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은 닉 카사베츠 감독이 제작한 로맨스 영화이다. 영화는 신분과 병마의 고개를 넘어 이룩하는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관객들은 영화 속 사랑스러운 이야기와 감동 가득한 반전을 맞이하며, 깊은 여운에 빠지게 된다.
영화는 해밀턴에게 책을 읽어주는 캘훈과 함께 시작한다. 그가 읽어주는 것은 두 젊은 남녀의 사랑 얘기다. 이야기 속 남녀인 노아와 앨리는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이끌려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다. 하지만 둘의 신분 차이, 앨리의 대학 진학, 노아와 이별하고 난 뒤 생긴 앨리의 약혼녀 등 수많은 장애물이 둘의 만남을 갈라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여곡절 끝에, 눈물 나는 해후를 이루어낸 두 사람은 다시금 사랑에 빠진다. 놀라운 사실은, 캘훈이 읽어준 이 모든 이야기가 사실 캘훈과 해밀턴의 이야기였다는 것이다. 치매를 앓는 앨리에게 노아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자신들의 사랑 이야기를 전하고 있던 것이었다. 영화는 둘의 곡진하고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독창적인 방식으로 풀어낸다.
- 관계의 변화를 보여주는 방식
영화 속 노아와 앨리의 관계는 신분이라는 장벽 앞에 가로막힌다. 영화는 이러한 장벽을 캐릭터 설정, 대사와 더불어 은유적인 시청각 효과로 탁월하게 묘사한다. 그 대표적인 장면이 바로 두 사람의 정사 장면이다. 두 사람은 영화의 전반과 후반 두 차례에 걸쳐 정사를 벌이는데, 이 두 장면의 비교를 통해 그들의 관계 양상을 파악해 볼 수 있다.
먼저, 두 장면은 연출 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첫 번째 관계는 노아가 앨리를 데리고 간 낡은 저택에서 이루어진다. 이 시퀀스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둘의 관계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이는 둘의 사랑의 화룡점정을 찍는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둘을 비추는 카메라는 두 사람을 하나의 프레임 안에 담지 않는다. 투샷이나 OS샷을 활용하지 않아 두 사람이 각각 고립되어 있는 느낌을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정사를 벌이는 도중 앨리는 쉴 새 없이 말을 한다. 이는 곧 불안하고 온전하지 못한 관계가 두려워, 그 사이에 벌어진 간극을 어떻게든 메우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교류와 합일이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기에, 위와 같은 연출은 마치 두 사람의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관계를 암시하는 듯하다.
하지만 앨리와 노아가 재회한 후에 맺는 관계는 앞서 말한 것과 사뭇 다르다. 카메라는 더 이상 둘을 따로 떼어놓지 않는다. 다시금 하나가 되어 더 이상 떨어지지 않으려는 그들의 굳센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둘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서로에게만 집중하며, 수년전과 달리 성공적인 관계를 맺는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결국 압제의 골짜기를 넘어 온전하고 안정적인 합일의 경지를 이룩했기 때문이다.
두 장면의 차이는 공간을 통해서도 극명히 드러난다. 불완전한 관계의 두 사람이 방문한 저택은 낡고 허름하며, 음습한 분위기를 머금고 있다. 게다가 조율되지 않은 피아노로 연주하는 앨리의 음울한 멜로디는 이러한 분위기를 한층 부각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이 낡은 저택이 노아의 드림 하우스라는 사실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의 꿈이 담긴 장소에서 맺는 관계라는 점에서 더욱 그 의미가 깊다. 하지만 앞서 얘기한 음험한 분위기가 암시한 것과 같이 둘의 관계는 도중에 좌절된다. 다행히도 수 년뒤, 두 사람은 눈부신 재회를 통해 같은 장소에서 성공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노아는 마침내 자신이 꿈꾸던 집에서, 자신이 꿈꾸던 사람과의 황홀경에 빠져들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노아의 집은 둘의 관계에 비유되고 있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 노아라는 이름
영화 속 노아의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착목한다면 본작을 더욱 풍부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 노아가 배를 타는 모습은 빈번히 등장한다. 영화를 시작하자마자 관객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석양이 지는 호수에서 홀로 배를 타고 있는 노아다. 앨리의 부모님과의 식사 후에도 앨리와 배를 타고, 앨리를 다시 만나 오리를 보여주러 갈 때에도 배를 타고 간다. 보다시피 노아는 배, 그리고 물의 이미지와 연관이 있는 인물이다. 때문에 그의 이름의 연원이 구약성서의 노아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노아는 굉장히 자유로운 인생을 영위하는 인물이다. 노아의 이미지는 물의 이미지와 맞닿아 있는데, 그 이유는 노아가 예속되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흘러가는 물의 특장점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앨리는 그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가 다닐 대학, 그녀가 살 집, 심지어는 그녀와 결혼할 사람까지도 정해준다. 노아는 그런 앨리를 자신의 배에 태워, 인생이라는 강물의 자유로운 물살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더욱 중요한 의미는 그의 이름과 플롯의 연결점에 있다. 구약성서 속 노아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앞으로 다가올 거대한 홍수에 대비해, 방주를 만들고 동물들을 피신시키는 인물이다. 영화 속 노아도 마찬가지다. 그는 앨리와의 아름다운 기억을 노트북이라는 방주에 담는다. 그리고 앨리의 치매라는 막대한 재앙에 맞서, 노년의 앨리에게 최대한 온전히 전달하려 노력한다. 결국 영화 속 노년기 노아의 노력은, 젊은 시절의 자신과 앨리를 치매에 걸린 앨리에게 전하려는 대모험인 것이다.
