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펜하이머>
크리스토퍼 놀런이 처음으로 사람 이름을 딴 영화를 가지고 왔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화려한 SF 장르보다는 인물 자체를 그리는 영화에 가깝다는 인상을 주었다. <다크 나이트>, <인셉션>과는 결이 다른 영화지만, 그만큼의 신선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외피적으로 2차 세계대전이 배경이라는 점에서는 <덩케르크>를 떠올리게 한다. 시계열의 플롯을 지니고, 컬러와 흑백 화면을 교차편집 한다는 특징으로 한다는 부분에서는 그의 장편영화 데뷔작 <미행>이나 출세작 <메멘토>를 연상케 한다. 또한 <인터스텔라>, <테넷>처럼 과학적 소재를 활용한다는 것도 공통점으로 언급할 수 있다. 이번 신작 <오펜하이머>는 놀런 감독의 모든 것들 응축해서 점화하고 폭발시킨다.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물리학자이자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한 인물인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고뇌와 생애를 그린다. 천재 물리학자로 알려지면서 교수를 지니며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핵무기 개발의 총책임자를 역임하고, 종전 후 국제 핵무기 규제에 애썼던 그의 인생을 다루고 있다. 개봉 34일 차에 월드와이드 7억 2,200만 달러를 거두며 2023년 개봉 영화 전 세계 흥행 4위를 차지했다. 더불어 7억 1,500만 달러의 흥행을 돌파한 <인터스텔라>를 제치고 놀런 감독 개인 흥행 기록 4위에도 올라서며 3위인 <인셉션>의 성적을 뛰어넘을지도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영화는 놀런 감독이 물리학자에게 헌정하는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놀런 감독의 화제 <오펜하이머>를 캐릭터, 구조, 플롯 등을 대비라는 개념을 통해 분석하려 한다. 글의 말미에는 <오펜하이머> 관람을 한층 풍부하게 하는 몇 가지 매체를 소개하려 한다.
※ 이 글은 <오펜하이머>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치의 맹렬한 위세가 한창 유럽을 뒤흔들던 1942년, 미 육군 대령 레슬리 그로브스(맷 데이먼)이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를 찾아와 핵무기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직을 제안한다. 오펜하이머는 이를 수락하고, 나치보다 먼저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빠른 시간 안에 무언가를 개발한다는 것에는 어려움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게 커다란 규모의 계획 아래 있다면 부담감마저 크게 느꼈을 테다. 이론과 현실의 많은 난관을 뚫고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최고의 과학자들을 모아서 단기간에 역량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로스앨러모스 사막 한가운데 마을을 만들어 지내고, 보안을 위해 철조망을 두르고, 그 안에서 완전히 격리된 상태로 수백 명을 모아서 이들이 서로 협력하게 만드는 가장 어려운 일을 해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결과인 인류 최초의 핵 실험 '트리니티'를 성공한 후 히로시마에 우라늄 1개가 투하되고 나가사키에 플루토늄 1개가 투하됐다. 그중 플루토늄이 오펜하이머가 개발한 원자폭탄으로, 우라늄과 달리 포신형의 모습을 여러 개로 쪼개 한꺼번에 붙인 형태이다. 구형 폭탄 중심에 플루토늄을 위치시키고, 구형의 바깥에 있는 모든 재래식 폭약들이 카운트다운에 맞춰 폭발 그 압력파가 동시에 도달하는 방식(내파형)으로 제조했다. 당시 이 폭탄이 가능할까 논쟁이 있었는데 그 결정을 내리는 게 오펜하이머의 역할이었다. 트리니티 실험에서 이용한 건 내파형 방식이었고, 원자폭탄은 TNT 18,600톤의 엄청난 위력으로 터졌고 실험은 성공적으로 끝이 난다.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29분 45초,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다.
한편 영화는 그의 영웅적 서사를 초반부터 배치하지 않는다. <오펜하이머>의 첫 장면은 길가에 팬 물웅덩이에 빗물이 파장을 일으키는 광경을 오펜하이머가 빤히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다. 이내 영화는 그런 오펜하이머의 상상으로 추정되는 시퀀스로 전환된다. 어둠 속에서 불꽃이 일렁이고 연소하는 일련의 과정이 반복되고,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서술한 자막과 오프닝 타이틀을 거친다. 관객들은 좁은 회의실에 갇혀 심문받고 있는 오펜하이머를 발견하게 된다. 1954년 오펜하이머의 보안 인가 갱신을 위한 비공개 청문회였으며, 종전 후 그가 공산주의자로 의심받아 조사받고 있는(정확히는 매카시즘이 작동된) 상황이었음을 영화 후반에서야 알 수 있게 된다.
