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영화 매거진 '씨네리와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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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미리 말해두지만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 전반부에 등장했던, 관객을 다소 당황케 만드는 이 내레이션은 어쩌면 영화의 결말을 암시하는 큰 스포일러다.
포스터와 줄거리를 대충 훑어보고 이 영화를 접한 사람이라면 조금은 놀랐을 지도 모르겠다. 누가 봐도 서로를 사랑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연인의 사진을 걸어두고 대뜸 이건 로맨스 영화가 아니라고 경고를 하다니, 의구심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영화가 전개될수록 우리는 깨닫는다. 포스터 속 두 사람의 모습은 사랑하던 연인이었던 그 때의 모습이 아닌, 헤어지고 난 후 주인공 ‘톰’이 꿈꾸는 재회라는 환상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사랑 같은 건 없어요. 환상이죠.’
‘당신이 틀렸어요.’
‘톰’은 운명을 믿는 청년이다. 새로 입사한 ‘썸머’가 하는 말 한마디에도 과장된 의미를 부여하며 그녀를 의식하는 그지만, 술자리에서 나누게 된 대화 중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만큼은 단박에 부정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운명의 상대를 기다리던 순정남이었던 것이다. 반면 ‘썸머’는 과거 부모님의 이혼으로 사랑의 존재 자체를 비관적으로 보는 인물이다. 연애는 연애일 뿐, 진정한 사랑 따위는 없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 그런 그녀가 ‘톰’에게 연애 비슷한 무언가를 제안하며 내건 조건도 같은 맥락이었다. ‘난 누군가를 진지하게 만날 생각은 없어. 그래도 괜찮아?’ ‘톰’은 당황하면서도 그런 그녀의 제안을 승낙한다.
이 지점에서부터 ‘썸머’는 관객들로부터 멀어진다. ‘몇몇’ 관객들에게서 멀어진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그들은 왜 ‘썸머’가 ‘톰’과의 관계를 명확히 정의하지 않는 건지, ‘썸머’라는 인물에 대한 의심을 지니게 된다. 영화가 전개될수록 이러한 의심은 점차 확신으로 변하고, 끝내 그녀를 이해할 수 없고 이기적인 인물로 정의하게끔 만든다. 연인 관계라면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묶이고, 구속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이를 지키지 않는 ‘썸머’의 모습은 나쁘고 이기적이다. ‘톰’은, 몇몇 관객들은, 또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의 나는 그렇게 그녀를 정의 내리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다. ‘썸머’는 관계의 시작부터 이미 ‘톰’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녀는 우리가 아는 그 ‘일반적’인 연애를 원하지 않았고, 그는 그 조건을 받아들인 것이다.
‘톰’에게 운명적인 사랑이란 그의 환상 속에서 만들어진 ‘톰의 썸머’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결국 ‘썸머’가 ‘톰’과 헤어지게 된 결정적 이유도 그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링고 스타의 노래를 좋아하고, 구속을 싫어하는, 그녀는 ‘톰이 꿈꾸는 썸머’가 아닌 ‘진짜 썸머’이기 때문이다. 관계가 진전될수록 ‘톰’은 처음의 약속과는 다르게 ‘썸머’에게 관계를 명확히 정의할 것을 요구한다. 그에게 그녀는 늘 기다려왔던 운명의 상대이므로, 더 이상 ‘썸머’가 요구하는 구속 없는 관계를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썸머’는 그녀대로 혼란스럽다. 그녀는 단지 ‘연인’으로 이름을 붙이고 사랑하기보다, 구속 없이 그와 함께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사랑의 존재 자체를 의심해왔고, 따라서 그녀에게 사랑이란 허상이었다. 어쩌면 연인이라고 정의하지 않고 그를 사랑한 것은 오히려 그녀가 그와 함께 하기 위한 큰 결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톰’이 말했던 운명적인 사랑. 그녀도 조금은 그것을 찾고 싶었던 걸지도. 그러나 결국 ‘톰’은 자신 곁의 ‘썸머’가 어떤 사람인지, 사랑을 의심하고 믿지 못하던 그녀의 모습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그의 환상 속 ‘썸머’, 즉 그의 연인인 ‘썸머’가 되어주기를 요구했고, 둘은 헤어지게 된다.
‘썸머’를 괘씸하고 이기적이라고 느낀 관객이라면 그녀에 대한 분노는 결말에서 정점을 찍을 것이다. 그녀의 결혼 때문이다. 사랑을 믿지 않는다면서 떠나놓고, 왜 다른 남자를 보고 진정한 사랑이라면서 결혼을 한 것인지를 의아해한다. 하지만 ‘썸머’가 영화에서 언급했듯, 그저 ‘썸머’와 ‘톰’이 서로의 반쪽이 아니었을 뿐이다. 사랑을 두려워하는 ‘썸머’와 사랑이라는 환상을 좇던 ‘톰’이었기에 관계가 지속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썸머’가 이후에 다른 사랑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결국 ‘톰’을 만났기 때문이다. 또 결국 ‘톰’이 ‘어텀’을 만나게 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관계가 허상이라는 믿음을 지우게 된 ‘썸머’와 자신이 만들어 낸 환상이 아닌 진짜 상대방을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된 ‘톰’이기에, 그들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낼 힘을 얻게 된 것이다.
확실히 감독이 ‘미리 말해두지만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라고 경고한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이 영화는 단순히 ‘썸머’와 ‘톰’의 사랑 이야기라기보다는, 상대방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찾게 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 영화 ‘500일의 썸머’는 누군가와 맺는 관계란 아무 의미 없는 허상도 아니고, 내 상상 속의 인물처럼 완벽한 누군가를 만나는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전하는 메시지였다.
여전히 ‘이기적인 전 여친’ 쯤으로만 언급되는 안타까운 ‘썸머’에게, 그러한 메시지를 내게 전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글 / 씨네리와인드 박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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