- 새에 비유되는 노아와 앨리
노아의 이름 이외에도 중요한 비유적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노아와 앨리, 두 사람은 모두 '새'에 비유되고 있는 것이다. 바닷가에 놀러 간 앨리는 "다른 생에선 내가 새였을까?"라고 외친다. 이에 노아는 "네가 새라면 나도 새가 될게."라고 답한다. 이 대사에 주목해서 영화를 본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은 시종 새에 비유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영화의 첫 장면을 떠올려보자. 석양이 지는 호수에서 노아는 물살을 가르며 배를 탄다. 카메라는 배를 타는 노아를 다양한 각도, 다양한 크기로 담는다. 오프닝씬이 어떻게 마무리되는지 기억나는가? 배를 타고 있는 노아의 방향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앨리의 방향으로 새가 날아가며 끝이 난다. 이 새들을 노아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앞서 말한 자신들의 아름다운 추억을 담아 앨리에게 전하려는 대모험을 하는 노아는, 앨리를 향해 날아가는 새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엔, 반대로 앨리가 새에 비유된다. 앨리가 노아의 곁으로 돌아오자, 노아는 앨리를 보트에 태워 오리를 보여준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오리는 과테말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다. 여기서 관객은 앨리 역시 다시 약혼자의 곁으로 돌아가야 하는 처지임을 상기해 볼 수 있다. 무성한 나무, 반짝이는 호수, 많은 수의 오리들, 그 가운데의 두 사람. 단편적으로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낭만적인 이 상황의 이면에는, 사실 약혼자에게 회귀해야 하는 앨리의 아픈 진실이 숨어있는 것이다.
영화의 오프닝씬 못지않게, 엔딩씬 역시 중요하다. 아마 대부분의 관객은 나란히 누워 영면에 든 두 사람을 부감으로 촬영한 장면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에 후행하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가는 새들이다. 영면에 들기 전, 앨리는 노아에게 "우리의 사랑이 우릴 같이 데려갈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엔딩씬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일지도 모른다. 영화 전반에 걸쳐 새에 비유된 두 사람은, 마지막 장면 역시 마찬가지로 새에 비유된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그들은 더없이 자유로운 새가 되어, 함께 오붓한 비행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본다.
- 양분화된 이야기
사실 이 모든 이야기의 핵심은 아마 양분화에 있을 것이다. 청년기의 사랑과 노년기의 사랑으로 나누어진 형태의 플롯은 관객이 느끼는 감동을 배가시킨다. 하지만 양분화된 것은 둘의 사랑 이야기뿐만이 아니다. 먼저, 당연하게도 둘의 신분이 양분화되어있다. 노아가 앨리의 가족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홀로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장면에서 이러한 점이 시각적으로 부각된다.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앨리에게는 현재 약혼자 론과, 옛사랑 노아가 있다. 그녀는 그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인다. 공간도 이원화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영화 속 공간(40년대)은 크게 시브룩과 찰스턴으로 나뉜다. 시브룩은 노아와 앨리가 만나 사랑을 나누었지만, 결국 노아만 남게 되는 도시이다. 찰스턴은 앨리가 론을 만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는 도시이다.
영화의 이야기는 피상적으로만 본다면, 앨리를 붙잡으려고 노력하는, 그리고 앨리를 잊지 못해 괴로워하는 노아의 모습만 기억에 남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위에서 언급한 노트북에 추억을 싣고 앨리에게 전하려는 노아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얘기한 양극화된 신분, 관계, 공간 속, 자신의 현 위치에서 운신해 상대에게 향하는 주체는 바로 앨리이다. 앨리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수동적 인물에서 그치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누구에게 가야 하는지 그 선택의 열쇠를 거머쥔 능동적 주체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영화 전반에 걸쳐 두 인물은 모두, 서로에게 향하는 지난한 고개를 넘는 각고의 모험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 마치며...
두 번째 만남에서 앨리와의 데이트를 성사시킨 노아는 앨리에게 좋아하는 일에 대해 묻는다. 앨리가 부모님이 좋아하실 법한 틀에 박힌 대답을 하자, 노아는 진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 이에 앨리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답변한다. 반면, 약혼자였던 론은 앨리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 말인즉슨, 론과 달리 노아는 앨리의 본질적인 측면을 세심히 들여다보고, 그녀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녀는 어떤 사람인지에 주의를 기울였다는 뜻이다.
영화의 후반부, 노아와 론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앨리에게,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진다. 남들의 기분은 신경 쓸 필요 없다며, 정말 원하는 것을 선택하라고 일갈한다. 노아의 일갈은 영화의 스크린을 넘어, 함께할 때에 진정한 의미의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사람과 동행할 것을 역설하며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한다. 물론, 그 모든 과정이 아름다운 정채만을 띄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각축과 덧없는 반목이 계속된다고 하더라도, 우린 결국 서로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모든 험난한 비탈길을 애틋함으로 물들일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