오펜하이머의 아내 키티(에밀리 블런트)와 동생 프랭크, 여러 친구와 친지가 공산당원이었으며 오펜 하이머 역시 과거에 교수 노조를 결성하려 했던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그의 좌파적 성향뿐만 아니라 정치적 행보야말로 일각에서 비난과 공격을 받는 데 더 큰 빌미를 제공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로서 '핵폭탄의 아버지'라고 칭송받던 그이지만, 종전 후에는 국제 핵무기 통제를 강경하게 지지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시기에 돌입하며 한창 국력을 증진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던 시기에 이런 의견을 내던 사람은 반공주의자들에 의해 잠적을 감추었다.
1954년 청문회 장면 이후, 화면은 금세 미국의 거물 사업가이자 미국에너지국 위원이었던 루이스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중심으로 또 다른 시점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는 1959년 시점의 공개 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를 만났던 과거와 아인슈타인에게 외면당했던 기억을 회상하고 있다. 이후에 이어지는 장면들을 한데 모으면 스트로스의 상무장관 발탁을 위해 그에 대한 미국 과학자들이 신망하고 있는가를 증명하기 위한 자리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영화는 오펜하이머가 영국, 독일, 네덜란드에서 유학한 후 미국에 돌아와 물리학 교수가 된 일화를 보여준다.
이어서는 첫 단락에서 제시된 바와 같다.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로 임명되고, 사막 한가운데에서 설립된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서 핵무기 연구 및 개발을 이어간다. 원자력 시대의 개막을 알린 트리니티 실험을 성공시키고, 독일의 패망 이후 항복하지 않는 일본에 핵폭탄을 떨어뜨린다. 영화에서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닐스 보어, 리처드 파인만, 에드워드 텔러 등 수많은 과학자들이 등장하며 그들이 했던 많은 일들의 시작을 보여준다. 영화의 메인 플롯 사이사이에 1954년 비공개 청문회, 1959년 공식 청문회 시점이 들어가며 이야기의 순서를 교차하는 것이 <오펜하이머>의 기본적인 뼈대다.
오펜하이머의 이야기 자체가, 그의 삶 자체가 핵폭탄과 비슷하지 않았나 싶다. 핵폭탄 같은 수많은 분열을 겪으며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을 만들어 나갔다. 그렇게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오펜하이머가 미국의 영웅처럼 대접받는데, 나중에는 국제적인 핵무기 사용을 반대하게 된다. 오펜하이머는 핵무기 개발 전후로 자신의 주장에 대척점을 가지게 된다. 영화는 처음부터 그런 대척의 요소들을 짝을 맞춰 보여준다. 물과 불, 입자와 파동, 잔잔함과 굉음, 현실과 상상, 빛과 어둠, 이론과 실험, 컬러와 흑백, 분열과 융합, 탄생과 소멸, 삶과 죽음, 개전과 종전, 전쟁과 평화, 나치(독일)와 미국, 애국과 매국, 공식(상원 청문회)과 비공식(비밀 청문회) 등 단 60초도 채 되지 않는 시간부터 영화의 러닝타임인 3시간 내내 혼재되기도 한다. 그저 단어의 나열 같겠지만, 이 영화 속 키워드들은 켜켜이 쌓여 주제의식 여실히 표출해낸다.
이 영화는 사실상 두 가지 이야기가 섞여들어가는 방식으로 구조화돼 있다. 크게 1부와 2부로 나누어보자면, 1부 컬러 장면은 오펜하이머의 학창시절부터 1954년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A.E.C) 청문회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고, 2부 흑백 장면은 1959년 스트로스의 상원 청문회로 이루어져 있다. 전자는 A.E.C에서 보안승인 심사 청문회이며, 후자는 상무부 장관이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에 해당한다. 이렇듯 감독은 두 개의 청문회를 맞세우는 구성으로 지니고 있다. 두 인물은 과학자-정치가로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공통점이 많은 것으로 영화에서는 묘사된다. 청문회를 재판처럼 대하는 태도로 주의를 받는다는 점, 타임의 표지 모델로 발탁된다는 점, 대통령에게 상을 수여받는다는 점. 무엇보다도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서 몰아내려는 목적으로 청문회를 받게 되고 파멸하고 만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둘은 같은 면모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1인칭 형식으로 서술함으로써 두 인물을 대비시키는 영화의 구조가 두드러진다.
이런 화면의 교차는 놀런 감독의 전작 <메멘토>에서도 구사된 바가 있다. <메멘토>에서 흑백 장면은 컬러 장면의 전제가 되는 반면, <오펜하이머>에서 컬러 장면이 흑백 장면의 전제가 된다. 컬러로 촬영된 오펜하이머 청문회 장면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핵분열(fision)'이라는 작은 타이틀이 올라온다. 흑백으로 묘사된 스트로스 청문회 장면이 나오자마자 '핵융합(fusion)'이라는 작은 타이틀이 등장한다. 오펜하이머의 사건은 원자폭탄의 폭발로, 스트로스의 사건은 수소폭탄의 폭발로 비유된다고 설명할 수 있다. 이는 영화의 구조에 그대로 관철되어 컬러-흑백 화면의 교차를 통해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의 관계로서 성립된다.
