께 서울로 향한다.


선우는 동생의 용돈을, 나미는 엄마의 생업비를 훔쳐서까지 서울에 올라와 채린을 찾아내는데 성공한다. 오히려 둘을 반기는 채린은 죄를 씻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기뻐하는 것.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나미와 선우는 당황스럽기만 하다. 채린은 미지의 종교단체에서 만든 대안학교를 다니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어딘가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낙원으로 가기 위해서 매일 같이 기도를 올리는 채린이 이상하게만 보이는 나미와 선우. 그리고 그곳엔 명호(박성훈)가 채린을 비롯한 어린 아이들의 선생님 노릇을 하고 있었다. 나미와 선우는 교회에서 지내며 채린에게 복수할 틈을 노리는 동안, 교회의 실체도 서서히 드러난다.



폐쇄성이라는 교집합


임오정 감독의 <지옥만세>는 학교폭력과 청소년 자살시도, 사이비종교와 질서 속 피해자라는 다양한 주제를 두 고등학생의 모험을 통해 풀어내고 있다. 관객도 그 모험의 일원이 된 경험을 하라는 듯이 카메라 숏은 인물들을 고루 비추는 한편, 나미와 선우의 시선을 잡아주기도 한다. 카메라는 두 사람이 다니는 공간마다 관객이 들어갈 비좁은 틈을 만들어낸다. 이는 교회를 무대로 할 때 극대화한다. 카메라는 채린과 아이들이 생활하는 교회 공간의 구조와 대상물을 더욱 폐쇄적으로 담아낸다. 교회로 들어가는 상가 복도, 생활시설, 강단, 비닐하우스, 이동수단인 봉고차까지. 마치 사이비종교의 공간적 특성이 학교폭력에 노출된 나미와 선우의 상황과 일치하는 선상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영화는 왜 학교폭력으로부터 출발한 사건을 사이비 종교집단이라는 무대로 옮겨놓은 것일까? 청소년들은 또래 집단의 질서 속에서 생활하고, 그 안에서 발생한 문제는 오로지 그들로부터 원인이 발생했다고 여겨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학교라는 공간은 청소년이 만든 것도, 또래 집단이 만든 것도 아니다. 바로 어른들의 질서에 의해 세워진 청소년을 위한 공간일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폭력의 피해자는 명확하지만 가해자는 뚜렷하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영화에서의 사이비종교는 '이상한 단체'라고만 단순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또래 집단 내에 작동하는 규율이 있고, 그 규율은 낙원으로 가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어른들이 정해놓은 질서에 따라 상점과 벌점을 받고 경쟁하고, 따돌림을 당할 누군가를 정해놓고 괴롭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사이비 종교단체는 학교폭력의 온상으로서 구실을 하고 있다. 채린과 혜진(이은솔) 역시 나미와 선우처럼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질서의 피해자인 것이다.



복수는 맥거핀


채린을 향한 나미와 선우의 복수는 성공하지 못한다. 정확히는 성공할 필요가 없었다. 나미는 계속해서 망설이고 선우는 마음이 약해졌다가 나미를 부추기기도 하지만, 이 영화가 목표하는 것은 나미와 선우가 어떤 마음으로 돌아서고 서로를 바라보게 됐는지를 관객이 알아봐주는 것이다. 이대로 죽기엔 너무나도 억울한 나미가 채린의 인생에 흉터 한번 내 보자 하고 선우와 손잡은 게 사건의 발단이지만, 실제로 복수는 일어나지 않는다. 되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는 말을 주창하는 것 같았다. 영화의 후반에 어른들의 모습을 통해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 채린의 얼굴에 흉터가 난다. 이처럼 영화 <지옥만세>에서 복수는 맥거핀이다.


영화는 수미상관의 구조를 지니며 앞으로 나아간다. 선우의 겁에 질린 숨소리로 시작해서 나미의 희망찬 숨소리를 들려주고, 나미가 자살기도를 하며 혼자 봤던 불꽃놀이는 어른들을 피해 도망쳐 나와 셋이서 함께 보는 불꽃놀이로 바뀌고, 서울로 갈 땐 따로 탔던 버스 자리였지만 집으로 갈 땐 함께 앉는 버스 자리 등을 비추고, 선우의 오키오키는 위약적이고 무덤덤한 긍정이었다면 이젠 진심으로 긍정하는 대답이 된 것처럼. 이렇듯 나미와 선우는 이전보다 한층 더 가까워지고, 자신들의 삶이 곧 실패가 아님을 깨닫는다. 막이 내리고 두 소녀는 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을까.


나미 : 현실이 아무리 우릴 죽고 싶게 하더라도 천국 가는 것보다는 낫지?

선우 : 오키오키.



망각해선 안 될 얼굴들


이젠 '학교폭력'이라는 주제가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나오기도 해서 외면당하기 쉽지만, 그것이 곧 지옥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학교폭력을 소재로 한 여러 작품들 중에서 나미와 선우, 채린은 보편적 얼굴을 하고 있지만, 독특한 위치에서 작품의 주제의식을 상기시킨다.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다른 친구를 바라만 보고 있는 비겁한 위치에 있는 나미, 마냥 당하고만 있는 것 같지만 내면의 단단함을 가진 선우, 여전히 따돌림을 주도하는 채린은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어색하거나 화끈거리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다. 자칫하면 공감성 수치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배우들은 자신들이 맡은 캐릭터를 흡수하여 과장되지 않게 스크린에 표현한다.


영화 <지옥만세>는 지옥을 견뎌낼 진짜 용기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다소 가벼운 톤과 경쾌한 걸음으로 나아가고 있어서 자칫 주제의식을 잃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학교폭력, 자살시도, 종교집단, 규율과 질서 등 다양한 주제들을 생각해보게 한다. 또 혜성 같은 배우들의 감칠맛 나는 연기를 감상할 수 있다. 감독이 숨겨놓은 빨강의 메타포, 몇몇 장면에 나오는 오핑의 음악을 찾아내는 재미도 느껴볼 수 있다.




끝으로 영화 <지옥만세>에 대한 별점과 한줄평을 남기려 한다.



★★★

기백이 멋지고, 질문이 넘치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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