핵분열은 단지 영화의 구조를 나누기 위한 요소에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플롯에도 반영된다. 누군가의 소개를 받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오펜하이머의 삶과 세계는 핵분열 연쇄반응을 떠올리게 한다. 거대한 목표를 함께 추구하는 물리학 공동체에서 오펜하이머는 최초의 중성자로 핵분열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묘사되며, 원자폭탄이 터지는 방식으로 플롯은 짜여져 있다. 그리고 수소폭탄이 터지기 위해서는 핵분열 반응이 전제가 돼야 한다. 핵분열 반응이 핵융합 반응의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스트로스는 오펜하이머를 몰락시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관계를 총동원한다. 이는 핵융합에 해당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청문회 과정에서 스트로스가 오펜하이머 청문회를 배후에서 장악한 게 드러나며 결정적 낙마 계기가 된다.
<오펜하이머>는 평범한 전기 영화가 아니다. 오펜하이머를 단지 국민적 영웅으로 비추기보단 그의 내밀한 심리와 감정을 담아내는 데에 우선하고 있다. 즉, 그가 어떤 인간인지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닌 어떤 인간이었을까 물음을 던지고 있다. 인간을 정의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 오펜하이머의 행동을 하나의 잣대로 판단하기란 어려운 이유일 테다. 허나 분명한 것은 그가 끊임없이 분열하고 '모순적'인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나치보다 먼저 핵무기 개발을 하기 위해 진두지휘한 반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후에는 핵무기 사용과 수소폭탄의 개발을 반대했다. 모순을 뒤집어서 보면 그는 '인간적'인 고민 속에 있었던 사람이다. 지켜야 할 가치를 끝까지 지키는 위엄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영화는 오펜하이머처럼 천재적이고 엄청난 업적을 이룬 것처럼 보이는 사람조차 우리와 같은 '모순적'인 인간임을 보여준다.
인간에는 두 부류가 있다. 평범한 사람과 비범한 사람이다. <오펜하이머>는 평범한 사람이 비범한 사람을 전복시키려는 이야기다. 비범한 오펜하이머는 평범한 사람에게는 오만한 태도를 보이는 반편, 자신과 같이 비범한 인간에게는 관용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작중 스트로스에겐 '미천한 구두 판매원'이라고 말하며 차가운 태도인 반면 에드워드 텔러에겐 '수소폭탄 연구를 용인'하는 따뜻한 태도를 보인다. 사실 텔러는 스트로스와 유사한 면을 지니고 있다. 반공주의자이고, 이후 오펜하이머를 파멸시키는 인물이며, 미국의 수소폭탄 개발을 주장하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왜 오펜하이머는 텔러에게 호의를 베풀고 지지를 보냈을까? 적어도 오펜하이머의 눈에는 텔러가 비범한 인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펜하이머는 그로브스 장군을 비범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분명 그로브스는 스스로를 평범한 사람이라고 말했음에도.
후반부에 이르러 오펜하이머는 평범한 사람으로 전락해버린다. 트루먼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이는 두드러지는데, 처음엔 오펜하이머를 비범한 사람으로 대우하다가 나중엔 "너는 책임질 필요가 없는 평범한 사람이자 도구다"라는 식으로 내팽겨친다. 훗날 세월이 지나 오펜하이머는 페르미상을 수여받았지만, 이때 진정한 주인공은 존슨 대통령과 권력자들이었다. 오펜하이머는 결국 자신이 비범한 사람이 아님과 동시에 권력의 도구였음을 깨닫게 된다. 모순이라는 인간의 특성은 전 인류적 영향, 오펜하이머의 삶, 미국 사회를 아울러 투영하고 있다.
<오펜하이머>는 평전의 내용을 잘 살려낸 영화인 만큼 책의 디테일을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책을 모르고 봤을 때는 그냥 지나갈 수도 있는 장면들을 책과 비교해서 보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펜하이머와 동시대를 살아간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을 나란히 놓고 보는 것도 감상의 폭을 넓혀준다. 에니그마를 해독해낸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의 이야기를 담은 <이미테이션 게임>, 게임 이론에 대한 새로운 분석을 제시하며 제2의 아인슈티인으로 불린 존 내쉬의 생애를 그린 <뷰티풀 마인드>을 추천한다.
끝으로 영화 <오펜하이머>에 대한 별점과 한줄평을 남기려 한다.
★★★★☆
크리스토퍼 놀런의 모든 것이 분열되고 융합된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